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잠 못 이루는 밤
1. 001~004 잠 못 이루는 밤
001-♥︎01
잠이 안 와서 살짝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지탄다가의 역사는 에도 시대 초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합니다. - P7
전후 농지개혁으로 일본 각지의 대지주들과 마찬가지로 지탄다가도 토지의 대부분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당주였던 지탄다 쇼노스케는 시류를 읽는 눈이 뛰어났던덕에, 주식으로 번 돈을 밑천으로 지탄다가의 농업을 한발 앞서 근대화하고 그렇게 해서 얻은 부를 더욱 늘렸습니다. - P8
집안 자랑 같지만, 지탄다 쇼노스케라는 인물은 단순히 사업 능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받을 만한 인격도 갖추었던 모양입니다. 쇼노스케는 사실 저희 할아버지입니다. 일찍 돌아가셔서 어떤 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않습니다. - P9
그리고 오늘 밤, 저는 또 신사로 갑니다. 내일부터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가 시작됩니다. 가미야마 고등학교의 다채로운 문예계 동아리 중 하나인 저희 고전부는 대단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할 생각이긴 하지만…………… 행운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새전함에 백 엔 동전을 던져 넣고 불빛이라곤 달빛뿐인 경내에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뒤 고전부 분들을 떠올립니다. - P11
후쿠베 씨의 쾌락주의적 언동이 어디까지 본심인지에 대해저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기주의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마야카 씨가 속상해하는데 웃으면서 모른 척할 것 같지 않습니다. 오레키 씨는 편히 자고 있을까요. - P12
세 분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기도를 드립니다. 내일부터 사흘간, 저희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 ‘산‘을 어떻게든 넘을 수 있기를. 눈을 뜬 저는 씻을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지갑에서 오십엔을 더 꺼냈습니다. - P12
002-♣︎01
잠이 안 와소 베개 밑에 들어 있던 안내 책자를 꺼냈다.
(중략).
끝까지 훑어본 뒤 나는 완성도에 만족해 안내 책자를 머리맡에 놓았다. 책자 앞면에 고딕체로 커다랗게 ‘야제 100배즐기기‘라고 씌어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제42회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라고 씌어 있다. 제작은 총무 위원회. 나, 후쿠베 사토시가 소속된 위원회다. - P17
직권 남용과 부수입의 경계를 명확히 가늠하는 것. 이게 또 재미있는 일이다. 이 안내 책자로 말하자면, 마지막코너인 ‘참가단체 한마디‘에 작은 장난을 쳤다. 작년까지 이 코멘트 코너는 오십음순으로 나열했는데, 그것을 남몰래 등록한 순서로 바꾸었다. 위원장에게는 ‘아카펠라부가 오십음* 중 맨 첫 자로 시작한다는 이유만으로 공식홍보의 자리인 코멘트 코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를 매번 차지한다는 건 공평하다고 할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의도는 사실 단순했다. 내가 속한 단체 중 하나인 고전부의 코멘트를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위치에 놓고 싶었던 것뿐이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위원장도 금세 전폭적으로 찬성했다.
・아, 카, 사, 타, 나, 하, 마, 야, 라, 와순. 각 자음은 아이우에오 순으로 모음 변화한다. - P18
아아, 기대된다. 축제 자체도, 그리고 우리 고전부가 실패를 어떻게 만회할지도.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좌우지간 지금은 푹 자고 내일을 대비하자. 모처럼 축제를즐기는 중에 에너지가 나는 사태가 벌어졌다간 후쿠베 사토시, 인생 최대의 실책이다. - P19
003-♠︎01
워낙 야행성이다 보니 잠이 안 온다.
책이나 읽을까 했는데 책꽂이에 있는 책 중에는 지금 기분에 맞는게 없었다. 거실로 내려와 텔레비전이라도 볼까 하고리모컨을 들었는데, 이쪽도 죄 보고 싶지 않은 것들뿐이다. 하는 수 없이 방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데스크톱컴퓨터를 켰다. 이 컴퓨터는 원래 누나가 쓰던 건데, 지금은 오레키가의공동 인터넷 전용 단말기다. 그래 봤자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은 나뿐이고, 나는 인터넷을 하며 노는 취미가 없다. 구형 모 - P20
어느 단체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꽤나 작정하고 만들었다. 사진이며 일러스트, 손으로 그린 지도 등을 풍부하게 사용하면서도 화면이 보기 편하고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다. 대충 둘러본 뒤, 이제 내가 소속된 특별 활동 동아리인 고전부의 소개나 읽어 볼까 하던 차에 접속이 끊겼다. 어디가 문제인지 이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하면 가끔 뚝끊어질 때가 있다. 슬슬 잠이나 자자고 생각했을 때, 위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가벼운 것을 보니 누나다. - P21
"호타로‘ 발소리 주인에 대한 내 판정은 옳았다. 누나 목소리다. 어쩐지 잠에 취한 것 같다. "너, 내일부터 학교 축제지?" 얼굴만 부엌 쪽으로 돌렸다. "그래." "얼른 자." - P22
"네 태도를 보면 다 알아. 뭐, 그보다 고전부의 학교 축제는 원래 말썽 없인 안 끝나. 그게 전통이라고." 어이구 저주인가. "너도 참 귀찮은 동아리에 들어갔구나." "...... 하마터면 맞받아칠 뻔했다. 나더러 고전부에 들어가라고한 사람은 누나다. - P23
얼마 동안 침묵이 흐른 뒤, 뒤쪽에서 뭐가 날아왔다. 정말부적이라도 주었나 싶어 봤는데 도무지 영검한 효력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만년필이다. 영검함은 몰라도 풍격은 있었다. 짙은 검은색에 점잖은 은색으로 가장자리를 둘렀다. 그렇게 싸구려는 아닐 것 같다. "그거 가져." ・・・・・・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건가?" "잉크는 다 썼고 펜촉은 갈라졌어." - P25
004-◆01
(전략). 흥미가 생겨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네. 내가 어휘는 풍부한것 같은데 쓸모 있는 말을 별로 모르지 뭐야." "쓸모없는 어휘는 풍부하고?" "탱크 데산트라든지, 운둔근이라든지. 아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가령 호타로는 ‘에너지 절약‘을 좌우명으로 들잖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건 그냥 자칭이잖아. 오레키가 진짜 소중히 여기는 게 ‘에너지 절약‘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이야." - P28
아휴 참, 어쩔 수 없다. 개인적으로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에 애착이 있어서 더신경이 예민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밤을 꼬박 새우고형편없는 컨디션으로 나갈 수도 없고. 잠자리에서 데굴데굴 굴러 나와 약상자에서 수면제를 꺼냈다. 이 약,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 P30
2 무수히 쌓인 그것
2-1.005~012 고전부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005-♠︎02
충분히 즐긴다. 말은 간단해도 실제로는 제법 쉽지 않은작업이다. 개인의 이해력의 차만 해도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요소가 아닌데, 기호의 차는 더더욱 큰 요인이다. 같은 마술을 봐도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마술인지 100분의 1도 모를 것이다. - P33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등교했다.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당일. 후쿠베 사토시가 "기대된다. 아아, 기대된다" 하고 하도 외쳐 대기에 작은 심술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사토시는 유난스레 히죽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탁견이라고 해 주고 싶지만, 뭘 모르는군, 호타로 뭘 몰라." - P34
후쿠베 사토시. 이 녀석과는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사토시는 외모로 따지면 갈색이 감도는 눈동자를 가진 것과 멀리서 보면 여자로 착각할 만큼 선이 가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는 사이클링으로 다진 다리 힘이 여간 아닌데, 겉만 보면 비실비실하다. 하지만 이 녀석의 진정한 특징은 정신에 있다. 방금 주고받은 대화에서도 얼핏 드러난 것처럼, ‘즐기는 것‘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학업이며 사교 같은 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방치할 정도다. - P36
이바라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지는 인연이지만, 중학교 입학 이래 사복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몇 번 없다. 하지만 사토시가 그렇다면그럴 것이다. 이바라는 지금까지 사토시에게 몇 차례 고백했다. 그런데 사토시는 자신도 호감이 없지 않을 텐데 계속 얼버무리기만 한다. 왜 그러는지 나는 짐작도 안 되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다. - P37
006-♣︎02
저기 가는 사람은 마야카가 틀림없었다. 호타로를 길가의불상으로 잘못 보는 일이 있어도 마야카를 잘못 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달려가 어깨를 탁 쳤다. "안녕, 마야카!" "아이 참, 아프잖아!"라며 노려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세게 때렸는데, 마야카는 오늘 아침 그런 기분이 아닌 모양이다. 몸을 움찔하더니 천천히 돌아보았다. "......안녕." - P38
"일반인 앞에서 그런 용어는 쓰지 마." 요새는 코스튬 플레이쯤이야. 금기어일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뭐, 마야카가 그런 것을 쑥스러워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터라 구태여 반론하지 않았다. 참고로 마야카가 오늘 코스프레를 하고 온다는 것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마야카가 소속된 만화 연구회에서 사복 등교 신청서를 총무 위원회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 P39
본인이 원해서 한 게 아닌 코스프레 모습에서 시선을 돌리고 끈 달린 주머니를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어쨌거나 고생 많아. 나중에 만연에도 얼굴 내밀게." 마야카는 살짝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야카는 만연 문집에도 기고했지?" "응." "읽어 볼게....... 힘들었겠어. 고전부하고 만연하고 이벤트까지 동시에 진행하기." "응, 힘들었어. 누구는 원고를 줄 생각도 안 하고 말이지." 내 딴에는 위로한답시고 한 말인데, 마야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이쿠, 이야기가 그쪽으로 갔나. - P41
007--♠︎03
주머니에 딱딱한 게 들어 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인다. 만년필. 정확히는 과거에 만년필로 사용되었던 쓰레기다. 잉크를 다 썼고 펜촉이 갈라진, 누나가 준 부적이다. 어젯밤 바닥에 그냥 둘 수도 없어서 버릴 생각으로 내 방으로 들고 왔는데, 아침에 급하게 집을 나오면서 손수건과 같이 가지고 나온 모양이다 - P43
가미야마 고등학교의 조감도는 H자 형태다. 두 개의 세로줄 중 한쪽은 주로 교실이 있는 일반동이고, 다른 한쪽은 과학과 예체능 쪽 특별 교실이 모여 있는 특별동이다. 가로줄은 두 건물의 연결 통로다. 정말로 조감하면 일반동에서 연결 통로가 뻗은 것도 보일 것이다. 그 끝에는 체육관이 있다. - P44
지학 교실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살풍경한 교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나를 보더니 바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오레키 씨."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한다. 긴 검은 머리가 찰랑거렸다. 고전부 부장 지탄다다. 십중팔구 이 녀석이 일등으로 와있을 줄 알았다. - P45
이 문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와 지탄다. 그리고 사토시가 한 일이라곤 원고를 쓰는 것뿐이었다 해도 지장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원고를 쓴다고 문집이 완성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페이지 수를 확정하고, 글씨체와 종이를 고르고, 원고 배치를 생각하고, 쪽 번호의 위치를 정해서 최종적으로인쇄소에 발주한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전부 이바라가 혼자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들어가는 삽화조차 이바라가 그렸다. - P47
회의를 통해 사전에 정한 <빙과>의 발행 부수는 서른 부우리가 각자 한부씩 사고, 지도 교사와 동아리실 비치용으로각각 한 부를 빼고 나면 판매용은 스물네 부. 그것도 다 못 팔것을 각오한 숫자였다. 그런데 인쇄된 <빙과>는 그보다 조금 더 많았다. 그래 봤자 일곱 배 정도. 별로 두껍지 않은 문집도 이백 부를 쌓아 놓으면 ‘산더미‘ 같아진다는 사실을 학습했다. - P48
<빙과>의 배포 가격은 이백 엔으로 잡았다. 이바라와 지탄다가 필사적으로 계산을 다시 한 결과는 이미 들었다. 우리는 원래 서른 부를 한 부에 사백 엔씩 받고 팔예정이었다. 그 가격으로 서른 부를 다 팔면 매상과 학교에서나오는 활동비로 인쇄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빙과>는 이백 부가 인쇄되었다. 그 자체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실수이지만, 대량 생산 효과로 한 부당 제작비가 급격히 낮아졌다. 이백 부를 다 판다고 생각할 경우 가격은 120엔까지 낮출 수 있는 모양이다. - P50
참고로 설령 다 팔려도 수익은 우리 수중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일 찻집‘ 금지를 표방하는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에서는 이익을 내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일인당 천 엔 이하는봐준다는 말도 들었지만, 그 이상 흑자가 발생할 경우는 국고, 아니고 학교 측에서 거두어 가는 게 규칙이다. - P51
"문제는 고전부의 지명도가 낮은 거하고 동아리실의 입지조건이 나쁜 거네." "네, 그게 제일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해요." 두 사람의 의견에는 나도 동감한다. - P52
"새 판매 장소를 마련한다는 말이죠. 전 어떤 방법으로 손님을 여기까지 모셔 올지 그 생각만 했지 뭐예요. 오레키 씨. 발상의 전환이네요." "아니. 전환이라 할 정도는……………." "하지만 당일에 허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글쎄. 그런 문제는 총무 위원인 사토시의 분야다. 그런데사토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좀 애매한걸. 물리적 공간으로 생각하면 물론 가능하지만 문제는 ‘이치‘론이야. 고전부한테만 그런 특권이 허용될 것인가, 아닌가. 우리 위원장 아니면 학생회장하고 직접 담판을 짓는 게 좋을걸." - P53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은 도무지 유쾌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사토시는 유난히 즐거워 보인다. 후쿠베 사토시는 원래 그 어떤 일도 즐기는 인간이다. 말썽도 바라는 바일지 모른다. 사토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보다 선전에 주력하고 싶은데." ‘호, 선전? 무슨 아이디어라도 있냐?" "암, 있고말고. 비책이 있지." - P54
"대강의 방침은 정해졌군. 지탄다가 판매 장소 협상, 사토시가 선전." "일단 그렇게 가죠. 그런데 오레키 씨는요?" 나? 실은 나도 비책이 있다. <빙과>의 판매 촉진에 크게 기여하면서 내 좌우명에도 위배되지 않는 훌륭한 방법이. 나는 헛기침을 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난 말이지." - P55
....뭐, 정말 이백 부를 다 팔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손톱끝만큼도 안 한다만.
[남은 부수 200부] - P57
008-♥︎02
(중략). 마이크 앞에 선 회장님은 멀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숨을크게 들이쉬었습니다. 그러고는 커다란 목소리로 대뜸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지금부터 제42회 간야제를 개최합니다!" - P57
총무위원회에서 발행한 『간야제 100배 즐기기』에 따르면, 개회식에는 브레이크 댄스부 분들이 출연한다고 합니다. 부끄럽지만 브레이크 댄스라는 것은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댄스는 알겠는데 브레이크라는 말이 조금 위험해 보입니다. 예전에 얼핏 봤던, 무대 위의 물건을 부수고 다니는 것 같은퍼포먼스가 아니면 좋겠는데요. - P58
댄스의 속도가 빨라집니다. 빨라요, 정말 빨라요. 팔다리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잔상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훌륭합니다. 곡도 단숨에 고조돼서 ・・・・・・ 아뇨, 음, 이렇게까지 소리가크니까 귀가 아픈데요. 큰 소리는 조금 불편합니다. - P59
저는 이윽고 회의실 앞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교실과 다를 바 없는 미닫이문에 ‘총무 위원회‘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문을 노크합니다. 어머나? "실례합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옆으로 당겨 보니 잠겨있습니다. 그렇군요. 생각해 보니 저는 개회식 도중에 빠져나온 셈입니다. 총무위원회 분이 아직 아무도 안 와 계신 것도 그럴 만합니다. 조금 일렀나 봅니다. - P61
다만 불만이 하나 있다면 제목이 ‘제42회 간야제‘라는 점입니다.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의 정식 명칭은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이고, 간야제는 그다지 의미가 좋지 못한 속칭입니다. 왜 의미가 좋지 못하다는 것인지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구석에 ‘학생회 집행부‘라고 씌어 있는데, 집행부에서 정식으로 만든 포스터라면 간야제라는 이름을 피했으면좋았을 것 같습니다. - P62
"안녕하세요. 총무 위원장인 다나베 선배시죠?" 전에 벽신문 <가미 고 월보》에서 사진으로 봤던 다나베 총무위원장이 틀림없습니다. 기름한 얼굴에 렌즈가 작은 안경을 꼈습니다. 깔끔하게 다듬은 짧은 머리와 더불어 상당히 성실할 듯한 인상을 줍니다. 다나베 선배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정중히 답례해 주었습니다. - P63
다나베 선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습니다. 몹시 난처한 표정입니다.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어렵게 말한 것 같지 않은데요. "우리는 정해진 대로 간야제를 진행하는 것뿐이라 말이지. 갑자기 판매 장소를 늘려 달라고 한들 좋을 대로 하시라고 할순 없어." - P64
서른 부였을 인쇄 부수가 이백 부가 된 것은 본래 마야카씨의 책임이 아닙니다. 저도 주문서를 봤는데, 마야카 씨는분명히 인쇄소에 서른 부를 부탁드렸습니다. 다만 마야카 씨는 동시에 개인적인 문집을 이백 부 부탁드렸습니다. 마야카씨가 어째서 개인적으로 문집을 이백 부나 찍으려 했는지는저도 모릅니다. 문제는 마야카 씨의 문집과 <빙과>가 혼동됐다는 것입니다. 마야카 씨는 확인을 철저하게 하지 않은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런 사태를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 P65
다나베 선배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이백 부란 말이지. 만연도 그 정도로 팔리진 않아. 응, 조금이라도 더 팔기 위해서 판매 장소를 늘리고 싶다는 건 알겠어. 도와주고 싶지만…………… 사정은 어느 부에나 있으니 말이지. 고전부만 갑자기 따로 판매 장소를 만들 순 없거든." - P66
010-◆02
(중략). 사실 고전부로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인쇄소에 발주하면서 똑똑히 확인하지 않은 것은 정말 큰 실수였다. 그에 대한 책임감도 물론 있다. 하지만 고전부에 가고 싶은 마음의 절반정도는 만연에 가고 싶지 않다는 기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P69
만연 동아리실은 일반동 2층의 제1 예비 교실이다. 고전부가 쓰는 지학 교실에 비하면 일반 교실 바로 옆이라는 위치는꽤나 운이 좋은 것이다. 복도에는 ‘만화 연구회‘라고 쓴 간판이 있을 뿐 별로 야단스러운 느낌은 없다. 부장인 유아사 쇼코 선배의 방침이다. - P70
부장은 가미야마 고등학교 교복인 세일러복을 입고 있었다. 분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원래 코스프레는 동아리실을지키면서 판매와 호객을 담당할 다섯 명이 할 예정이었다. 부장은 그중에 포함되지 않는다. 나와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않는데도 유아사 부장에게는 어른 같은 관대함이 있었다. 포용력도 느껴진다. 나쁘게 말하면 가끔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보일 때도 있다. 고양이와 툇마루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포동포동한 얼굴에 쌍꺼풀진 큰 눈, 유아사 부장은 내 분장을 흘깃 보더니 말했다. - P72
손님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좀 더 있을 것 같다. 나는 ㄷ자로 책상을 늘어놓은 제1 예비 교실을둘러보았다. 만연의 주력 상품은 고금의 만화 백 편을 모아리뷰를 쓴 문집 『제아미즈」. 왜 『제아미즈냐고 물었더니 작년 문집 『간아미즈』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간아미와 제아미를 이용한 말장난. 14, 15세기 일본에서 노의 원류인 사루가쿠를 대성시킨부자를 말한다. - P73
분위기가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은 아니다. 불꽃이 튀는 것도 아니다. 만화를 좋아하는 마음은 다들 똑같다. 하지만 역시 나는 축제 기간 중 만연을 못 벗어날 것 같다. 그런 내가 고전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만연에 <빙과>의 위탁판매를 부탁하는 것 정도다. 만연에서 <빙과>를 팔 수 있다면 지명도를 고려할 때 스무 부 정도는 어떻게 되지 않을까. 지금은 분위기가 이러니 무리겠지만, 긴장이 조금 풀려 분위기가 가벼워지면 부탁해 볼 생각이다. 되도록 빨리. - P74
고전부의 활동 목적이 불분명한 여파로 <빙과>의 내용도무질서해졌다. 펴 보지 않아도 기억한다. 나와 지탄다는 빙과 사건의 전말을, 이바라는 고전으로 존중되는 만화에 관해썼다. 사토시는 고전적 패러독스와 관련된 조크를 칼럼풍으로 썼다. - P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