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게임

"이기고 있다면 명확히 하라.
지고 있다면 복잡하게 만들어라." - P367

Intro

나는 미국의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이며, 정보 이론의 아버지라 불리는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의 집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랐다. 61세의 나이 차이 탓에 우리가 함께 어울려 다닌 적은 없지만 나는 늘 그와 친하게 지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 P369

그 많은 것들 중 섀넌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그가 쓴 논문이다. 구글에서1948년 논문인 <통신의 수학적 이론>A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을 검색하면 바로 볼 수 있다. 전자적 소통에 혁명을 일으킨 논문, ‘정보‘라는 모호한 개념을 정확하고 측정 가능한 양으로 변환시킨 논문이다. - P369

따라서 섀넌의 근본적인 정보 단위는 이진수binary digit 이며, 줄여서 표현하면 ‘비트‘bit다. 실제로 작동하는 비트를 이해하기 위해 숨겨진 정보에 대한 고전 게임인 <행맨>Hangman‘을 플레이할 때 비트가 어떻게 개입되는지를 살펴보자. 약 28만 개의 단어 목록이 있는 2019년판 콜린스 스크래블(단어 찾기 게임-옮긴이)용 사전에서 목표 단어를 뽑기로 한다. 이 사전에 있는 단어들을모두 열거하려면 18자리 이진 코드(더하기 19자리 코드 몇 개가 필요하다. 따라서 섀넌식으로 표현한다면, 단어를 알아낸다는 것은 대략 18.09 비트의 정보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잠깐 비교하자면 디지털 사진의 정보는 이것의 100만 배 정도 된다.² - P372

제5부 정보 게임

INTRO


‘정보‘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원한다. 역사적인 논문 그 자체를 읽을 수 있다. 《수학적커뮤니케이션 이론》 (클로드 섀넌 워런 위버 저, 백영민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이장에서는 《인포메이션: 인간과 우주에 담긴 정보의 빅히스토리》 (제임스 글력 저, 박래선, 김태훈 역, 동아시아, 2017)와 <저글러, 땜장이, 놀이꾼, 디지털 세상을 설계하다: 세상을 바꾼 괴짜 천재의 궁극의 놀이본능>(지미 소니 · 로브 굿맨 저, 양병찬 역,
곰출판, 2020)이라는 두 가지 훌륭한 2차 자료도 참고했다. - P508

제5부 정보 게임

1 아직 이 게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자면, 이것은 시대를 초월했으며 쓸데없이 병적인 게임이다. 한 플레이어가 비밀 단어를 선택한 다음 그 단어의 글자 수만큼 빈칸을 그린다. 다른 플레이어는 비밀 단어 전체를 완성하기를 바라면서 한 번에 하나씩 글자를 추측한다. 추측한 글자가 단어 안에 없으면 목숨 하나를 잃으며,
여덟 번 목숨을 잃으면 지게 된다.

2 이론적으로는 사진의 RGB 값을 픽셀 단위로 추측하는 행맨 버전을 플레이할 수도있지만, 한판에 몇 년이 걸릴 것이다. - P477

한때 내 이웃이었던 클로드 섀넌은 그의 웅대한 이론이 그렇게 경박한 용도로 쓰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그가 좋아할 거라고 확신한다.
섀넌은 "과학의 역사는 귀중한 결과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일이 많음을 보여주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벨연구소에서 일할 때 공용 공간에서 하루 종일 보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의 상사는 "클로드가 ‘비생산적이 될 권리‘를 얻었다"고 말했다. - P376

제25장

숫자 야구


정보의 바다에서 유의미한 것을 어떻게 건져내야 할까?



고전적 암호 해독 게임<숫자 야구> 게임은 <마스터마인드>Mastermind라는 이름으로 1970년대에 가장 잘나가는 보드 게임 중 하나가 되었으며, <대부>의 유료 영화만큼(굳이숫자를 따지자면 5,000만장) 팔렸다. 하지만 이 게임이 그 알록달록한 플라스틱못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 P377

교사 폴록하트Paul Lockhart는 "수학자에게 문제란 탐침, 즉 수학적 현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다. 우리 나름대로 ‘막대로 찔러‘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보는 방식인 것이다."라고 했다. 숫자 야구>를 최적으로 플레이하려면 가장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방식으로 비밀 숫자를 찔러봐야 한다.
이는 때때로 이미 틀렸음을 알고 있는 숫자를 일부러 추측에 넣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P381

게임의 유래


많은 고전 게임과 마찬가지로 이 게임의 기원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곤 20세기 초 영국인들이 이 게임을 <황소와 암소>라고 불렀다는 것뿐이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는 케임브리지와 MIT에서이 게임의 컴퓨터 버전이 출현했다. 그러다 몇 년 후 이스라엘 통신 전문가 모데카이 메이로비츠 Mordecai Meirowitz가 <마스터마인드>라는 이름으로 출시해 이게임에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 P381

4 안드레아 안졸리노의 말에 따르면 이탈리아인들은 이 게임을 작은 숫자 Little Num-bers 또는 스트라이크와 볼strike and Ball이라고 불렀다. - P477

비참하고 전형적인 표본인 나를 보자. 나는 77개의 팟캐스트를 구독하고트위터에서 600명을 팔로우한다. 또한 내 폰에 있는 위키백과 앱이 열려 있는탭 수는 이미 최댓값을 넘어설 정도다.⁵ 이 모든 정보를 고려할 때 과연 나는정보를 얼마나 얻었을까? - P38

5탭 최댓값은 100이다. 나의 마지막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엘리 브로쉬Allie Brosh, 월드 시리즈 챔피언 목록, 장미의 일기, 이안 하니 로페즈lan Haney Lopez, ‘큰 노랑택시, 존 로커, 산토리니(게임), 아나이스 미첼 그것은 내가 최근에 생각했던 것에대한끔찍하고도 훌륭한 판옵티콘 방식의 스냅샷이다. - P478

일반적으로 인간은 적절한 장소에서 정보를 찾지 않는다. 한 고전적 심리학연구를 살펴보자. 피험자들은 한쪽 면에는 문자가 있고 다른 면에는 숫자가있는 카드 4장을 보았다. 그런 다음 규칙을 배웠다. 모음이 있는 카드는 숫자가짝수라야 한다.
여기서 질문이 있다. 규칙을 위반했는지 확인하려면 어떤 카드를 뒤집어야할까? - P382

이 연구는 ‘확증 편향‘이라는 패턴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론에 반대될 수 있는 예를 찾는 대신 이론이 맞음을 확인하기 위한 예를 찾는 경향이 있다. 확증 편향은 감정에 기인할 때가 많다 - P383

이와 대조적으로 <숫자 야구>는 자업자득의 대표적 게임이다. 쓸데없는 질문을 하면 쓸데없는 대답을 듣게 된다. 정보가 우리를 덮치도록 내버려두는대신 목적의식을 갖고 세상을 조사하면서 정보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게임이 끝났을 때 솔방울이 실제로 무엇인지 찾아볼 수도 있다.⁴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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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아카펠라부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아이스박스를 가리키며 뭐라 뀈뀈거리는 녀석이 있다. 다른 녀석들도 고개를 내젓고 아이스박스를 들여다보는 등 거동이 수상하다. 무슨 일있나? - P78

하품이 최고조에 달해 아래턱이 뻐근해졌을 때..
문을 열어 놓은 문간에 누가 나타났다. 오오, 엄청난 게 왔다. 다 찢어진 셔츠를 옷핀으로 이어 붙이고 손가락과 목에는 실버 액세서리를 했다. 펑크족이다. 펑크족이 왔다. 어째선지 주뼛거리는 눈빛이지만, 뭘 하러 왔나 싶어 의아하게 생각하는 내게 펑크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아무것도...... 아니, 문집을 파는데요."
"문집?" - P79

"너, 이, 이거!"
무슨 일인가. <빙과>에 바퀴벌레라도 들었나.
아니다. 펑크족이 주시하는 것은 <빙과> 더미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쓰레기였다. 망가진 만년필, 펑크족은 그것을 흡사 보물이라도 받들어 들듯 공손하게 집었다.
"이거야! 훌륭해!"
눈앞에서 느닷없이 흥분하면 이쪽은 싸늘하게 식을 수밖에 없다. - P80

"가지세요."
"어? 진짜? 정말 준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이미 품에 끌어안고 있다.
"그, 그럼 이거 줄게."
(중략).
"우리 패션쇼의 우대권이니까 그거 들고 오면 돼. 장소는복장실, 괜찮아, 코디네이트 잘해 줄 테니까. 패션쇼라고 그렇게 특별한 식으로 걸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 괜찮아. 그럼!" - P81

012-♥︎03

(전략).
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요. 12시가 거의 다 됐습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을까요? 이러면 안 되죠. 관심이 가는 게 있을 때마다 멈춰 섰다간 맡은 바를 다할 수 없습니다.
저는 굳은 결심을 가슴에 품고 창가를 벗어났습니다.
복도로 눈을 돌리니 주술 동호회의 수상쩍어 보이는 포렴과 후쿠베 씨가 정성을 다했다는 수예부의 간판, 구도가 매우 흥미로운 사진부의 포스터………….
아아, 앞만 보이는 안경이 어디 떨어져 있으면 좋을 텐데요! - P83

2-2. 013~019 퀴즈 트라이얼

013-♣︎04


가미야마 고등학교 퀴즈 연구회에서 주최하는 퀴즈 트라이얼, 그것은 가미야마 시 최대의 퀴즈 대회다!
이 도시에서 다른 퀴즈 대회가 열렸다는 말을 못 들어 봤기때문이지만.
퀴즈 트라이얼은 개인적으로 첫째 날의 하이라이트다. 절대 놓칠 수 없다. 진정한 데이터베이스가 누군지 똑똑히 보여주마! - P84

"이번이 일곱 번째입니다. 뭐, 꽤 괜찮은 상품도 준비했고문제도 퀴즈에 자신 있는 사람한테만 유리하지 않게 신경 써서 배분했어요. 게다가 당연한 일이지만, 퀴즈 대회인데 퀴즈연 부원은 참가 안 하고요. 이건 기회입니다. 많은 분들이참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 게다가 점심 먹고 나서니까운동장에서 OX퀴즈를 풀며 뛰어다니면 소화도 되고 좋지 않을까요."
제법 그럴싸하게 꼬드긴다 싶어 감탄했다. 전교 방송이겠다. 다소 효과가 있겠지 했더니만 다소 정도가 아니다. - P85

게다가 잊어서는 안 되는 벽신문부도 퀴즈연을 언급했다.
축제 기간 중 벽신문부는 두 시간 간격으로 호외를 내는데,
그중 첫날 12시 호에 퀴즈연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기사가 실렸다. 곳곳의 게시판에 붙어 있었으니 선전 효과가 장난 아니었을 것이다. - P86

퀴즈연 부장은 그렇게 말하더니 도중에 단상에 올라온 여학생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내려갔다. 조금 안심했다. (중략).
"첫 번째 문제! 금강석이란 다이아몬드를 말하고, 녹주옥은 에메랄드를 가리킨다. 맞을까요, 틀릴까요?"
헤헹, 첫 문제는 이 정도인가.
물론 동그라미다(‘녹주석‘은 화학식이 같은 아콰마린을 포함하지만, ‘녹주옥‘이라고 하면 에메랄드다)! - P87

014-◆03

생각했던 것보다 한산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동인지 마켓의 분위기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마켓이 아니라 학교 축제,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모인 게 아니니 이게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 P88

 주의해서 들어 보니 문제를 낭독하는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문제! ‘깨지락거리다‘의 깨와 ‘깨나른하다‘
의 깨는 같다. 맞을………… ……………까요?"
뭐?
생각도 해본 적 없다. 괴상한 문제다. 참가자를 걸러 내는게 목적일 테니, 직감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섞여있어도 안 될 것 없겠지만. - P89

015-♣︎05

(전략).
"정답은....."
문제를 읽는 여학생, 유난스럽게 질질 끈다.
아니, 끌어도 너무 끈다. 야.
"......X! 예선 종료!"
야호(어원은 모르지만 ‘나른하다‘는 있어도 ‘지락하다‘는없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문제가 이어지면서 점점 흥분한 출제자는 춤을 출 듯한 몸짓으로 우리를 가리켰다. - P90

그렇게 내게 말을 건 사람은…………….
・・・・・・ 잠깐만, 좀만 기다려 봐. 생각해 낼 테니까. 알아, 분명히 아는 얼굴인데, 일단 가슴을 펴고………….
"뭐, 그렇지."
"너, 내가 있는 거 몰랐지.‘
"하하, 퀴즈에 집중하느라."
누구더라. 얘가 누구더라. 같은 학년인 건 알겠는데,
총무 위원도, 수예부원도 아니다. 그렇다면 같은 반. 우리 반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애는 주몬지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 P91

다니는 우쭐한 표정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바둑부 말이냐. 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때, 들어볼래?"
재미있는 이야기라 인상이 다소 달라졌다지만 다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듯한 이미지가 전혀 아니다.
"단상으로 올라오시죠!"
별로 관심이 당기지 않던 차에 다시 부름을 받았다. 어이쿠, 그렇지, 귀중한 선전 기회다. 나는 손으로 조회대를 가리키며 다니에게 가자고 했다. - P92

"자, 네 번째 결승 진출자입니다! 그럼 학년 반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헛기침을 한 다음 참가자 이백 명. 그리고 아마도 스피커를 통해 듣고 있을 건물 내의 수백 명을 향해 가슴을 펴고말했다.
"고전부 후쿠베 사토시입니다."
"네?"
"고전부요. 현대 문학과 고전 문학 할 때의 고전부입니다."
출제자는 순간 당황한 듯했다. - P93

016-♠︎05

"본격적이란 말이죠."
그래, 본격적이지.
주로 양이.


[남은 부수 185부] - P95

017-♣︎06

(전략).
퀴즈연 부원에게 당신이 모르는 지식이 있다고 했으니 간단히 낚이는 게 당연하다(야유하는 뜻은 전혀 없다. 내게도퀴즈연 부원에 부합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막연히 아는 것뿐. 나는 자신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간야제란 이름 자체입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이거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를 줄여서 간야제가 되었다는 식의 간단한게 아니거든요. 고전부는 그 이름의 유래를 밝혀낸 겁니다." - P95

018-♥︎04

(전략).
운동장쪽에서 참가자 여러분의 환호성이 어렴풋이 들려왔습니다. 후쿠베 씨의 연설이 많은 분들에게 감명을 준 모양입니다. 그 뒤로도 몇 마디 이어지더니 이윽고 퀴즈 대회 결승전 개시를 알리는 한층 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잘해 주세요. 후쿠베 씨. 속으로 건투를 빕니다.
저도 질 수 없습니다.
생각해 봤는데, 위탁 판매라는 방법도 분명히 효과가 있겠죠. 하지만 다른 분들 동아리에 저희 <빙과>를 가져다 놓는다고 <빙과>의 매력이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 P97

죄송해요. 좀 급해서요.
"마술부 제2회 공연. 오 분 뒤에 시작합니다!"
니다.
아차, 아뇨, 벽신문부에 가는 길이었죠. 미련이 남습
"2학년 F반 영화 봤냐?"
"아, 그거? 봤어. 꽤 괜찮지 않았냐?"
우후.
축제의 온갖 장식과 인파에 제 마음이 심히 현혹됩니다.
이럴 때는 오레키 씨의 어디에도 혹하지 않는 정신력이 부럽습니다. - P99

(전략).
"그럼 후배분을 소개해 주실 수 없을까요?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도가이토 선배는 한층 곤혹스러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뭐, 소개 정도는 해 줄 수 있지만, 미안한데 소용없을 거다. "
"소용없다고요?"
"두 시간마다 호외를 낸다고. 스케줄이 미리 정해져 있어.
지금 와서 갑자기 고전부 기사를 끼워 넣긴 좀・・・ 있었다 - P101

"실어 달라고 부탁한다고 실어 줄 순 없어. 간야제엔 쉰 개가 넘는 단체가 참가한다고. 전부 소개하는 건 불가능하겠다. 소개한다면 주목해야 할 곳이 우선시돼. 이렇게 말하면좀 그렇지만 고전부는 그거잖아, 문집을 파는 것뿐이잖아?"
가차 없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실제로 문집을 파는것뿐이긴 하죠. - P102

유감입니다. 오레키 씨와 후쿠베 씨, 마야카 씨를 볼 낯이없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맡은 바를 다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런가요.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도가이토 선배는 기운을 북돋워 주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기면 다시 와. 힘이 돼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작에 힘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 P103

가호 씨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는 면이 조금 있거든요.
"점을 치신다는 건...………..
"응, 점술 연구회."
"다른 부원분들은 어떻게 되셨나요?"
그렇게 묻자 가호 씨는 약간 비뚜름하게 웃었습니다.
"점술 연구회, 나 혼자야."
"네? 뜻밖이네요. 인기 있을 것 같은데요.‘
"주술 동호회가 따로 있거든. 그쪽은 인기 있어." - P105

바닥에 놓은 종이 쇼핑백에서 그런 물건들을 꺼내던 가호씨가 느닷없이 동작을 멈췄습니다.
"아, 타로는 안 된다." - P105

가호 씨는 제 표정을 슬쩍 살폈습니다.
"・・・・・ 그러게. 에루는 이런 거 좋아할지도 모르겠네. 잠깐볼래?"
쇼핑백에서 카드가 나왔습니다. 가호 씨가 건네준 카드를언뜻 봤다가 저는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카드에는 꽤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 P106

주몬지가에는 자식이 둘 있지만, 가미 고에 현재 다니는 사람은 주몬지 가호 씨뿐이고 이 도시에 주몬지 성을 쓰는 다른 집안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즉, 추측이기는 해도 여기 가미야마 고등학교에서 주몬지라고 하면 가호 씨입니다. 가호 씨의 이름을 사칭해 가호 씨의 물건을 훔치다니 참 이상합니다.
특이한 이야기입니다. - P107

메모장에서 찢어 낸 종이에 ‘축제가 끝나면 돌려 드릴게요‘라고 급히 갈겨썼습니다. ・・・・・・ 도둑치고는 정말 특이합니다. 저는 어쩐지 웃음이 났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가호 씨가웃으며 말했습니다.
"표정이 밝아졌네."
"그래요?" - P108

"뭔가 특별한 건가요?"
가호 씨는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내용은 다른 거랑 똑같아. 그렇지만 이게 그 카드랑 같이 놓여 있었거든. 맨 끝의 참가 단체 한마디 페이지가 펴진채."
참가 단체 한마디라면 이 안내 책자의 맨 마지막 코너입니다. 몇 페이지네 걸쳐 말 그대로 이번 축제에 참가하는 단체가 한 줄씩 홍보를 합니다. - P109

019-♣︎07

결승은 벨을 빨리 눌러 7점을 먼저 따는 사람이 이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승패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나는 어쨌든 내세울 게 데이터베이스라는 것밖에 없다. 어느 정도는 적극적으로 해야지.
안 그러면 아깝다. - P109

그렇지만 이제 그만 끝내자. 다음 문제는 내가 맞힌다!
"・・・・・・ 그럼 다음 문제입니다. 가미야마 고등학교의 …………학교에 관한 문제인가. 정신 집중..………….
"학생회장의 풀 네임……………."
알기는 아는데, 잠깐. 함정 문제일 수도 있다. ‘풀 네임은이것인데 그럼 교장 선생님의 풀 네임은?‘이라고 문제를 꼬는 것은 흔한 수법이다.
"・.....을 답해 주세요." - P110

상품은 우승자에게만 주었다. 시미즈 노리코 선배(묘한 지식을 묻는 문제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재미있을 것 같은 사람이다. 이름을 기억해 두자)가 받은 상품도포장지로 싸여 있기 때문에 뭔지 모르겠다. 뭐, 오기로 하는말이 아니라 정말 상품에는 전혀 관심 없었지만. - P111

"결승 시작하기 전에 하려던 재미있는 이야기 하다 말았잖냐."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잊어버릴 뻔했다. 나는 듣고 싶은 눈치를 보이지 않았으니 요컨대 다니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리라 들어서 손해 볼 것도 없으니 들어 주자.
"그랬지. 바둑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다니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둑돌 몇 개를 도둑맞았거든." - P112

"응. 그럼 이만.‘
"아니, 잠깐."
움직이려던 발을 멈추었다. 다니는 묘하게 굳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후쿠베. 너 이 뒤로도 대회 같은 거 나갈 생각이지?"
"......그런데?"
고개를 끄덕이자 다니는 내 쪽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너한테 질 순 없지. 무승부로 끝내는 건 찝찝해. 승부를내자고" - P114

승부라 생각도 해 본 적 없는데. 다니가 찝찝하건 말건 나는 알 바 아니고.
나는 아닌 게 아니라 온갖 것을 즐긴다.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재미있어서 호타로가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볼 만큼.
하지만 그것이 개인적 체험이라는 부분을 지금까지 소중히여겨 왔다. - P115

2-3. 020~022 또 하나늬 폭풍

020-◆04

(전략).
"그거 봐. 역시 너무 수수한 게 패인이라니까. 아무도 안오잖아.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분위기를 바꿔 보자. 캐릭터를 내세워서 말이지.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포스터 그리는 정도는 별로 귀찮을 것도 없고."
내가 보기에는 고치 선배가 말하는 것만큼 손님이 없는 것같지 않았다. 문집도 그런대로 팔리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봐줘도 북적거린다고 할 정도가 아닌 것은 사실이었다. - P116

"응, 그렇지만 이런 분위기로 가자고 다 같이 결정한 거고......."
"말이 그렇지, 다수결로 정한 것도 아니잖아. 애초에 이 문집이 이상해. 리뷰 백 편이라니 너무 딱딱하다고. 이런 걸 누가 읽는다는 거야? 패러디 같은 걸 내자고 했잖아."
패러디를 그리고 싶은 만연부원은 누구나 출품해도 된다고 되어 있었다. - P118

그러면서 주위에 동의를 구한다. 추종자들 중 누가 모깃소리로 "맞아요"라고 했다. 예스맨 노릇을 할 생각이면 최소한좀 더 분명한 태도로 하면 좋겠다.
그나저나 의미가 없나. 으음.
몇몇 부원이 매대 앞 의자에 앉은 내게 시선을 돌렸다.
・・・・・・ 고치 선배에게 대놓고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는 사람은나뿐인 게 맞지만, 그렇다고 왜 나를 보나. - P119

"소용없다느니, 의미가 없다느니, 그게 무슨 뜻이죠. 선배?"
선배는 역시 반론을 할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때까지 다가서 있던 유아사 부장에게 서슴없이 등을 돌리고 나를 향하더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웃었다.
"재미있다 없다 같은 걸 말하는 게 소용없다. 말 그대로의뜻인데 이해가 안가?" - P120

나는 침을 삼켰다.
"확인할 게 있는데요. 선배는 주관이란 말을 하시는 거죠?"
"그래."
"선배는 ‘주관에 따라 어떤 작품이나 명작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어떤 것을 나쁜 작품이라고 말하는 건 무의미한 걸 넘어서 심지어 유해하다‘라고 하시는 거죠?"
고치 선배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말이야. - P122

"주관에 따라 어떤 작품도 명작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이걸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건 무의미한 걸 넘어서 심지어 유해하다‘란 말이 되지 않나요?"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노라고 한다면 선배는자신의 의견을 좀 더 온건하게 고쳐 말해야 할 것이다. 내 생각은 그랬다. 그런데 결정적인 모순을 지적한 줄 알았건만, 고치 선배의 웃음은 거기서 더욱 뚜렷해졌다.
"맞아."
"네?" - P123

전부터 고치 선배에게 어딘지 모르게 될 대로 되라는 듯한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만연의 중심인물 중 한 명으로서 자기를 따르는 부원이 여럿 있는데도, 어쩐지 자신을 따르는 사람조차 업신여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 그런 느낌의 밑바닥에 흐르는 저류를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치 선배는 이런사람이구나.
질까 보냐. ・・・・・・ 그런 것에 질까 보냐. - P124

나는, 그리고 아마도 만연부원 대다수는, 만화가 표현 도구로서 절대적인 결함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고치 선배도 만화는 만화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명작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선배는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난 만화에 명작이나 걸작이 없단 말 안 했는데.
"한 거랑 뭐가 다르죠? 주관에 따라 어떤 거든 쓰레기가될 수 있다고 했잖아요." - P125

선배의 눈이 조금 전보다 날카로워졌다. 나도 아마 선배를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심호흡을 하고 싶었다.
비장의 카드를 내놓을 때라고 생각했다.
선배를 부정하기 위해 내 보물을 꺼내야 한다고. 선배를부정하지 않으면 내 보물들이 부정당할 것이라고.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 P126

나는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선배처럼 말하면 제가 그린 만화도 다른 모든 만화랑 가치가 똑같다는 뜻이 되는데, 그건 그렇지 않아요. 어떤 의미로든 제 만화랑 절대 견줄 수 없는 작품이 존재해요. 그것도아무런 도태도 안 거친 상태에서.
예를 들어 선배, 작년에 우리 학교 축제에서 판매했던 『저녁에는 송장이』란 만화, 읽으셨나요?"
어느새 선배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없었다. - P127

"뭐야, 이게."
동아리실이 거의 만원이었다. 조금 전까지 만연부원밖에없었는데 지금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어, 어째서? 언제부터?
어느새 내가 펙펙거리는 것도 다 봤단 말이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손님들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시선을피했다. 그러고는 변명처럼 줄 뒤에 서서 문집 『제아미즈』를사 들고 갔다. 한 묶음에 열 부씩, 두 묶음 놓아두었던 『제아미즈』가 거의 없어졌다. - P128

022-♠︎06

시계를 보니 조금 있으면 5시다. 이제 곧 첫째 날이 끝난다.
교내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고전부원은 이때 모두 지학 교실에 모여 있었다. 지탄다와 사토시는 중간에 가끔 얼굴을 비쳤지만, 이바라는 아침에 얼핏 본 이후 처음 보는 것이다.
따로 할 일이 없는 시간이 잔뜩 있었던지라 나는 <빙과>의대부분을 상자 속에 감춰 놓았다. - P130

사토시가 주먹을 쳐들었다.
"좋아! 내일도 열심히 해 볼까. 오전에 조리 연구회에서하는 콘테스트가 있거든."
들뜬 표정의 사토시에게 옆에서 이바라가 무심코 말했다.
"세 명이 한 팀인 그거?"
사토시의 웃는 얼굴이 굳었다.
"엥? 세 명이 한 팀? 정말?"
허둥지둥 안내 책자를 꺼낸다. 총무 위원이 이벤트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다니 안 될 일이군. - P131

솔직히 지탄다에게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지탄다의 능력을 기대하지 않았다기보다. 이미 시작된 이벤트에서 특별사례를 인정해 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고개를 들지 않던 지탄다가 생각난 게 있는지 문득 얼굴을들었다.
"아,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게 있었어요."
신경 쓰인다고?
그 말을 듣고 전율했다. 이 좋은 집안 아가씨가 ‘신경 쓰여요‘라고 하면 돌이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 P132

"그래서 호타로, 전적은 어때?"
사토시가 물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체중을 실었다.
"열세 부.
제법 괜찮은 출발이라 해도 될 숫자다. 스물네 부를 판매한다는 처음 예정을 생각하면 첫날 열세 부를 판 것은 쾌거라 할 수 있으리라. 어차피 결전의 장은 토요일인 셋째 날이겠다. - P133

남은 날짜는 이틀. 대책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생각나는게 아니다. 폭발적으로 무슨 일이 생길 것을 기대할 것인가.
아니, 그것은 기적을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나.
벨이 울렸다.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 첫날 일정이 끝났다.

 [남은 부수 177부]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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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잠 못 이루는 밤

1. 001~004 잠 못 이루는 밤

001-♥︎01

잠이 안 와서 살짝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지탄다가의 역사는 에도 시대 초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합니다. - P7

전후 농지개혁으로 일본 각지의 대지주들과 마찬가지로 지탄다가도 토지의 대부분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당주였던 지탄다 쇼노스케는 시류를 읽는 눈이 뛰어났던덕에, 주식으로 번 돈을 밑천으로 지탄다가의 농업을 한발 앞서 근대화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부를 더욱 늘렸습니다. - P8

집안 자랑 같지만, 지탄다 쇼노스케라는 인물은 단순히 사업 능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받을 만한 인격도 갖추었던 모양입니다. 쇼노스케는 사실 저희 할아버지입니다. 일찍 돌아가셔서 어떤 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않습니다. - P9

그리고 오늘 밤, 저는 또 신사로 갑니다.
내일부터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가 시작됩니다. 가미야마 고등학교의 다채로운 문예계 동아리 중 하나인 저희 고전부는 대단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할 생각이긴 하지만…………… 행운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새전함에 백 엔 동전을 던져 넣고 불빛이라곤 달빛뿐인 경내에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뒤 고전부 분들을 떠올립니다. - P11

후쿠베 씨의 쾌락주의적 언동이 어디까지 본심인지에 대해저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기주의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마야카 씨가 속상해하는데 웃으면서 모른 척할 것 같지 않습니다.
오레키 씨는 편히 자고 있을까요. - P12

세 분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기도를 드립니다.
내일부터 사흘간, 저희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 ‘산‘을 어떻게든 넘을 수 있기를.
눈을 뜬 저는 씻을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지갑에서 오십엔을 더 꺼냈습니다. - P12

002-♣︎01

잠이 안 와소 베개 밑에 들어 있던 안내 책자를 꺼냈다.

(중략).

끝까지 훑어본 뒤 나는 완성도에 만족해 안내 책자를 머리맡에 놓았다. 책자 앞면에 고딕체로 커다랗게 ‘야제 100배즐기기‘라고 씌어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제42회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라고 씌어 있다. 제작은 총무 위원회. 나,
후쿠베 사토시가 소속된 위원회다. - P17

 직권 남용과 부수입의 경계를 명확히 가늠하는 것.
이게 또 재미있는 일이다. 이 안내 책자로 말하자면, 마지막코너인 ‘참가단체 한마디‘에 작은 장난을 쳤다.
작년까지 이 코멘트 코너는 오십음순으로 나열했는데, 그것을 남몰래 등록한 순서로 바꾸었다. 위원장에게는 ‘아카펠라부가 오십음* 중 맨 첫 자로 시작한다는 이유만으로 공식홍보의 자리인 코멘트 코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를 매번 차지한다는 건 공평하다고 할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의도는 사실 단순했다. 내가 속한 단체 중 하나인 고전부의 코멘트를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위치에 놓고 싶었던 것뿐이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위원장도 금세 전폭적으로 찬성했다.

・아, 카, 사, 타, 나, 하, 마, 야, 라, 와순. 각 자음은 아이우에오 순으로 모음 변화한다. - P18

아아, 기대된다. 축제 자체도, 그리고 우리 고전부가 실패를 어떻게 만회할지도.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좌우지간 지금은 푹 자고 내일을 대비하자. 모처럼 축제를즐기는 중에 에너지가 나는 사태가 벌어졌다간 후쿠베 사토시, 인생 최대의 실책이다. - P19

003-♠︎01

워낙 야행성이다 보니 잠이 안 온다.

책이나 읽을까 했는데 책꽂이에 있는 책 중에는 지금 기분에 맞는게 없었다. 거실로 내려와 텔레비전이라도 볼까 하고리모컨을 들었는데, 이쪽도 죄 보고 싶지 않은 것들뿐이다.
하는 수 없이 방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데스크톱컴퓨터를 켰다.
이 컴퓨터는 원래 누나가 쓰던 건데, 지금은 오레키가의공동 인터넷 전용 단말기다. 그래 봤자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은 나뿐이고, 나는 인터넷을 하며 노는 취미가 없다. 구형 모 - P20

어느 단체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꽤나 작정하고 만들었다. 사진이며 일러스트, 손으로 그린 지도 등을 풍부하게 사용하면서도 화면이 보기 편하고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다.
대충 둘러본 뒤, 이제 내가 소속된 특별 활동 동아리인 고전부의 소개나 읽어 볼까 하던 차에 접속이 끊겼다.
어디가 문제인지 이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하면 가끔 뚝끊어질 때가 있다. 슬슬 잠이나 자자고 생각했을 때, 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가벼운 것을 보니 누나다. - P21

"호타로‘
발소리 주인에 대한 내 판정은 옳았다. 누나 목소리다. 어쩐지 잠에 취한 것 같다.
"너, 내일부터 학교 축제지?"
얼굴만 부엌 쪽으로 돌렸다.
"그래."
"얼른 자." - P22

"네 태도를 보면 다 알아. 뭐, 그보다 고전부의 학교 축제는 원래 말썽 없인 안 끝나. 그게 전통이라고."
어이구 저주인가.
"너도 참 귀찮은 동아리에 들어갔구나."
"......
하마터면 맞받아칠 뻔했다. 나더러 고전부에 들어가라고한 사람은 누나다. - P23

얼마 동안 침묵이 흐른 뒤, 뒤쪽에서 뭐가 날아왔다. 정말부적이라도 주었나 싶어 봤는데 도무지 영검한 효력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만년필이다.
영검함은 몰라도 풍격은 있었다. 짙은 검은색에 점잖은 은색으로 가장자리를 둘렀다. 그렇게 싸구려는 아닐 것 같다.
"그거 가져."
・・・・・・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건가?"
"잉크는 다 썼고 펜촉은 갈라졌어." - P25

004-◆01

(전략).
흥미가 생겨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네. 내가 어휘는 풍부한것 같은데 쓸모 있는 말을 별로 모르지 뭐야."
"쓸모없는 어휘는 풍부하고?"
"탱크 데산트라든지, 운둔근이라든지. 아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가령 호타로는 ‘에너지 절약‘을 좌우명으로 들잖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건 그냥 자칭이잖아. 오레키가 진짜 소중히 여기는 게
‘에너지 절약‘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이야." - P28

아휴 참, 어쩔 수 없다.
개인적으로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에 애착이 있어서 더신경이 예민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밤을 꼬박 새우고형편없는 컨디션으로 나갈 수도 없고.
잠자리에서 데굴데굴 굴러 나와 약상자에서 수면제를 꺼냈다. 이 약,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 P30

2
무수히 쌓인 그것

2-1.005~012 고전부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005-♠︎02

충분히 즐긴다. 말은 간단해도 실제로는 제법 쉽지 않은작업이다. 개인의 이해력의 차만 해도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요소가 아닌데, 기호의 차는 더더욱 큰 요인이다. 같은 마술을 봐도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마술인지 100분의 1도 모를 것이다. - P33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등교했다.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당일. 후쿠베 사토시가 "기대된다. 아아, 기대된다" 하고 하도 외쳐 대기에 작은 심술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사토시는 유난스레 히죽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탁견이라고 해 주고 싶지만, 뭘 모르는군, 호타로 뭘 몰라." - P34

후쿠베 사토시. 이 녀석과는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사토시는 외모로 따지면 갈색이 감도는 눈동자를 가진 것과 멀리서 보면 여자로 착각할 만큼 선이 가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는 사이클링으로 다진 다리 힘이 여간 아닌데, 겉만 보면 비실비실하다.
하지만 이 녀석의 진정한 특징은 정신에 있다. 방금 주고받은 대화에서도 얼핏 드러난 것처럼, ‘즐기는 것‘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학업이며 사교 같은 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방치할 정도다. - P36

이바라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지는 인연이지만, 중학교 입학 이래 사복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몇 번 없다. 하지만 사토시가 그렇다면그럴 것이다.
이바라는 지금까지 사토시에게 몇 차례 고백했다. 그런데 사토시는 자신도 호감이 없지 않을 텐데 계속 얼버무리기만 한다. 왜 그러는지 나는 짐작도 안 되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다. - P37

006-♣︎02

저기 가는 사람은 마야카가 틀림없었다. 호타로를 길가의불상으로 잘못 보는 일이 있어도 마야카를 잘못 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달려가 어깨를 탁 쳤다.
"안녕, 마야카!"
"아이 참, 아프잖아!"라며 노려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세게 때렸는데, 마야카는 오늘 아침 그런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몸을 움찔하더니 천천히 돌아보았다.
"......안녕." - P38

"일반인 앞에서 그런 용어는 쓰지 마."
요새는 코스튬 플레이쯤이야. 금기어일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뭐, 마야카가 그런 것을 쑥스러워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터라 구태여 반론하지 않았다. 참고로 마야카가 오늘 코스프레를 하고 온다는 것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마야카가 소속된 만화 연구회에서 사복 등교 신청서를 총무 위원회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 P39

본인이 원해서 한 게 아닌 코스프레 모습에서 시선을 돌리고 끈 달린 주머니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어쨌거나 고생 많아. 나중에 만연에도 얼굴 내밀게."
마야카는 살짝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야카는 만연 문집에도 기고했지?"
"응."
"읽어 볼게....... 힘들었겠어. 고전부하고 만연하고 이벤트까지 동시에 진행하기."
"응, 힘들었어. 누구는 원고를 줄 생각도 안 하고 말이지."
내 딴에는 위로한답시고 한 말인데, 마야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이쿠, 이야기가 그쪽으로 갔나. - P41

007--♠︎03

주머니에 딱딱한 게 들어 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인다.
만년필. 정확히는 과거에 만년필로 사용되었던 쓰레기다.
잉크를 다 썼고 펜촉이 갈라진, 누나가 준 부적이다. 어젯밤 바닥에 그냥 둘 수도 없어서 버릴 생각으로 내 방으로 들고 왔는데, 아침에 급하게 집을 나오면서 손수건과 같이 가지고 나온 모양이다 - P43

가미야마 고등학교의 조감도는 H자 형태다. 두 개의 세로줄 중 한쪽은 주로 교실이 있는 일반동이고, 다른 한쪽은 과학과 예체능 쪽 특별 교실이 모여 있는 특별동이다. 가로줄은 두 건물의 연결 통로다. 정말로 조감하면 일반동에서 연결 통로가 뻗은 것도 보일 것이다. 그 끝에는 체육관이 있다. - P44

지학 교실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살풍경한 교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나를 보더니 바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오레키 씨."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한다. 긴 검은 머리가 찰랑거렸다. 고전부 부장 지탄다다. 십중팔구 이 녀석이 일등으로 와있을 줄 알았다. - P45

이 문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와 지탄다. 그리고 사토시가 한 일이라곤 원고를 쓰는 것뿐이었다 해도 지장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원고를 쓴다고 문집이 완성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페이지 수를 확정하고, 글씨체와 종이를 고르고,
원고 배치를 생각하고, 쪽 번호의 위치를 정해서 최종적으로인쇄소에 발주한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전부 이바라가 혼자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들어가는 삽화조차 이바라가 그렸다. - P47

회의를 통해 사전에 정한 <빙과>의 발행 부수는 서른 부우리가 각자 한부씩 사고, 지도 교사와 동아리실 비치용으로각각 한 부를 빼고 나면 판매용은 스물네 부. 그것도 다 못 팔것을 각오한 숫자였다.
그런데 인쇄된 <빙과>는 그보다 조금 더 많았다.
그래 봤자 일곱 배 정도.
별로 두껍지 않은 문집도 이백 부를 쌓아 놓으면 ‘산더미‘
같아진다는 사실을 학습했다. - P48

<빙과>의 배포 가격은 이백 엔으로 잡았다.
이바라와 지탄다가 필사적으로 계산을 다시 한 결과는 이미 들었다. 우리는 원래 서른 부를 한 부에 사백 엔씩 받고 팔예정이었다. 그 가격으로 서른 부를 다 팔면 매상과 학교에서나오는 활동비로 인쇄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빙과>는 이백 부가 인쇄되었다. 그 자체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실수이지만, 대량 생산 효과로 한 부당 제작비가 급격히 낮아졌다. 이백 부를 다 판다고 생각할 경우 가격은 120엔까지 낮출 수 있는 모양이다. - P50

참고로 설령 다 팔려도 수익은 우리 수중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일 찻집‘ 금지를 표방하는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에서는 이익을 내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일인당 천 엔 이하는봐준다는 말도 들었지만, 그 이상 흑자가 발생할 경우는 국고, 아니고 학교 측에서 거두어 가는 게 규칙이다. - P51

"문제는 고전부의 지명도가 낮은 거하고 동아리실의 입지조건이 나쁜 거네."
"네, 그게 제일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해요."
두 사람의 의견에는 나도 동감한다. - P52

"새 판매 장소를 마련한다는 말이죠. 전 어떤 방법으로 손님을 여기까지 모셔 올지 그 생각만 했지 뭐예요. 오레키 씨.
발상의 전환이네요."
"아니. 전환이라 할 정도는……………."
"하지만 당일에 허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글쎄. 그런 문제는 총무 위원인 사토시의 분야다. 그런데사토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좀 애매한걸. 물리적 공간으로 생각하면 물론 가능하지만 문제는 ‘이치‘론이야. 고전부한테만 그런 특권이 허용될 것인가, 아닌가. 우리 위원장 아니면 학생회장하고 직접 담판을 짓는 게 좋을걸." - P53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은 도무지 유쾌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사토시는 유난히 즐거워 보인다. 후쿠베 사토시는 원래 그 어떤 일도 즐기는 인간이다. 말썽도 바라는 바일지 모른다. 사토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보다 선전에 주력하고 싶은데."
‘호, 선전? 무슨 아이디어라도 있냐?"
"암, 있고말고. 비책이 있지." - P54

"대강의 방침은 정해졌군. 지탄다가 판매 장소 협상, 사토시가 선전."
"일단 그렇게 가죠. 그런데 오레키 씨는요?"
나?
실은 나도 비책이 있다. <빙과>의 판매 촉진에 크게 기여하면서 내 좌우명에도 위배되지 않는 훌륭한 방법이. 나는 헛기침을 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난 말이지." - P55

....뭐, 정말 이백 부를 다 팔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손톱끝만큼도 안 한다만.

[남은 부수 200부] - P57

008-♥︎02

(중략).
마이크 앞에 선 회장님은 멀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숨을크게 들이쉬었습니다. 그러고는 커다란 목소리로 대뜸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지금부터 제42회 간야제를 개최합니다!" - P57

총무위원회에서 발행한 『간야제 100배 즐기기』에 따르면, 개회식에는 브레이크 댄스부 분들이 출연한다고 합니다.
부끄럽지만 브레이크 댄스라는 것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댄스는 알겠는데 브레이크라는 말이 조금 위험해 보입니다.
예전에 얼핏 봤던, 무대 위의 물건을 부수고 다니는 것 같은퍼포먼스가 아니면 좋겠는데요. - P58

댄스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빨라요, 정말 빨라요. 팔다리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잔상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훌륭합니다. 곡도 단숨에 고조돼서 ・・・・・・ 아뇨, 음, 이렇게까지 소리가크니까 귀가 아픈데요. 큰 소리는 조금 불편합니다. - P59

저는 이윽고 회의실 앞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교실과 다를 바 없는 미닫이문에 ‘총무 위원회‘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문을 노크합니다.
어머나?
"실례합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옆으로 당겨 보니 잠겨있습니다.
그렇군요. 생각해 보니 저는 개회식 도중에 빠져나온 셈입니다. 총무위원회 분이 아직 아무도 안 와 계신 것도 그럴 만합니다. 조금 일렀나 봅니다. - P61

다만 불만이 하나 있다면 제목이 ‘제42회 간야제‘라는 점입니다.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의 정식 명칭은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이고, 간야제는 그다지 의미가 좋지 못한 속칭입니다. 왜 의미가 좋지 못하다는 것인지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구석에 ‘학생회 집행부‘라고 씌어 있는데, 집행부에서 정식으로 만든 포스터라면 간야제라는 이름을 피했으면좋았을 것 같습니다. - P62

"안녕하세요. 총무 위원장인 다나베 선배시죠?"
전에 벽신문 <가미 고 월보》에서 사진으로 봤던 다나베 총무위원장이 틀림없습니다. 기름한 얼굴에 렌즈가 작은 안경을 꼈습니다. 깔끔하게 다듬은 짧은 머리와 더불어 상당히 성실할 듯한 인상을 줍니다. 다나베 선배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정중히 답례해 주었습니다. - P63

다나베 선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습니다. 몹시 난처한 표정입니다.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어렵게 말한 것 같지 않은데요.
"우리는 정해진 대로 간야제를 진행하는 것뿐이라 말이지. 갑자기 판매 장소를 늘려 달라고 한들 좋을 대로 하시라고 할순 없어." - P64

서른 부였을 인쇄 부수가 이백 부가 된 것은 본래 마야카씨의 책임이 아닙니다. 저도 주문서를 봤는데, 마야카 씨는분명히 인쇄소에 서른 부를 부탁드렸습니다. 다만 마야카 씨는 동시에 개인적인 문집을 이백 부 부탁드렸습니다. 마야카씨가 어째서 개인적으로 문집을 이백 부나 찍으려 했는지는저도 모릅니다. 문제는 마야카 씨의 문집과 <빙과>가 혼동됐다는 것입니다. 마야카 씨는 확인을 철저하게 하지 않은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런 사태를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 P65

다나베 선배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이백 부란 말이지. 만연도 그 정도로 팔리진 않아. 응, 조금이라도 더 팔기 위해서 판매 장소를 늘리고 싶다는 건 알겠어. 도와주고 싶지만…………… 사정은 어느 부에나 있으니 말이지. 고전부만 갑자기 따로 판매 장소를 만들 순 없거든." - P66

010-◆02

(중략).
사실 고전부로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인쇄소에 발주하면서 똑똑히 확인하지 않은 것은 정말 큰 실수였다. 그에 대한 책임감도 물론 있다. 하지만 고전부에 가고 싶은 마음의 절반정도는 만연에 가고 싶지 않다는 기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P69

만연 동아리실은 일반동 2층의 제1 예비 교실이다. 고전부가 쓰는 지학 교실에 비하면 일반 교실 바로 옆이라는 위치는꽤나 운이 좋은 것이다. 복도에는 ‘만화 연구회‘라고 쓴 간판이 있을 뿐 별로 야단스러운 느낌은 없다. 부장인 유아사 쇼코 선배의 방침이다. - P70

부장은 가미야마 고등학교 교복인 세일러복을 입고 있었다. 분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원래 코스프레는 동아리실을지키면서 판매와 호객을 담당할 다섯 명이 할 예정이었다. 부장은 그중에 포함되지 않는다. 나와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않는데도 유아사 부장에게는 어른 같은 관대함이 있었다. 포용력도 느껴진다. 나쁘게 말하면 가끔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보일 때도 있다. 고양이와 툇마루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포동포동한 얼굴에 쌍꺼풀진 큰 눈, 유아사 부장은 내 분장을 흘깃 보더니 말했다. - P72

손님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좀 더 있을 것 같다. 나는 ㄷ자로 책상을 늘어놓은 제1 예비 교실을둘러보았다. 만연의 주력 상품은 고금의 만화 백 편을 모아리뷰를 쓴 문집 『제아미즈」. 왜 『제아미즈냐고 물었더니 작년 문집 『간아미즈』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간아미와 제아미를 이용한 말장난. 14, 15세기 일본에서 노의 원류인 사루가쿠를 대성시킨부자를 말한다. - P73

분위기가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은 아니다. 불꽃이 튀는 것도 아니다. 만화를 좋아하는 마음은 다들 똑같다. 하지만 역시 나는 축제 기간 중 만연을 못 벗어날 것 같다. 그런 내가 고전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만연에 <빙과>의 위탁판매를 부탁하는 것 정도다. 만연에서 <빙과>를 팔 수 있다면 지명도를 고려할 때 스무 부 정도는 어떻게 되지 않을까.
지금은 분위기가 이러니 무리겠지만, 긴장이 조금 풀려 분위기가 가벼워지면 부탁해 볼 생각이다. 되도록 빨리. - P74

고전부의 활동 목적이 불분명한 여파로 <빙과>의 내용도무질서해졌다. 펴 보지 않아도 기억한다. 나와 지탄다는 빙과 사건의 전말을, 이바라는 고전으로 존중되는 만화에 관해썼다. 사토시는 고전적 패러독스와 관련된 조크를 칼럼풍으로 썼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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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대만금마장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 관객상을 거머쥔 데 이어 2024 홍콩금상장영화제, 2024 홍콩감독조합상에서 연이어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젊은 창작자가 등장했다. 장편 데뷔작 <연소일기>로 잠재력을 인정받은 탁역겸 감독은 자살과 우울증이라는, 자국 홍콩이 마주한 사회문제를 소년요우제(황재락)의 삶에 투영한다. 요우제의 부모는 또래보다 늦되는 그를 영재 동생 요우쥔(하백염)과 비교하며 매순간 몰아붙인다. 부모의 기대치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요우제에게 돌아오는 건 그를 무시하는 주변인들의 가시 돋친 말뿐이다. 탁역겸 감독은 "육체적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될 수 있지만,
말로 인한 상처는 평생 마음에 남는다"며 타인의 말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살과 우울에 대한 깊은 이야기

<연소일기>
탁역겸 감독 - P20

"우리 다음에는 꼭 형도 데리고 여행 가요"라는요우쥔의 대사가 마음에 남았다. 형이 죽었다는걸 알면서도 요우쥔은 부모에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우울증 이론의 5단계 중 첫 단계는 ‘부정‘인데나는 이것이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몇년 전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처음 보인 반응도 요우쥔과 마찬가지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배경들을 요우쥔의 반응에 적용했다.


요우제가 삶을 포기하지 않는 전개를 생각해본적 있는지.

있다. 만약 요우제가 살아남아 성장했다면 부모에게 반항하고 심지어 맞서 싸우기 시작하는청소년이 됐을지도 모른다. - P20

홍콩에서 작품의 반응이 무척 좋았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안타깝게도 홍콩의 자살 문제가 내가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심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연소일기>를 관람할 한국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영화의 주제가 무겁고 진지해 대중이 쉽게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살과 우울에 관해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은 관객에게는 작품이 꼭 닿길 바란다. 나도 그 주제에 관해 궁금한 것이 정말 많다. - P21

작별하지 않는다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사 매혹적인 이유에 관하여


송경원

운명은 죄가 없다. 삶의 무게를 저티기 힘들 때 우하응 이 묵직항 울림의 단어에 너무 많은 책임을 미루곤 한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손을 놓을 때 그 무기력한 낙담조차 정해진 운명일까. (중략).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사라진 유명 배우를 추적하난 어느 영화감독의 걸음에 동행하는 영화다. 노년의 영화감독 미겔 가라이(마놀로 솔로)는 한 TV프로그램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후략). - P44

운명과 자유의지

운명이란 단어를 사용할 땐 앞뒤 행간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설사 세상의 일들이 모두 결정되어 있고 바꿀 수 없다는 게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을 어떤 결정의 이유로 삼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중략).
짐작하겠지만 이 영화가 제5ㅣ하는 선 답을 찾는 게임이 아니다. 차라리 열쇠의 형태를 감상하는 시간에 가깝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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