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설득해서 종단을 세우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우혁은 그런 미래를 상상으로만 남겨두기로 했다. 애당초 소년을 둘러싼 다툼은 새천년파와 조강현이 맞붙는 구도였다. - P113

이쯤에서 만족하는 게 최선이었다. 드라이브를 통해 20년간의 여정이 매혹적인 피날레를 맞이했음을 받아들이고, 이만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김형의 말대로, 서른넷은 멀끔한 일상에 뿌리내릴 나이다.......
형이 또라이 기질이라 부른 것도 고쳐질까? - P114

소년이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창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생각을 읽고 거절할 준비를 하는 중인가 싶었지만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였다.
"추적이 붙었다. 검은 그랜저야.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고있어"
"그냥 경로가 겹친 거 아니야? 양양고속도로 타고 내려가는 차가 한둘도 아니고."
"이건 내가 봐서 아는 거니까 말 들어 갓길에 세워라." - P115

"예언 적중률이 애매한데, 추적이 붙었다는 건 알아도 둘중 누구 편인지는 모른다니."
"나도 답답하다만 지금은 이 정도가 최선이야. 악령한테 몸을 넘겨주면 반나절은 드러눕게 돼."
자동차가 다시 한 차례 강줄기를 건넜다. - P116

"여기서 가평 방면으로 빠져나갈 수 있어. 어쩔까?"
룸미러에 비친 소년은 명상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내비게이션 우측 상단의 시계가 43분에서 44분으로 변하는 순간두 눈이 번쩍 뜨였다.
"악령이 뭔가 다른 걸 생각하는 모양이다. 더는 말해주지않아 마음 단단히 먹어라."
"몸을 갈아치우고 싶어 하는 건가? 네가 도망치는 중이라서?"
"확실치 않아. 지금 상태가 최선이라 보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부활은 가능하지?"
"나도 도의란 걸 안다. 네가 여기서 개죽음당하게 두진 않아." - P117

사람을 죽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시속 180킬로미터의 속도로 충각 돌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 전투에서 우세를 점할 방법은, 정확한 각도와 속도로 선공하는 것이다.
우혁은 웃음이 침처럼 질질 새는 것을 느꼈다.
경직된 뺨이 불규칙적으로 경련하며 이가 딱딱 부딪혔다. - P118

"안전벨트 매고 가방 꽉 잡아. 충돌하면 바로 산 쪽으로 도망가고."
우혁은 블랙박스에 녹음되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렸고,
잠시 심호흡한 뒤 덧붙였다.
"저것들도 부활시켜줘야 된다. 죽으면 과실비율 계산에 불리해."
K5를 피하고, 룸미러로 후방을 살피고, 시속 180킬로미터로 주행하면서, 어떻게 그런 말들을 또박또박 늘어놓을 수있었을까?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려난 와중에도 이성은 계속 과실 비율을 계산하고 있었단 말인가? - P119

우혁은 헐떡이며 아, 아, 아, 하고 외쳤다.
머릿속 슬롯머신의 세 줄이 기적처럼 맞아떨어지며 7.7·7을 띄웠다.
잭팟!
압도적인 속도가 굉음으로 화했다. 제네시스의 전면부가K5의 운전석을 옆에서 들이박았고, 차벽이 서로의 영토를 침범했으며, 넘쳐흐르는 운동량이 두 자동차의 융합체를 차도 가장자리까지 떠밀어갔다. 철제 가드레일이 바깥으로 휘었다. 우혁은 시간이 느려지며 세계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 P120

휘도는 동전을 향해 뻗는 손이 있었다. 소년의 손이었다.
갑작스럽게도 다른 손이 뻗어나와 소년을 붙들었다. 굵고 억센 손이었다. 조명이 이동하듯 그늘이 슬쩍 물러나며 손의주인들이 보였다. 건장한 남자가 소년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말하고 있었다. - P121

(전략).
"어르신, 남서윤의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딸입니다. 가서 보시죠. 이름도 지어주시고요."
"이름은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마지막 날에 현세의것들은 다 소용이 없어지니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여덟 달이라도 인간에게는 긴 시간입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이름은 세희로 하고, 성씨는 어머니 것을 따서 지어라 남서윤은 애를 가진 줄도 모른 채로 여기에 왔으니 아비 성씨를 물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나도 곧 가서볼 테니 먼저 가서 전해라."
"남세희‘군요. 알겠습니다." - P122

그 모두가 소년이 알던 이들, 혹은 아직 모르지만 언젠가알게 될 이들의 피였다.
온 세상 사람 80억의 피…………….
문득 우레 같은 음성이 들려오더니 천사들이 날아와 일곱개의 그릇을 기울였다. 그릇 하나가 쏟아질 때마다 사람들의몸에서 종기가 자라났으며 바다의 모든 생명이 죽었고 강과샘이 피로 변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그 피를 말리더니 구름마저 불태웠고, 왕좌로부터 다시 큰 음성이 났다. - P123

우혁은 눈을 떴다. 우그러진 프레임 너머로 햇빛이 비쳐 들고 있었다. 밤새도록 격렬한 파티를 즐긴 후 열일곱 시간짜리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듯 노곤했다. - P123

박살 난 디퓨저 병이 주의를 끌더니 쇠비린내와 샌들우드 향의 불균등한 조화가 니치 향수의 새로운 라인업처럼 느껴졌다. 톱 노트는 피비린내, 미들 노트는탄내, 베이스 노트는 샌들우드 향, 요새 유행은 그런 식인가?
응? 품에서 꺼낸 휴대전화는 액정이 깨졌을 뿐만 아니라 온통 피로 뒤덮여 있었다. 차내 역시 피범벅이었다.
현실적인 긴박감이 신비 체험에서 기인한 고양감을 몰아냈다.
이게 도대체 전치 몇 주짜리야?
병원비는?
하지만 몸을 살펴본바 유리 파편에 찢긴 목덜미가 흉터 없이 아물었을 뿐만 아니라 그 흔한 근육통조차 없었다. - P124

우혁은 변형된 가드레일 바로 앞에 서고서야 자신이 산등성이가 아니라 교각을 지나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칫했더라면 30미터 아래의 개천으로 떨어질 뻔했던 것이다. 그는물줄기 양옆의 밭과 컨테이너 주택과 비닐하우스가 있는 한적한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소년이 지금쯤 어디를 지나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 P125

그랜저 운전자의 얼굴을 확인한 우혁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경찰 아니었네."
일전에 소년이 학원으로 도망 왔을 때 내부 수색을 요구하던 경찰 중 하나였다. 그때도 사칭범일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재회하다니 생뚱맞았다. - P125

우혁은 자신의 존재가 세상 앞에 초라해지는 것을 느끼며수줍은 태도로 말을 이었다.
"사실 제네시스가 아버지 차인지라 사정을 말씀드려야 하는데, 휴대폰이 고장 나서 연락이 안 되네요. 보험도 아버지거로 적용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그쪽 담당자 연락처도 모르고요. 이거 보험 처리랑 손해배상이………… 아니, 솔직히 이게제 잘못 아니라는 거 아시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할 말이 없어서 멋쩍은 듯 헤헤 웃었다.
입에서 짠맛이 났다. - P126

#3
이미 그리고 아직
Already but not yet


그랜저 운전자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갓길로 물러나 있던 중년 무리가 다가왔다. 119에 연락했으니 일단 앉아서 기다리라고,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데 무리할 필요 없다고 했다. 우혁은 자신이 멀쩡하다고 주장했지만 중년들의 입장은 확고했다. 대형 사고를 겪은 직후에는 뇌가 천연마취제를 분비하므로 고통에 둔감해진다는 거였다.  - P129

. 전치 4주라도 얻어내야 했다. 그러나 최종적인 관건은 자동차 보험이 아버지 명의이며 자신은 그 보장 내역을 정확히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부모님께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하나 싶은 생각에 등줄기가 서늘해졌고, 상가 부동산을 지나며 얼핏 보았던 매물 사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휘돌았다. - P130

우혁은 부모님의 노후 대비 수준을 검토했고, 아버지가 못난 아들놈을 위해 전세 자금을 빼진 않으리라 판단했으며,
K5에게 과실 비율을 떠넘길 방편을 고민해보았다. 목격자들이 K5의 위협 운전을 증언해주더라도 먼저 들이받은 쪽은 자신이었다. - P130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면서, 우혁은 앞으로 자신이 이 대답을 무수히 반복할 것임을 직감했다. 잘 모르겠다는 것 외에 어떤 해명이 가능하단 말인가? 당신네들의 몸이 포도주틀 안에 쑤셔져 들어가 피바다를 이루는 것을 보았다고? 혹은 요세푸스와 바르 코크바의 환생―그것을 환생이라 부를수 있다면-인 누군가가 30미터 아래로 도망쳤다고? 충돌전 10분간의 블랙박스를 제출하며 K5 운전자의 돌발 행동을 규탄하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버리는 게 최선일 터였다.
그렇게 구급차가 왔으며 경찰도 왔다. 질문을 몇 가지 듣긴했으나 그 내용은 의식이 남아 있는지, 신상 명세가 어떻게되는지 가족 연락처를 기억하는지 체크하는 선에서 그쳤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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