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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던진 순간, 아니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손가락 끝에서 공이 떠나기 직전에 ‘아아, 이건 아닌데.‘ 하는 감이 왔다. 이래서는 힘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느끼면서 팔을 뻗었다. 당연히 좋은 볼이 던져질 리 없다. - P279
비록 전력 외 통보를 받은 몸이지만, 구단이 박정하게 굴지는 않았다. 현역으로 계속 뛸 생각이니 연습장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지금 시점에서 야나기사와에게 손을 내밀어 줄 만한 구단은 없었다. 이대로 가면 은퇴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남은 기회는 단 하나, 합동 트라이아웃뿐이다. - P280
야나기사와는 속구 투수는 아니었다. 제구력과 공의 배합, 날카로운 변화구로 승부하는 타입이다. 그런데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변화구가 이제는 말을 듣지 않는다. 머릿속에 그린대로 공이 곡선을 그려 주지 않는 것이다. 원인이 무엇인지자신도 알 수 없었다. - P280
남은 공 다섯 개를 모두 던졌지만 만족스러운 공은 한 개도 없었다. 씁쓸하게 웃으며 무네타에게 다가갔다. "지금 이런 공은 무네타 씨도 던지겠어." "컨디션이 저조해서 그래. 시즌 동안 피로가 누적된 데다그런 일까지 일어나서 한동안 연습도 제대로 못했잖아." ‘그런 일‘이란 물론 사건을 말할 것이다. - P281
"이 물건에 관해 뭔가 좀 알아내셨나요?" "돌아가신 부인의 지인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아는 분이 없더군요. 몇몇 분이 남편에게 선물하려던 게 아니겠느냐고 말한게 전부입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무슨 기념일도 아니고……………. 내용물이시계라고 하셨죠?" "X선으로 조사해 본 결과 자명종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럼 더더욱 이상하죠. 제게 뭐 하러 그런 걸 선물하겠습니까." - P282
"이거 야나기사와 씨 겁니까?" 야나기사와가 잡지 제목에 눈길을 주었다. 야구와는 무관한 스포츠 종목이 쓰여 있다. 구사나기가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중략). "아니요, 신경이 좀 쓰여서요. 이건 배드민턴 전문지잖아요. 야구 관계자가 왜 이런 잡지를 읽는지 궁금했습니다." - P283
헤어지기 전에 무네타가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속는 셈 치고 얘기나 한번 들어 보지 그래? 참고가 될지도모르잖아." 하지만 야나기사와는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물리학자인지 뭔지는 몰라도, 배드민턴에 관해 글을 쓴 사람에게 야구에 관해 의논하러 가자니, 가당키나 한소리인가.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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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야나기사와는 목을 움츠렸다. "문턱이 높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보군. 설마 내가 데이토대학문을 들어서게 될 줄이야." 그 말에 무네타가 슬며시 웃음 지었다. "입학시험을 보러 온 것도 아닌데 긴장할 필요 없잖아." "성격 탓이야 이런 데는 딱 질색이야." - P287
유가와가 책상 밑에서 뭔가를 또 꺼냈다. 이번에는 야구공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야구공처럼 생긴 플라스틱 구체였다. "구사나기에게 얘기를 듣고 두 분께 설명해 드리려고 만들었습니다. 안에 센서가 들어 있는 공이에요. 서두르는 바람에조잡하게 만들어져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제 의도는 이해할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유가와는 그 공을 야나기사와에게 내밀었다. "이걸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 P289
"학생들이 장난하는 거라면 야단을 치겠지만 이건 물리 실험입니다. 더구나 두 분은 아마추어가 아니잖습니까.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럼 한번 해 보죠." 무네타가 재킷을 벗었다. "직구와 변화구를 번갈아 던지세요." 유가와가 말했다. "구종을 적당히 섞으셔도 괜찮습니다." - P290
"야나기사와 씨의 첫 번째 공입니다." 유가와가 설명을 시작했다. "회전수는 1초에 32.3회, 회전축은 수평보다 오른쪽으로8.7도 기울어 있습니다. 두 번째 공은 회전축이 수직에 가깝고 9.2도 기울어 있고요. 회전수는 1초에 13.5회. 이건 변화구군요." - P291
무네타가 앞으로 다가앉으며 말했다. "호조를 보이던 시절의 투구 폼과 비교해서 뭘 어떻게 교정해야하는지 알아내는 일도 가능할까요?"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야나기사와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호조를 보이던 시절의 비디오는 지겹도록 봤어요.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도 잘압니다. 그걸 교정해도 나아지지 않으니 답답한 겁니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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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장에서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무네타일 것이다. 구사나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야나기사와가 투구 연습을 하고 있다. 무네타가 공을 받고 있다는 점은 지난 번과 마찬가지지만 오늘은 협력자가 하나 늘어났다. 옆에 놓인 책상에서 유가와가 컴퓨터를 조작하고 있었다. - P293
봉투 속에 든 것은 카스텔라 사이에 단팥을 넣은 빵이었다. "고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유가와 교수님의 도움을받은 이래 하루하루가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야나기사와의 투구폼이 그 정도로 망가졌을 줄은 몰랐거든요. 약간만 교정을 했을 뿐인데도 상당히 좋아진 것 같습니다. 큰 공부가 되었어요. ‘관절의 각속도 같은 용어도 처음 알았고요." 무네타의 말이 공치사로 들리지는 않았다. - P294
"사건의 충격이 여전한 모양이군요." "그런 점도 있겠지만, 다소 께름칙한 마음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부인이 야나기사와가 현역 생활을 계속하는 데 반대했었나 봅니다." (중략). "부인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상황이 바뀌었다는 말씀이군요" - P295
(전략). 그렇게 전제한 뒤 구사나기는 야나기사와 다에코가 살해되었을 당시 자동차에 놓여 있던 쇼핑백 얘기를 꺼냈다. "아닌 게 아니라 묘한 구석이 있군. 그 시계를 누군가에게선물할 작정이었다면 당연히 그 상대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을 텐데, 그런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거야?" "여러 방면으로 알아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어. 휴대 전화통화 이력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빠짐없이 물어봤지만헛수고였지." - P297
구사나기가 입꼬리를 비죽이 내려뜨렸다. "그걸 뭐 하러 가르쳐 주겠어. 알아 봐야 이래저래 의심만생길텐데." 흠, 하며 유가와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바람을 피운거 아닐까 하고?" "주부가 대낮에 한껏 꾸미고 외출을 했다. 게다가 그런 사실을 남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누가 들어도 수상하다고 여길걸. 그런 쓸데없는 일을 알려 줄 필요가 있겠어?" "그래,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야." - P298
7
운동장을 빠져나온 후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하지만도중에 안면이 있는 기자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야나기사와가 전력 외 통보를 받았을 때 은퇴하기에는 이르다는 요지의기사를 써 준 기자다.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어서 걸음을 늦췄다. - P299
오늘 첫 번째 트라이아웃이 있었다. 전력 외를 선고받은 각구단 선수들이 모여 각자의 실력을 어필했다. 어느 구단의 눈에라도 들면 재고용의 길이 열리겠지만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야나기사와는 세 명의 타자와 경기를 펼쳤다. 실전처럼 주자가 1루에 나가 있는 설정으로, 간간이 견제구를 던져 가며세트 포지션으로 던졌다. - P300
운동장 옆 보도를 남자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낯익었다. 속도를 늦추고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틀림없다.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서둘러 차창을 내리고 말을 건넸다. "유가와 교수님!" 그러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지 유가와는 고개를 숙인 채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유가와 교수님! 하고 다시 한 번 불렀다. - P301
유가와 조수석에 태운 채 두리번거리며 찻집을 찾았다. 패밀리 레스토랑이 눈에 띄어 그곳에 들어가기로 했다. "일부러 보러 오시다니, 놀랐습니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할지." 야나기사와가커피잔에 손을 대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였다. "우연히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요." - P302
(전략).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일단 야구에서 물러나기로 한 이상더는 교수님께 폐를 끼칠 수 없습니다." 야나기사와가 양손을 무릎에 얹고 다시 한 번 깊이 고개를숙였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재기해서 은혜를 갚고 싶었는데, 그러기는 힘들 것 같으니 다른 형태로라도 보답하겠습니다." "보답은 필요 없습니다만....... 정말 그만두실 작정인가요? 오늘 있었던 트라이아웃을 보고 어느 구단에선가 손을 내밀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 P304
두 사람은 패밀리 레스토랑을 나와 야나기사와의 자동차로 걸어갔다. 그런데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유가와가 의아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시죠?" "아, 그게, 칠이 좀 이상한 형태로 벗겨져 있어서요." 그 말에 야나기사와가 조수석 쪽으로 다가갔다. 유가와의말대로 창틀 조금 아래쪽의 칠이 벗겨진 채 녹이 번져 있었다. "여기도 그렇군요. 그리고 여기도요." 유가와가 보닛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 P305
"아니요. 사실은 운전이 오랜만입니다. 아마 그날 세차한이후 처음일 거예요. 그 직후에 사건이 일어났으니까요." "사건이 있던 날 부인이 차를 몰고 나가셨죠?" - P305
"무슨 문제라도...... 녹이 좀 묘하게 슬기는 했지만, 달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안 그래도 이쯤 해서 새 차로 바꿀까 하던 참이었으니 걱정 마세요." 그러자 물리학자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렇군요. 어쩐지 신경이 쓰여서요. 금속이 이런 식으로 녹슨걸 본적이 없거든요." "역시 과학자는 관찰력이 대단합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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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유가와에게 이상한 질문을 받은 것은 어제저녁이었다. 야나기사와 다에코가 살해된 날 혹시 도쿄 어딘가에서 약제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아마 강알칼리성 약제일 거야. 소화기 분말로 추정되는데." 유가와의 말투로 미루어 급한 일인 듯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유가와는 야나기사와의 자동차 얘기를 꺼냈다. 차에 난 흠집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 P307
호텔에서 발생한 사고란 자동차 사고였다. 지하 주차장 출입구를 대형 트럭이 들이받은 것이다. 높이 제한을 무시해서생긴 단순한 실수였다. (중략). 주차장 출입구 쪽으로 대량의 소화기 분말이 분사된 것이다. 사태를 알아차린 경비원이 스위치를 껐을 때는 이미 3분가량 분말이 분사된 후였다. 구사나기는 유가와에게 전화를 걸어 사고에 관해 말해 주었다. - P308
"소화제가 출입구 부근에서만 분사된 덕에 주차돼 있던 차에는 영향이 없었어요. 다만 분사되는 시점에 몇 대가 출입구를 통과했으니 그 차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방범 카메라에 찍히기는 했는데, 거품 때문에 번호판을읽기 힘들어서 연락을 취할 도리가 없었어요." "그 영상을 볼 수 있을까요?" - P309
자동차 몇 대가 그 거품 속을 통과했다. 별일 아닐 거라고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때 유가와가 "잠깐만!" 하고 외쳤다. "방금 지나간 차 아니야?" 영상을 되돌려 확인했다. 은회색 자동차가 출입구를 통과하고 있었다. 번호판은 보이지 않지만 생김새가 야나기사와의 차와 흡사하다. - P310
"소화기 분말의 성분을 알 수 있을까요?" 유가와가 경비원에게 물었다. "자세한 건 잘 모르겠는데……………." 그러고서 경비원이 팸플릿을 찾아왔다. "역시 수성막포 소화약제로군." 팸플릿을 읽고 난 유가와가 중얼거렸다. - P310
"야나기사와 투수의 부인이 사건 당일에 이 호텔을 방문했던건 확실해 보여." 걸으면서 유가와가 말했다. "문제는 호텔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건데." "일단 프런트에 가서 확인해 볼까?" "아마 소용없을 거야. 밀회가 목적이었다면 유부녀가 프런트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겠지. 남자가 먼저 체크인을 해 놓으면 그 방으로 직접 갔을 거야." - P311
엘리베이터 앞에 선 채 두 사람은 호텔 내부 시설들을 확인했다. 1층에 티 라운지가 있었다. 두 사람은 그곳으로 가서 커피를 주문하면서 종업원에게 야나기사와 다에코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아, 이분 말이군요." "기억나십니까?" "몇 번 오신 적이 있어요. 주로 허브티를 주문하셨던 것 같습니다." - P312
"요즘은 통 안 보이시던걸요. 아마 3주쯤 전에 오신 게마지막일 거예요." 그녀의 기억은 정확했다. 사건은 20일 전에 발생했다. "그때도 남자분과 함께였습니까?" "그랬을 거예요. 아, 맞다!" 종업원이 뭔가 떠오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크를 주문하셨어요. 쇼트케이크요. 그러면서 초가 있느냐고 물었어요‘ - P313
그리고 다음 순간 유가와가 눈을 화들짝 떴다. "내용물이 시계라고 했지? 그렇군! 그럴 가능성도 있겠어." "뭐야, 무슨 말이야?" 그러자 유가와가구사나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봐, 이번에는 내가 부탁을좀 해야겠어. 그 남자를찾아줘."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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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급작스레 나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구사나기가 사과했다. (중략). 야나기사와가 앉자 두 사람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종업원이 다가오자 맥주와 음식을 주문했다. "차체의 녹슨 부분은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가와가 물었다 - P315
"사고차량이 소속된 회사에서 배상하겠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다에코 그 사람이 그런 곳에는 왜 간건지 그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소문대로 맛은 있었지만 야나기사와는 다에코의 의문스러운 행적이 마음에 걸려 느긋하게 음미하기 어려웠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유가와가 "예의 물건은 가지고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 P317
야나기사와는 옆에 놓아두었던 쇼핑백에서 포장지에 싸인상자를 꺼냈다. 사건 당일 다에코의 차에서 발견된 물건이다. "내용물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아니요, 뜯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제가 잠시 보겠습니다." (중략). "테이프를 떼었다 붙인 흔적이 있어. 일단 풀었다가 다시포장했어." "이걸로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군." 야나기사와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는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 P317
야나기사와도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흰 요리사 복장을 한 체격이 다부진 남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쉰 전후로 보였다. "부인과 만난 사람이 바로 접니다. 양, 이라고 합니다. 대만에서 왔어요. 이 음식점 주인입니다." "대만......." 야나기사와는 숨을 삼켰다. 다에코가 대만 사람을 만나 내일을 의논하다니…………. - P318
"야구를 계속할 수만 있다면 국외로 진출하는 경우도 각오하고 있을 텐데, 그렇게 될 경우 당황하지 않도록 지금부터 준비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설마 그 사람이………. 제게는 은퇴를 권해 왔거든요." "그게 부인 나름의 독려 방식이었습니다. 어디라도 두말없이 따라가겠다는 태도를 보이면 남편은 분명 마음이 해이해질 것이다.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전한다는 각오를 다지게 하고 싶다. 그러시더군요." - P319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받지 않았습니다." "왜죠?" "대만에서는," 유가와가 말했다. "자명종을 남에게 선물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답니다." - P320
야나기사와가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께 얘기를 듣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덕분에 아내의 진심을 알았어요." "부인은," 양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었다. "남편의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꼭 다시 보고싶다고 하셨어요"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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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대만의 관습까지 그렇게 꿰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어." 구사나기가 말했다. "대만에는 우수한 물리학자가 많아. 그들에게는 멋진 구석이 있는데, 설사 비과학적이더라도 문화와 인습을 경시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시계에 관해서도 그들을 통해 알게 되었어." - P322
양은 휴대 전화가 있지만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따라서 그에게 연락하려면 가게로 전화하는 것이 빠른 길이었다. 야나기사와 다에코도 그러한 사정을 알기에 만나자고 약속할 때는 가게로 전화를 걸었던 듯하다. - P323
"투수란 그런 존재야. 그리고 양 씨를 만난 이후로 야나기사와 투수는 확실히 변했어. 내게 새삼 협조를 요청했을 뿐 아니라 연습에 임하는 자세도 크게 달라졌지. 그 결과, 과학적인데이터만 봐서는 전성기와 견주어도 투구에 손색이 없어." "아니, 그럼 부활할 수 있다는…………..? 그때 쉿, 하고 유가와가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마운드에서 야나기사와가 투구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 P324
6장
위장하다
1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획기적인 발명품이지만 융통성이없다는 게 맹점이야." 조수석에서 유가와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부터 산속의 외길만 줄기차게 보여 주잖아.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차라리 다음 분기점이 나올 때까지 꺼두는 게 낫겠어." - P395
"강수 확률이 90퍼센트로군. 예보로 봐서는 곧 비가 올 모양인데, 그것도 꽤 많이 올 것 같아." "정말이야? 이거 낭패인걸. 우산도 없는데." "차를 호텔 현관 앞에 세우면 괜찮을 거야." "주차장이 멀리 있으면 어쩔 건데? 나만 쫄딱 맞으라는 말이야?" "둘 다 젖는 것보다야 낫지. 재킷이랑 짐은 내가 들고 내릴게. 피해를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거야." - P396
구사나기 곁으로 돌아온 유가와는 어느 틈엔가 비닐우산을 쓰고 있었다. "그 우산은 어디서 났어?" "방금 그 여자가 줬어." "여자? 운전하는 사람이 여자였어?" "응. 젊은 여자였어. 게다가 상당한 미인이던걸 타이어를교체하고 있는 사람이 홀딱 젖은 모습이 안돼 보이더라는 거야.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 있다니, 아직은 세상이 살만해." - P398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그리운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가와와 마찬가지로 대학 시절 배드민턴부에서 같이 활동했던 친구 둘이다. "이봐, 자네들, 드디어 때가 왔어." 고가라는 친구가 구사나기와 유가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독신은 자네들 둘뿐이라고, 잊지는 않았겠지? 마지막 남은 한 명이 모두에게 고기를 마음껏 먹게 해 주자는 약속 말이야." - P399
"멀리까지 오라고 해서 미안해. 그래도 이 호텔이 음식이 맛있는 데다 온천도 있고 각종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서 꽤 괜찮아. 모처럼 왔는데 다들 느긋하게 쉬다가." 다니우치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고향으로 돌아와 현청에 들어갔다. 거기서 지역 발전을 위해 일하다가 2년 전에 그만두고 이곳 읍장 선거에 입후보했다. 다니우치의 아버지도 읍장 출신이다. 결과는 단독 후보로 당선. -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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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기 다에가 방을 나선 것은 오후 6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중략). 식욕은 전혀 없지만 뭐라도 먹어 둬야 했다. 샐러드와 파스타를 주문했다. 와인이라도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유리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머금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는 듯하다. 별장이 어떻게 되었을지 조금신경이 쓰였다. 질척이는 땅을 걸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우울했다. - P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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