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구급차가 왔으며 경찰도 왔다. 질문을 몇 가지 듣긴했으나 그 내용은 의식이 남아 있는지, 신상 명세가 어떻게되는지, 가족 연락처를 기억하는지 체크하는 선에서 그쳤다. 피범벅이 되어 웅크린 사람에게 깊은 이야기를 듣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 P131

연락을 받고 응급실로 달려온 부모님은 아들을 보더니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으며 그의 생환이 수사학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기적일 수 있음을 인지했다. 소년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거의 본능적으로, 그러나 상식과 어긋난 직관은 인지부조화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 P132

"하지만...... 교재를 가지러 파주에 간다고 했지 않냐!"
여기서부터는 항변이 불가능했다. 우혁은 자업자득의 무게를 절감하며 쏟아지는 비난을 감내했다.  - P133

아버지는 한동안 원색적인 모욕을 가하더니 그만 입을 다물었고, 거실 장식장에서 위스키 병을 쥐어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우혁에게서 천천히 고개를 돌린 어머니는 거실 텔레비전에 전원을 넣고 소파에 웅크려 앉았다. - P133

그는 왁자지껄한 텔레비전 소리가 곧장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방으로 들어갔다. 고장 난 휴대전화에서빼낸 유심 칩을 구형 공기계에 끼워 넣으려는데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고, 그림자마저 동작에 맞붙지 못하는 듯했다. 내일은 멀쩡히 출근하겠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 없었다. - P134

우혁은 뻣뻣이 굳은 목을 가까스로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포동역 바로 앞 사거리는 유리 조각이 비죽비죽 솟아 파도 같은 형상을 이루며 그 골짜기 사이사이로 불길이내달리는 형상이었다. 불길 한가운데에 선 여자. 여자의 얼굴은 시간을 넘나들며 점차 어리게 변해간다. - P135

 떨어지는 별의 꼬리가 우혁을 낚아챘다. 그는 산 채로 타오르는 육신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을 헐떡였지만장소는 여전히 횡단보도 앞이었고 사이렌 소리라 착각했던것은 휴대전화 벨소리였다. 시간은 10시 40분, 전화를 받자마자김형이 불쑥 물었다.
"야, 이 새끼야. 일이 어떻게 됐길래 이제야 연락을 받아 진짜 죽었나 싶어서 다섯 번도 넘게 전화했다. 사고라도 났냐?"
높다란 산등성이를 굽이굽이 돌아오다가 드디어 평지로 내려갈 때처럼 머리가 아찔해지더니 감각이 한순간에 밀려 들어왔다. - P137

"하여간 손 많이 간다. 지금 어디야? 집? 병원? 경찰서?"
우혁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개포동역 5번 출구요. 급한 일은 다 처리했어요. 지금은한가해요."
"근처네. 이자카야 주소 찍어줄 테니까 올 수 있으면 걸어와라. 나도 15분쯤 뒤에 퇴근할 것 같다." - P138

. 그는 자신이 어떤 남자의 몸뚱이를 개포동역에서 이자카야 앞까지 옮겨다 주는 짐꾼이라고 상상하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김형은 가게 옆 골목에서 전자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의외로 멀쩡하네? 사고 크게 났다길래 팔 하나쯤 부러졌을 줄 알았는데."
"지금 그게 문제예요. 죽어야 하는데 멀쩡해서."
우혁은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며 엄지로 이자카야 간판을가리켰다. - P139

(전략). 한 무리는 방학을 만끽하는 대학생들이었고 다른 무리는 허랑방탕한 삶에 일가견이 있는 중년들이었다. 더 의심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우혁은 휴대전화를 꺼내 사고 현장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새끼가 밥 먹는 자리에서 이런 걸・・・・・・ . 야, 잠깐만. 이게 사고 현장이야?"
"제네시스 밑에 검은 웅덩이 보이죠. 그거 다 피거든요."
"그런데 내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 P140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그런 사고를 일부러 내요. 실수 맞으니까 모츠나베도 시켜줘요. 죽었다 살아나서 그런가 몸이허하네."
"며칠 내내 근태도 엉망인 새끼가 이것도 시켜달라, 저것도 시켜달라야 명령하는 게 아주 습관이 되어 있어. 그럴 거면 네가 학원장 해라." - P141

"술 마시게요? 형은 내일 오전 타임부터 강의 있지 않나."
"안 마실 거면 이자카야에 왜 오냐. 하도 정신이 없어서 주문을 까먹은 거지......."
"그래도 혼자 마시기에는 많지 않겠어요? 나 술 거의 안마시는 거 알잖아." - P143

"너 지금 본가에서 지내는 중이지? 부모님이 보면 한달만에 잘린 줄 알겠다."
"부모님 관련해서는,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사고 난 게 아버지 차거든요. 솔직히 내가 이 처지에 제네시스가 어디서 나요. 빌린 거지."
"좆됐구나." - P143

푹 자고 일어난 뒤에는 세상이 훨씬 고요해져 있었다. 내면의 소란이 가라앉았다기보다는, 긴박하게 진행되던 무대가 막을 내리고 인터미션에 접어듦으로써 참여자들에게 짧은휴식 시간을 부여하는 듯했다. - P153

"국과수 확인 결과 2.5리터가량의 혈액이 모두 선생님의 것이었고, 블랙박스 영상에서도 선생님이 치명적인 상해를 입은 정황이 확인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히 앉아 계시는게 의학적, 과학적, 상식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조사관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우혁은 혹시 정액도 검출됐나요? 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진 않았다.  - P154

조사관은 혹시 모르니 정신과 검사를 받아보라며 권유했고, 형사 합의의 중요성을 알려주었으며, 운이 나쁘면 징역형을 살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미래였지만 경찰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우혁은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진짜로 제가 가해자인가요?" - P155

"급발진이다 이거는 지금 시점에서 제가 드릴 말씀이 없구요. 두 번째 논점이, 선생님한테는 동승자가 있었어요. 이 동승자가 사라졌습니다. 목격자들의 증언과 기타 정황을 고려할 경우 가드레일 밑으로 뛰어내린 건 확실한데 발견되지 않고 있어요. 관계는 어떻게 되고, 어쩌다가 태운 겁니까?"
"모르겠는데요."
"몰라요?" - P156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가 우혁을 거실 바닥에 앉히더니 2차 취조를 시작했다.
"경찰 조사는 어떻게 됐느냐"
"별 얘기 없었습니다. 그냥 잘 모른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됐다 정도로만 대응했고요. 워낙 통상적이지 않은 사례다 보니 확언은 어렵지만 제 과실 비율이 더 높아질 수도 있다고합니다."
아버지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한동안 침묵했다.
"우혁아, 이래도 내가 널 쫓아내지 않는 이유를 아느냐?"
"공감과 연대의 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P157

아버지는 또다시 눈 감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 상태로 한참이 지나고서야 대화가 재개되었다.
"그게 아니라, 네가 아예 코빼기도 보이지 않게 되면 어디서 뭘 하고 다닐지 일절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그렇군요‘가 아니라!"
아버지의 일갈에 우혁은 시무룩하니 대답했다. - P158

"그런데 진짜 첨삭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길래 실실 웃어대냐"
"사탄의 권세와 악한 영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넌 어떻게 된게 맨날 자기 생각밖에 없어. 그 나이쯤 먹었으면 남 생각도 하고 살아라."
"형 말은 내가 사탄의 혈육이라는 거예요?" - P160

"그러면 계좌 압류당한 잠재적 전과자랑 만나는 건 괜찮은일이야? 넌 성범죄 안 저질렀으면 좀비랑도 사귀고 결혼할 거야? 어? 말 나온 김에 이건 확실히 하고 가자. 솔직히 대답해봐. 교통사고, 실수 아니지? 일부러 갖다 박은 거지?"
"아이…………… 솔직히 아니죠. 어차피 저쪽도 제정신 아닌데이때다 하고 들이댄 거죠." - P161

"죄송합니다."
"갑자기 뭐가 죄송해."
"덜떨어진 인간이라서……………."
"알면 됐고, 자살은 하지 마라. 내가 보기에 너한텐 알코올이 부족한 것 같아. 남은 거싹 부어줄 테니까 원샷으로 마셔, 중간에 끊으면 내가 너 죽일 거야."
"나, 술 거의 안 마시는 거 알잖아요. 이러나저러나 죽겠네." - P152

"그건 그렇다 치고, 형, 나 후회돼."
"잘한 거랑 별개로 후회는 해야지. 그 수준의 대형 사고를쳐놓고 생글거리고 있으면 네가 인간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걔가 태워준 보답으로 주식 종목 찍어준다고 했단 말예요."
"뭐 오른다고 했는데? 나도 좀 듣자." - P152

연락을 받고 응급실로 달려온 부모님은 아들을 보더니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으며 그의 생환이 수사학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기적일 수 있음을 인지했다. 소년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거의 본능적으로, 그러나 상식과 어긋난 직관은 인지부조화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 P142

80억 명의 절반가량은 식상한 비참에 시달리고 있지만 자신은 한 접시에 65,000원인 사시미를 즐기는 중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자신에게 좋지 않은데, 주변 사람들은 지금의 세상을 그럭저럭 기꺼워하는 듯해서 우혁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는 떠오르는 대로 말하기시작했다.
"소고기 다타키도 먹고 싶은데, 새우튀김이랑 콜라도 한 캔" - P144

"태연하게 남을 속여먹는 새끼가 그런 건 무턱대고 믿어.
도대체 넌 뭐가 문제일까?"
"문제 많죠. 너무 많아서 짚을 수가 없죠."
우혁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자신이 정말로 이상한 질문을 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알면 됐다. 그런데 재림 예수를 죽이면 심판이 시작된다는 건 새천년파 주장이잖아. 걔가 난간 밑으로 떨어졌는데 아직 멀쩡한 거 보면, 다른 조건이 있는 거 아니야?" - P148

"그런데 하느님 원래 극단적이고 인간들한테 별 관심 없잖아. 아니야?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현실에 적용하면 진짜하자가 많아서, 이거저거 덧댄 게 신학이잖아.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쓴 이유가 뭐야. 고트족 이교도들이 로마를 약탈하는데 하느님은 아무 은혜도 내려주지 않으신다. 왜냐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하려니까 혀가 길어진 거지. 난 배운 대로 말하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이거 굉장히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해석이야." - P146

김형은 잠시 뜸 들이더니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그래도, 솔직히 말해서, 대환난은 내가 죽은 다음에 왔으면 좋겠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야 안타깝긴 한데 살아있는 동안에는 안 겪고 싶어. 사실은 죽은 다음에도 심판 전까지는 천국 갈 사람이든 지옥 갈 사람이든 가만히 잠들어있는다고들 하니까………… 이번 일은 잘한 거 맞아." - P149

새천년파가 열두 명의 아이들을 살려둔 이유는 무엇일까?
대속이 무효로 돌아가더라도, 죄 없는 아이들은 여전히 구원받기 때문에?
지옥이란 대환난보다 두려운 것인가?
그렇다면 삶은 어떤가?
우혁은 그 열두 명의 절반이 새천년파 치리회가 되었다는사실을 떠올렸다. - P150

한 무리는 방학을 만끽하는 대학생들이었고 다른 무리는 허랑방탕한 삶에 일가견이 있는 중년들이었다. 더 의심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우혁은 휴대전화를 꺼내 사고 현장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새끼가 밥 먹는 자리에서 이런 걸・・・・・・ . 야, 잠깐만. 이게사고 현장이야?"
"제네시스 밑에 검은 웅덩이 보이죠. 그거 다 피거든요."
"그런데 내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 P140

"하여간 손 많이 간다. 지금 어디야? 집? 병원? 경찰서?"
우혁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개포동역 5번 출구요. 급한 일은 다 처리했어요. 지금은한가해요."
"근처네 이자카야 주소 찍어줄 테니까 올 수 있으면 걸어와라. 나도 15분쯤 뒤에 퇴근할 것 같다." - P138

그는 자신이 어떤 남자의 몸뚱이를 개포동역에서 이자카야 앞까지옮겨다 주는 짐꾼이라고 상상하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김형은 가게 옆 골목에서 전자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의외로 멀쩡하네? 사고 크게 났다길래 팔 하나쯤 부러졌을 줄 알았는데."
"지금 그게 문제예요. 죽어야 하는데 멀쩡해서." - P139

우혁은 뻣뻣이 굳은 목을 가까스로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포동역 바로 앞 사거리는 유리 조각이 비죽비죽 솟아 파도 같은 형상을 이루며 그 골짜기 사이사이로 불길이내달리는 형상이었다. 불길 한가운데에 선 여자. 여자의 얼굴은 시간을 넘나들며 점차 어리게 변해간다. - P135

"얘는 술도 잘 안 마시는 놈이 항상 취해 있는 것 같아 미친소리 하지 말고, 메뉴 추가해줄 테니까 조용히 먹기나 해라."
우혁은 소고기다타키와 새우튀김과 콜라를 먹었고 종말론이야기도 했다. 핵심만 간추렸지만 김 형은 별다른 부연 설명없이도 잘 이해하는 기색이었다. - P145

한참을 헐떡였지만 장소는 여전히 횡단보도 앞이었고 사이렌 소리라 착각했던것은 휴대전화 벨소리였다. 시간은 10시 40분. 전화를 받자마자 김형이 불쑥 물었다.
"야, 이 새끼야. 일이 어떻게 됐길래 이제야 연락을 받아 진짜 죽었나 싶어서 다섯 번도 넘게 전화했다. 사고라도 났냐?"
높다란 산등성이를 굽이굽이 돌아오다가 드디어 평지로 내려갈 때처럼 머리가 아찔해지더니 감각이 한순간에 밀려 들어왔다. - P137

하지만 아버지, 현세의 모든 영광은 종말 앞에 아무 의미가 없단 말입니다.………….
아버지는 한동안 원색적인 모욕을 가하더니 그만 입을 다물었고, 거실 장식장에서 위스키 병을 쥐어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우혁에게서 천천히 고개를 돌린 어머니는 거실 텔레비전에 전원을 넣고 소파에 웅크려 앉았다. - P133

그는 왁자지껄한 텔레비전 소리가 곧장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방으로 들어갔다. 고장 난 휴대전화에서 빼낸 유심 칩을 구형 공기계에 끼워 넣으려는데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고, 그림자마저 동작에 맞붙지 못하는 듯했다. 내일은 멀쩡히 출근하겠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 없었다. - P134

"새천년파인지 뭔지에는 언제부터 몸담았던 거니?"
"종교 생활은 해본 적이 없는데요. 저는 있는 사실만 이야기한 겁니다. 차량은 사실상 전손에 온통 피범벅인데 운전자는 멀쩡하다는 게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새천년파는 제가 아니라 위협 주행을 한 쪽입니다."
우혁은 고개를 수그리면서도 기본적인 대전제는 양보하지 않았다. 양보할 수가 없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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