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평평하다

현대적인 건물의 정면은 믿기 힘들 정도로 평평한 경향이 있다.

창문과 문이 거의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는다.

지붕도 평평한 경우가 많다. - P93

너무 밋밋하다

현대식 건물에는 장식이 없다.

(중략).

요철, 틈, 굴곡, 총안, 처마돌림띠, 그리고 안팎으로, 주변부로 돌출된 지점이 있다. ‘특별‘하거나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은 일상적인 건물마저 이 같은 태도로 만들어졌다. 흥미로움과당대의 미에 대한 관심과 함께. - P95

너무 직선적이다

현대적인 건물의 디자인은 직사각형에 기초하는 경향이 있다. 고전적인 건물 역시 크게 다르지 않기도 했을 뿐더러, 이런 접근법자체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극히 실용적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논리적 의의도 있다. - P96

그러나 직선과 직사각형 구조에만 의존하는 설계는 이제 한계에다다랐다. 직선과 직사각형이 독재하는 대형 건물은 반복적인 수평의 장면을 만들어 내고, 지나가기에 딱딱하면서 전혀 친근하지않게 느껴진다. 이런 건물은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 P97

너무 반짝인다

현대적인 건물의 외부는 많은 경우 금속이나 유리처럼 매끈하고평평한 재료로 만들어진다. 반짝이는 재료는 물론 나쁘지 않지만 건물 전체나 심지어는 구역 전체가 오직 딱딱한 느낌을 뿜는 재료로만 만들어질 때 우리의 감각은 무관심으로 마비된다. 다양성의 부족은 감각을 심각하게 둔화시킨다. - P98

너무 단조롭다

현대적인 건물은 작은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직사각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직사각형은 격자식으로 배열된다.

(중략).

이런 종류의 단조로움은 인간에게 영감을 주거나 인간의 흥분을유발하지도, 인간을 매혹하지도 못한다.

우리가 선택의 여지 없이 거주하고 일하게 되는 장소는 결국 이런 모습에 가까워진다: 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안조로움. - P103

따분함은 언제 안 따분할까?

지금껏 말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제시한 요점에 일일이 매달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P108

따분함은 마음의 굶주림이다.

신경 과학자 콜린 엘라드Collin Ellard는 이런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연구했다. 2012년, 엘라드는 뉴욕에서 사람들이 따분한 장소를 걷다가 곧이어 흥미로운 장소를 통과할 때 어떤 느낌을 받는지 분석했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짧은 시간 머무르는 일이사람의 기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자 한 것이다. - P112

사람들의 기분이 어떻게 바뀌는지 파악하는 데 사실 앱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엘라드가 연구 기록에 적기를, "텅 빈 파사드, 즉 건물 정면 앞에서는 사람들이 조용하고 움츠러든 자세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보다 활기찬 현장에서는사람들이 생기를 찾고 수다스러워지는 통에 열의를 가라앉히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 P114

수집한 데이터를 검토한 결과, 엘라드는 따분한 장소 속 사람들이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임을 발견했다. 자율 각성, 즉 스트레스 수치가 높아진 것이다.

따분함은 그저 무엇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피실험자의 뇌와 몸은 스트레스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 P115

과학자들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들어설 때 무의식적으로 정보를검색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중략). 자연 환경은 복잡성으로 가득 차 있다. 매초마다 우리의 감각은 환경과 주위를 둘러싼 것들에 관한 약 1,100만 개 정보를 뇌에 전달한다. - P115

뇌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박탈당하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당황한다. 뇌는 신체를 경계 상태로 전환하여 위험에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 태세를 갖춘다. - P116

저층 주택이나 연립 주택이 늘어선 잘 설계된 거리에 살면 서서히 이웃과 친해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목례는 미소가 된다.

미소는 알아봄이 된다.

알아봄은 가벼운 대화가 된다.

가벼운 대화는 더 크고 무거운 이야기가 된다.

크고 무거운 이야기는 우리 삶을 더 의미 있게 하는 우정이 양질의관계가 된다. - P119

이처럼 건물의 외부 디자인은 우리 삶과 사회의 형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상의 경우, 건물은 우리를 서로에게로 향하게 하여 긍정적으로 연결될 가능성을 높인다.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다.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는 연결망 안에 안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번성하고, 그러지 못할 때 고통받는다. - P120

과학자들은 수년에 걸쳐 사람이 자연과 함께 있을 때 더 행복하고 건강해진다는 가설을 뒷받침할 강력한 증거를 수집해 왔다.

일리노이대학교 조경 및 인간 건강연구소의 프란시스 쿠오FrancesE. Kuo 박사는 시카고의 악명 높은 주택 프로젝트인 로버트 테일러홈즈The Robert Taylor Homes에서 이러한 효과를 연구했다. 1962년 건설 당시 이 주택 단지는 16층짜리 콘크리트 타워 28개로 구성된세계 최대 규모의 공공주택 단지였다. 개발 과정 또한 폭력적이고 위험했다. 주민들은 그런 곳에서 생활하는 데 따른 스트레스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 P122

쿠오는 가난한 도심 지역의 경우 "나무 몇 그루를 심는 단순한 행위가 개인과 가족에게 ‘수많은 문제에 맞서 싸우는 데 필요한 심리적 자원을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인간은 자연 속에서 진화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행복하다. 자연 속에서 20초만 머물러도 심박수가 떨어진다. - P123

연구가 중 한 명인 치누키 세레신헤Chanuki Sereshinhe 박사는 ‘자연은 아름답다‘는 오래된 격언이 불완전한 것 같다며 해안선산·운하 같은 자연의 특징은 장면의 아름다움을 향상시킬 수있지만, 평평하고 흥미롭지 않은 녹지 공간은 아름답다고 여겨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 P124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경치미다. - P125

사람들은 따분한 장소를 좋아하지 않는다

2천 명 넘는 미국인에게 한 쌍의 공공 건물 이미지(한장은 전통적인 건물의 모습, 다른 한 장은 현대적인 건물의 모습)를 평가하도록 요청하자 사람들은 일관되게 현대적인 이미지를 거부하는 경향을 보였다. 어떤 계층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든 마찬가지였다. - P131

내가 사는 곳에서도 결과는 같았다. 영국 대중의 건축 취향에 관한일련의 설문조사를 분석한 결과, "인구의 15~20% 정도가 주류 현대 건축에 대한 감상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주류 현대 건축에 대한 혐오감은 영국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몇 안되는 요소 중 하나로 밝혀졌다.  - P131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건물 10선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구글 인기 검색어를 바탕으로 선정한 세계 10대 건물 중에는 지난 100년* 사이 지어진 건물이 7개나 포함된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신축건물이 아니다. 따분한 건물이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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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급차가 왔으며 경찰도 왔다. 질문을 몇 가지 듣긴했으나 그 내용은 의식이 남아 있는지, 신상 명세가 어떻게되는지, 가족 연락처를 기억하는지 체크하는 선에서 그쳤다. 피범벅이 되어 웅크린 사람에게 깊은 이야기를 듣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 P131

연락을 받고 응급실로 달려온 부모님은 아들을 보더니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으며 그의 생환이 수사학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기적일 수 있음을 인지했다. 소년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거의 본능적으로, 그러나 상식과 어긋난 직관은 인지부조화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 P132

"하지만...... 교재를 가지러 파주에 간다고 했지 않냐!"
여기서부터는 항변이 불가능했다. 우혁은 자업자득의 무게를 절감하며 쏟아지는 비난을 감내했다.  - P133

아버지는 한동안 원색적인 모욕을 가하더니 그만 입을 다물었고, 거실 장식장에서 위스키 병을 쥐어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우혁에게서 천천히 고개를 돌린 어머니는 거실 텔레비전에 전원을 넣고 소파에 웅크려 앉았다. - P133

그는 왁자지껄한 텔레비전 소리가 곧장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방으로 들어갔다. 고장 난 휴대전화에서빼낸 유심 칩을 구형 공기계에 끼워 넣으려는데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고, 그림자마저 동작에 맞붙지 못하는 듯했다. 내일은 멀쩡히 출근하겠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 없었다. - P134

우혁은 뻣뻣이 굳은 목을 가까스로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포동역 바로 앞 사거리는 유리 조각이 비죽비죽 솟아 파도 같은 형상을 이루며 그 골짜기 사이사이로 불길이내달리는 형상이었다. 불길 한가운데에 선 여자. 여자의 얼굴은 시간을 넘나들며 점차 어리게 변해간다. - P135

 떨어지는 별의 꼬리가 우혁을 낚아챘다. 그는 산 채로 타오르는 육신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을 헐떡였지만장소는 여전히 횡단보도 앞이었고 사이렌 소리라 착각했던것은 휴대전화 벨소리였다. 시간은 10시 40분, 전화를 받자마자김형이 불쑥 물었다.
"야, 이 새끼야. 일이 어떻게 됐길래 이제야 연락을 받아 진짜 죽었나 싶어서 다섯 번도 넘게 전화했다. 사고라도 났냐?"
높다란 산등성이를 굽이굽이 돌아오다가 드디어 평지로 내려갈 때처럼 머리가 아찔해지더니 감각이 한순간에 밀려 들어왔다. - P137

"하여간 손 많이 간다. 지금 어디야? 집? 병원? 경찰서?"
우혁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개포동역 5번 출구요. 급한 일은 다 처리했어요. 지금은한가해요."
"근처네. 이자카야 주소 찍어줄 테니까 올 수 있으면 걸어와라. 나도 15분쯤 뒤에 퇴근할 것 같다." - P138

. 그는 자신이 어떤 남자의 몸뚱이를 개포동역에서 이자카야 앞까지 옮겨다 주는 짐꾼이라고 상상하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김형은 가게 옆 골목에서 전자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의외로 멀쩡하네? 사고 크게 났다길래 팔 하나쯤 부러졌을 줄 알았는데."
"지금 그게 문제예요. 죽어야 하는데 멀쩡해서."
우혁은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며 엄지로 이자카야 간판을가리켰다. - P139

(전략). 한 무리는 방학을 만끽하는 대학생들이었고 다른 무리는 허랑방탕한 삶에 일가견이 있는 중년들이었다. 더 의심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우혁은 휴대전화를 꺼내 사고 현장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새끼가 밥 먹는 자리에서 이런 걸・・・・・・ . 야, 잠깐만. 이게 사고 현장이야?"
"제네시스 밑에 검은 웅덩이 보이죠. 그거 다 피거든요."
"그런데 내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 P140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그런 사고를 일부러 내요. 실수 맞으니까 모츠나베도 시켜줘요. 죽었다 살아나서 그런가 몸이허하네."
"며칠 내내 근태도 엉망인 새끼가 이것도 시켜달라, 저것도 시켜달라야 명령하는 게 아주 습관이 되어 있어. 그럴 거면 네가 학원장 해라." - P141

"술 마시게요? 형은 내일 오전 타임부터 강의 있지 않나."
"안 마실 거면 이자카야에 왜 오냐. 하도 정신이 없어서 주문을 까먹은 거지......."
"그래도 혼자 마시기에는 많지 않겠어요? 나 술 거의 안마시는 거 알잖아." - P143

"너 지금 본가에서 지내는 중이지? 부모님이 보면 한달만에 잘린 줄 알겠다."
"부모님 관련해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사고 난 게 아버지 차거든요. 솔직히 내가 이 처지에 제네시스가 어디서 나요. 빌린 거지."
"좆됐구나." - P143

푹 자고 일어난 뒤에는 세상이 훨씬 고요해져 있었다. 내면의 소란이 가라앉았다기보다는, 긴박하게 진행되던 무대가 막을 내리고 인터미션에 접어듦으로써 참여자들에게 짧은휴식 시간을 부여하는 듯했다. - P153

"국과수 확인 결과 2.5리터가량의 혈액이 모두 선생님의 것이었고, 블랙박스 영상에서도 선생님이 치명적인 상해를 입은 정황이 확인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히 앉아 계시는게 의학적, 과학적, 상식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조사관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우혁은 혹시 정액도 검출됐나요? 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진 않았다.  - P154

조사관은 혹시 모르니 정신과 검사를 받아보라며 권유했고, 형사 합의의 중요성을 알려주었으며, 운이 나쁘면 징역형을 살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미래였지만 경찰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우혁은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진짜로 제가 가해자인가요?" - P155

"급발진이다 이거는 지금 시점에서 제가 드릴 말씀이 없구요. 두 번째 논점이, 선생님한테는 동승자가 있었어요. 이 동승자가 사라졌습니다. 목격자들의 증언과 기타 정황을 고려할 경우 가드레일 밑으로 뛰어내린 건 확실한데 발견되지 않고 있어요. 관계는 어떻게 되고, 어쩌다가 태운 겁니까?"
"모르겠는데요."
"몰라요?" - P156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가 우혁을 거실 바닥에 앉히더니 2차 취조를 시작했다.
"경찰 조사는 어떻게 됐느냐"
"별 얘기 없었습니다. 그냥 잘 모른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됐다 정도로만 대응했고요. 워낙 통상적이지 않은 사례다 보니 확언은 어렵지만 제 과실 비율이 더 높아질 수도 있다고합니다."
아버지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한동안 침묵했다.
"우혁아, 이래도 내가 널 쫓아내지 않는 이유를 아느냐?"
"공감과 연대의 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P157

아버지는 또다시 눈 감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 상태로 한참이 지나고서야 대화가 재개되었다.
"그게 아니라, 네가 아예 코빼기도 보이지 않게 되면 어디서 뭘 하고 다닐지 일절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그렇군요‘가 아니라!"
아버지의 일갈에 우혁은 시무룩하니 대답했다. - P158

"그런데 진짜 첨삭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길래 실실 웃어대냐"
"사탄의 권세와 악한 영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넌 어떻게 된게 맨날 자기 생각밖에 없어. 그 나이쯤 먹었으면 남 생각도 하고 살아라."
"형 말은 내가 사탄의 혈육이라는 거예요?" - P160

"그러면 계좌 압류당한 잠재적 전과자랑 만나는 건 괜찮은일이야? 넌 성범죄 안 저질렀으면 좀비랑도 사귀고 결혼할 거야? 어? 말 나온 김에 이건 확실히 하고 가자. 솔직히 대답해봐. 교통사고, 실수 아니지? 일부러 갖다 박은 거지?"
"아이…………… 솔직히 아니죠. 어차피 저쪽도 제정신 아닌데이때다 하고 들이댄 거죠." - P161

"죄송합니다."
"갑자기 뭐가 죄송해."
"덜떨어진 인간이라서……………."
"알면 됐고, 자살은 하지 마라. 내가 보기에 너한텐 알코올이 부족한 것 같아. 남은 거싹 부어줄 테니까 원샷으로 마셔, 중간에 끊으면 내가 너 죽일 거야."
"나, 술 거의 안 마시는 거 알잖아요. 이러나저러나 죽겠네." - P152

"그건 그렇다 치고, 형, 나 후회돼."
"잘한 거랑 별개로 후회는 해야지. 그 수준의 대형 사고를쳐놓고 생글거리고 있으면 네가 인간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걔가 태워준 보답으로 주식 종목 찍어준다고 했단 말예요."
"뭐 오른다고 했는데? 나도 좀 듣자." - P152

연락을 받고 응급실로 달려온 부모님은 아들을 보더니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으며 그의 생환이 수사학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기적일 수 있음을 인지했다. 소년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거의 본능적으로, 그러나 상식과 어긋난 직관은 인지부조화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 P142

80억 명의 절반가량은 식상한 비참에 시달리고 있지만 자신은 한 접시에 65,000원인 사시미를 즐기는 중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자신에게 좋지 않은데, 주변 사람들은 지금의 세상을 그럭저럭 기꺼워하는 듯해서 우혁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는 떠오르는 대로 말하기시작했다.
"소고기 다타키도 먹고 싶은데, 새우튀김이랑 콜라도 한 캔" - P144

"태연하게 남을 속여먹는 새끼가 그런 건 무턱대고 믿어.
도대체 넌 뭐가 문제일까?"
"문제 많죠. 너무 많아서 짚을 수가 없죠."
우혁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자신이 정말로 이상한 질문을 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알면 됐다. 그런데 재림 예수를 죽이면 심판이 시작된다는 건 새천년파 주장이잖아. 걔가 난간 밑으로 떨어졌는데 아직 멀쩡한 거 보면, 다른 조건이 있는 거 아니야?" - P148

"그런데 하느님 원래 극단적이고 인간들한테 별 관심 없잖아. 아니야?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현실에 적용하면 진짜하자가 많아서, 이거저거 덧댄 게 신학이잖아.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쓴 이유가 뭐야. 고트족 이교도들이 로마를 약탈하는데 하느님은 아무 은혜도 내려주지 않으신다. 왜냐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하려니까 혀가 길어진 거지. 난 배운 대로 말하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이거 굉장히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해석이야." - P146

김형은 잠시 뜸 들이더니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그래도, 솔직히 말해서, 대환난은 내가 죽은 다음에 왔으면 좋겠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야 안타깝긴 한데 살아있는 동안에는 안 겪고 싶어. 사실은 죽은 다음에도 심판 전까지는 천국 갈 사람이든 지옥 갈 사람이든 가만히 잠들어있는다고들 하니까………… 이번 일은 잘한 거 맞아." - P149

새천년파가 열두 명의 아이들을 살려둔 이유는 무엇일까?
대속이 무효로 돌아가더라도, 죄 없는 아이들은 여전히 구원받기 때문에?
지옥이란 대환난보다 두려운 것인가?
그렇다면 삶은 어떤가?
우혁은 그 열두 명의 절반이 새천년파 치리회가 되었다는사실을 떠올렸다. - P150

한 무리는 방학을 만끽하는 대학생들이었고 다른 무리는 허랑방탕한 삶에 일가견이 있는 중년들이었다. 더 의심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우혁은 휴대전화를 꺼내 사고 현장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새끼가 밥 먹는 자리에서 이런 걸・・・・・・ . 야, 잠깐만. 이게사고 현장이야?"
"제네시스 밑에 검은 웅덩이 보이죠. 그거 다 피거든요."
"그런데 내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 P140

"하여간 손 많이 간다. 지금 어디야? 집? 병원? 경찰서?"
우혁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개포동역 5번 출구요. 급한 일은 다 처리했어요. 지금은한가해요."
"근처네 이자카야 주소 찍어줄 테니까 올 수 있으면 걸어와라. 나도 15분쯤 뒤에 퇴근할 것 같다." - P138

그는 자신이 어떤 남자의 몸뚱이를 개포동역에서 이자카야 앞까지옮겨다 주는 짐꾼이라고 상상하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김형은 가게 옆 골목에서 전자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의외로 멀쩡하네? 사고 크게 났다길래 팔 하나쯤 부러졌을 줄 알았는데."
"지금 그게 문제예요. 죽어야 하는데 멀쩡해서." - P139

우혁은 뻣뻣이 굳은 목을 가까스로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포동역 바로 앞 사거리는 유리 조각이 비죽비죽 솟아 파도 같은 형상을 이루며 그 골짜기 사이사이로 불길이내달리는 형상이었다. 불길 한가운데에 선 여자. 여자의 얼굴은 시간을 넘나들며 점차 어리게 변해간다. - P135

"얘는 술도 잘 안 마시는 놈이 항상 취해 있는 것 같아 미친소리 하지 말고, 메뉴 추가해줄 테니까 조용히 먹기나 해라."
우혁은 소고기다타키와 새우튀김과 콜라를 먹었고 종말론이야기도 했다. 핵심만 간추렸지만 김 형은 별다른 부연 설명없이도 잘 이해하는 기색이었다. - P145

한참을 헐떡였지만 장소는 여전히 횡단보도 앞이었고 사이렌 소리라 착각했던것은 휴대전화 벨소리였다. 시간은 10시 40분. 전화를 받자마자 김형이 불쑥 물었다.
"야, 이 새끼야. 일이 어떻게 됐길래 이제야 연락을 받아 진짜 죽었나 싶어서 다섯 번도 넘게 전화했다. 사고라도 났냐?"
높다란 산등성이를 굽이굽이 돌아오다가 드디어 평지로 내려갈 때처럼 머리가 아찔해지더니 감각이 한순간에 밀려 들어왔다. - P137

하지만 아버지, 현세의 모든 영광은 종말 앞에 아무 의미가 없단 말입니다.………….
아버지는 한동안 원색적인 모욕을 가하더니 그만 입을 다물었고, 거실 장식장에서 위스키 병을 쥐어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우혁에게서 천천히 고개를 돌린 어머니는 거실 텔레비전에 전원을 넣고 소파에 웅크려 앉았다. - P133

그는 왁자지껄한 텔레비전 소리가 곧장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방으로 들어갔다. 고장 난 휴대전화에서 빼낸 유심 칩을 구형 공기계에 끼워 넣으려는데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고, 그림자마저 동작에 맞붙지 못하는 듯했다. 내일은 멀쩡히 출근하겠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 없었다. - P134

"새천년파인지 뭔지에는 언제부터 몸담았던 거니?"
"종교 생활은 해본 적이 없는데요. 저는 있는 사실만 이야기한 겁니다. 차량은 사실상 전손에 온통 피범벅인데 운전자는 멀쩡하다는 게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새천년파는 제가 아니라 위협 주행을 한 쪽입니다."
우혁은 고개를 수그리면서도 기본적인 대전제는 양보하지 않았다. 양보할 수가 없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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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느끼지 못한 채 식사를 끝냈다.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디저트를 드시겠느냐고 묻는다.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고 계산을 치른 후 레스토랑을 나왔다.
7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서둘러 정면 현관으로 나가는데
"손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걸음을 멈췄다. 검은 옷차림의 중년 남자가 뛰어왔다.
"외출하시는 건가요?" - P403

다에는 후진으로 아우디를 볼보 옆에 세우고 우산을 펼친다음 차에서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땅이 질척거린다. 자동차 타이어도 흙투성이였다. 왜 주차장 바닥을 포장하지 않는지. 별장 주인인 다케히사에게 화가 났다.
대문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당기자 아무런저항 없이 문이 열렸다. - P404

거실 문을 열었다. 실내가 캄캄했다. 손으로 벽을 더듬어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거실이 환하게 밝아졌다.
창가에 있는 흔들의자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케히사다.
다에는 헉, 숨을 삼켰다. 다케히사의 가슴 아랫부분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야. 머리 한구석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왼손으로 입을 막은 채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 P405

"어쩔 수 없잖아. 구사나기도 공무원인걸."
"아하, 그렇군. 위에서 하는 일에는 가타부타하지 않는다.
이건가?"
"무슨 소리야. 자네가 공무원의 애로를 알아?"
구사나기가 주먹을 불쑥 내밀었다. - P406

다니우치가 한쪽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폭우로 산사태가 났나봐. 산 밑으로 내려가는 도로 일부의 통행이 금지되었대."
"그 외길이 막혔단 말이야?"
구사나기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떠올렸다.
"그런가 봐. 다행히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발이 묶이게 생겼어." - P407

그때 구마쿠라의 제복 안에서 휴대 전화 벨소리가 들렸다.
실례하겠습니다. 하며 구마쿠라가 전화를 받았다.
"나야. 그래, 무슨 일이야? 도로가 또 말썽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구마쿠라의 조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의 다음 말에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고 말았다.
"뭐, 살인 사건?" - P409

구사나기는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기면서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은 오타카.
읍사무소에서 총무과장으로 일한다고 한다.
"용건이 뭡니까?"
구사나기가 물었다.
"제가 말씀드리기는 좀……………. 읍장님이 직접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타카의 말투가 어딘지 석연치 않았다. - P410

"아까 통화하는 걸 듣고 짐작하셨겠지만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서로 신고가 들어왔어요. 부모님이 살해당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장소는요?"
"이 근처입니다."
구마쿠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P411

"왜 그 얘기를 저한테 하시는 거죠?"
구마쿠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경시청에 계신 분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겠죠. 현경관할이니까요. 다만, 아시다시피 현재 산 밑으로 내려가는 도로의 통행이 금지된 상태라서 현경 본부는 물론이고 우리 서에서도 사건 현장에 사람을 보내기 어렵습니다. 날씨가 이래서 헬리콥터를 띄우는 것도 무리고요."
"그럼 지금도 신고인 혼자서 현장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별장지 인근에 파출소가 있어서 그곳 경찰이 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 P412

"그건 그렇지만, 도로가 불통인데 어쩔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 서에서는 현장으로 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라면 가능하죠."
"네?"
"서장님이 직접 현장으로 가시겠다는 거야."
다니우치가 말했다.
"서장님이요?"
그러자 구마쿠라가 가슴을 젖히며 말했다.
"서장이라도 경찰은 경찰이니까요." - P413

"현장에 동행해 달라는 말씀입니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구마쿠라가 양손을 무릎에 놓았다.
"경찰서장이 지척에 있으면서 아무 대처도 못한다는 건 아무래도 좀……………."
곤란하겠지, 하고 구사나기는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와서 살인 현장에 발을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 P414

4

(전략).
구사나기와 구마쿠라는 작업복 차림이었다. 호텔에서 빌린 것이다. 그리고 현장에 머리카락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모자를 썼다. 물론 장갑도 준비했다.
별장은 목조 건물이었다. 날이 어두운 데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어 전체 모습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대지 넓이만도 줄잡아 백 평은 될 듯했다. 가쓰라기가의 별장이라는 것은오는 동안 들어서 알고 있었다. - P415

구사나기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역한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오물과 피가 섞인 듯한 냄새다.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은 순간 구사나기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뒤따라 들어온 구마쿠라의 입에서도 으악,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창가에 놓인 흔들의자다. 거기에 몸집이 자그마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긴 바지에 폴로셔츠와 조끼를 입은 남자는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아랫부분은 시커먼 피로 물들어 있었다. - P418

구사나기는 그 위치에서 남자의 가슴에 난 상처를 관찰했다. 마치 도려내기라도 한 듯이 구멍이 뚫려 있었다. 피부도그 안의 장기도 엉망으로 뭉그러진 듯했다. 그 상흔의 정체가 무엇인지 구사나기는 짐작이 갔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사체를 본 적이 있었다.
남자는 예순에서 여든 사이 주름투성이 잿빛 얼굴이 거북이를 연상시켰다. - P419

"다케와키 가쓰라 선생의 존함은 저도 들어서 압니다. 그렇군요, 그 남자분이 다케와키 선생이었군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구마쿠라가 매우 엄숙하게 말했다.
가쓰라기 다에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그건 아버지가 집 밖에서 사용하시던 이름이라서 제게는 남의 이름처럼 들리거든요." - P420

가쓰라기 다에는 잠시 주저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혀로입술을 축였다.
"어젯밤, 엄마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아버지가 도리카이 슈지라는 사람을 별장으로 부르겠다고 하셨다는 거예요. 아버지의 제자로 지금은 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분이에요."
"그 사람을 왜 부르려고 하신 겁니까?"
구마쿠라가 다시 물었다.
"항의하시겠다고요." - P421

구마쿠라의 물음에 가쓰라기 다에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워낙 경력이 오래다 보니 쓰신 작품도 방대해요. 개중에는 발표하지 않은 것도 많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만큼 어느 작품이 당신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제자의작품과 혼동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도리카이 씨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 P422

가쓰라기 다에는 고개를 끄덕하고 나서 잔에 담긴 물을 머금고 숨을 몇 번 크게 쉬더니 입을 열었다.
이 호텔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경, 체크인을 하고 방에들어가서 부모님 휴대 전화와 별장 전화로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부모님이 휴대 전화를 지니지 않은채 외출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잠시 방에서 쉬기로 했다. - P423

"부모님은 누구에게 원한을 살 만한 분들이 아니에요. 다만 예전에 별장을 털린 적이 한 번 있습니다. 그림과 골동품등을 도난당했죠. 별로 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요. 3년쯤 전의 일이에요. 아마 경찰서에 도난신고를 했을 거예요."
"범인은 잡았나요?"
가쓰라기 다에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잡히지 않았어요."
약 한 시간 후, 가쓰라기 다에는 참고인 조사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P424

5

(전략).
"난들 좋아서 이번 사건에 끼어들었겠어? 다니우치의 체면을 세워 주려는 거지. 그 친구 입장에서 생각해 봐. 평생의 기념이 되어야 할 결혼식 날에 산사태로 도로가 막히지 않나,
근처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나. 신부랑 알콩달콩 지내기는커녕 여태껏 관계자들과 협의 중이래."
"하기야 다니우치가 딱하게 된 건 사실이지." - P425

"그러게 말이야. 나는 그 도리카이인가 하는 남자가 의심스러워. 별장을 둘러본 바로는 범행 목적이 뭔가를 훔치려는것 같지는 않았어. 말다툼을 벌이던 중 발끈한 다케히사 씨가 산탄총을 꺼내서 위협하려다가 오히려 상대에게 총을 빼앗겨 당한게 아닐까 싶어."
"총이 피해자 것인가?"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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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안가

겉으로 보기에 올드리치 에임스는 그냥 평범하게 불행한 CIA 요원이었다. 그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결혼 생활은 느리고 잔잔하게 미끄러지듯이 무너지고 있었다. 돈이 충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P197

애칭이 럭인 에임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냉소주의가 단단한 염증이 되어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그 속도가 너무 느려서 아무도, 특히 에임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때는 에임스도 큰 꿈을 꾸었다. 1941년에 위스콘신주 리버 폴스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대에 시리얼 상자에 그려진 목가적인 꿈같은 근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나름대로 우울증, 알코올 의존중, 조용한 절망도 존재하는 삶이었으나 그런 것은 모두 가려졌다. 그의 아버지는 학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으나 어쩌다 보니 버마에서 CIA를 위해 일하게 되었다. - P198

에임스는 머리가 좋고 상상력이 풍부했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의희망과 달랐다. 그가 생각하는 응분의 보상을 그에게 주지도 않았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성적 불량으로 퇴학당한 뒤 그는 한동안 배우 아르바이트를 했다.  - P198

CIA의 하급 요원 훈련 코스의 목적은 복잡하고 힘든 첩보 세계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애국심에서 우러난 헌신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효과가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임스는 때로는도덕을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음을 배웠다. 미국 법이 다른 나라의 법보다 우선한다는 것, 욕심 많은 스파이가 이념이 투철한 스파이보다 더 가치가 높다는 것도 배웠다 - P199

에임스는 1972년 워싱턴으로 돌아와 러시아어 강좌를 듣고, 4년동안 소련-동유럽부에서 일했다. 그곳이 행복한 직장은 아니었다.
리처드 닉슨이 1972년 워터게이트 강도 사건에 대한 연방 조사를막기 위해 CIA를 동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지난 20년 동안 CIA가 한 일에 대한 일련의 조사가 시작되면서 CIA는 위기에 빠졌다. <수치스러운 비밀>이라고 불리게 된 조사 결과 보고서에는 CIA의 권한을 한참 벗어나는 불법적인 활동들이 줄줄이 밝혀져 있었다. - P201

1982년 중반 무렵 에임스는 불만 많고, 외롭고, 성마른 사람으로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게으르고 술을 많이 마셔서 이런 추락을 막기 위해 뭔가 조치를 취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다 로사리오가 그의 인생에 등장하면서 반짝 불이 켜졌다. - P201

그녀와 릭 에임스는 외교가의 디너파티에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아 현대 문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그의 아파트로 갔다. 로사리오는 에임스가 미국의 평범한 외교관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어느 정도 돈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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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 1--단장 1


"자크가 같이 와 줘서 다행이야."
마을을 떠나 한참을 걸어왔을 때, 아레스가 불쑥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정말 나로 괜찮아? 제대로 된 어른이 더 낫지 않았을까?"
나는 속으로 계속 생각하던 말을 꺼냈다. 14세 소년 둘이서 왕도로 향하는 것은 조금 무모하지 않을까 계속 생각한 것이다. - P114

타인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는 아레스조차 속으로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느낀 것 같았다.
"뭐, 마물은 강하니까. 우리 부모님도 살해당하셨고, 누가 싸우고 싶겠어."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모험가다. 마물과 싸우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계셨지만, 마왕군과의 큰 싸움 중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 P115

아레스는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밤에 일어나면 가끔씩 어머니가 우시는 모습을 볼 때가 있었어. 사실은 용사 따위는 되지 않기를 바라셨을 거야."
그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나의 양부모님이기도 한 아레스의 부모님은 예언자가 남긴 예언의 신빙성을 의심했다. 되도록이면 아레스가 용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 P115

여정은 순조로웠다. 도중에 들른 마을들에서 아레스는 어른처럼 능숙하게 협상을 하더니 얼마 안 되는 돈과 맞바꿔 물과 식량을 손에 넣었다.
마물과 조우해도 최대한 싸움을 피했고, 어떻게 해도 피할 수없을 때에만 싸웠다.
싸울 때도 나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 냉정하게, 그리고 착실하게 싸움을 진행했다. 공격 마법과 회복 마법을 정확하게 사용해 칼로 숨통을 끊는 그 모습은 역시 용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P116

"대단하다. 아레스 혼자라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중략).
"자크도 날 너무 치켜세운다니까. 뭔가를 혼자 계속하는 건 힘든 일이야. 네가 있어 주니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거지. 검을 배웠을 때도, 마법을 공부했을 때도, 회복 마법을 배웠을 때도 그래. 처음에는 다른 무리들과 함께 시작했지만, 잘 안 된다는 걸알고 나면 한 명 한 명 빠져나가.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건 늘 너와 나뿐이었지." - P117

"아레스가 잘하지 못한다는 건 상상이 안 가. 하지만 나도 뭔가하나쯤은 배우고 싶었는데."
그것은 진심이었다. 적어도 뭔가 하나쯤은 동갑인 사촌을 따라잡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늘 잘 되진 않았다.
"나도 잘하지 못하는 것 정도는......"
거기까지 말하고, 아레스는 멈춰 섰다. 나도 뭔가를 알아차리고 멈춰서서 주위의 상황을 살폈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 P118

마인. 마왕의 권속인 이들은 사람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힘도 마력도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내가 바로 도망친 것은 마인에 대한 공포도 있었지만, 아레스의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였다. - P118

처음에는 여유를 보이던 마인도 공격을 하지 않는 아레스의 모습에 드디어 귀찮아진 것 같았다.
"방어만은 훌륭하구나. 하지만 마법은 어떨까?"
쉽게 공격이 닿지 않는 것에 초조해진 마인이 검으로 하는 공격을 멈추고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 마법을 발동시키려 했다.
그 순간을 아레스는 놓치지 않았다. - P119

그리고 날카로운 아리스의 일격에 맞아버린 마인은 마침내 검을 풀어뜨리고 말았다.
제그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마인의 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레스는 마인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휘둘다 - P120

바람 마법을 마인의 눈을 향해 날렸다.
"칫!"
마법은 회피해 버렸지만, 그 사이 아레스는 뒤로 물러나 간격을 벌릴 수 있었다.
마인은 왼손을 파고들던 검을 뽑아 숲속에 내팽개쳤다. 왼손은축 늘어져 있다. 저 상태로는 만족스럽게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 P121

나는 아레스를 향해 내 검을 던졌다.
마인이 오른손 손톱을 치켜들었다.
(중략).
"・목숨도 내주마・・・・・・ 하지만, 너도 길동무다・・・・・・・"
마인은 검에 꿰뚫린 상태로, 입안에서 엿보이는 커다란 송곳니로 아레스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아레스의 목에서 거세게 피가 뿜어져 나왔다. - P122

-fragment 2--단장 2

자크는 내가 여섯 살 때 우리 집에 왔다. 아버지의 여동생이자크의 어머니였기에 그 녀석은 나의 사촌 형제에 해당했다. 나이도 똑같고 키도 비슷해서 나는 좋은 놀이 상대가 생겼다며 기뻐했다.
자크의 부모님은 모험가를 하고 있어 그런지 체격이 아주 좋았다. - P124

자크의 부모님은 일주일 정도 집에 머무른 뒤 마왕군과 싸우기위해 떠나게 되었다.
들어보니 마리카국이 마왕군의 침략을 받아 큰 싸움이 벌어졌으니, 그곳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잠시 동안은 평화로워진다고 했다.
"잠시? 계속 평화로워지는 게 아니라?" - P125

목표는 자크의 아버지 같은 전사. 그가 보여주었던 그 검술을 모두가 목표로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레스, 질렸으니까 다른 거 하자."
한 달쯤 지나자 친구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맞아, 아레스만 너무 강하니까 재미없어."
다른 친구들도 거기에 찬성했다.
아무래도 연습을 하면서 실력에 차이가 벌어지는 것이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내가 제일 잘했고, 친구들과 많은 차이가 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P126

우리 집은 촌장 집안이라 아버지도 어머니도 학문에 뜻을 두셨었고, 덕분에 자크와 함께 읽고 쓰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글씨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집에 있던 여러 가지 책을 읽게 되었다. 자크가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꽤 나중의 일이었을 것이다.
읽은 책 속에 용사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이야기에 따르면 용사는 검뿐만 아니라 마법사와 같은 공격 마법, 성직자와 같은 회복 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 P127

"용사? 그래, 용사라."
신부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정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께 허락을 받고 오거라. 그러면 간단한 기초는 알려주마. 원래라면 성직자가 될 사람만 알려줘야 하는데, 시대가 시대이니 말이야." - P128

곧바로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회복 마법? 그건 선택된 인간이 아니면 쓸 수 없을 텐데.
뭐, 신부님이 기초를 알려주신다고 했다면 시험해 보려무나."
아버지는 내가 회복 마법을 쓸 수 있게 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쨌든 허락은 떨어졌다. - P128

"신의 존재를 느끼면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면."
(중략).
"집에서 하는 밭일은 힘드니까. 신부님처럼 기도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친구의 동기는 불순하다고 생각했지만, 기도하는 방법은 알려주었다. (중략). 이유는 똑같다. 신부라는 일이 ‘폼나고 편하니까‘라는 것이었다. - P129

이 나라의 뮬러 장군이 이끄는 군이 분전하여 마왕군을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도착이 늦은 탓에 마리카국은 멸망했다.
의용병으로 전선에서 싸우던 모험가들은 누구 한 명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그 소문을 들은 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와 자크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자크는 우리 아이가 될 거란다." - P130

미미하지만 신의 기적을 일으킨 다음 날 아침, 교회에 가서 신부님께 그것을 보여드렸다.
"대단하구나. 솔직히 말하면 난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전 확실히 신의 기적이 맞단다."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신부님은 나를 칭찬해 주셨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강한 힘이 느껴지진 않는구나. 아마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초보 회복 주문 정도일 거다. 그래도 계속할 거니?"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P131

(전략).
다만 신부님 말씀대로 한계는 금세 찾아왔다. 초급 회복 마법밖에 쓸 수 없었고, 그 이상의 신의 기적은 행사할 수 없었다.
솔직히 이대로는 아무 쓸모가 없을 것 같아 나는 공격 마법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공격 마법을 배워야 할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자크가 이 이상 회복 마법을 배워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P132

우리가 공격 마법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마을에 졌다. 그러자 또 친구들이 함께 공부하고 싶다며 찾아왔다.
단순히 ‘마법을 쓸 수 있는 인간은 대단하다‘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 P132

결국 내가 처음으로 마법 영창에 성공한 것은 열두 살 때였다.
5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자크가 함께 공부해 주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자크는 공격 마법도 습득하지 못했다. - P133

그럴 때, 절망적인 일이 벌어졌다.
마을에 예언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 마을에서 마왕을 물리칠 용사가 나타난다.』
수많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예언자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지 마! 제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 P134

결국 나는 용사로 추대되었지만, 묵묵히 받아들였다.
부모님과 상의해 일단 왕도로 가 팔룸 학원에 들어가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부모님만은 냉정하게 판단해 주셨고, 그들은내가 당장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는 용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계셨다. - P134

fragment 3-단장 3

결과적으로 아레스는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마인이 바로 죽어버린 데다 목에 난 상처도 생각보다 증상은 아니었고 회복 주문으로 상처는 막을 수 있었다. - P136

"미안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아레스가 사과했다.
"신경 쓰지 마. 난 지금 세상을 구하려는 용사를 구하고 있잖아. 그럼 엄청난 영웅 아니야?"
농담으로 얼버무렸지만,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 P137

아레스의 상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었다.
배의 상처가 곪은 것인지 고열을 내기 시작했고 결국 걷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나는 대부분의 짐을 버리고 아레스를 업고 걸어갔다.
자신과 같은 체격의 사람을 업는 것은 괴롭다. 금세 체력이 바닥난다.
등에 업고 걷다가 바로 쉬는 것을 반복했다. - P137

근처에 강이나 수도 시설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숲이너무 험해서 안까지 들어갈 수도 없었다. 물의 소중함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지고 있던 물은 어제 아레스의 상처를 씻는 데거의 다 사용해 버린 탓에 더는 없었다.
"물이여!"
옛날 아레스와 함께 연습한 물의 마법 영창을 시도해 보았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기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P138

밤이 찾아오고, 주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중략). 불이 필요했다.
"불이여!"
문구만 아는 불의 마법을 시전했지만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레스의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상처가 부패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무서워서 상처를 덮은 천을 들어 올려 그것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 P139

"어떻게 해야 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절망감에 그만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죽여줘......."
아레스가 신음하듯 그렇게 말했다.
"난 이미 틀렸어. 이대로라면 자크 너까지 죽을 거야. 게다가 너무 괴로워. 내 몸이 썩어가는 것도 무서워. 부탁이야, 내 검의로 날 찔러줘." - P140

아레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통증을 감내하듯 얼굴만 몇 번씩 찡그릴 뿐이다.
"나 혼자 왕도에 가서 뭘 어쩌라는 거야? 넌 용사잖아? 용사가죽어버리면 세상은 끝인 거잖아!"
"....결국 난 용사가 아니었던 거야. 예언자도 이 마을에서 세계를 구할 용사가 나타난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지. 나라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어. 게다가 난 예언자의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아니라 어쩐지 자크가 떠올랐어." - P142

fragment 4-단장 4


그 후로 8년이 흘렀다.
이 숲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하늘을 뒤덮을 만큼 거대하고 울창한 나무들, 이유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는 이 분위기.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마왕은 처리했지만 아직도 마물의 수는 많았고, 인적은 전무했으며, 숲을 빠져나가는 길은 황폐했다. - P144

"거기서 뭐 하는 거지, 아레스? 이런 곳에서 한눈팔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왕도로 돌아가 마왕 토벌 보고를 해야지. 잔당도많이 남았다고 하고, 아직 우리의 힘은 필요해"
길에서 벗어나 숲으로 들어간 나에게 레온이 말을 걸었다.
그는 귀가를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차기 백작가 당주로서 큰공을 세웠으니 가슴을 펴고 당당히 왕궁에 보고를 하고 싶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 P144

레온은 잠시 말을 끊고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혹시 왕이 되는 것이 불안한가? 그래,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평민 출신인 인간이 왕이 되면 반대하는 귀족들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걱정이라면 내가 붙어있으니까 괜찮다! 백작가가 전력을 다해 지원하마. 누구에게도 불평이 나오지 않게 만들겠어." - P145

"미안 나는 아레스가 아니야. 사실은 용사가 아니었어."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서야 입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네가 아레스가 아니면 누구라는 거야?"
레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크, 내 진짜 이름은 자크라고 해. 지금까지 속여서 미안해‘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P146

"내가 용사를 죽였으니까. 그래서 내가 용사를 이어받아야 했어. 그 책임이 있었어."
용사를 죽인 책임을 지기 위해 나는 여기까지 왔다.
"아레스가 죽은 건 마인 때문이에요. 당신 잘못이 아닌데요?"
마리아가 말했다.
"......아니, 아레스가 죽은 건 나 때문이야. 내 손에는, 아레스를 검으로 찔렀을 때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 그리고 난 자크로서 마왕을 토벌한 게 아니야. 아레스로서 마왕을 쓰러뜨렸지. 자크로 있었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거야." - P147

"그러니까, 그 공적을 모두 아레스 것으로 돌리고 넌 떠나겠다고?"
솔론의 말끝마다 분노가 느껴졌다.
"원래 아레스에게 돌아갔어야 할 공적이야.‘ - P147

"용사는 너야! 아레스는 도중에 쓰러졌고! 그게 사실이지! 게다가 예언자의 말은 나도 알고 있어. 이 마을에서 마왕을 물리칠 용사가 나타난다‘라고 했지. 정확히 아레스를 가리킨 게 아니야. 처음부터 용사는 너였던 거라고!"
현자인 솔론의 지적은 옳다. 나도 그것은 알고 있다.
"나는 검도 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했던 평범한 사람이야. 용사가 될 만한 그릇이 아냐.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용사는 아레스야!" - P148

"정말 떠나는 건가요. 아레스... 아니, 자크."
마리아가 평소와 같은 꾸며낸 성녀의 얼굴이 아닌, 진짜 얼굴로 진심을 담아 날 걱정해 주고 있었다.
"가지 말아요, 자크. 제가 이렇게 말리고 있잖아요. 제 부탁을 거절하는 건 신을 향한 모독이나 다름없는데요?" - P149

"국왕 폐하는 아직 연로하지 않으시다. 서둘러 차기 국왕을 결정할 필요는 없지. 언제든지 돌아와라. 나는 널 기꺼이 맞아 줄거다."
"고마워, 레온, 나는 너라면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당연하지." - P150

솔론이 희미하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솔론. 당신은 어릴 때부터 친구가 한 명도 없었잖아요."
마리아가 놀렸다. 솔론은 그것을 눈으로 잠시 비난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난 네가 어디를 가더라도 반드시 찾아내서 데리고 올 거야. 친구니까." - P151

알렉시아의 장


"왔어?"
뻥 뚫린 방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솔론이 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자주색 현자의 로브를 걸치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올 것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어째서 아레스가 용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려준거죠?"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일이니까." - P152

"우리가 이 나라로 돌아온 후, 너에게는 수차례 혼담이 들어왔어. 그 필두는 레온이었지. 하지만 너도 레온도 거절했어. ‘죽은 용사야말로 왕녀의 약혼자이며, 아직 오래 지나지도 않았다‘라고하면서."
혼담은 레온뿐만이 아니었다. 솔론 역시 후보로 거론되었지만그 역시 거절했다. 나는 날아드는 혼담을 계속 거절했고, 레온과 솔론은 어째서인지 그것을 지지해 주었다.  - P153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였겠지. 폐하께서 가만히 두고 보시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넌 용사의 공적을 문헌으로 정리하는사업을 시작했다. 그 녀석을 찾기 위해."
맞는 말이었다. 나는 국가 시책으로서 용사의 공적을 문헌에정리할 것을 제안했고, 직접 나서서 그 조사를 시작했다.
그가 살아 있다고 믿고하지만 설마 그가 아레스가 아니었다니. - P153

"하지만 말이지. 그 거짓말을 셰라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어쩔래?"
"어쩔래......라니, 모르고 계시잖아요."
"알아. 반드시 알고 있을걸."
솔론은 단언했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죠?"
"한 번 더 셰라를 만나러 가봐. 그럼 그쪽에서 알려줄 거야." - P155

"지금으로서는 이 방에서 전이해서 이 방으로 돌아오는 것못해."
솔론은 마치 결함인 것처럼 말했지만 충분히 대단한 성과였다. 획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 P156

솔론이 말한 대로 셰라가 사는 촌장의 집까지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다. 도중에 오고 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의아한 눈초리를 받긴 했지만 솔론은 그들의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촌장 집에 도착했고, 그의 재촉에 나는 집 문을 두드렸다.
"네... 어머?"
나온 것은 세라였다.
"또 오셨군요...... 오실 줄 알았습니다." - P157

"우리가 왜 여기에 왔는지도 짐작하고 있겠지."
"네, 자크 말이죠."
그녀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
"알고 있답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말해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 사실은 그 아이에게 그 자리에서 말했어야만 했는데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건가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설마 그렇게 일찍부터 알고 있있을 줄은 몰랐다. - P158

"자크가 이 집에 돌아왔을 때, 전 순간 아레스가 돌아온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아이의 상냥하고 슬픈 눈빛을 보고 곧바로 자크라는 걸 알았죠. 그러고는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아레스가 마왕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아레스도 마인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라고.
그러고는 저에게 저 검을 건네주었어요."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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