저자 서문

『한국주택 유전자』가 세상에 나온 때는 2021년 6월이다. 아직 코로나 팬데믹의 공포가 지구 전체를 두텁게 감싸고 있을때였다. 그때까지 벌써 1년 반이나 문을 열지 못한 학교를 뒤로하고 온라인으로 다시 한 학기를 마칠 즈음이었다. 오랜시간 공들여 책을 썼기 때문인지 몸도 전처럼 가볍지 않았고,
감염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두가 모임을 기피하고 있었다. - P13

내용을설명하기보다 ‘이 많은 자료를 어떻게 정리했느냐‘고 묻는 대학원생이나 건축가들에게 방법을 전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앞에두고 ‘나의 공부법과 태도‘를 보태면 연구가 책으로 엮이는 과정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13

『한국주택 유전자』를 쓰는 동안 곁눈질을 해서 몇몇 독립연구자와 함께 『경성의 아파트』라는 이름의 책도 엮었다.
1930년대 일본이 서구의 사례를 번역해 조선에 들여온
‘아파트‘가 지금의 ‘단지식 아파트‘와는 달리 거리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건축 유형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책이었다. - P14

『마포주공아파트』는 『한국주택 유전자』의 또 다른심화편이다. 연대기적으로 본다면 20세기 초 『경성의 아파트』가 쥐고 달리던 바통을 넘겨받아 다른 주자에게 또전해야 할 뜀박질의 중간 주자 격에 해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바통을 받아 전달해야 할 마땅한 최종 목적지는 아마도 21세기일 것이니 『마포주공아파트』는 20세기 한국의 모던을 그대로 드러낸 전범이겠다. - P14

오래전 어떤 자리에선가 박정현 전 편집장과 마주 앉아
‘대한민국의 20세기를 오롯이 설명하는 물질적 대상‘을 골라 단행본 시리즈를 만들면 어떨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그 자리에서 ‘마포아파트‘와 ‘미군기지‘를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P15

반공주의와 발전주의 그리고 여기에 권위주의가 결합한 박정희 정권에서 탄생해 1970년대 후반에 완성을 본 ‘마포아파트 체제‘는 곧 대한민국의 공간 생산 방식이자 규범이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닐것이다. - P17

3 국가 프로젝트 이데올로기

1970년 전체 주택 중 단독주택이 차지하는 비율이95.3퍼센트로 415만 4,902호였고, 아파트는 0.77퍼센트인3만 3,372호에 불과했다. ○ 집은 곧 단독주택이었다.
50년 뒤 이 수치는 극적으로 바뀐다. 통계청이 발표한「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2000년에 전체 주택 중47.8퍼센트였던 아파트의 비중은 2005년 (52.7퍼센트)에 절반을 넘겼고, 2016년 (60.1퍼센트)에 처음으로 60퍼센트대를 돌파한 뒤 계속 상승하여 2020년에는 1,166만 2,000호로 총주택 1,852만 6,000호의 62.95퍼센트를 차지했다. - P67

혁명 주체의 ‘시범‘

장동운 대한주택공사 초대 총재가 마포아파트 건설과 관련해
"이 일을 ‘시범아파트‘로 강력하게 추진한 배경에는 ‘혁명주체‘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신뢰 때문"○이라고 여러 차례밝힌 바 있다. "그 당시 ‘아파트‘라고 불리던 다세대주택은 주로영세민들이 살고 있어서 ‘빈민굴‘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이런 인상을 불식시키려고 10층의 최신식 아파트단지를지으려고 했습니다. - P69

발전국가와 건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만난다. 1960년대한국에서 미래를 현재로 호출하는 건축의 이데올로기와발전국가의 계획은 유례없이 공명했다. - P69

아파트의 점유율이 0.77퍼센트에불과했던 1970년에서 10년쯤 더 거슬러 올라간 1961년에 중앙집중식 난방에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아파트를 입주자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오르고 내리는 장면은 아직 손에 잡히지않는 흐릿한 미래 풍경이었다. 어떤 면에서도 당대에 불가능해보였던 예외, ‘각종 첨단 설비와 장치‘는 이데올로기를 전하는 매체였다. 이는 "근대문명의 혜택"이었고, 체제 홍보와 대북선전의 장치였다. - P71

최신 설비를 갖춘 10층 아파트 설계는 한국 건축가들에게미지의 영역이었다. 엄덕문 당시 주택영단 건설이사 겸건축부장은 ‘영단 수준으로는 설계 못 한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엄덕문은 와세다대학교 부설 고등공업학교에서건축을 공부했고, 훗날 세종문화회관(1978), 과천정부종합청사 (1982) 등을 설계하며 당대 최고의 건축가 가운데한 명으로 성장하는데, 그런 그에게도 10층 아파트는 무모한 계획이었다.** 군사 정부의 서슬에 기가 눌려 죽을 상황이었지만 못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위대한 세대의 증언 : 주거혁명의기수 장동운」, 「월간조선 뉴스룸]2006년 7월호 중 엄덕문 회고 부분.

**그는 1957~1958년에 ICA주택기술실장을 거쳐 1958년 11월 11일 대한주택영단 건설이사로 취임했으며영단의 겸직제가 실시된 1959년부터 건축부장도 겸했다. 1961년 11월 11일 퇴임했는데 이때는 이미 마포아파트 기본설계를 마무리한 뒤였다. 그의 후임으로 1962년 7월 1일 홍사천이 취임했다.

***이와 유사한 상황은 5년 뒤인1966~1967년경에 다시 반복된다.
정부종합청사 설계경기에서 등장했던 ‘규모의 실현 문제‘가 그것이다. 이에대해서는 박정현, 「건축은 무엇을했는가』, 70~97쪽 참조. - P73

10층 높이는 아니었지만, 외국인들을 위한 주택인 한남동 유엔빌리지의 외인아파트처럼 다양한 설비를 갖춘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역시 중앙산업이설계하고 당시 한국에서 가장 다양한 경험을 지닌 육군공병단이 시공을 맡아 완공 후 이를 대한주택영단에 인계한 것이었다. - P77

엄덕문의 회고는 장동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마포아파트의 예외적인 위상을 강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이내 자부심으로 바뀌고, 이 과정에서 마포아파트의이데올로기는 증폭된다. 엄덕문은 ‘최고 전문가들을자문위원으로 위촉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진해 단 3개월 만에10층 아파트 설계를 마무리했다‘**며 전형적인 극복의 서사를 들려준다.

**대한주택공사는 분야별외부 전문가를 위촉해 자문위원회,
건설추진위원회, 건설위원회 등을조직해 선례가 없는 사업의 기술적난관을 극복하고자 했고, 이를
‘공동설계‘라 불렀다. "공사는 마포아파트의 설계를 할 때 당시건축계의 권위였던 김희춘, 강명구,
정인국, 나상진, 김종식, 합성권 씨 등을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공동설계‘를했으며, 약 50억 원의 예산을 들여이 건물들을 1961년 10월 16일에 착공, 1962년 12월 말까지 준공할예정이었다." 같은 책, 360쪽. - P77

계획가 박병주, 건축가 엄덕문과 김중업의 평가

설계 책임을 맡았던 엄덕문 역시 비슷한 평가를 내린다.
최첨단 ·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 입식 생활을 추구한 마포아파트가 이후 변기와 싱크대 등 주택 관련 산업이발전하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건축가 김중업 역시[경향신문] 좌담회를 통해 "마포아파트 건립은 결국 ‘대규모아파트군(群) 형성‘의 첫 케이스"라 평한 뒤 ‘인공대지와 도시입체화‘를 통해 택지 문제와 공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위대한 세대의 증언 : 주거혁명의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활황을기수 장동운」, 「월간조선 뉴스룸』2006년 7월호. 실제로 주택산업과의연관성 측면에서 나름의 성취를 이룬경우는 한강맨션아파트라 할 수 있다.
한강맨션아파트 준공(1970.9.9)이후 소위 ‘맨션산업‘은 타 분야의구가했으며, 부엌 가구와 침대를 비롯해다채로운 가전제품과 가구, 도기에이르는 품목이 다양하게 발전했다. - P81

‘시범‘을 물리적 규모나 최신 설비 도입이 아니라 정책적인 측면으로 해석한 이도 있었다. 대한주택영단 주택문제연구소단지 연구실장을 거쳐 홍익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긴 박병주는1967년 발표한 글에서 마포의 임대아파트가 분양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금의 현실에서 임대아파트가 사라져도 괜찮은지 탄식에 가까운 질문을 던진다. - P83

‘공영주택 건설 비용에 정부의정책 자금이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때문에 대단위 주택지에서 (공공이) 먼저 몇 곳을 골라 집을지은 뒤 이를 모범적 선례로 삼도록 민간을 지도하는 의미‘*가
‘시범‘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소수에 불과했다. 마포아파트 건립을 추진한 이들에게 임대냐 분양이냐는 부차적 문제였고, 이 결정이 지금까지 이어지는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규모, 이 규모가 선사하는새로운 도시 경관, 즉 발전과 등치되길 원한 혁명의 이미지였다.

* 박병주, 「아파트 건설과주택사업」, 「주택」 제19호(1967년 6월),
78~79쪽. 나아가 박병주는 가능한한 단지 규모를 대단위로 해야 성과를 1거둘 수 있다면서 ‘단지화 전략‘을 적극 주장했다. 박병주, 「주택금고에 부치는 나의 제안: 단지화된 주택사업에 우선토록」, 『주택』 제20~21호(1967년12월), 39쪽. - P83

그러나 장동운은 USOM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데실패한다. USOM의 입장에서 마포아파트는 적절치 않은사업이었다. 담당자의 말대로 규모와 형식 모두 최빈국의 주택정책에 적합하지 않았다. 장동운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자금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건설부장관이었던 조성근과최고회의 자금 담당 오정근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육사 8기동기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도 부탁한다.

김 부장에게 "내가 아파트를 지으려고 하는데 협조해달라"며 아파트 조감도를 보여줬더니 "아주 좋다"고 하더군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일본인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귀속자금으로 마포아파트 자금을 마련했어요. 당시 화폐로 5억 원 정도 됐을 겁니다.*** - P85

***「위대한 세대의 증언 : 주거혁명의기수 장동운」, 「월간조선 뉴스룸』2006년 7월호. - P84

실제로 엘리베이터는 주택영단 이사장이나 설계자는물론이고 마포아파트 자금 지원은 거절했으나 건설 과정을끊임없이 살피던 USOM 측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쟁점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미국의 반대로 10층에서 6층으로설계 변경을 해야 했을 때에도 마포아파트 설계자들은 비록 엘리베이터를 당장 설치하지 못하지만 엘리베이터 홀은 그대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 대한주택공사,
『대한주택공사20년사』, 360쪽.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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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살해는 잘 알려진 대로 한 개인뿐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도 최초의 가장 큰 범죄다(『토템과 터부』를 볼 것).
죄의식을 느끼는 감정은 그 주된 원천을 여기에 두고 있다. 이것이 유일한 원천인지 어떤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지금까지의 연구 상황으로 보아 죄의식과 속죄 욕구의 정신적 근원을 확정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 P551

어린 소년과 아버지의 관계는 우리가 이미 밝혔듯이 양의성兩意性)을 갖는 관계다. 아버지를 경쟁자로 여기며 제거하도록 부추기는 증오에는 일반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함께 존재한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인도한다. - P551

이렇게 해서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사랑이라는 두 충동은 억압에 의해 무의식으로 침잠하게 된다. 하지만 심리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위험(거세)에 대한 두려움으로 포기하지만, 반면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근본에 있어서는 동일한 외적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해도내적이고 충동적인 위험으로 간주된다. - P552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버지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로서만이 아니라 응징으로서도 거세는 끔찍한것이다.  - P552

도스토옙스키에게 이런 양성적 성향이 있었다는 가정은 설득력을 갖는다. 이 성향은 잠재적 형태(내재적인 동성애)를 띠고있는데, 그가 남자 친구들과 나누었던 우정과 연적이었던 남자들에 대한 그의 특이한 애착, 그리고 그가 쓴 중편 소설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일러 주듯, 억압된 동성애밖에는 달리설명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 대한 그의 놀라운 이해력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 P552

 뭔가 새로운 것을 추가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아 속에 영구적인하나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동일시는 자아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자아 속에 자리를 잡지만, 조화를 이루는 것이아니라 특이한 심급으로서 자아의 다른 구성 부분과 대립하게 된다. - P553

만일 아버지가 거칠고 폭력적이었고 잔인했다면,
그때 초자아는 이러한 특징들을 물려받을 것이고, 억압되어야만했던 수동적 태도는 초자아와 자아의 관계 속에서 다시 형성된다. - P553

윤리 의식이 형성되는 정상적인 과정은 위에서 묘사한 비정상적인 과정과 유사할 수밖에 없다. 양자 사이의 경계를 아직은 분명히 알아낼 수는 없지만, 양자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억압되어있는 여성성이라는 수동적 구성 요소가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 P554

 이미 알려진것들에 이 양성적 특질을 첨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죽음의 엄습>이라는 이 조숙한 징후는 아버지와 자아의 동일시였고, 이 동일시는 초자아가 응징으로서 허락한 동일시이기도 했다. <너는 너 자신이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자 했다. 이제 너는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너는 죽은 아버지밖에는 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히스테리성 증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제다. - P554

요약하자면 한 개인인 아버지와 욕망의 대상인 아버지의 관계는 그 내용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자아와 초자아의 관계로 변형되는 것이다. 두 번째 무대에서 다시 연극이 이루어지고 있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유래한 이러한 어린아이의 반응들은 현실에서 자양분을 얻을 수 없을 때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의 특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 P555

승리와 애도, 혹은 즐거운 축제와 슬픈 초상이 공존하는 이 단계를 우리는 이미 아버지를 죽이고 토템 식의 음식 잔치를 벌이는 원시 부족에게서 볼 수 있었다.⁸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을 때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그가 일으켰던 발작들이 응징의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리라.

8 「토템과 터부」를 볼 것. - P556

히스테리성 증후가 갖고 있는 의미가 복잡한 변화를 보인다는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도스토옙스키가 겪었던 발작들의 의미를앞에서 살펴본 초기 단계를 넘어서서 심화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¹⁰

10 누구보다도 도스토옙스키 자신이 발작의 의미와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친구인 스트라호프에게 그는 간질성 발작을 일으킨 이후 자신이 극심한 신경과민과 의기소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느끼게 하고 자신을 짓누르는 알 수없는 무거운 죄의식에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며, 자신이 어떤 나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퓔뢰프-밀러의 도스토옙스키의 신성한 병』). 이러한 자아 규탄 속에서 정신분석학은 도스토옙스키가 <정신적 현실을 알고 있었다는 흔적을보게 되고, 이 알 수 없는 죄의식을 의식할 수 있도록 시도할 것이다원주 - P557

아버지와의 관계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다른 두 영역에서, 다시 말해 국가의 권위와 신에 대한 신앙에서 그의 행동을 결정했던 것도 바로이 죄의식이었다. 국가와 관계에서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버금가는 <작은아버지>였던 차르에게 완벽에 가까운 복종을 보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실제로도 차르와 죽음의 연극¹¹을 벌였고,
차르는 또 매우 빈번하게 그의 발작 속에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11 페트라솁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후, 차르 니콜라이 1세의 잔인한 장난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특사령이 내려진 사건을 지칭한다. 물론 사형 의도는처음부터 없었고, 형장에 끌려 나가는 것조차 미리 계획된 각본이었다. 당시 같이 투옥되었던 사람들 중 한 명은 이 연극으로 실성하고 만다. - P557

그는 자신의 대단한 지성에도 불구하고 이 힘을 극복할수 없었다. 공정해야 할 분석이 공정성을 잃었고, 오직 편파적인 세계관을 가졌을 때만 내릴 수 있는 판단으로 도스토옙스키를 심판했다고 혹자는 우리를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수적인 사람이라면 종교 재판관의 입장을 취하면서 도스토옙스키를 전혀다르게 심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의 제기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로서는 도스토옙스키의 결정이 신경증 때문에생긴 사고 금지 현상¹²에 의해 내려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이의 제기에 약간의 토를 달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12 생각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금지하는 의식작용으로서 무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심적 갈등의 주요한 한 증후다.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도 간혹 관찰할 수 있지만, 도스토옙스키를 다루고 있는, 특히 그의 신앙문제를 다루고 있는 프로이트의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은 없다>고 말해야 될 때<신은 죽었다>는 식의 환언법을 쓰는 경우가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 P558

가장 꾸밈없이 표현된 경우는 물론 그리스 전설을 따르고 있는비극이다. 이 비극에서도 행동을 저지르는 사람은 역시 주인공 자신이다. 그러나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완화시키거나 숨겨야만 한다. 분석하면 아버지 살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만, 우회적으로 표현되지 않을 때 이 아버지 살해의 의도는 분석의 준비 과정이 없는 상황 속에서는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 P559

영국의 희곡 작품 속에서는 이야기의 전개가 한층 간접적이다.
다시 말해 주인공이 직접 죄악을 저지르지 않는다. 죄악은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는데, 이 사람에게는 그의 행동이 아버지 살해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 P559

 죄의식은 신경증의 진전 과정과 완벽하게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할 수 없는 그의 무능에 대한 지각 행위쪽으로 이동해 있다. 몇 가지 흔적들을 통해 우리는 주인공이 자신의 죄의식을 초개인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사람 한사람의 자격을 따진다면, 과연 누가 이 채찍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¹³

13 『햄릿』 제 2막 2장 - P560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앞의 두 작품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있다. 이 소설에서도 살해는 다른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다. 그러나이 다른 사람은 주인공인 드미트리와 살해당한 사람과 같은 친족관계를 맺고 있고, 또 그의 행동에서 성적 경쟁 관계가 동기였다는 점이 공개적으로 밝혀져 있다. - P560

누가 실제로 행동을 저질렀느냐의 문제는 거의 아무런 중요성도 없다. 심리학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단지 누가 이 행동을 원하고 있었으며, 완결된행동을 누가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느냐를 밝히는 것이다.¹⁵ 이런 이유로 해서, 다른 사람들과는 대비가 되는 알료샤를 제외한 모든 형제들은 똑같이 죄인이었다.

15 할스만의 경우에 대한 프로이트의 언급에서 능동적인 범죄에 대한 실제적인적용을 찾아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여기에서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대하여 다시 논하고 있다. - P561

오히려 이것은 한성자가 살인자를 경멸하고 증오하려 했던 자신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이런 유혹을 느꼈던 자기 자신을 형편없는 인간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범죄자에 대해 도스토옙스키가 가지고 있던 애정은 실제로 끝이 없는 것이었다.
그의 공감은 불행한 자에게 보내는 동정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것이었다. - P561

 죄의식에 짓눌려 있는 작가의 극단적인 경우에서 단지 좀 더 수월하게 이 메커니즘을 식별해 낼 수 있는 것뿐이다. 동일시에 의한 이러한 애정이 도스토옙스키가 주제를 선택할 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략). 근원적인 죄악인 아버지 살해를 저지른 죄인을 다룬 것은 그의 말년에 이르러서였고, 이런 죄인을 다루면서 그는 문학적으로 고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P562

 신경증 환자에게서는 결코 드물지 않은 죄의식은 이 경우 뭔가 손으로 만지는 것으로 대체된 것인데, 노름을 하며 지게 된 빚이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도스토옙스키는 빚쟁이들에게서 벗어나 러시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노름에서 돈을 따야만 했다는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핑계일 뿐이다. - P562

그는 도박을 위한 도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¹⁶

16 도스토옙스키는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도박그 자체다. 맹세하건대, 비록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돈이 필요한 처지이지만, 돈 욕심이 나서 도박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원주 - P563

우리는 이 사실을 그녀의 글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녀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유일한 출구였던 남편의 문학 창작이 가장 잘 진전되는 때는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고 마지막 재산마저 저당을잡혔을 때였다고 쓰고 있다. 물론 아내가 이 관계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의식이 그가 자기 자신에게스스로 가한 응징에 의해 해소되었을 때, 비로소 작업을 방해하던 금지가 사라졌던 것이고, 성공을 향해 몇 발자국 옮겨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¹⁷

17 퓔뢰프-밀러는 도박장의 도스토옙스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다 잃을 때까지, 완전히 파산할 때까지 그는 테이블에 남아 있었다. 완전한 파멸을 맞이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악령은 창조의 수호신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그의 영혼에서빠져나갔다> 원주. - P563

나의 친구이기도 한 작가가, 비록 소설 속에 나오는 많은 자질구레한 것들이 독자들에게 어떤 비밀스러운 흔적을 전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가 한 해석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나 의도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르다고알려 왔을 때, 이는 예술 창조의 한 본성으로 생각하면 이해할 만한 일이다. - P564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한 이 환상은 어머니는 청년을 자위라고 하는 두려운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그를 성에 입문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 기초해 있다(속죄를 다루는 많은소설들은 같은 기원에서 비롯된 작품들이다). 자위라는 <악습>이 노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¹⁸ 작가가 두 손의 격정적인 움직임을 특이할 정도로 강조하고 있다는 데서 자위행위와 노름벽 사이의 파생 관계를 읽을 수 있다.

18 1897년 12월 22일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로이트는 이후 모든 탐닉으로 대체되는 <첫 번째 탐닉>이 이 자위라고 추측했다(프로이트, 편지 79) - 원주, - P566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 마는 노름에서 벗어나려는 싸움이 뒤따랐던 노름벽과 그로 인해 반복되었던 자기 응징의 기회들이 자위의 강박적 반복과 동질의 것이라면, 자위의 강박적 반복이 도스토옙스키 생애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놀라운 일이 아니다. - P567

이러한 만족을 억압하려는 노력과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것이므로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²⁰

20 지금까지 내가 취했던 관점들은 노이펠트Jolan Neufeld가 쓴 「도스토옙스키,
정신분석적 소묘」라는 탁월한 글에서 대부분 이야기되었던 것들이다-원주 - P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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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침해로부터 개인권을 보호하려는 매디슨의 시도는 79년 뒤 (1868) 수정헌법 14조가 채택됨으로써 비로소 헌법적 결실을 보게 된다. 어쨌건 이권리장전은 연방대법원이 배런대 볼티모어Barron v. Baltimore 사건(1833)에서확인했듯이 주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 P61

주정부에 대한 제한은 각 주의 헌법이결정할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는 권리장전이 주정부와 지방정부로부터 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방권력에 의한 침해의 두려움을 불식시키기 위해 제정되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⁴⁶ - P61

46 Barron v. Baltimore, 7 Peters 243(1833). - P472

권리가 정부를 구속하다 -수정 헌법 14조

남북전쟁은 연방헌법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해결했고 주에 대한 연방정부의 우위를 확립했다. 재건 시대*에 추가된 수정헌법 13~15조는 노예제를폐지시켰고, 시민들을 "중국에서 태어나거나 합중국에 귀화한 모든 사람"
으로 정의함으로써 드레드 스콧 판결을 파기했으며, 새로 해방된 노예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했다.

*통상적으로 남북전쟁이 끝나고 남부연합 11개 주가 연방에 재편입되면서 발생한 사회적·경제적 문제들의 해결을 모색한 1865년부터 1877년까지를 가리킨다. - P63

"정당한 절차"와 "동등한 보호" 같은 표현들의 해석은 그 뒤 100년 동안 헌법 논쟁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논쟁들이 일어나게 된직접적인 원인은 수정헌법 14조가 주의 침해로부터 개인권을 보호할 권한을연방대법원에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 P63

반대 의견서를 작성한 스티븐 J. 필드Stephen J. Field 연방대법관은 이 사건이 "지대한 중요성"을 지닌 헌법적 문제를 제기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것은바로 "최근에 추가된 연방헌법의 수정 조항들이 주의회가 합중국 시민들의공동 권리를 박탈하는 것으로부터 합중국 시민들을 보호하는가의 문제였다. 필드는 보호한다고 답했다. "그러한 수정 조항은 미국 시민들이 가진 공동의 권리를 연방정부의 보호 아래 두기 위해 (...) 채택되었다." 그것은 "양.
도 불가능한 권리들, 즉 창조주의 선물로서 법이 부여하지는 않고 인정만 할뿐인 권리들에 대한 1776년의 선언에 실천적 효력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⁵¹ - P64

이후 40년 동안 연방대법원은 주법과 연방헌법이 수정헌법 14조에 대한이러한 확장적 해석과 부합하는지를 검토했으며 재산과 계약의 권리를 강조했다. 이 시기에 연방대법원은 물가, 임금, 시간, 노조활동에 관한 법률들을통해 산업 경제를 규제하려는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시도들을 비롯해 거의200개 가량의 법을 무효화했다.⁵³ - P65

53 Tribe, American Constitutional Law, p. 435. - P472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로크너 대 뉴욕 주 Lochner v. New York 사건(1905) *에서 연방대법원은 제빵공장 노동자의 근무시간을 주 60시간 이내로 제한하는 뉴욕 주의 법률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연방대법원은 "자신의 일과 관련해 계약을 맺을 일반적인 권리는 수정헌법 14조가 보호하고 있는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 P66

* 뉴욕 주의회는 제빵공장 노동자의 근무시간을 1일 10시간, 주 60시간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법률을 제정했다. 이에 연방대법원은 근무시간의 제한이라는 수단이 공공복리 증진이라는 목적과 합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제빵공장 노동자와 주인 간의 계약의 자유를 침해한다 하여 이 법률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 P66

실질적 적법 절차 심사에 따라 위헌으로 결정된 법이 모두 경제적 규제와관련된 것은 아니었다.⁵⁸ 하지만 로크너 연방대법원은 대부분의 경우에 재산권과 시장이 부과하는 어떤 조건으로든 계약을 맺을 자유를 보호했다. 이러한 경제적·헌법적 견해를 갖고 있던 연방대법원은 1930년대 들어 뉴딜 입법에 위헌 결정을 내렸고, 그로 인해 강력한 정치적 저항에 직면했다. 1936년 연방대법원이 뉴욕 주의 최저임금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고 나서 몇달 뒤에 실시된⁵⁹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는 연방대법원의 대법관을 증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 P67

58 Meyer v. Nebraska, 262 U.S. 390, 399(1923); Pierce v. Society of Sisters, 268 U.S.
510(1925)를 보라.
59 Morehead v. New York ex rel. Tipaldo, 298 U.S. 587(1936). - P472

인도적 개혁에 반대했다는 점에서, 로크너 연방대법원이 오늘날의 자유주의에 공헌했는지는 그리 분명하지 않다. 로크너 연방대법원은 실질적인 적법절차의 원칙을 무기로 산업자본주의의 과도한 행위를 옹호했고 진보적 개혁을 좌절시켰다. - P68

오히려 권리를 바탕으로 한 로크너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 당연시하는 헌법 구조를 정착시켰다. 권리의 이름으로 연방대법원을 "주의 모든 입법에 대한 영구적 검열관"⁶²으로 만든 헌법적 변화는 그러한 변화의 첫 번째 사례를 제공한 정통 경제 이론보다도 오래 살아남았다. - P69

62 Slaughter-House Cases, 83 U.S.(16 Wallace) 36, 78(1873)용한 표현. - P473

미국 역사상 최초로 권리가 최후 수단의 역할을 맡았다. 자유는 이제 더이상 권력 분산에만 의존하지 않고 법원에서 직접적인 은신처를 발견했다.
기본권이 걸려 있는 것으로 생각될 경우에는, 연방주의의 원칙들과 주의 주권의 원칙들도 더 이상 사법부의 간섭을 막을 수 없었다. - P69

정치철학은 대개 이 세상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듯 보인다. 정치철학의 원리와 정치는 서로 다른 것이며, 최선을 다해 이상대로 살고자 하는 노력이 성공을 거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 - P5

그런데 정치철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처음부터 세계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 P5

이 책은 현대 미국에서 지금 우리 삶 속에 있는 이론을 연구한 것이다. 이책의 목적은 우리의 실천과 제도들에 함축되어 있는 공공철학을 확인하고,
철학 내의 긴장이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 P5

옮긴이의 말

도덕적 인격을 갖추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이지 국가가 나서서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성생활은 전적으로 개인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지 간통죄 같은 것으로 국가가 통제할 일이 아니라고생각하는가? 부부 중 어느 한편이 살기 힘들다고 하면 웬만하면 이혼이 허용되는 쿨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집에서 포르노를 보든 마약을 하든 사이비 종교를 믿든 국가가 상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경제에서 핵심 문제는 뭐니 뭐니 해도 경제 성장과 평등한 분배의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대형 할인점이 교통의 요지에 들어서고 기업형 슈퍼마켓이 동네 상권을 파고들어 중소 상인들의 폐업이 속출하는 것은 경제 발전에 따르는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하는가? - P551

이러한 민주주의의 불만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으나 완화는 할 수 있는공공철학으로 샌델은 공화주의를 제시한다. - P552

다양한 현실적 영역과의 접합을 통해 철학적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샌델의이 책은 실천적인 정치 철학이 나아가야 할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 P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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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주의적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만일 칸트적 자유주의자들의 생각과 달리 우리가 선택의 자유를 지닌 무속박적 자아가 아니라면, 정부는 중립적이어서는 안 되고 결국은 정치가 시민들의 덕을 함양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일부 정치철학자들은 중립성 옹호론이 칸트적 인간관과 분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P34

 이러한 중립성 옹호론은 칸트적 인간관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철학적으로말하면 표면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최소주의적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²⁸ - P34

28 여기서 최소주의적 자유주의는 존 롤스의 최근 저서 Political Liberalism(New York: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19] "Justice as Fairness: Political NotMetaphysical", Philosophy & Public Affairs, 14(1985), 223-251, Richard Rorty, "The Priority of Democracy to Philosophy", in TheVirginia Statute for Religious Freedom, ed. Merrill D. Peterson and Robert C.
Vaughan(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397941. Rawls, "Justice as Fairness", p. 230° - P467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은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치적 정체성이 왜 우리가 개인적 삶에서 지지하는 도덕적·종교적 신념들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가? 정의와 권리에 대해 숙고할 때 왜 우리 삶의 나머지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도덕적 판단들을 제쳐두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최소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현대의 민주적 생활과 관련한 중요한 사실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 P35

 합리적 다원주의가 맞다면, 우리는 좋음에 대한 특정한 견해를 내세우지 않고서 정의와 권리의 문제들을 결정해야 한다. 오로지 이런 방식을 통해서만 상호 존중에 바탕을 둔 사회적 협력의 정치적 가치를 주장할 수 있다.³⁰ - P35

30 Rawls, Political Liberalism, pp. xvi - xxviii. - P467

하지만 사회적 협력과 상호 존중을 보장하는 것에 대한 실천적관심이 어째서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는 도덕적·종교적 견해 내부에서 생겨날 수 있는 어떠한 경쟁적인 도덕적 관심도 물리칠 만큼 항상 강력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실천적인 관심의 우위를 보장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이괄호 치는 도덕적·종교적 견해들 가운데 어떤 것도 참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P36

개인의 권리에 대한 규정이 존재했을까?
-초기 공화정의 권리장전

정부 구조[즉 헌법]가 정부에 우선한다는 생각은 미국 헌정주의에 특유한것으로서, 절차적 공화정의 자유주의를 향해 손짓하지만 아직 둘의 거리는 멀다. - P54

헌법제정회의 기간의 마지막 주에 접어들어서도 연방의회에 제출할 헌법안이 만들어지지 않자, 버지니아 주 대표인 조지 메이슨 George Mason이 자리에서 일어나 "헌법안이 권리장전으로 시작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권리장전이 "사람들을 안심시킬 것이고, 작성하는 데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의 권리선언들을 참고하면 몇 시간이면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매사추세츠 주 대표인 엘브릿지 게리ElbridgeGerry가 이에 동의를 표하고 권리장전의 초안을 잡을 위원회의 구성을 제안했다.²⁵ - P55

25 Max Farrand, ed., The Records of the Federal Convention of 1787(New Haven: YaleUniversity Press, 1966), vol. 2, pp. 587-588. - P470

메이슨은 합중국의 법이 주의 권리장전*보다 우선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10개 주의 대표들 가운데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제안은 거부되었고, 대표들은 주들이 수출품의 저장 비용과 검사 비용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지에 관한 토의로 되돌아갔다." 훗날 비준 논쟁**이 한창일 때제임스 윌슨James Wilson은 "그후 지금까지 엄청난 소동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권리장전의 문제는 당시에는 휴회 직전까지도 대표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으며," "그 문제가 간단한 대화만으로 얼렁뚱땅 지나가버렸다는 생각이 있기는 했으나 거의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고 말했다.²⁷

*권리선언을 가리킨다.
* 1787년에 만들어진 헌법 초안의 비준 여부를 놓고 연방주의자들과 반연방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 - P55

26 Max Farrand, ed., The Records of the Federal Convention of 1787(New Haven: YaleUniversity Press, 1966), vol. 2, pp. 588
27 John Bach McMaster and Frederick D. Stone, eds., Pennsylvania and the FederalConstitution (Philadelphia: Historical Society of Pennsylvania, 1888), p. 253** *인용. - P470

벤저민 러시Benjamin Rush는 펜실베이니아 회의석상에서 "이 체제가 권리장전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것"을 "막바지에 이른 이 회의의 영예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찌됐건, 새로 만들어질 연방정부는 "외국인들, 즉 우리의 습속이나 의견에 익숙하지 않고 우리의 이익이나 번영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꾸려가지는 않을 것이고, 권리들에 대한 우려는 연방헌법에 따라 만들어질 자치기구들보다는 대영제국과의 논쟁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러시에 따르면, 자유는 권리장전이 아니라 의회의 "순수하고 적절한 대표성"에 달려있었다.³⁰ - P56

30 McMaster and Stone, Pennsylvania and the Federal Constitution, pp. 294-295재인용. - P471

오늘날 헌법을 둘러싼 논쟁들의 관점에서 볼 때, 반연방주의자들의 권리장전 옹호는 "권리에 기초한 정치적 도덕의 초창기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처럼 보일지 모른다.³⁴ - P57

34 David A. J. Richards, Toleration and the Constitut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Press, 1986), p. 291. - P471

대부분의 반연방주의자에게 권리장전은 주의 주권을 위협하는 것과 관련해서만 필요했다. "주들이 적절히 연합하기만 하면 권리장전은 전혀 필요치 않을것이다."³⁵ 전국적 권리장전에 대한 반연방주의자들의 옹호를 이미 주들이보장하고 있는 권리들을 연방정부로부터 보호하려는 시도로만 볼 수는 없다.
6개 주는 권리장전이 전혀 없었고, 존재하는 권리장전들도 결코 포괄적이지않았다. - P58

35 "Address by Denatus", in Storing, The Complete Anti-Federalist, vol. 5, p. 263 ;
"Letters of Centinel", ibid., vol. 2, p. 1525 H - P58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곳은 2개 주뿐이었고, 종교의 국교화"를 허용한 곳은 5개 주였다.³⁶ 전국적인 권리장전은 단순히 이미 주들이 보호하고 있는 권리들을 지속적으로 보장하는 수단이 아니라 주의 독립에 위협이 되는 중앙정부의 권력을 제한하는수단이었다. - P58

36 Leonard W. Levy, Constitutional Opinions: Aspects of the Bill of Rights (New York:Oxford University Press, 1986), pp. 111-112. - P471

매디슨은 반연방주의자들보다도 더 권리를 중시했지만, 권리를 가장 잘보호할 수 있는 것은 "양피지 문서 울타리"가 아니라 정부 구조라고 생각했다. 그는 《연방주의자 논설》에서 세 가지 정부 구조를 강조했다. - P59

거부권은 중앙정부가 개인권을 직접 보호하는 쪽으로 행동하고, "국가 정책의 내적 변화"를 통제하며,
"이해관계를 가진 다수에 의한 소수와 개인의 권리 침해를 억제할 수 있게해줄 것이다. 이 제안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제안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충동은 나중에 사법부를 통해 생명을 얻게 된다.⁴² - P60

42 Charles F. Hobson, "The Negative on State Laws: James Madison, the Constitution,
and the Crisis of Republican Government", William and Mary Quarterly, 36(April1979), 215-235 2. The quotation is from Madison to Washington, April 16,
1787, aat p.
219. - P472

매디슨은 최종적으로 채택된 연방의회에 대한 제한들 외에, 주정부의 침해로부터 개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또 하나의 수정 조항을 제안했다. "어떠한 주도 양심의 평등권,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형사 사건에서 배심재판권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⁴³ - P60

43 Annals, 1st Cong., 1st sess., August 17, 1789, Charles S. Hyneman and George W.
Carey, eds., A Second Federalist(Columbia: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1967), p.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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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줄거리.

구전되는 노래인 줄로만 알았던 올빼미 법정, 어린 시절 배트맨은 탐정 기술을 연마하여 법정의 존재를 입증하려 한 적이 있었지만, 고담이 올빼미를 숭배하는 비밀 조직의 지배하에 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아낼수 없었다.

세월이 지난 뒤 법정의 전설적 암살자 탈론이 나타나 시장 후보자 링컨 마치와 만나고 있던 브루스 웨인을암살하려는 일이 벌어진다. 웨인은 구 웨인 타워 꼭대기에서 내던져져 추락하지만 다크 나이트가 갖고 있는모든 방법과 기술을 동원해 겨우 목숨을 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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