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을 느끼지 못한 채 식사를 끝냈다.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디저트를 드시겠느냐고 묻는다.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고 계산을 치른 후 레스토랑을 나왔다. 7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서둘러 정면 현관으로 나가는데 "손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걸음을 멈췄다. 검은 옷차림의 중년 남자가 뛰어왔다. "외출하시는 건가요?" - P403
다에는 후진으로 아우디를 볼보 옆에 세우고 우산을 펼친다음 차에서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땅이 질척거린다. 자동차 타이어도 흙투성이였다. 왜 주차장 바닥을 포장하지 않는지. 별장 주인인 다케히사에게 화가 났다. 대문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문손잡이를 당기자 아무런저항 없이 문이 열렸다. - P404
거실 문을 열었다. 실내가 캄캄했다. 손으로 벽을 더듬어전기 스위치를 올렸다. 거실이 환하게 밝아졌다. 창가에 있는 흔들의자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케히사다. 다에는 헉, 숨을 삼켰다. 다케히사의 가슴 아랫부분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야. 머리 한구석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왼손으로 입을 막은 채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 P405
"어쩔 수 없잖아. 구사나기도 공무원인걸." "아하, 그렇군. 위에서 하는 일에는 가타부타하지 않는다. 이건가?" "무슨 소리야. 자네가 공무원의 애로를 알아?" 구사나기가 주먹을 불쑥 내밀었다. - P406
다니우치가 한쪽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폭우로 산사태가 났나봐. 산 밑으로 내려가는 도로 일부의 통행이 금지되었대." "그 외길이 막혔단 말이야?" 구사나기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떠올렸다. "그런가 봐. 다행히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발이 묶이게 생겼어." - P407
그때 구마쿠라의 제복 안에서 휴대 전화 벨소리가 들렸다. 실례하겠습니다. 하며 구마쿠라가 전화를 받았다. "나야. 그래, 무슨 일이야? 도로가 또 말썽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구마쿠라의 조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의 다음 말에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고 말았다. "뭐, 살인 사건?" - P409
구사나기는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기면서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은 오타카. 읍사무소에서 총무과장으로 일한다고 한다. "용건이 뭡니까?" 구사나기가 물었다. "제가 말씀드리기는 좀……………. 읍장님이 직접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타카의 말투가 어딘지 석연치 않았다. - P410
"아까 통화하는 걸 듣고 짐작하셨겠지만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서로 신고가 들어왔어요. 부모님이 살해당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장소는요?" "이 근처입니다." 구마쿠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P411
"왜 그 얘기를 저한테 하시는 거죠?" 구마쿠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경시청에 계신 분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겠죠. 현경관할이니까요. 다만, 아시다시피 현재 산 밑으로 내려가는 도로의 통행이 금지된 상태라서 현경 본부는 물론이고 우리 서에서도 사건 현장에 사람을 보내기 어렵습니다. 날씨가 이래서 헬리콥터를 띄우는 것도 무리고요." "그럼 지금도 신고인 혼자서 현장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별장지 인근에 파출소가 있어서 그곳 경찰이 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 P412
"그건 그렇지만, 도로가 불통인데 어쩔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 서에서는 현장으로 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라면 가능하죠." "네?" "서장님이 직접 현장으로 가시겠다는 거야." 다니우치가 말했다. "서장님이요?" 그러자 구마쿠라가 가슴을 젖히며 말했다. "서장이라도 경찰은 경찰이니까요." - P413
"현장에 동행해 달라는 말씀입니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구마쿠라가 양손을 무릎에 놓았다. "경찰서장이 지척에 있으면서 아무 대처도 못한다는 건 아무래도 좀……………." 곤란하겠지, 하고 구사나기는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와서 살인 현장에 발을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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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구사나기와 구마쿠라는 작업복 차림이었다. 호텔에서 빌린 것이다. 그리고 현장에 머리카락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모자를 썼다. 물론 장갑도 준비했다. 별장은 목조 건물이었다. 날이 어두운 데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어 전체 모습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대지 넓이만도 줄잡아 백 평은 될 듯했다. 가쓰라기가의 별장이라는 것은오는 동안 들어서 알고 있었다. - P415
구사나기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역한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오물과 피가 섞인 듯한 냄새다.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은 순간 구사나기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뒤따라 들어온 구마쿠라의 입에서도 으악,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창가에 놓인 흔들의자다. 거기에 몸집이 자그마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긴 바지에 폴로셔츠와 조끼를 입은 남자는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아랫부분은 시커먼 피로 물들어 있었다. - P418
구사나기는 그 위치에서 남자의 가슴에 난 상처를 관찰했다. 마치 도려내기라도 한 듯이 구멍이 뚫려 있었다. 피부도그 안의 장기도 엉망으로 뭉그러진 듯했다. 그 상흔의 정체가 무엇인지 구사나기는 짐작이 갔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사체를 본 적이 있었다. 남자는 예순에서 여든 사이 주름투성이 잿빛 얼굴이 거북이를 연상시켰다. - P419
"다케와키 가쓰라 선생의 존함은 저도 들어서 압니다. 그렇군요, 그 남자분이 다케와키 선생이었군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구마쿠라가 매우 엄숙하게 말했다. 가쓰라기 다에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그건 아버지가 집 밖에서 사용하시던 이름이라서 제게는 남의 이름처럼 들리거든요." - P420
가쓰라기 다에는 잠시 주저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혀로입술을 축였다. "어젯밤, 엄마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아버지가 도리카이 슈지라는 사람을 별장으로 부르겠다고 하셨다는 거예요. 아버지의 제자로 지금은 음악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분이에요." "그 사람을 왜 부르려고 하신 겁니까?" 구마쿠라가 다시 물었다. "항의하시겠다고요." - P421
구마쿠라의 물음에 가쓰라기 다에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워낙 경력이 오래다 보니 쓰신 작품도 방대해요. 개중에는 발표하지 않은 것도 많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만큼 어느 작품이 당신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제자의작품과 혼동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도리카이 씨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 P422
가쓰라기 다에는 고개를 끄덕하고 나서 잔에 담긴 물을 머금고 숨을 몇 번 크게 쉬더니 입을 열었다. 이 호텔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경, 체크인을 하고 방에들어가서 부모님 휴대 전화와 별장 전화로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부모님이 휴대 전화를 지니지 않은채 외출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잠시 방에서 쉬기로 했다. - P423
"부모님은 누구에게 원한을 살 만한 분들이 아니에요. 다만 예전에 별장을 털린 적이 한 번 있습니다. 그림과 골동품등을 도난당했죠. 별로 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요. 3년쯤 전의 일이에요. 아마 경찰서에 도난신고를 했을 거예요." "범인은 잡았나요?" 가쓰라기 다에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잡히지 않았어요." 약 한 시간 후, 가쓰라기 다에는 참고인 조사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P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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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난들 좋아서 이번 사건에 끼어들었겠어? 다니우치의 체면을 세워 주려는 거지. 그 친구 입장에서 생각해 봐. 평생의 기념이 되어야 할 결혼식 날에 산사태로 도로가 막히지 않나, 근처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나. 신부랑 알콩달콩 지내기는커녕 여태껏 관계자들과 협의 중이래." "하기야 다니우치가 딱하게 된 건 사실이지." - P425
"그러게 말이야. 나는 그 도리카이인가 하는 남자가 의심스러워. 별장을 둘러본 바로는 범행 목적이 뭔가를 훔치려는것 같지는 않았어. 말다툼을 벌이던 중 발끈한 다케히사 씨가 산탄총을 꺼내서 위협하려다가 오히려 상대에게 총을 빼앗겨 당한게 아닐까 싶어." "총이 피해자 것인가?"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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