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서문

『한국주택 유전자』가 세상에 나온 때는 2021년 6월이다. 아직 코로나 팬데믹의 공포가 지구 전체를 두텁게 감싸고 있을때였다. 그때까지 벌써 1년 반이나 문을 열지 못한 학교를 뒤로하고 온라인으로 다시 한 학기를 마칠 즈음이었다. 오랜시간 공들여 책을 썼기 때문인지 몸도 전처럼 가볍지 않았고,
감염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두가 모임을 기피하고 있었다. - P13

내용을설명하기보다 ‘이 많은 자료를 어떻게 정리했느냐‘고 묻는 대학원생이나 건축가들에게 방법을 전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앞에두고 ‘나의 공부법과 태도‘를 보태면 연구가 책으로 엮이는 과정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13

『한국주택 유전자』를 쓰는 동안 곁눈질을 해서 몇몇 독립연구자와 함께 『경성의 아파트』라는 이름의 책도 엮었다.
1930년대 일본이 서구의 사례를 번역해 조선에 들여온
‘아파트‘가 지금의 ‘단지식 아파트‘와는 달리 거리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건축 유형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책이었다. - P14

『마포주공아파트』는 『한국주택 유전자』의 또 다른심화편이다. 연대기적으로 본다면 20세기 초 『경성의 아파트』가 쥐고 달리던 바통을 넘겨받아 다른 주자에게 또전해야 할 뜀박질의 중간 주자 격에 해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바통을 받아 전달해야 할 마땅한 최종 목적지는 아마도 21세기일 것이니 『마포주공아파트』는 20세기 한국의 모던을 그대로 드러낸 전범이겠다. - P14

오래전 어떤 자리에선가 박정현 전 편집장과 마주 앉아
‘대한민국의 20세기를 오롯이 설명하는 물질적 대상‘을 골라 단행본 시리즈를 만들면 어떨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그 자리에서 ‘마포아파트‘와 ‘미군기지‘를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P15

반공주의와 발전주의 그리고 여기에 권위주의가 결합한 박정희 정권에서 탄생해 1970년대 후반에 완성을 본 ‘마포아파트 체제‘는 곧 대한민국의 공간 생산 방식이자 규범이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닐것이다. - P17

3 국가 프로젝트 이데올로기

1970년 전체 주택 중 단독주택이 차지하는 비율이95.3퍼센트로 415만 4,902호였고, 아파트는 0.77퍼센트인3만 3,372호에 불과했다. ○ 집은 곧 단독주택이었다.
50년 뒤 이 수치는 극적으로 바뀐다. 통계청이 발표한「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2000년에 전체 주택 중47.8퍼센트였던 아파트의 비중은 2005년 (52.7퍼센트)에 절반을 넘겼고, 2016년 (60.1퍼센트)에 처음으로 60퍼센트대를 돌파한 뒤 계속 상승하여 2020년에는 1,166만 2,000호로 총주택 1,852만 6,000호의 62.95퍼센트를 차지했다. - P67

혁명 주체의 ‘시범‘

장동운 대한주택공사 초대 총재가 마포아파트 건설과 관련해
"이 일을 ‘시범아파트‘로 강력하게 추진한 배경에는 ‘혁명주체‘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신뢰 때문"○이라고 여러 차례밝힌 바 있다. "그 당시 ‘아파트‘라고 불리던 다세대주택은 주로영세민들이 살고 있어서 ‘빈민굴‘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이런 인상을 불식시키려고 10층의 최신식 아파트단지를지으려고 했습니다. - P69

발전국가와 건축은 바로 이 지점에서 만난다. 1960년대한국에서 미래를 현재로 호출하는 건축의 이데올로기와발전국가의 계획은 유례없이 공명했다. - P69

아파트의 점유율이 0.77퍼센트에불과했던 1970년에서 10년쯤 더 거슬러 올라간 1961년에 중앙집중식 난방에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아파트를 입주자들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오르고 내리는 장면은 아직 손에 잡히지않는 흐릿한 미래 풍경이었다. 어떤 면에서도 당대에 불가능해보였던 예외, ‘각종 첨단 설비와 장치‘는 이데올로기를 전하는 매체였다. 이는 "근대문명의 혜택"이었고, 체제 홍보와 대북선전의 장치였다. - P71

최신 설비를 갖춘 10층 아파트 설계는 한국 건축가들에게미지의 영역이었다. 엄덕문 당시 주택영단 건설이사 겸건축부장은 ‘영단 수준으로는 설계 못 한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엄덕문은 와세다대학교 부설 고등공업학교에서건축을 공부했고, 훗날 세종문화회관(1978), 과천정부종합청사 (1982) 등을 설계하며 당대 최고의 건축가 가운데한 명으로 성장하는데, 그런 그에게도 10층 아파트는 무모한 계획이었다.** 군사 정부의 서슬에 기가 눌려 죽을 상황이었지만 못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위대한 세대의 증언 : 주거혁명의기수 장동운」, 「월간조선 뉴스룸]2006년 7월호 중 엄덕문 회고 부분.

**그는 1957~1958년에 ICA주택기술실장을 거쳐 1958년 11월 11일 대한주택영단 건설이사로 취임했으며영단의 겸직제가 실시된 1959년부터 건축부장도 겸했다. 1961년 11월 11일 퇴임했는데 이때는 이미 마포아파트 기본설계를 마무리한 뒤였다. 그의 후임으로 1962년 7월 1일 홍사천이 취임했다.

***이와 유사한 상황은 5년 뒤인1966~1967년경에 다시 반복된다.
정부종합청사 설계경기에서 등장했던 ‘규모의 실현 문제‘가 그것이다. 이에대해서는 박정현, 「건축은 무엇을했는가』, 70~97쪽 참조. - P73

10층 높이는 아니었지만, 외국인들을 위한 주택인 한남동 유엔빌리지의 외인아파트처럼 다양한 설비를 갖춘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역시 중앙산업이설계하고 당시 한국에서 가장 다양한 경험을 지닌 육군공병단이 시공을 맡아 완공 후 이를 대한주택영단에 인계한 것이었다. - P77

엄덕문의 회고는 장동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마포아파트의 예외적인 위상을 강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이내 자부심으로 바뀌고, 이 과정에서 마포아파트의이데올로기는 증폭된다. 엄덕문은 ‘최고 전문가들을자문위원으로 위촉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진해 단 3개월 만에10층 아파트 설계를 마무리했다‘**며 전형적인 극복의 서사를 들려준다.

**대한주택공사는 분야별외부 전문가를 위촉해 자문위원회,
건설추진위원회, 건설위원회 등을조직해 선례가 없는 사업의 기술적난관을 극복하고자 했고, 이를
‘공동설계‘라 불렀다. "공사는 마포아파트의 설계를 할 때 당시건축계의 권위였던 김희춘, 강명구,
정인국, 나상진, 김종식, 합성권 씨 등을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공동설계‘를했으며, 약 50억 원의 예산을 들여이 건물들을 1961년 10월 16일에 착공, 1962년 12월 말까지 준공할예정이었다." 같은 책, 360쪽. - P77

계획가 박병주, 건축가 엄덕문과 김중업의 평가

설계 책임을 맡았던 엄덕문 역시 비슷한 평가를 내린다.
최첨단 ·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 입식 생활을 추구한 마포아파트가 이후 변기와 싱크대 등 주택 관련 산업이발전하는 데 큰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건축가 김중업 역시[경향신문] 좌담회를 통해 "마포아파트 건립은 결국 ‘대규모아파트군(群) 형성‘의 첫 케이스"라 평한 뒤 ‘인공대지와 도시입체화‘를 통해 택지 문제와 공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위대한 세대의 증언 : 주거혁명의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활황을기수 장동운」, 「월간조선 뉴스룸』2006년 7월호. 실제로 주택산업과의연관성 측면에서 나름의 성취를 이룬경우는 한강맨션아파트라 할 수 있다.
한강맨션아파트 준공(1970.9.9)이후 소위 ‘맨션산업‘은 타 분야의구가했으며, 부엌 가구와 침대를 비롯해다채로운 가전제품과 가구, 도기에이르는 품목이 다양하게 발전했다. - P81

‘시범‘을 물리적 규모나 최신 설비 도입이 아니라 정책적인 측면으로 해석한 이도 있었다. 대한주택영단 주택문제연구소단지 연구실장을 거쳐 홍익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긴 박병주는1967년 발표한 글에서 마포의 임대아파트가 분양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금의 현실에서 임대아파트가 사라져도 괜찮은지 탄식에 가까운 질문을 던진다. - P83

‘공영주택 건설 비용에 정부의정책 자금이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때문에 대단위 주택지에서 (공공이) 먼저 몇 곳을 골라 집을지은 뒤 이를 모범적 선례로 삼도록 민간을 지도하는 의미‘*가
‘시범‘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소수에 불과했다. 마포아파트 건립을 추진한 이들에게 임대냐 분양이냐는 부차적 문제였고, 이 결정이 지금까지 이어지는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규모, 이 규모가 선사하는새로운 도시 경관, 즉 발전과 등치되길 원한 혁명의 이미지였다.

* 박병주, 「아파트 건설과주택사업」, 「주택」 제19호(1967년 6월),
78~79쪽. 나아가 박병주는 가능한한 단지 규모를 대단위로 해야 성과를 1거둘 수 있다면서 ‘단지화 전략‘을 적극 주장했다. 박병주, 「주택금고에 부치는 나의 제안: 단지화된 주택사업에 우선토록」, 『주택』 제20~21호(1967년12월), 39쪽. - P83

그러나 장동운은 USOM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데실패한다. USOM의 입장에서 마포아파트는 적절치 않은사업이었다. 담당자의 말대로 규모와 형식 모두 최빈국의 주택정책에 적합하지 않았다. 장동운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자금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건설부장관이었던 조성근과최고회의 자금 담당 오정근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육사 8기동기인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도 부탁한다.

김 부장에게 "내가 아파트를 지으려고 하는데 협조해달라"며 아파트 조감도를 보여줬더니 "아주 좋다"고 하더군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일본인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귀속자금으로 마포아파트 자금을 마련했어요. 당시 화폐로 5억 원 정도 됐을 겁니다.*** - P85

***「위대한 세대의 증언 : 주거혁명의기수 장동운」, 「월간조선 뉴스룸』2006년 7월호. - P84

실제로 엘리베이터는 주택영단 이사장이나 설계자는물론이고 마포아파트 자금 지원은 거절했으나 건설 과정을끊임없이 살피던 USOM 측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쟁점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미국의 반대로 10층에서 6층으로설계 변경을 해야 했을 때에도 마포아파트 설계자들은 비록 엘리베이터를 당장 설치하지 못하지만 엘리베이터 홀은 그대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 대한주택공사,
『대한주택공사20년사』, 360쪽.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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