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 토요일. 한 척의 배가 파도를 가르며 미에현 이세만에 떠있는 작은 섬으로 가고 있었다. 정원열명의 관광용 낚싯배로, 검은 야구 모자를 옆으로 돌려 쓴 선장이 키를 잡고 있다. 승선한 승객은 네 명뿐이라 배 안은 충분히 여유로웠다. - P301
핑크색 폴로셔츠 위에 남색 재킷을 걸친 퉁퉁한 남자에게장단을 맞추듯 양복 남자도 살짝 얼굴을 누그러뜨렸지만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가느다란 눈에는 어딘가 냉혹함이 감돌았다. - P302
멋대로 좌석 밑 수납고를 들여다본 세번째 남자는 30대초반, 청 소재의 재킷과 와이드팬츠,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이고 양쪽 귓불에 디자인이 다른 피어스를 한 그는 들뜬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호화로운 크루저보다 이런 배로 섬에 건너가는 게 더 재미있지 않아요? 기껏해야 30분이면 도착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 P302
쇠락한 어촌 항구를 출발한지 벌써 20분이 지났다. 노란머리 남자가 일어나서 "저거다!" 하고 갑판에서 큰 소리로외치자 선실 안에 있던 세 사람도 나란히 밖으로 나왔다. 왼쪽 대각선 앞에 기복이 평탄한 작은 섬이 보였다. 퉁퉁한 남자가 그곳이 목적지가 맞는지 물어보려 하자..... - P303
"해적섬이라 별로 특이할 것 없어 보이는 섬이지만 이름이 낭만적이야. 와아, 바람이 기분 좋아!" - P303
"그래, 섬에서 유일한 건물처럼 보이는군." 두 중년 남자가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직심이라는 건 속칭이야." 바지 정장을 입은 여자가 노란 머리 남자 앞에서 아는 척했다. - P304
"사전 조사를 하신 거예요?" "어떤 섬인지도 모르는 곳에 태평하게 상륙할 수는 없잖아.." "으음, 초대한 사람의 정체도 모르는데요." - P304
퉁퉁한 남자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어깨를 으쓱했다. "불편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재미지 보고, 연락, 의논 같은시시한 굴레에서 벗어나서 후련한걸. 통신이 안 되는 건 현대 리조트가 갖춰야 할 훌륭한 조건일지도 몰라." - P305
"숙소가 바로 보이니까 안내받을 필요도 없네요. 저 길을쭉 따라 올라가면 되는 거죠?" 가장 젊은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렸다. 나머지 세 사람도 짐을 챙겨 상륙하자, 배는 곧바로 부두에서 떨어져 뱃머리를 돌렸다. - P305
바지 정장을 입은 여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섬의 첫인상을말했다. "리조트 호텔의 현관이니 이 주변은 말끔하게 정비하겠죠 아직 공사를 시작할 기미도 안 보이지만." - P306
노란 머리 남자가 콧노래를 부르며 완만한 비탈을 올라갔다. 그 뒤를 따르는 세 사람의 감상은 다들 비슷했다. ‘완전히 어린애로군.‘ ‘이런, 이상한 사람이 끼었네.‘ ‘얼마나 훌륭한 호텔에 묵게될지 모르겠지만 분명 저사람이 분위기를 망칠 거야.‘ - P306
그때 커다란 쌍여닫이문이 벌컥 열렸다. 마흔 안팎의 남녀로, 남자는 예복에 나비넥타이, 여자는 메이드 복장을 입고 깊숙이 고개를 숙이더니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입을 맞추어 엄숙하게 말했다. - P307
안에 들어가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화려할지 모른다는 기대도 배신당해, 누군가 "마치 회사의 휴양 시설 같다"는 말도 했지만 실제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1층 라운지에서 웰컴 드링크를 받고 환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지. ‘그‘가 메일에 적어 보낸 서프라이즈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겁니다." - P307
"다망한 우리를 이런 벽지에 불러들였으니 그에 합당한대접을 해줘야지. ‘그‘의 위엄이 걸린 문제야." "위엄?" 이시무라의 말을 듣고 긴 다리를 꼭 사오토메 유나가 중얼거렸다. - P308
"근본까지는.....… 비밀스럽고 재미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해요. 인터넷을 이용해 대부호가 된 현대의 전설이기도하고요. 연휴 초반 며칠을 할애해서 초대에 응한 건 ‘그‘를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남자든 여자든 분명 독특한사람이겠죠." - P308
"초대장을 프린트해 왔어요. 음, 마지막 부분을 볼까요? ‘완전히 새로운 재미로 가득한 해적섬은 실로 천국에 가장가까운 섬입니다.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서프라이즈가 기다립니다. 귀하가 영상 크리에이터로 다망한 나날을 보내고계시다는 점은 충분히 알지만 초대하고자 합니다. 부디 만사 제쳐놓고 방문해주십시오. 덴스케 올림." - P309
"그렇죠. 덴스케라고 하면 시대의 총아인데 그런 ‘그‘가초대해줬으니 허영심을 자극받았죠. ‘앞으로는 사업에도 관여하려 합니다. 때문에 비즈니스 세계에서 눈부시게 활약하고 계신 구로세님께서 제가 준비 중인 새로운 리조트를 보시고 유익한 조언을 해주신다면 영광입니다‘라고 하니……게다가 이시무라 선생님도 함께 가신다니 너무 매력적이었습니다." - P309
그들을 맞이한 나비넥타이 남자가 등을 꽂꽂이 편채로다가왔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정한 생김새였지만 감정을 일체 드러내지 않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뭔가 전부 체념한 사람의 표정 같기도 했다. - P310
초대 손님들은 크나큰 호기심과 함께실내로 들어갔다. ‘애개, 뭐야 언제 놀라게 해준다는 거야?‘ ‘생각보다 좁은데. 침대가 높아서 누워서도 바다가 보이는 게 유일한 장점이군.‘ ‘어라, 시시한데. 그냥 평범한 방이잖아.‘ - P310
"두 번째 배가 도착했나?" 소파에 몸을 깊이 묻고 있던 이시무라 마사토가 엉거주춤일어섰다. 그들이 타고 온 어선이 나머지 초대 손님들을 데려온 것이다. 그 배라면 한 번에 모두 태울 수도 있지만 사람들마다 항구에 도착하는 시간이 달라서 두 번 왕복하게 되었다. - P311
"일란성 쌍둥이니까 얼굴도 똑같아요. 실망했죠?" "그렇지 않아. 당신도 미남이야. 대도시원스럽고 눈매가 약간 거친 것도 좋아." 두 사람은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시무라와 구로세는 창가로 다가가 접안하는 배를 바라보았다. - P312
남편의 이름을 들와은 인재파견 회사 사장이 "근면해 보이는 이름이야, 고생할팔자인가" 하고 웃는 바람에 사오토메가 눈살을 찌푸렸다. - P312
"어떤 분들일까요? 다양한 분야에서 고른 것 같던데." 갑갑한 양복에서 캐주얼한 삼베 셔츠로 갈아입은 구로세는 두 손바닥을 문질러댔다. 요요도착한 사람은 남녀세명. 그중에 후타쓰기 톰과 똑같은얼굴은 없었다. - P313
초대 손님이 모인 라운지에서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두번째 배로 섬에 도착한 사람은 여자 둘에 남자 하나 사오토메 유나가 수첩에 메모를 하자 후타쓰기 톰이 들여다보려했다. - P313
복스러운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사람 가리지 않고 명함을내민 것은 에노키 도모요였다. 예순을 바라볼까 말까 하는나이로 그녀가 이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것은 틀림없다. 큼직한 붉은 테 안경 속에서 자그마한 눈동자를 쉴새없이 굴리고 있다. 오사카에서 고급 요양 시설을 운영한다는데, 회사 이름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 P314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말하는 우도 만사쿠는 초대 손님들 중에서 최연소인 스물아홉 살 언뜻 보면 자신의 운동선수 타입인데 등을 구부리고 작은 목소리로 웅얼웅얼 말했다. "내성적이라"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라고 자꾸 변명을했다. - P315
"자네 쌍둥이 동생은 어떻게 된걸까?" 이시무라의 말에 후타쓰기가 어깨를 으쓱 움츠렸다. "모르겠어요. 급한 용무가 생긴 것 같았으니 결국 못 오게된 건지, 덴스케에게 메일로 연락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도 모르시죠?" - P316
"여기에 멀쩡한 전화기는 있겠지? 뭔가 연락 온 건 없나?" "아니요, 아직은 연락 온 게 없습니다." "후타쓰기 씨의 남동생이 전화하면 알려주게." 이시무라는 톰을 돌아보며 물었다. "남동생 이름은?" "짐입니다. 자비로운 꿈이라고 쓰고 짐이라고 읽습니다." - P316
"귀로 들었을 때 국적을 알 수 없는 이름은 사양하고 싶었지만요. 위엄과 관록 있는 이름이 좋은데. 겐지로처럼." - P317
"어머, 귀여워라." 하루야마 미하루가 감탄하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덩달아몇 사람이 벽난로를 에워쌌다. "해적섬 마스코트일까요? 정교한데요. 제가 이런 걸 좋아하거든요." - P317
받침대에는 졸리 로저가 그려져 있었다. 해적기에서 흔히보는 해골과 비스듬히 교차하는 두 개의 뼈가 그려진 마크로 죽음과 공포의 상징이다. - P318
"서양식이라야 한눈에 해적인 줄 알잖아요." 에노키가 안경 속에서 실눈을 떴다. "저는 왼쪽에서 네번째 인형이 특별히 마음에 드는군요. 수염을 기르고 나이프를 들고 있는 해적이 아이가 가장 듬직해요. 사오토메 씨는 어느 게 마음에들어요?" - P318
‘어느 타이밍에 어떤식으로 놀라게 해주려는 걸까? 내일아침, 눈을 뜨면 여기가 베르사유 궁전처럼 바뀌어 있다거나? 설마‘ - P319
모바라 부부가 무슨 음료를 마실지 묻더니 와인과 맥주, 우롱차를 가져왔다. 호스트 없이 저녁 식사가 시작되어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일단 이시무라의 주도로 건배를 했다. - P319
"덴스케 씨가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몰래카메라로 우리를 관찰하고 있다는 말이야? 설마 그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려고." "글쎄요, 안 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 P320
식사 중에는 이시무라와 에노키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다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라 "어떤 일을 하십니까?" "고향은?" 하고 질문거리는 충분했다. - P320
"저, 후타쓰기 씨 작품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거대한 대야가 떨어지는 영상 밤중에 배꼽 잡고 웃었어요." "고맙습니다. 대야가 에베레스트에 충돌하는 효과음을 찾느라 고생했어요. 제법 그럴싸했죠?" - P321
"웃기는 예술 작품입니다. 통신이 되는 세계로 돌아가면꼭 봐주세요. 그 작품은 어째선지 북미와 남미에서 엄청 반응이 좋아서 곧 조회 수가 500만을 넘을 것 같습니다." "굉장하군요." - P321
"그나저나." 구로세가 말했다. "서프라이즈는 대체 뭘까요?" 옆자리에 앉은 이시무라가 그 어깨를 툭 쳤다. "구로세 씨, 그건 일단 머리에서 지웁시다. 우리가 잊었을때를 노려서 뭔가를 할 속셈이겠지요. 머리 위로 대야가 쿵떨어진다거나. 하하." - P322
후타쓰기가 말을 꺼냈을 때, 양쪽 구석에 놓인 스피커에서 서글픈 기타 아르페지오가 들려왔다. 어디서 들어본 적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세 명, 레드제플린의 <천국으로 가는계단> 도입부라고 생각한 사람이 두 명. - P323
후타쓰기가 얼빠진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덴스케는 얼굴만 안 비치는 게 아니라 목소리도 철저하게 숨기는 건가? 일부러 합성한 어색한 목소리를 빌리다니, 음침하군." 로버트 플랜트의 노랫소리를 타고 목소리가 이어졌다. - P323
하루야마가 외치자 기계 목소리가 말했다. 이 "이해를 못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당신들의 악행을 차례대로 알려주겠다. 서로 ‘그건 너무하네‘ 하고 비난해보시지. 무작위로 먼저 구로세 겐지로 ‘ 지명된 남자가 스피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 P324
"성공한 사람을 질투해서 만들어낸 비열한 거짓 소문을믿다니. 황당하군." 구로세의 말은 무시당했다. - P324
‘다음, 사오토메 유나, 당신, 무슨 목적으로 변호사의 길을선택했지? 지성도 감정도 없는 곤충이 본능대로 잎사귀를먹듯 사법시험 공부만 하고, 법의 정신은 눈곱만큼도 배우지 않았지. 대학에서 한스 켈젠의 법철학은 듣지도 않았겠지? 그러니 범죄 수준의 의료과실이나 중대한 노동재해 사건도 태연히 덮을 수 있는 거겠지. 당신을 보고 있으면 변호사가 ‘악의 먹이사슬‘에서 정점에 서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않아. 목숨으로 갚도록.‘ - P325
"다음으로 이시무라 마사토, 이 이름도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금전욕과 지배욕으로 새까맣게 얼룩진 인간이 성스러운 인간이라니. 뇌물로 배가 터지도록 사리사욕을 채운것도 국민으로서는 분통터지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구로세의 뒷배가 되어 법의 해석을 왜곡해온 죄가 깊다. 인간쓰레기들의 조합이 수많은 비극을 낳았어. 당신과 구로세는 공동정범이다. 목숨으로 갚도록." - P325
‘다음, 후타쓰기 톰과후타쓰기 짐. 천재 영상 크리에이터라니 아주 재미있어. 당신들 작품, 일찍 세상을 떠난 친구의아이디어를 훔친 것만 평이 좋지. 그건 좋다고 쳐……… 형제가 함께 마음껏 악행을 저지르고 있더군. 양심이 없으니 어렸을 때부터 약자응 괴롭히고, 협박하고, 스무 살이 넘은 뒤에는 사기에 가까운 동아리 활동으로 돈을 긁어모았지. 형은 불법 촬영물로 한 여성을 자살하게 만들었고, 동생도 여고생에게 약물을 주사해 쇼크사에 빠트렸어. 당신들은 두 사람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악마가 되는 것 같으니 이곳에서 함께 처리하기로 했다. 둘 다 용서하지 않겠다. 목숨으로 갚도록.‘ - P326
‘다음, 하루야마 미하루 당신, 약 1년 전 비 오는 밤, 음주운전으로 노인을 차로 치어 숨지게 했지. 4월 11일에 있었던일이다. 믿을 수 없는 강한 악운 덕분에 지금까지 무사했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야. 당신이 죽인 건 오로지 불우한 아이들을 구하는 일에 겸허하게 인생을 바친 성인 같은 사람이었다. 인간에게도 아직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게 해준 희망의 빛. 그런 사람을 부주의한 사고로 살해한 것만으로도 엄벌이 마땅한데 당신은 일말의 반성도 없이 주위에서 띄워주는 대로 희희낙락 살고 있지. 너무 끔찍해. 아무리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 목숨으로 갚도록‘ - P326
‘다음, 에노키 도모요. 당신의 고급 요양 시설에서는 치먀 입소자를 상습적으로 학대해서, 내가 알아낸 것만으로도 세명이 사망했다. 개별 사안에 대해 담당했던 간병인들에게도책임이 있겠지만 이는 이익만 우선하는 썩어빠진 경영 방침과 가혹한 통제가 낳은 참혹한 살인이야. 지금도 계속되는 연쇄살인을 막기 위해서라도 당신을 이 섬에서 살려서 내보내진 않겠다. 목숨으로 갚도록‘ - P327
‘다음, 우도 만사쿠有作이 이름도 아주 아이러니해제대로 일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만들어보지 않았잖아. 자기를 유명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한 시스템 엔지니어인 척 소개했지만 당신, 사실은 유치하고 더러운 크래커잖아. 아제르바이잔의 발전소를 해킹해서 큰 정전을 일으켰지. 그 일로 다섯 명의 시민이 죽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지? 더군다나, 더군다나……… 가상화폐를 조작해 내 재산을 훼손하려 한 죄는막중하다. 목숨으로 갚도록‘ - P327
‘다음, 모바라 쓰토무와 모바라 가오리‘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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