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직장, 다른 대우

한편, 남성들과 함께 근무하는 일터에서는 특정 직군에만 여성 노동자를 배치하기도 한다. - P91

비정규직을 2년 이상 채용할 경우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기업은 이들을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과 통합하기보다 비정규직이 담당하던 업무를 다른 직군으로 분리해 차등적 임금 및 승진체계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관리하고자 했다.⁸ - P91

8 조순경, <여성 비정규직의 분리직군 무기계약직 전환과 차별의논리>, 《한국여성학》 24(3), 한국여성학회, 2008, 5~40쪽. - P203

계약기간 역시 성별에 따라 분리된다. 경리사무와 같이여성들의 직무는 무기계약직 혹은 계약직 일자리로 활용된다. - P92

취약한 지위와 직장 내 괴롭힘


정규직 사원이 대부분인 직장에서 정규직이 아닌 ‘여성‘노동자라는 취약한 지위는 직장 내 괴롭힘의 토대가 되기도한다. 하경은 회사 내에서 승진이 불가능했지만 "보수도 어느 정도 괜찮았고" "계속 다니면 잘리지도 않"을 것이므로 만족했다. - P93

그러나 승진제도가 존재하지 않아 여성 (고졸) 노동자에 대한 성과평가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황에서 하경의 사수는 진급을 앞두고 하경의 상황을악용했다.  - P94

승진도 성과평가도 없는 직군이라는 여성들의 직장 내지위는 중심부 노동자들의 책임 전가뿐만 아니라 괴롭힘에대한 고용주(사용자)의 방관을 낳는다. - P97

대기업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당시 정규직 노동자에의해 스토킹을 경험한 세라 역시 회사에 해당 문제를 알렸지만 정작 회사를 떠나게 된 건 그녀 자신이었다. - P98

회사를 떠나도 반복되는 불안정

계약기간, 직장 내 괴롭힘, 과도한 노동강도 등으로 인해노동이 불안정한 상황은 새로운 일자리를 탐색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유망한 일‘에 대한 정보 부족은 이들의 탐색을 투자로 전환하지 못한다. - P98

처음 계약 만료로 퇴사했을 당시 명신은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이제 진짜 뭘 해먹고 살아야 되지?" 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해 다른 방송국에 파견직으로 다시 입사했다. - P99

하경 또한 더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로 중견기업의 경리사무 일을 그만두었지만, 그 이후 더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 하경은 "그저 그런 회사에서" "전전하고 싶지 않아"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기술은 웹디자인, 영상편집과 프로그래밍이었다. - P100

이처럼 청년여성들은 비전이 없는 현재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새로운 직업 찾기를 갈망하지만 이들의 노동이력이 보여주는 결과는 이러한 탐색이 결국 유사한 불안정 노동시장으로 이동하는 데 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 P102

 게다가 ‘유망하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직업을 얻기 위해서는 기술 습득을 위한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는 금전적 부담이 따른다. 정부가 지원하는 교육프로그램도 있지만, 교육상품을 구매하는 비용뿐만 아니라교육을 받는 기간 동안 임금노동이 제한된다는 사실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청년여성들에게 그 자체로 위험부담이된다.  - P102

교육과 시험으로 장기화되는 취업 준비

(전략). 신입사원을 고용하여직무교육을 실시하던 과거와 달리 각 기업들은 추가적인 비용을 들여 직무교육을 할 필요가 없는 ‘이미 완성된 노동자‘를 채용하고자 하기에 청년들은 교육상품을 구매하여 기업이 원하는 능력을 미리 습득해야 한다. - P103

청년들은 학과 공부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다양한 외부활동을 병행하고, 각종 자격증이나 수상실적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전시해야 한다. - P104

게다가 노동시장에 만연한 성차별은 시험이 가지고 있는공정성을 부각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4장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 P106

한편, 고용안정성을 택하기보다는 우선 대학원에 진학하여 추가적인 교육자본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노동시장 진입을유예하는 청년여성들도 있다. 대학원 진학이라는 결정은 원하는 공부를 더 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선택의 배경에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가 어려운 사회적 현실이 자리한다. - P107

사실상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하더라도 취직이 보장되지않는 사회에서 이들의 취업 경쟁은 해소된 것이라기보다 유예된 것에 가깝다.  - P107

자발과 비자발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이직과 전직

많은 청년이 ‘정규직‘을 원한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틀리다. 우리는 ‘좋은 회사‘의 정규직을 원한다. - P108

기업별 노조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에서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꾸려 집단주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그래서 요즘 청년들은 이직이라는 개인적 해결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 P109

이러한 상황에서 외부노동시장에 위치한 노동자들은 외부 노동시장 내에서 반복적으로 이직을 수행하여 자신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자 한다. - P109

(전략). 입사를 결정하던 당시 재윤은 급여가 낮아도 숙련된 디자이너와 함께 근무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해당 회사를 선택했는데 막상 입사를 하고 보니 디자인 전공자는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매일 한 시간씩 야근을 해야 했고, 포괄임금제 적용으로 수당도 받지 못했다. 월급은 160만 원에 불과했다. 재윤은 결국 퇴사를 결정했다. - P110

재윤은 한 달도 안되어 바로 다시 일자리를 구했는데, 이번에는 취업정보 사이트를 운영하는 회사였다. 급여는 이전직장과 동일했다. 업무량도 많지 않고 야근도 없어서 일은 수월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회사는 디자이너를 11개월 단기계약직으로만 고용했다. - P110

그 후 재윤은 방송국에서 프리랜서로 근무를 시작했다.
1년에 2400만 원으로 총 2년을 일하는 조건이었다. 방송국은 스물네 시간 방송이 송출되어야 했기에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의 교대근무제도를 운영했다.*


* 이러한 프리랜서 고용은 불법이다. 프리랜서는 특정 회사에 소속되지 않고 일을 완수할 것을 약속하여 일의 결과에 대해 보수를 지급하는 계약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근로감독을 받을 수 없다. 방송국에서 특정한 시간에 다른 노동자의 지시를 받으며 일한 재윤의 경우근로감독이 존재했다고 판단되므로 이는 불법이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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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국 문화가 우수한 이유

세계적으로 한류를 이끄는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과거로부터 우리나라는 주변 국가인 일본이나 중국에 한류를 이끌며 큰 영향을 끼쳐왔다. 지금은 노래와 춤, 드라마와 스포츠 등 한류로 인해 한글, 한복, 한식 등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 P106

1. 한류의 시작

우리나라 최초의 한류는 백제의 불교, 건축, 예술의 전파로 일본 아스카 문화를 형성해 준 구로다(큰나라)이다. - P107

 최근 전 세계를 강타한 K문화의 한류 효시는 1997년 중국에 수출되어 1억 5천만이시청한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로서, 당시 중국인들이 한국에 관광오면 주인공인 대발이네 집에 갔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 수출된 ‘겨울연가‘로 욘사마를 부르며 많은 사람들이 남이섬을 방문했다. 또 ‘대장금‘이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에 인기몰이(이란 시청률 90%, 60개국 수출)를 하였다. - P107

왜 외국인들은 한국 드라마를 좋아할까? 이유 중 하나는 외국인들은 좌뇌적 특징을 갖은 것에 비해 한국인은 우뇌적 사고가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P107

또 다른 한류 중 하나는 인터넷의 보급으로 형성된 한국인들의 인터넷강국 이미지이다. 일본과 비교하더라도 일본은 모든 것이 꼼꼼하고 정밀한 매뉴얼에 의해 일하기에 인터넷 활용을 제대로 못하는데 비해, (후략). - P108

감이 있다는 것은 공간 지각력이 뛰어나다는 뜻으로 공간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여 총체적 그림을 단 한 번에 그리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 P108

2. 흥과 신명

우리나라 사람들은 에너지가 한번 폭발하면 자신도 놀라워하고 세계가 놀란다. 이 에너지의 기운을 신기, 신명이라고 부른다. 2002년 월드컵 축구 4강 신화가 좋은 예이다. - P109

우리나라 술 소비를 보아도 맥주 1인당 83병(500ml 기준), 소주 70병(360ml 기준)으로 술 소비량 세계 15위에 속한다. - P110

3. 종교심

우리나라 사람은 좌뇌(이성, 언어)보다 우뇌(감각, 직관)가 더 발달하였다. 이는 우리말에서도 좌뇌가 담당하는 명사보다 우뇌가 담당하는 형용사가 발달한 데서 알 수 있다. (중략). 우리나라 사람들은 논리와 토론에 약하다. 상대의 말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보다 감정적으로 제멋대로 해석해 마음대로 말하길 좋아한다. - P110

4. 문화력

(중략). 문자는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체계를 만들어주고 바르고 빠른 판단과 행동을 하게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가 인정해 주고 있다. - P111

또 400여년의 역사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은 세계에서 분량이 가장 많은 최대의 역사 기록물이다. - P111

5. 결론

(전략). 원래 한류라는 용어는 1990년대 후반 중국에서 한국 문화의 열풍을뜻하는 말로 처음 사용되어 이후 K팝, K드라마, K푸드, K뷰티, K패션, K웹툰, K게임 등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알리고 세계 문화 속에서 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였다.  - P113

Ⅱ. 사상적 관점으로 본 한국인
(무속 신앙이 내재된 종교심)


04
질서와 예의를 가르치는 유교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교가 끼친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 P141

1. 유교 사상

유교 사상은 중국 고대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맹자, 순자를 거치면서 정립된 사상으로, 귀신보다는 인간을, 죽음보다는 삶을 중시하여 내세보다 살아가는 사회 현실을 중시한 사상이다. - P142

2. 유교 사상의 형성

조선시대 인륜의 실천윤리를 강조한 지배 세력은 유교 경전을 학습하여, 서울에 성균관, 지방에 향교와 서원, 시골에 서당을 두어 교육하였다. 왕자의 유학 공부와 왕의 유학 강의, 집현전, 규장각, 독서당 설치와 과거 시험 등으로 유교 교육이 중요해졌다. - P142

첫째, 정치적으로는 천과 민과 도덕을 강조하였다. (중략). 이때 천의 의사표시는 민의 의사 곧 여론으로 ‘하늘이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민이 듣는 것과 보는 것이다‘라고 표현하였다.  - P143

둘째, 사회적으로 효와 충과 예의 관습을 강조하였다. - P143

3. 성리학의 영향

유교는 조선 왕조의 사상적 근간이고 국가 통치 이념이었던 성리학에의해 생각과 생활을 결정지었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집대성한 유학의 철학적 체계로 이과 기라는 우주론적 개념을 통해 만물의 원리를 설명하고 인간의 도덕적 수양과 사회 윤리를 강조한 학문이다. - P144

 정치적으로 중앙에서는 왕권과 신권의 견제가 법과 제도로 정비되었고 지방에서는 향촌이 마을 공동체 윤리를 강화시키고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 P144

그러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지나 친 성리학의 원론 중심 정치로 말미암아 동인과 서인의 두 파로 나누어져 4색 당파를 형성하게 되었고, 사회적으로 백성을 잘살게 하기보다 명분과 원칙만 중시하다가 피폐한 현실을 자초하고, 외교적으로 소중화 의식과 명의 멸망이후 주자학 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에 빠져 있다가 외세의 침략에 무너지게 되었다. - P145

4. 결국

중국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교는 내세보다 현실의 삶을 중시하여 종교라기 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생활 규범과 인간관계에서의 질서를 강조하였다. - P145

4. 결론

(전략).
그래서 현대에도 한국인의 삶 속에서 가족중심주의의 남성중심 가부장적 가치관과 효와 예절 중심의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이 남아 있고, 특히 유교적 과거제의 전통으로 입시 중심의 교육과 서열 중심의 조직 문화, 기술과 윤리를 함께 중시하는 장인 정신이 강조되고 있다.  - P146

05

한국인이 만든 새로운 사상, 민족 종교

우리나라가 주체적으로 만든 종교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국인들은 종교심이 강한 민족이다. (중략). 특히 일제시대 자유를 빼앗기고 억압받던 상황에서 나라의 독립과 국민적 통합과 후천개벽의 개혁을 바라는 종교가 많이 만들어졌다. 한국인의 깊은 종교심으로 만들어진 민족 종교를 알아보고자 한다. - P147

1. 동학

동학이 발생했던 조선 후기의 정세는 오랜 세도정치로 인해 양반들의 수탈과 착취로 농민의 삶이 피폐해졌고, 결정적으로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과중한 세금과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서구 열강과 일본의 경제적 침탈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 P148

동학의 핵심 교리는 인내천(人乃天)사상이다. - P148

2. 천도교

천도교는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한 후 종교적 기반을 중심으로 재편성한 결과, 동학 3대 교주 손병희가 동학의 사상적 틀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동학을 서학과 대등한 종교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에서 시작되었다. 천도교는 ‘하늘의 도를 믿는다‘는 뜻에서 동학의 인내천, 시천주, 후천개벽, 경천애인 사상을 계승해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민족의 자주적 발전을 강조한 종교이다. - P149

천도교는 일제시대 독립 운동 선두에 서서 3.1운동의 주도 세력(33인중 15명 참여)이 되어 독립선언서부터 독립 만세 운동까지 지도하였고, 이후 천도교 청년당 등을 조직하여 독립 운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 P150

3. 증산교와 대순진리회

(전략), 1909년 강증산이 죽자 그의 제자들에 의해 조직화되었다. 증산교의 교리는 1) 새로운 이상 세계가열릴 것을 예언해 이를 준비하기 위한 도덕적, 사회적 실천을 강조한 후천개벽 사상, 2) 강증산이 선천의 모든 부조리를 청산하고 후천 시대의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 인간과 자연과 신이 조화롭게 연결된 이상적 질서의식인 삼계 통합의 천지공사 사상, 3) 천지와 부모와 형제와 이웃에게은혜를 갚아야 하는 보은 사상, 4) 강증산을 옥황상제로 숭배하고 그를 통해 천지의 이치를 깨닫고 스스로 도를 깨우쳐 자신의 삶을 구원해야한다는 믿음의 상제 구원 신앙이다 - P150

이러한 증산교는 여러 분파로 나누어져 다양한 교단을 이루었는데 지금의 대순진리회와 증산도 등 현대 한국 신흥 종교의 주요 흐름을 형성하였다. 대순진리회는 1969년 조철제가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증산의 후천개벽 사상을 기반으로 새롭게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독립적으로 창시한 종교이다. - P151

4. 대종교

대종교는 1900년 초 일제의 침탈과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한국 고유의 신앙 체계와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단군을 중심으로 고대 한국의신화와 전통을 되살려 민족의 독립을 위한 정신적 무기를 마련하고자, 1909년 나철과 오기호에 의해 민족종교로 탄생하였다. - P152

현재는 약 3,700명의 신도에 불과하나 중광절, 어천절, 가경절, 개천절을 기념하는 민족 종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 P152

5. 원불교

원불교는 1916년 26세에 깊은 깨달음을 얻은 소태산 박중빈이 1924년 불법연구회를 설립해 일원상(一圓相)사상을 체계화하고 1935년 원불교로 교단 이름을 바꾸면서 조직화하였다.  - P153

6. 결론

우리나라 민족 종교를 창시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 P153

이들의 공통점을 살펴 보면, 1) 하늘 사상과 자연 숭배 사상이다. 하늘을 신성하게 여기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시했다. 2) 새 시대를 여는변화의 후천개벽 사상이다. (중략). 3) 인간 존중과 평등을 강조한 민중 사상이다. 당시 신분 차별에 대해 거부하고 평등을 강조해 민중이 스스로 주체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4) (중략). 유교의 조상숭배와 충효 사상, 불교의 윤회와 깨달음 강조, 도교의 자연과 조화와 신선 사상, 기독교의 천국과 사랑 실천 사상이 혼재하였다. 5) 사회 실천 운동이다. (후략). - P154

한국인들은 영성과 사회 개혁 의지가 강해 과거 우리의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의 교리를 융합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고, 또 이를 잘 실천함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개혁할 줄 알았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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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계자연유산

2007년에 우리나라 첫 번째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은 최상의 자연 현상, 뛰어난 자연미와 미학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으로서 지형 발전상의 지질학적 주요 진행 과정과 특징을 포함해 지구역사상 주요 단계를 입증하는 대표적 사례로 등재되었다. - P81

2021년에 등재된 한국의 갯벌은 과학이나 보존 관점에서 보편적 가치가 탁월하고 생물학적 다양성의 현장 보존을 위해 가장 중요하고 의미가 큰 자연 서식지로 등재되었다. - P82

6. 결론

세계문화유산에 대하여 영국의 건축가 존 러스킨은 ‘우리는 조상의 유산을 단순히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빌려온 것이다‘라고 하여 문화유산이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후손에게 되돌려 줘야할 책임 있는 자산이며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하였다. 세계문화유산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 완전성을 기준으로 등재된다. - P82

우리나라의 세계문화유산의 특징은 1) 오랜 역사와 고유한 문화 형성의 산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를 아우르는 유산이다. 2)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연과의 조화를 보여준다. 불교 산사에서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를 보여주고, 한국의 서원에서 유교적 자연관의 반영을 보여주어, 한국의 전통 문화가 자연과 함께 성장하고 상호작용하였음을 알려준다. 3) 한옥과 궁궐 건축, 불교 사찰 등전통 건축의 특징과 기술을 잘 보여준다. 이는 자연과의 조화, 목재를 이용한 건축 기법, 기하학적 아름다움에서 나타난다. 4) 무형문화유산, 역사마을, 역사유적지구에서 한국인의 정서적 가치관과 한국 고유의 생활양식과 공동체 의식이 반영된 문화적 가치를 볼 수 있다. - P83

08

100년 전부터 바뀌기 시작한 한국인의 삶

우리나라의 전통 생활은 근대화되면서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나라의 생활 방식은 외세 침략으로 강제적으로 바뀌면서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과 변혁시키려는 의지가 서로 부딪히며 변화되어 갔다.  - P84

1. 생활의 변화

19세기 후반부터 한양과 개항장을 중심으로 외국 음식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려 서둘러 군대를 파견하면서 군대와 함께 중국 상인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 P85

 양식도 19세기 말 독일 여인에의해 정동 이화여고 자리에서 경영하는 손탁호텔에서 팔리기 시작해, 종로 기독교청년회관과 백화점 양식부에서 스테이크와 돈가스(서양의 고기 요리를 일본식으로 바꾼 음식) 메뉴로 한 경양식집이 유행하였다. 이후에는 경양식집에서 돈가스, 비후가스, 오므라이스 등을 팔며 외식 문화를 선도하기도 하였다. - P85

2. 식생활의 변화

우리의 전통 숙박 시설인 주막은 한 잔 술에 함께 친구가 되는 사랑방같은 곳으로 누구나 상하 구분없이 한 방에서 잠을 자고 한 솥에서 끓인 국밥을 먹고 삶의 피곤을 함께 나누던 곳이었는데, 일제시대를 거치며개인의 사생활이 중시되어 점차 여관과 모텔, 식당으로 변하였다. - P86

 조선시대 외국인이 소개한 한국인의 식습관에 대한 기록에 보면 조선 사람들은 2,3인분의 밥을 먹는 대식가로서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많이 먹고 키도 컸다고 한다. - P86

3. 의식의 변화

(전략). 또 농사를 지으며일출과 일몰에 따라 계절 중심으로 지내던 시간관념이 서양의 기계와 근대적 시간표가 도입되면서 정해진 시간에 따라 활동하고, 시간 엄수의개념이 보급되어 서구식 생활 습관이 나타나게 되었다. - P87

1950년대 6.25전쟁이 끝나고, 60, 70년대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일자리를 찾는 대이동이 일어나 전통적 대가족제에서 핵가족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고, 특히 젊은 여성인 공순이들이 도시의의류와 전자제품 공장에서 일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돕는 일꾼이 되었다. - P87

. 전통 시장과 5일장 중심의 소비에서 백화점과 대형 상점이 생기고, 미원과 해표, 라면 등의 간편식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 P88

4. 결론

막스 베버는 ‘근대화란 합리화 과정이며 전통적 가치에서 벗어나 이성과 과학에 기반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전통적 사고방식에서 합리적 사고로의 전환, 미신과 관습의 생활 습관에서 이성과 과학의 생활 습관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 P88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19세기 후반 자발적인 근대화를 실패하고 외세의 침투에 의한 강제적 근대화를 맞이하여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침략을 위해 근대 문물이 수용되었고 민족말살정책을 위한 근대 교육이 도입되었다. - P89

외세에 의한 근대화 과정에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한 미국식 기독교와선진 문물에 익숙해졌고, 6.25전쟁 후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미국의 지원과 협력 속에 미국식 생활 방식과 의식 개선이 이루어졌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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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합숙의 제일 큰 목적은 작품 촬영이라기보다 남녀 간의 교류, 즉 동아리 내부 미팅이죠. (중략). 다만 방이 모자라서 부원이 전부 참가할 수는 없나 보더라고요. (중략). 그런 이벤트에 불청객을 끼워줄 여유는 없다는 뜻이에요." - P36

"하지만 최근에 상황이 달라졌어요."
(중략).
"합숙 이 주 전에 참가하기로 했던 부원 대부분이 불참하겠다는 뜻을 밝혔어요. 실은 이 이야기를 해준 제 친구도 그중 하나예요." - P36

"협박장이 왔대요."
뜸을 들이듯이 겐자키 씨가 컵에 입을 댔다. - P37

"예, 자살 동기와 합숙의 인과관계는 불명확하지만 몇몇부원의 증언에 따르면 작년에 촬영한 심령 영상에 사람 얼굴이 찍혔는데, 영연이 연출한 건 아니라나."
"그러니까 지벌이나 저주를 받아서 그랬다고요?" - P38

"예. 신도 씨가 협박장을 보자마자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다그쳤대요. (중략). 그의 태도가 어쩐지 찜찜해서 친구는 숨겨서는 안될 일이라고 판단했어요. (중략). 그래서 눈덩이가 커지듯이 참가를 취소하는 부원이 늘어난 거고요." - P39

"미팅을 주선하겠다는 명분으로 졸업생에게 초대를 받았을 텐데 여자 참가자가 없으면 말이 안 되니까 신도 씨도 고심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말인데요. 저랑 같이 참가하지 않으시겠어요?" - P40

"잠깐만요. 아까 거래라고 하셨죠? 이래서는 저희만 득을보는데요. 애당초 왜 저희한테 이런 이야기를 꺼내신 건가요?"
그때 살짝 벌어진 겐자키 씨의 입술 사이로 송곳니 같은 것이 보인 것 같았다. (중략).
"이유를 묻지 말 것. 그게 이번 거래의 교환 조건이에요." - P41

002


자담장

1

(전략).
산속의 폐업한 호텔, 방치된 지 이십 년 가까이 지났고 주변에 다른 건물도 없으므로 이제 이 지역 사람들도 어지간해서는 걸음하지 않는다. - P43

약 이십여 년에 걸친 하마사카의 연구 인생. 그 모든 것을바친 대학 연구실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 (중략).
하마사카에게 남은 사명은 단 하나, 이 성과를 세상에 알리는 것뿐이다. - P44

잘 봐라! 어제 우리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 테니까!"
세상을 구하는 전사라도 된 기분일까. 하마사카는 싸늘한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일본에서 입학 커트라인이 제일 높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냉혹한 현실을 이겨내지 못하고 퇴사했다. - P45

2


합숙 당일.
아케치 씨와 나, 그리고 겐자키 씨는 이른 아침에 학교 근처 역에서 만나 전철을 탔다.
합숙 장소인 펜션은 S현 사베아 호수 근처에 있으므로 참가자들은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 집합하기로 했다. - P46

언어나 사건은 딱히 걱정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꺼림칙한 협박장보다 조증에 걸린 것처럼 들뜬 아케치 씨를 다른 젊은이들 사이에 섞어놓는 게 제일 걱정이다. - P47

"그건 그렇고 펜션을 대여해주다니 영연에는 배포가 큰 졸업생이 있나 보네요."
내 물음에 겐자키 씨가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지만 부모님이 영상 제작 회사 사장님이라나 봐."
겐자키 씨는 이제 내게 존댓말을 쓰지 않고 친근한 말투로대한다. - P48

문득 겐자키 씨가 나를 응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유는 바로 알았다. 내 왼쪽 관자놀이에 남은 오래된 흉터를 보고 있는 것이다. 사오 센티미터쯤 찢어진 상처라 꽤 눈에 띈다. 머리카락으로 덮어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흐트러져서 눈에 들어온 거겠지. - P49

3

"겐자키 히루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는데드디어 기억이 났어. 예전에 경찰서에 명함을 돌리러 갔는데 내가 신코 대학에 다니는 걸 알고 어떤 형사님이 그 이름을 꺼내더라고. 빼어난 추리력을 발휘해 경찰조차 애를 먹은 갖가지 어려운 사건들을 해결로 이끈 소녀 탐정이라는군." - P51

"나도 흥미가 생겨서 다누마 씨에게 알아봐달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사람 본가는 요코하마에서 유서가 깊은 명문가인가 봐. 그 사람이 사건에 관여할 때마다 보도가 엄중히 제한된대. 가문에 먹칠을 하는 짓이다, 그건가." - P51

하지만 기묘한 이야기다. 그 정도 실력과 실적을 가진 그녀가 왜 일개 대학교 동아리에서 벌어진 협박장 소동에 일일이 흥미를 보일까. - P52

4

환승역에서 일찌감치 점심을 먹은 후 JR에서 민영 전철로 갈아타고 삼십 분을 더 갔다.  - P51

"오오, 신도, 이번에 어려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상대는 딱딱한 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이 영화 연구부 부장 신도인가. (중략).
"이런 예외를 허용하면 안 되지만, 겐자키 씨의 제안도 있고 상황도 상황이다 보니. 뭐, 즐겁게 지내다 가자."
말투를 들어보니 너 따위는 부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본심인 듯했다 - P54

이어서 우리도 자기소개를 했다. 겐자키 씨가 이름을 말하자신도가 머리를 숙였다.
(중략).
아케치 씨를 대할 때와는 태도가 매우 다르다. 신도가 한학년 위인데도 존댓말을 쓴다. 고분고분한 그 태도를 겐자키씨는 물 흐르듯이 받아넘겼다.
"아니요, 저도 흥미가 있어서요." - P55

"안녕하세요, 신코 대학에서 오셨죠? 저는 펜션을 관리하는 간노 유이토라고 합니다."
"......작년에 일하던 분은 그만두셨습니까?"
신도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예. 저는 작년 십일월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다른 분들은다 타셨습니다."
간노는 상쾌한 웃음을 지으며 슬라이드도어를 열어주었다. - P56

(전략). 그런데 먼저 온 참가자들은 두 명이 마지막 줄에 자리를 잡고 한 명이 조수석에앉아 있었다. 마치 반발하는 자석처럼 가장 멀리 떨어진 좌석에 나누어 앉다니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신도도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없이 둘째 줄에 올라탔다. - P57

"평소에도 이렇게 차가 밀립니까?"
신도가 묻자 간노는 백미러로 시선을 보냈다.
"아니요, 평소에는 텅 비어 있어요. 다만 오늘과 내일은 근처 자연공원에서 야외 이벤트가 열리나 보더라고요."
(중략).
"사베아 록 페스티벌,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 아까 찾아보니까 꽤 유명한 밴드도 참가하는가 봐. 그렇지, 미후유?" - P59

"다카기 씨는 작년에도 합숙에 참가하셨나요?"
(중략).
"이 년 연속 참가하는 사람은 나랑 개뿐이야." - P59

내용을 확인하자 2박 3일의 일정 외에 펜션에서 각자가 묵을 방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중략).
재학생 참가자는 영화 연구부와 연극부, 불청객인 우리를 포함해 총 열 명. 방 배치에 공백이 눈에 띈다. 2층과 3층에 객실이 합쳐서 열여섯 개지만, 방 여섯 개에는 이름이 씌어 있지 않다. - P60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호시카와를 제외한 나머지여학생들은 조금도 들뜬 모습을 보이지 않아, 갈 곳을 잃은남자들의 목소리만이 차 안을 가득채웠다. - P61

간노가 차를 느릿느릿 몰면서 즐겁게 말했다.
"그럼 저희 펜션이 마음에 드실지도 모르겠네요."
(중략).
"아니요. 그런 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장님이 취미로수집하신 외국의 무기를 펜션에 잔뜩 장식해두셨어요. 검이나창 같은 걸 으리으리하게요.
" - P63

언덕을 금방 다 올라 탁 트인 장소가 나오자 방금 전에 본지붕이 달린 펜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중략).
"뭐랄까..…………. 훌륭한 건물이네요. 좀더 규모가 작지 않을까 상상했는데요."
시골의 초등학교 크기 정도는 되지 않을까. - P65

"빨간색 GT-R이라. 숲속에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머신이로군.‘
"가네미쓰 씨 차입니다. 이 펜션 주인의 아드님이에요." 간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치스럽죠?"
천만 엔은 됨직한 고급차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뒤에서 욕설이 들렸다. - P66

남자는 입을 열자마자 집요하게 트집 잡는 목소리로 말했다.
"늦었잖아. 아침부터 여자애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뚱땡이가 먼저 도착해서 토할 뻔했다고." - P67

"적당히 해, 데메. 우리가 다 부끄럽다."
충고한 사람은 피부가 볕에 잘 그을린 남자였다. - P67

"신코 대학교 후배 여러분, 만나서 반가워. 우리는 영연 선배는 아니지만 신코 대학교 졸업생이고 여기 앉은 나나미야의 친구야. (중략). 나는 다쓰나미 하루야라고 해. 저 시끄러운 녀석은 데메 도비오."
웬걸, 데메라는 물고기상 남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초대받은 손님이었다. - P68

"저 사람이 이곳 주인의 아들이로군."
"응. 삼사 년 전에 졸업한 영연 선배야. 지금도 후배들에게 무료로 펜션을 제공해주니까 아량이 넓지. 데메 씨도 태도가 저래서 오해받기 십상이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 마음에 둘것 없어."
신도는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빠른 말투로 해명했지만, 여자들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 P69

"배정된 방 중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방에는 그 사람들이묵고 있다는 뜻이군요."
우리 열 명이 묵을 방말고 숙박자의 이름이 비어 있는 방이 여섯 개 있다. 그중 세 개를 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 P70

간노가 프런트의 자물쇠를 열고 카드 다발을 꺼내 왔다.
"방의 카드키를 나누어드리겠습니다. (중략). 오토록이니까 외출하실 때는 방에 놔두고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프런트에 맡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후략)." - P71

"저쪽 엘리베이터는 작아서 기껏해야 네 명 정도밖에 못랍니다. 모두가 한꺼번에 올라가기는 어려우니 계단도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P71

(전략), 나는 여자 참가자들이 전부 미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은 미인밖에 못 본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 P73

문이 바깥쪽, 즉 복도 쪽으로 열려서 의외였다. 지금까지묵었던 비즈니스호텔은 대부분 안쪽으로 열렸던 것 같다. (중략).
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자 자동으로 자물쇠가 철컥 잠기는소리가 났다. (중략).
카드키를 벽의 홀더에 꽂아야 실내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것은 비즈니스호텔과 똑같다. - P74

발코니에서 밖을 내다보자 오른쪽에 각 방이 비스듬히 배치된 건물의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집합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나는 펜션을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 P75

엘리베이터 홀에는 객실말고도 문이 두 개 더 있었다. 문에 끼워진 명판에는 창고와 리넨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 호텔이나 병원 등에서 침구, 시트, 타월 등 섬유 제품을 보관하는 방. - P76

"이야. 병아리 탐정님이네. 나는 사회학부 3학년 구다마쓰다카코야. 잘 부탁해."
그렇게 말하며 자위대 대원처럼 이마에 손을 갖다 붙였다.
오랜만에 밝은 사람을 만난 것 같다. - P77

"경쟁자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중략).
"그 사람 집이 유명한 영상 제작 회사를 하거든. 그래서 그 사람한테 잘 보이면 직장을 소개해주기도 한대."
연줄로 취직자리를 얻을 생각인가. 말은 쉽지만 정말로 그에게 그런 권력이 있을까. - P78

"완전히 헛소문은 아니야. 실제로 작년에도 그 회사에 취직한 사람이 있다고. 펜션을 멋대로 사용하게 해주는 걸 보면 부모도 아들 하면 껌뻑 죽는 팔불출 아니겠어?" - P78

"방금 경쟁자 아니냐고 물어보셨잖아요. 구다마쓰 씨말고도 연줄로 취직하려는 사람이 또 있는 거죠?"
그러자 구다마쓰는 아아, 하고 업신여기는 듯한 시선을 홀구석으로 던졌다.
"쟤야 쟤. 부, 장."
오리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며 문 하나를 가리켰다. 신도 방이다. - P79

나는 중앙 구역으로 되돌아와서 2층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는 간노 말대로 상당히 비좁았다. (중략). 즉 합쳐서 260킬로그램. 성인 남성이 짐을 들고 타면 세 명이라도 아슬아슬하지 않을까. - P80

"저도 처음 봤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사장님은 중세 전투를 아주 좋아하시나보더라고요."
늘어놓은 무기들을 보니 확실히 장식성을 중시했다기보다개인적인 취향이 강하게 반영된 것 같았다. - P82

나는 신경쓰이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간노 씨, 자담장은 펜션치고는 좀 색다르네요. 용도가 불분명한 문도 있고, 방이 넓은데도 전부 싱글룸이고요. 종업원도 간노 씨 한 명뿐이잖아요." - P83

"저렇게 기분 나쁜 사람들이랑 사흘이나 같이 지내야 한다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부 아유무 책임이야." - P84

기분 나쁜 사람들이 졸업생 일행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역시 여자 참가자들은 졸업생들에 대한 첫인상이 아주 안좋았던 모양이다.
한편 신도는 변함없이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어물어물대꾸했다. - P85

아케치 씨가 신도에게 물었다.
"요 부근에서 촬영할 거야?"
"아니, 촬영 장소는 폐업한 호텔이야. 차로 조금만 가면돼."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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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의 회화에서 캔버스는 평평하지만 시각적으로는 어떤 ‘공간‘이 보입니다. 모더니즘에서는 이러한 공간을 ‘환영illusion‘이라고 보고, 환영을 제거해 ‘평면성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해야 장르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 P22

그림 밖으로 나와 사물이 된 미술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평면성이라는 모더니즘의 원리가 사각형의 캔버스 틀 안에서는 끝내 해결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환영마저도 없애려고 했던 시도가 바로 미니멀리즘입니다 - P26

도널드 저드는 통째로 된하나의 유일한 사물을 전시함으로써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해체하고 환영을 제거합니다. 그는 작품 <무제>에서 상자 모양의 단위체들을 층층이 쌓아 올렸는데, 사이의 움푹 빈 공간은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다는 그의 신념을 반영합니다.  - P27

또 다른 미니멀리즘 작가인 칼 안드레Carl Andre는 여러 장의 벽돌을 바닥에 깔아놓는 ‘바닥 조각‘을 선보였습니다. 그가 만든 시리즈는 〈등가〉 조각으로 불렸는데요, 그 이유는 높이, 질량, 부피가 모두 같은 ‘등가‘이기 때문입니다. - P27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이처럼 표준화된 산업 자재를 사용해 이것들을 ‘배열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줃략). 솔 르윗Sol LeWitt 또한 ‘정육면체를 사용해 반복성과 연속성을 만들어 내는데요, 반복적인 형태들은 끝이 보임에도 그 구조가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느껴집니다. - P30

미니멀리즘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작가가 작품의 중요 요소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작품을 만드는 주체가 중요하지 않다니, 의아할 수 있어요. - P30

관람자의 지각과 체험이 중요해진 이유

미니멀리즘을 첫 번째 키워드로 꼽은 이유는 미니멀리즘이 요즘 미술을 이해하는 데에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니멀리즘은 ‘관람객의 체험‘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P34

미니멀리즘 작가들 중에서도 지각의 차원을 강조한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는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고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전시장에 다면체를 놓아두었습니다. - P34

그런데 모더니즘 비평가인 마이클 프리드 Michael Fried는 로버트 모리스의 작품이 무대 위의 배우 같다는 점에서 ‘연극성theatricality‘을 지닌다고 비판했습니다. - P35

 프리드가 보기에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의 미술 원리에서 이탈한 ‘퇴보적‘ 미술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마이클 프리드의 분석은 비판이라기보다는 미니멀리즘의 특성을 잘 설명한 글로 읽힙니다. - P35

미니멀리즘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도널드 저드마저도 자신의 작품이 미니멀 아트로 규정되는 것에 반대했다고 하죠.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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