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아카펠라부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아이스박스를 가리키며 뭐라 뀈뀈거리는 녀석이 있다. 다른 녀석들도 고개를 내젓고 아이스박스를 들여다보는 등 거동이 수상하다. 무슨 일있나? - P78
하품이 최고조에 달해 아래턱이 뻐근해졌을 때.. 문을 열어 놓은 문간에 누가 나타났다. 오오, 엄청난 게 왔다. 다 찢어진 셔츠를 옷핀으로 이어 붙이고 손가락과 목에는 실버 액세서리를 했다. 펑크족이다. 펑크족이 왔다. 어째선지 주뼛거리는 눈빛이지만, 뭘 하러 왔나 싶어 의아하게 생각하는 내게 펑크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아무것도...... 아니, 문집을 파는데요." "문집?" - P79
"너, 이, 이거!" 무슨 일인가. <빙과>에 바퀴벌레라도 들었나. 아니다. 펑크족이 주시하는 것은 <빙과> 더미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쓰레기였다. 망가진 만년필, 펑크족은 그것을 흡사 보물이라도 받들어 들듯 공손하게 집었다. "이거야! 훌륭해!" 눈앞에서 느닷없이 흥분하면 이쪽은 싸늘하게 식을 수밖에 없다. - P80
"가지세요." "어? 진짜? 정말 준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이미 품에 끌어안고 있다. "그, 그럼 이거 줄게." (중략). "우리 패션쇼의 우대권이니까 그거 들고 오면 돼. 장소는복장실, 괜찮아, 코디네이트 잘해 줄 테니까. 패션쇼라고 그렇게 특별한 식으로 걸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 괜찮아. 그럼!" - P81
012-♥︎03
(전략). 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요. 12시가 거의 다 됐습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을까요? 이러면 안 되죠. 관심이 가는 게 있을 때마다 멈춰 섰다간 맡은 바를 다할 수 없습니다. 저는 굳은 결심을 가슴에 품고 창가를 벗어났습니다. 복도로 눈을 돌리니 주술 동호회의 수상쩍어 보이는 포렴과 후쿠베 씨가 정성을 다했다는 수예부의 간판, 구도가 매우 흥미로운 사진부의 포스터…………. 아아, 앞만 보이는 안경이 어디 떨어져 있으면 좋을 텐데요! - P83
2-2. 013~019 퀴즈 트라이얼
013-♣︎04
가미야마 고등학교 퀴즈 연구회에서 주최하는 퀴즈 트라이얼, 그것은 가미야마 시 최대의 퀴즈 대회다! 이 도시에서 다른 퀴즈 대회가 열렸다는 말을 못 들어 봤기때문이지만. 퀴즈 트라이얼은 개인적으로 첫째 날의 하이라이트다. 절대 놓칠 수 없다. 진정한 데이터베이스가 누군지 똑똑히 보여주마! - P84
"이번이 일곱 번째입니다. 뭐, 꽤 괜찮은 상품도 준비했고문제도 퀴즈에 자신 있는 사람한테만 유리하지 않게 신경 써서 배분했어요. 게다가 당연한 일이지만, 퀴즈 대회인데 퀴즈연 부원은 참가 안 하고요. 이건 기회입니다. 많은 분들이참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 게다가 점심 먹고 나서니까운동장에서 OX퀴즈를 풀며 뛰어다니면 소화도 되고 좋지 않을까요." 제법 그럴싸하게 꼬드긴다 싶어 감탄했다. 전교 방송이겠다. 다소 효과가 있겠지 했더니만 다소 정도가 아니다. - P85
게다가 잊어서는 안 되는 벽신문부도 퀴즈연을 언급했다. 축제 기간 중 벽신문부는 두 시간 간격으로 호외를 내는데, 그중 첫날 12시 호에 퀴즈연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기사가 실렸다. 곳곳의 게시판에 붙어 있었으니 선전 효과가 장난 아니었을 것이다. - P86
퀴즈연 부장은 그렇게 말하더니 도중에 단상에 올라온 여학생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내려갔다. 조금 안심했다. (중략). "첫 번째 문제! 금강석이란 다이아몬드를 말하고, 녹주옥은 에메랄드를 가리킨다. 맞을까요, 틀릴까요?" 헤헹, 첫 문제는 이 정도인가. 물론 동그라미다(‘녹주석‘은 화학식이 같은 아콰마린을 포함하지만, ‘녹주옥‘이라고 하면 에메랄드다)! - P87
014-◆03
생각했던 것보다 한산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동인지 마켓의 분위기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마켓이 아니라 학교 축제,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모인 게 아니니 이게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 P88
주의해서 들어 보니 문제를 낭독하는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문제! ‘깨지락거리다‘의 깨와 ‘깨나른하다‘ 의 깨는 같다. 맞을………… ……………까요?" 뭐? 생각도 해본 적 없다. 괴상한 문제다. 참가자를 걸러 내는게 목적일 테니, 직감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섞여있어도 안 될 것 없겠지만. - P89
015-♣︎05
(전략). "정답은....." 문제를 읽는 여학생, 유난스럽게 질질 끈다. 아니, 끌어도 너무 끈다. 야. "......X! 예선 종료!" 야호(어원은 모르지만 ‘나른하다‘는 있어도 ‘지락하다‘는없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문제가 이어지면서 점점 흥분한 출제자는 춤을 출 듯한 몸짓으로 우리를 가리켰다. - P90
그렇게 내게 말을 건 사람은……………. ・・・・・・ 잠깐만, 좀만 기다려 봐. 생각해 낼 테니까. 알아, 분명히 아는 얼굴인데, 일단 가슴을 펴고…………. "뭐, 그렇지." "너, 내가 있는 거 몰랐지.‘ "하하, 퀴즈에 집중하느라." 누구더라. 얘가 누구더라. 같은 학년인 건 알겠는데, 총무 위원도, 수예부원도 아니다. 그렇다면 같은 반. 우리 반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애는 주몬지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 P91
다니는 우쭐한 표정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바둑부 말이냐. 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때, 들어볼래?" 재미있는 이야기라 인상이 다소 달라졌다지만 다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듯한 이미지가 전혀 아니다. "단상으로 올라오시죠!" 별로 관심이 당기지 않던 차에 다시 부름을 받았다. 어이쿠, 그렇지, 귀중한 선전 기회다. 나는 손으로 조회대를 가리키며 다니에게 가자고 했다. - P92
"자, 네 번째 결승 진출자입니다! 그럼 학년 반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헛기침을 한 다음 참가자 이백 명. 그리고 아마도 스피커를 통해 듣고 있을 건물 내의 수백 명을 향해 가슴을 펴고말했다. "고전부 후쿠베 사토시입니다." "네?" "고전부요. 현대 문학과 고전 문학 할 때의 고전부입니다." 출제자는 순간 당황한 듯했다. - P93
016-♠︎05
"본격적이란 말이죠." 그래, 본격적이지. 주로 양이.
[남은 부수 185부] - P95
017-♣︎06
(전략). 퀴즈연 부원에게 당신이 모르는 지식이 있다고 했으니 간단히 낚이는 게 당연하다(야유하는 뜻은 전혀 없다. 내게도퀴즈연 부원에 부합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막연히 아는 것뿐. 나는 자신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간야제란 이름 자체입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이거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를 줄여서 간야제가 되었다는 식의 간단한게 아니거든요. 고전부는 그 이름의 유래를 밝혀낸 겁니다." - P95
018-♥︎04
(전략). 운동장쪽에서 참가자 여러분의 환호성이 어렴풋이 들려왔습니다. 후쿠베 씨의 연설이 많은 분들에게 감명을 준 모양입니다. 그 뒤로도 몇 마디 이어지더니 이윽고 퀴즈 대회 결승전 개시를 알리는 한층 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잘해 주세요. 후쿠베 씨. 속으로 건투를 빕니다. 저도 질 수 없습니다. 생각해 봤는데, 위탁 판매라는 방법도 분명히 효과가 있겠죠. 하지만 다른 분들 동아리에 저희 <빙과>를 가져다 놓는다고 <빙과>의 매력이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 P97
죄송해요. 좀 급해서요. "마술부 제2회 공연. 오 분 뒤에 시작합니다!" 니다. 아차, 아뇨, 벽신문부에 가는 길이었죠. 미련이 남습 "2학년 F반 영화 봤냐?" "아, 그거? 봤어. 꽤 괜찮지 않았냐?" 우후. 축제의 온갖 장식과 인파에 제 마음이 심히 현혹됩니다. 이럴 때는 오레키 씨의 어디에도 혹하지 않는 정신력이 부럽습니다. - P99
(전략). "그럼 후배분을 소개해 주실 수 없을까요?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도가이토 선배는 한층 곤혹스러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뭐, 소개 정도는 해 줄 수 있지만, 미안한데 소용없을 거다. " "소용없다고요?" "두 시간마다 호외를 낸다고. 스케줄이 미리 정해져 있어. 지금 와서 갑자기 고전부 기사를 끼워 넣긴 좀・・・ 있었다 - P101
"실어 달라고 부탁한다고 실어 줄 순 없어. 간야제엔 쉰 개가 넘는 단체가 참가한다고. 전부 소개하는 건 불가능하겠다. 소개한다면 주목해야 할 곳이 우선시돼. 이렇게 말하면좀 그렇지만 고전부는 그거잖아, 문집을 파는 것뿐이잖아?" 가차 없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실제로 문집을 파는것뿐이긴 하죠. - P102
유감입니다. 오레키 씨와 후쿠베 씨, 마야카 씨를 볼 낯이없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맡은 바를 다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런가요.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도가이토 선배는 기운을 북돋워 주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기면 다시 와. 힘이 돼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작에 힘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 P103
가호 씨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는 면이 조금 있거든요. "점을 치신다는 건...……….. "응, 점술 연구회." "다른 부원분들은 어떻게 되셨나요?" 그렇게 묻자 가호 씨는 약간 비뚜름하게 웃었습니다. "점술 연구회, 나 혼자야." "네? 뜻밖이네요. 인기 있을 것 같은데요.‘ "주술 동호회가 따로 있거든. 그쪽은 인기 있어." - P105
바닥에 놓은 종이 쇼핑백에서 그런 물건들을 꺼내던 가호씨가 느닷없이 동작을 멈췄습니다. "아, 타로는 안 된다." - P105
가호 씨는 제 표정을 슬쩍 살폈습니다. "・・・・・ 그러게. 에루는 이런 거 좋아할지도 모르겠네. 잠깐볼래?" 쇼핑백에서 카드가 나왔습니다. 가호 씨가 건네준 카드를언뜻 봤다가 저는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카드에는 꽤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 P106
주몬지가에는 자식이 둘 있지만, 가미 고에 현재 다니는 사람은 주몬지 가호 씨뿐이고 이 도시에 주몬지 성을 쓰는 다른 집안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즉, 추측이기는 해도 여기 가미야마 고등학교에서 주몬지라고 하면 가호 씨입니다. 가호 씨의 이름을 사칭해 가호 씨의 물건을 훔치다니 참 이상합니다. 특이한 이야기입니다. - P107
메모장에서 찢어 낸 종이에 ‘축제가 끝나면 돌려 드릴게요‘라고 급히 갈겨썼습니다. ・・・・・・ 도둑치고는 정말 특이합니다. 저는 어쩐지 웃음이 났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가호 씨가웃으며 말했습니다. "표정이 밝아졌네." "그래요?" - P108
"뭔가 특별한 건가요?" 가호 씨는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내용은 다른 거랑 똑같아. 그렇지만 이게 그 카드랑 같이 놓여 있었거든. 맨 끝의 참가 단체 한마디 페이지가 펴진채." 참가 단체 한마디라면 이 안내 책자의 맨 마지막 코너입니다. 몇 페이지네 걸쳐 말 그대로 이번 축제에 참가하는 단체가 한 줄씩 홍보를 합니다. - P109
019-♣︎07
결승은 벨을 빨리 눌러 7점을 먼저 따는 사람이 이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승패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나는 어쨌든 내세울 게 데이터베이스라는 것밖에 없다. 어느 정도는 적극적으로 해야지. 안 그러면 아깝다. - P109
그렇지만 이제 그만 끝내자. 다음 문제는 내가 맞힌다! "・・・・・・ 그럼 다음 문제입니다. 가미야마 고등학교의 …………학교에 관한 문제인가. 정신 집중..…………. "학생회장의 풀 네임……………." 알기는 아는데, 잠깐. 함정 문제일 수도 있다. ‘풀 네임은이것인데 그럼 교장 선생님의 풀 네임은?‘이라고 문제를 꼬는 것은 흔한 수법이다. "・.....을 답해 주세요." - P110
상품은 우승자에게만 주었다. 시미즈 노리코 선배(묘한 지식을 묻는 문제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재미있을 것 같은 사람이다. 이름을 기억해 두자)가 받은 상품도포장지로 싸여 있기 때문에 뭔지 모르겠다. 뭐, 오기로 하는말이 아니라 정말 상품에는 전혀 관심 없었지만. - P111
"결승 시작하기 전에 하려던 재미있는 이야기 하다 말았잖냐."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잊어버릴 뻔했다. 나는 듣고 싶은 눈치를 보이지 않았으니 요컨대 다니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리라 들어서 손해 볼 것도 없으니 들어 주자. "그랬지. 바둑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다니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둑돌 몇 개를 도둑맞았거든." - P112
"응. 그럼 이만.‘ "아니, 잠깐." 움직이려던 발을 멈추었다. 다니는 묘하게 굳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후쿠베. 너 이 뒤로도 대회 같은 거 나갈 생각이지?" "......그런데?" 고개를 끄덕이자 다니는 내 쪽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너한테 질 순 없지. 무승부로 끝내는 건 찝찝해. 승부를내자고" - P114
승부라 생각도 해 본 적 없는데. 다니가 찝찝하건 말건 나는 알 바 아니고. 나는 아닌 게 아니라 온갖 것을 즐긴다.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재미있어서 호타로가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볼 만큼. 하지만 그것이 개인적 체험이라는 부분을 지금까지 소중히여겨 왔다. - P115
2-3. 020~022 또 하나늬 폭풍
020-◆04
(전략). "그거 봐. 역시 너무 수수한 게 패인이라니까. 아무도 안오잖아.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분위기를 바꿔 보자. 캐릭터를 내세워서 말이지.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포스터 그리는 정도는 별로 귀찮을 것도 없고." 내가 보기에는 고치 선배가 말하는 것만큼 손님이 없는 것같지 않았다. 문집도 그런대로 팔리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봐줘도 북적거린다고 할 정도가 아닌 것은 사실이었다. - P116
"응, 그렇지만 이런 분위기로 가자고 다 같이 결정한 거고......." "말이 그렇지, 다수결로 정한 것도 아니잖아. 애초에 이 문집이 이상해. 리뷰 백 편이라니 너무 딱딱하다고. 이런 걸 누가 읽는다는 거야? 패러디 같은 걸 내자고 했잖아." 패러디를 그리고 싶은 만연부원은 누구나 출품해도 된다고 되어 있었다. - P118
그러면서 주위에 동의를 구한다. 추종자들 중 누가 모깃소리로 "맞아요"라고 했다. 예스맨 노릇을 할 생각이면 최소한좀 더 분명한 태도로 하면 좋겠다. 그나저나 의미가 없나. 으음. 몇몇 부원이 매대 앞 의자에 앉은 내게 시선을 돌렸다. ・・・・・・ 고치 선배에게 대놓고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는 사람은나뿐인 게 맞지만, 그렇다고 왜 나를 보나. - P119
"소용없다느니, 의미가 없다느니, 그게 무슨 뜻이죠. 선배?" 선배는 역시 반론을 할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때까지 다가서 있던 유아사 부장에게 서슴없이 등을 돌리고 나를 향하더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웃었다. "재미있다 없다 같은 걸 말하는 게 소용없다. 말 그대로의뜻인데 이해가 안가?" - P120
나는 침을 삼켰다. "확인할 게 있는데요. 선배는 주관이란 말을 하시는 거죠?" "그래." "선배는 ‘주관에 따라 어떤 작품이나 명작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어떤 것을 나쁜 작품이라고 말하는 건 무의미한 걸 넘어서 심지어 유해하다‘라고 하시는 거죠?" 고치 선배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말이야. - P122
"주관에 따라 어떤 작품도 명작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이걸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건 무의미한 걸 넘어서 심지어 유해하다‘란 말이 되지 않나요?"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노라고 한다면 선배는자신의 의견을 좀 더 온건하게 고쳐 말해야 할 것이다. 내 생각은 그랬다. 그런데 결정적인 모순을 지적한 줄 알았건만, 고치 선배의 웃음은 거기서 더욱 뚜렷해졌다. "맞아." "네?" - P123
전부터 고치 선배에게 어딘지 모르게 될 대로 되라는 듯한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만연의 중심인물 중 한 명으로서 자기를 따르는 부원이 여럿 있는데도, 어쩐지 자신을 따르는 사람조차 업신여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 그런 느낌의 밑바닥에 흐르는 저류를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치 선배는 이런사람이구나. 질까 보냐. ・・・・・・ 그런 것에 질까 보냐. - P124
나는, 그리고 아마도 만연부원 대다수는, 만화가 표현 도구로서 절대적인 결함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고치 선배도 만화는 만화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명작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선배는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난 만화에 명작이나 걸작이 없단 말 안 했는데. "한 거랑 뭐가 다르죠? 주관에 따라 어떤 거든 쓰레기가될 수 있다고 했잖아요." - P125
선배의 눈이 조금 전보다 날카로워졌다. 나도 아마 선배를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심호흡을 하고 싶었다. 비장의 카드를 내놓을 때라고 생각했다. 선배를 부정하기 위해 내 보물을 꺼내야 한다고. 선배를부정하지 않으면 내 보물들이 부정당할 것이라고.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 P126
나는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선배처럼 말하면 제가 그린 만화도 다른 모든 만화랑 가치가 똑같다는 뜻이 되는데, 그건 그렇지 않아요. 어떤 의미로든 제 만화랑 절대 견줄 수 없는 작품이 존재해요. 그것도아무런 도태도 안 거친 상태에서. 예를 들어 선배, 작년에 우리 학교 축제에서 판매했던 『저녁에는 송장이』란 만화, 읽으셨나요?" 어느새 선배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없었다. - P127
"뭐야, 이게." 동아리실이 거의 만원이었다. 조금 전까지 만연부원밖에없었는데 지금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어, 어째서? 언제부터? 어느새 내가 펙펙거리는 것도 다 봤단 말이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손님들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시선을피했다. 그러고는 변명처럼 줄 뒤에 서서 문집 『제아미즈』를사 들고 갔다. 한 묶음에 열 부씩, 두 묶음 놓아두었던 『제아미즈』가 거의 없어졌다. - P128
022-♠︎06
시계를 보니 조금 있으면 5시다. 이제 곧 첫째 날이 끝난다. 교내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고전부원은 이때 모두 지학 교실에 모여 있었다. 지탄다와 사토시는 중간에 가끔 얼굴을 비쳤지만, 이바라는 아침에 얼핏 본 이후 처음 보는 것이다. 따로 할 일이 없는 시간이 잔뜩 있었던지라 나는 <빙과>의대부분을 상자 속에 감춰 놓았다. - P130
사토시가 주먹을 쳐들었다. "좋아! 내일도 열심히 해 볼까. 오전에 조리 연구회에서하는 콘테스트가 있거든." 들뜬 표정의 사토시에게 옆에서 이바라가 무심코 말했다. "세 명이 한 팀인 그거?" 사토시의 웃는 얼굴이 굳었다. "엥? 세 명이 한 팀? 정말?" 허둥지둥 안내 책자를 꺼낸다. 총무 위원이 이벤트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다니 안 될 일이군. - P131
솔직히 지탄다에게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지탄다의 능력을 기대하지 않았다기보다. 이미 시작된 이벤트에서 특별사례를 인정해 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고개를 들지 않던 지탄다가 생각난 게 있는지 문득 얼굴을들었다. "아,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게 있었어요." 신경 쓰인다고? 그 말을 듣고 전율했다. 이 좋은 집안 아가씨가 ‘신경 쓰여요‘라고 하면 돌이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 P132
"그래서 호타로, 전적은 어때?" 사토시가 물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체중을 실었다. "열세 부. 제법 괜찮은 출발이라 해도 될 숫자다. 스물네 부를 판매한다는 처음 예정을 생각하면 첫날 열세 부를 판 것은 쾌거라 할 수 있으리라. 어차피 결전의 장은 토요일인 셋째 날이겠다. - P133
남은 날짜는 이틀. 대책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생각나는게 아니다. 폭발적으로 무슨 일이 생길 것을 기대할 것인가. 아니, 그것은 기적을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나. 벨이 울렸다.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 첫날 일정이 끝났다.
[남은 부수 177부]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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