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내게 사인을 해달라고 들이대던 팬들과 이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건 이 사람 또한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사람만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아니다.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인간은 내 주위에 이 사람을 포함해 일곱 명이나 된다. 남자 넷 여자 셋. 실제로 조금 전까지 이 집에 있었던 자도 나를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 P16

오늘 밤 나를 죽일 인간으로 그 일곱 명 중 누구를 선택하든 상관없었다. 내가 이 사람을 최종적인 살인자로 선택한 건 그저 잠깐의 변덕 같은 것이다. - P16

몸을 돌렸지만, 누군가는 내가 쳐다보는 것도 알지 못한 채죽은 물고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윽고 내 눈길을 깨달은 모양이지만 그 후에도 얼굴 대신 스웨터에 눈길이 가 있었다.
물고기와 꼭 닮은 파란색과 흰색의 굵은 줄무늬 스웨터였기 때문이다. 이것도 나의 소소한 계산이다. - P17

머릿속 한 귀퉁이에서는여태껏 자신을 괴롭혀온 여자가 죽는 모습을 상상하고 내게 들키지 않게 은밀한 미소를 지었을 게 틀림없다. 그리고 죄 없는 물고기가 아니라 이 여자가 죽었어야 한다고 아쉬워했을 것이다. - P18

"청산가리는 일반인이라면 쉽게 구할 수 없지만 의사라면다르잖아. 그래도 설마 살해하려고 할 만큼 나를 미워했다니, 전혀 생각도 못 했지 뭐야." - P18

"이미 결론이 났는데도 오늘 저녁에 또 불쑥 찾아온 거야.
얼굴이 음울한 게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손톱 끝으로 빈 약봉지를 집어 전등 불에 비췄다. 내 시선은 밀랍 종이를 통해 붉은 어둠과 그 가장자리에 걸린 누군가의왼쪽 눈을 찬찬히 관찰했다.
"어머, 지문이 찍혀 있네? 경찰에 신고해버릴까. 미수에 그쳤어도 살인 사건이 날 뻔했잖아. 이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체포될걸." - P19

"이 술잔을 요만큼만 당겨서 내 입에 넣었다면 나는 벌써죽었겠지? 너무 끔찍해."
생각난 대로 내뱉은 그 두 가지 말에 누군가는 아무 반응도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만 태연한 척하는 것이다. 무표정한 눈의 뒤쪽에서는 분명 변화가 일어났다. - P20

재빨리 그다음 덫을 치기 위해 일부러 진한 한숨을 내쉬
"아무튼 바보 같은 사람이라니까. 의사인 데다 나이가 마흔다섯 살이나 됐으면 조금 더 머리를 썼어야지. 이건 뭐, 길에서충동적으로 생판 타인을 죽이는 열대여섯 살 어린애나 똑같지 뭐야." - P20

"아니, 여기 집 안 곳곳에 그 사람의 지문이 남아 있잖아.
문짝만이 아니야. 이 테이블에도, 유리잔에도, 브랜디 술병에도,
그리고 저쪽 테이블과 재떨이에도 찍혀 있을걸."
나는 조금 떨어진 백목 테이블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 P21

"알리바이?" 나는 깔깔깔 웃었다. "당신, 그거 몰랐어? 내가내일부터 십오일 일정으로 파리에 가잖아. 이 집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건 가사도우미뿐인데 그 여자는 이달 말에나 올 거야. 십오일 동안 내가 보이지 않아도 설마 살해되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는 얘기야. 사체는 11월 30일에나 발견되겠지. 그러면 경찰에서도 내가 며칠 몇 시에 살해되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게돼. 사망 추정 일시가 확실하지 않은 범죄인데 알리바이를 준비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는 거 아닌가? 그 사람도 내가 십오일 동안 여행을 떠난다는 거, 다 알고 있어." - P22

"게다가 그 사람, 오늘이 며칠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어. 나한테 배신당한 충격으로 신경증에 걸린 듯한 기미였거든. 이번 달부터 병원도 쉬고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대."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알리바이라면, 아마 그걸 써먹을 거야."

"맞아, 나를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안성맞춤의 알리바이가 될 만한 게 있어. 간단하지만 틀림없이 잘 먹힐 거야. 하긴그러려면 오늘 밤 안에 내가 살해되어야 해... 어때, 알려줄까?"
(중략)
"싫어, 그걸 알려주면 당신이 정말로 나를 죽일 수도 있잖아. 그 의사만이 아니라 당신도 나를 죽이고 싶어 했지?"
"죽이다니, 말도 안 돼…."
누군가는 다급하게 취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 P23

"좋아, 그렇다면 알려줄게. 너무 웃기는 방법이거든."
나는 술을 꿀꺽 마시고 취해서 입이 가벼워진 척하며 빠른 말투로 주워섬겼다. 이미 완전히 외워버린 얘기를 연기가 서툰 배우가 입 끝으로만 대사를 읽듯이 줄줄 쏟아내며 나는 오로지 벽시계 소리만 듣고 있었다. - P24

죽음이 초침 소리와 함께 드디어 내게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일곱 명 중 누구여도 상관없는 한 명, 그 사람에게 의기양양하게 알리바이 조작 방법을 알려주면서, 지난 오년 사이의 또 하루, 저주스러운 기념일이 생각났다. 어느 날, 쇼가 끝나고 무대 뒤편으로 팬이라면서 한 여자가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단둘이 남았을 때, 웃는 얼굴 그대로 내게말했다.
"너, 성형수술 했지?" - P25

나는 실제로도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직 나를 죽일 생각은 없겠지. 나한테 그만큼 앙갚음을 당하면서도 당신은 소심해서 그런 짓을 시도할 용기도 없거든. 근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 달라질걸? 아마 진짜로 죽이고 싶어질 거야."
그리고 다시 변덕이 도진 척하며 문득 웃음을 지워버렸다. - P28

봉투에서 일곱 장의 종이를 꺼내 툭 던져주자 누군가는가로채듯이 집어 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갈 때마다 눈빛은 경악과 공포의 빛이 진해져 갔다. 덥지도 않은데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 이마에 배어난 진땀을 나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았다. 이 미소는 다른 어떤 표정보다도 나를 뼛속까지악에 물든 잔인한 여자로 보이게 할 것이다. - P29

봉투에는 매주 160만부의 판매 부수를 자랑하는 주간지의 편집부 주소와 ‘오자와 유지‘라는 기자 이름이 적혀 있다. 신랄한 글솜씨와 스캔들을 낱낱이 파헤치는 기사로 그쪽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다. 그자의 이름을 물론 이 사람도 알고 있다. - P30

있어?"
"협박이라고?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돈 같은 걸 요구한 적이
"대체 왜...."
왜 이런 지독한 짓을 하는가, 왜 이렇게 나를 증오하는 것인가….
누군가는 지겹지도 않은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영원히 답을 찾을 수 없는 수수께끼에 오로지 주문呪文처럼 ‘왜‘라는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 P31

이자는 그리 쉽게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타인의 목숨까지 희생시킬 인간이다. 나는 이 사람의 그런 쩨쩨한 이기주의에 내기를 걸었다.
"어떻게 하면 되겠니...."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처럼 말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하면 봐줄 거야? 그 편지만 보내지 않으면 뭐든 다 할게."
돈이 필요하다면 전 재산을 내줄 거고, 뭐든 원하는 대로해줄게... - P33

몇 초의 침묵 끝에 나는 먹이를 던져주었다.
"오늘 밤 안으로 나를 죽이면 돼."
물론 깔깔 웃으며 곧바로 그 말을 취소했다. - P34

이 밤의 정적 속에 언제까지고 길게 꼬리를 끌었다. 이윽고 누군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사람을 죽이지는 못해. 모든 걸 뻔히 꿰뚫어 보고 있구나."
체념한 듯한 서글픈 눈빛을 슬쩍 내게로 흘렸다. 힘없는 목소리는 내 동정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 P36

"맞아, 포기하는 게 좋아. 당신도 드디어 모든 걸 내려놓기로 결심한 모양이네. 이제 나하고 똑같아졌어. 건배라도 할까?"
누군가가 손에 든 잔에 내 잔을 쟁그랑 맞부딪쳤다. - P36

얼음을 넣자 잔의 술이 부쩍 늘어났다. 마치 유리잔에 눈금이라도 그려진 것처럼 세 번째 잔의 독약 섞인 술의 높이와 똑같았다. 이 사람은 마침내 결심하고 독약이 든 잔과 내 잔을 바꿔치기할 작정인 것이다.
마지막 장난기가 발동해서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아니, 가득 따라줘야지." - P37

깍지를 끼고 얌전히 무릎 위에 놓인 누군가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지금 내가 몇 마디 던지면 이 사람이 어떤 얼굴을 할지 상상해보았다.
"당신, 나를 죽이려고 하지? 근데 실은 살해당하려고 전부내가 꾸민 거야."
또다시 어설픈 농담을 한다면서 못마땅한 얼굴을 할까. 나는 또한 그 손에 내 손을 얹는 장면을 상상했다. 우리의 관계는 공범과 비슷해서 서로 손도 맞잡곤 했으니까. 하지만 우욱 구토감이 몰려와 목을 비볐다. - P38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대체 누구야, 이런 시간에?"
나는 짜증을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사이드보드 옆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 P39

그런 말과 함께 수화기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다시 비틀비틀 돌아와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 의사야. 어쩌면 저렇게 치근덕거리는지 모르겠어. 이런끔찍한 짓을 했으면서 뭘 용서해달래 ? 술에 엄청 취했나 봐. 집에 가서 또 퍼마신 모양이지. 그야 술을 들이켜고 싶은 기분도 이해는 되지만." - P39

누군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바보같이아직도 그 의사의 알리바이를 걱정하고 있다. 내 사체가 발견되는건 십오일 뒤라서 부검을 통해서는 정확히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알아낼 수 없는데도 게다가 내가 이 사람에게 알려준 알리바이 조작 방법은 사망 추정 시각이 확실하지 않다는 조건 아래 비로소 성립하는 것인데도. - P40

조금 더 마시려다가 마음이 바뀐 척하며 술잔을 테이블에내려놓고 나는 말했다.
"어째 써늘하네. 침실에서 담요 한 장만 갖다줄래? 아, 아냐, 내가 갈게. 서랍 안쪽에 있어서."
비틀거리며 침실에 들어가 문을 살짝 닫았다. 2센티미터쯤틈을 남기고, 침실은 썰렁한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 P41

실용적인 목적뿐인 낙타색의 군데군데 얼룩진 담요가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의상이라는 것은 아무도 알지못했다. 이제 곧 나는 조금 더 어울리는 의상을 몸에 두르게 될것이다. 다시 한번 재떨이 이쪽편의 술잔에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연극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진지하게 유리잔 바닥으로 시선이 내달렸다.
흠집이 없었다.
술잔을 바꾼 것이다. - P42

 누군가는 이제 더이상 얼굴빛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줄곧 유지해온 평정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 더 이상 못 마신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홍, 내가 입을 댄 것은 못 마시겠다? 그래, 이제 그만 가봐. 나도 이것만 마시고 잘 거니까..."
내뱉듯이 말하고 술잔을 손에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비틀비틀 침실로 향했다.  - P43

일초, 술잔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침실 문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이 초.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복수라는 말을 떠올렸다. 삼초. 정적 속에서 나는 기다렸다. 사초, 오로지 기다리고또 기다렸다. 오초, 뱃속에 흘러든 모래가 돌연 뻘건 용암이 되어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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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묘사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생각나게 만든다.








마키 씨는 가는 도중에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지요 씨가 찾아온 건 나흘 전이에요."
그날 저물녘에 한 품위 있는 부인이 시조의 야나기 화랑에찾아왔다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우미노 지요‘라고 밝히면서 교토 시립 미술관에서 <보름달의 마녀>를 보고 왔다고 했답니다. - P250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야기가 나오면서야나기 씨가 도서실 이야기를 꺼내신 거예요. 지요 씨는 무척 흥미를 느끼신 것 같았어요. 잠깐 생각하더니 ‘지금 보러 가면안 될까요?‘라고 묻더군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놀랐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하시는 데다 야나기 씨도 허락해 주셔서저는 일찍 퇴근해 지요 씨를 작업실로 안내해 드리기로 했어요.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고 말이죠." - P251

작업실로 가는 택시 안에서 지요 씨는 "『열대』라는 소설을아나요?" 하고 마키 씨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사야마 쇼이치라는 사람이 쓴 소설인데요. 할아버님께 들은적 없나요?" - P251

그 말에 마키 씨는 놀랐습니다. <보름달의 마녀>는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작품이었습니다. 당시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았거니와, 그림의 제재와 도서실의 책을 통해 『천일야화』에서 촉발됐을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 P252

"그래요,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요 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 합니다.
『열대』는 『천일야화』의 이본이니까." - P252

. 작업 테이블과 이젤이 드문드문 놓여 있을 뿐 다른 가구는 없었고, 벽 가까이 상자와 액자가 쌓여 있었습니다. 화백이 작업했던 당시의 모습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마니시 씨와제가 전기난로를 쬐는 동안 마키 씨는 벽 앞의 상자에서 손전등을 꺼냈습니다.
"가실까요, 할아버지 도서실은 이 뒤에 있어요."
작업실 뒤는 어둠에 잠겨 있었습니다. - P253

마키 씨가 불을 켜자 천장의 전등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외관과는 달리 아주 편안해 보이는 방이었습니다. 바닥에는페르시아 양탄자를 깔았고 일인용 갈색 소파와 원형 사이드 테이블이 놓여 있고 창가에는 책꽂이와 고풍스러운 레코드플레이어가 있었습니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잠수함 노틸러스호의 도서실이 생각났습니다. - P254

"이 도서실에 있는 책은 아버지 서재에 있었던 거예요. 아마 마키 선생님이 인수하셨겠죠."
나가세 에이조 씨의 장서.
당연히 마키 씨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내가 외국에 가 있는 동안 아버지가 장서를 처분하고는 경위를 이야기하지 않은 채로 돌아가셨으니까요…………. 설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너무 반가워요." - P255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연 순간, 바닷바람 같은 냄새가 나더군요. 왠지 모르게 오싹해서 서둘러 스위치를 켰더니불은 아무 문제 없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요 씨가 없었어요."
이마니시 씨가 의심스레 중얼거렸습니다.
"잠겨 있던 방에서 사라졌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저도 여우에 홀린기분이었어요.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 P256

"이 도서실엔 마물이 살고 있다."
제가 중얼거리자 이마니시 씨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마물이 지요 씨를 잡아먹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저희는 마물의 정체를 모르니까요."
마키 씨는 소파에 앉아 팔걸이에 턱을 괴었습니다. - P257

우리는 분담해서 도서실 구석구석을 살펴봤습니다. 테이블과 소파를 이동하고 양탄자를 들추고 책꽂이의 책을 빼봤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비밀의 문 같은 건 없었습니다. 창문에는쇠창살이 있으니 그쪽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 P257

"......도서실의 문이 닫힌다."
"네?"
"저를 잠깐 여기 혼자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카드에 쓰인 대로 도서실 문을 닫고 지요 씨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한 겁니다. - P258

"마물이 나타나 저를 잡아먹을까 봐 그러십니까?"
제가 농담조로 말하자 이마니시 씨는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 P258

조만간 마키 씨도 어딘가에서 『열대』를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이마니시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대』의 책장을 넘긴 그들 앞에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그들만의 『열대』인 겁니다.
"당신의 『열대』는 당신만의 것입니다."
저는 마키 씨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도서실 문을 닫았습니다. - P259

쓰여 있던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봤습니다. 그곳에는 제가 교토에서 경험한 일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마지막 카드의 마지막 줄은 ‘대단원‘. 그게 끝입니다.
대단원은 연극이나 영화, 소설 등의 결말을 의미하고, 특히
‘모든 게 잘 마무리 된다‘라는 해피엔드를 가리킵니다. - P260

『열대』는 『천일야화』의 이본이니까.
지요 씨는 마키 씨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때 소박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천일야화』는 어떻게 끝이 날까. - P260

마치 천일야화』 안에 또 하나의 『천일야화』가 존재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안의 『천일야화』 안에도 또 하나의 『천일야화』가 존재하고, 또 그 안에도....... 그런 망상이 머릿속에 떠올라 바닥을 알 수 없는 구멍을 들여다본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때 문득 전등이 깜박였습니다.
저는 숨죽이고 긴장했습니다. - P263

램프 불빛이 흡사 스포트라이트처럼 테이블 위에 있는 노트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늘 저와 함께 있었던 노트. 거기에는 『열대』와 관련된 온갖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P264

그 순간 저는 제가 무인도 모래사장에 서서 광대한 바다를 앞에 둔 듯한 착각을 맛봤습니다.
"눈을 감아요. 마음속으로 그려봐요."
지요 씨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곳에 펼쳐진 것은 상상의 세계, 『열대』의 세계였습니다. - P264

저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펜을 들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그때 거대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습니다. - P265

제 4장, 눈에 보이지 않는 군도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내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주위는 어둠에 싸여 있고 파도가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상황을 파악할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 P269

나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며 일어나서 뺨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여기는 어디지?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실마리를 찾아 입고 있던 옷가지를 살펴봤지만, 입은 것이라곤 가죽점퍼와 셔츠, 바지뿐 주머니에는 지갑조차 없었다.  - P261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멍하니 있는데 앞바다에 기이한것이 나타났다.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가는 작은 2량 열차였다. 모래사장에서 기껏해야 이백 미터쯤 떨어져 있어 동틀녘의 바다 위에 비치는 차창 불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왠지 모르게 향수가 느껴지는 정경이었다.  - P271

나는 바다를 왼쪽에 두고 홀로 모래사장을 걸었다.
열차는 대체 뭐였을까. 그 정도로 똑똑히 보였는데 환영일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열차가 보이지 않자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꿈을 꾸고 있나? - P272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인가.
보이는 곳이라곤 굽이지며 뻗어가는 하얀 모래사장뿐이었다. 왼편은 수평선까지 아무것도 없는 광대한 바다, 오른편은정체를 알 수 없는 열대의 숲이었다.
아무리 모래사장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해안을 벗어나 숲속에 발을 들여놓을 용기는 없었다. - P272

 나는 안으로 들어가 봤다.
바다를 내다보는 유리창 앞의 작은 나무 책상에 낡은 수첩과공구, 쌍안경이 놓여 있었다.
나는 땀을 닦으며 지저분한 창문으로 밖을 내다봤다.
녹색을 띤 파란 바다와 길게 뻗은 잔교가 보였다. 배가 한 척도 없다는 게 묘하게 느껴졌다. - P273

나는 쌍안경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잔교 끝까지 걸어가 앞바다를 봤다.
작은 섬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섬이 매우 기묘했다.
파도에 삼켜질 것처럼 얄팍해서는 모래사장이 거의 대부분인데 야자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묘한것은 야자나무 그늘에 빨간 콜라 자동판매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 P274

나는 잔교에 주저앉아 바다를 향해 다리를 늘어뜨렸다. 맑은 바닷물 속에서 바닷말이 흔들리고 물고기가 헤엄쳤다.
"이거야 원. 이제 살았군."
나는 안도하며 남자를 기다렸다.
그게 ‘학파의 남자‘ 사야마 쇼이치와의 첫만남이었다. - P274

그는 잔교에 보트를 매며 물었다.
"댁은 어디서 온 거지?"
"그건......."
(중략)
"말할 수 없나?"
"저도 모르거든요." - P273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나?"
"정신이 들었더니 저기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었는데요." 나는 바위땅 쪽을 가리켰다. "그보다 더 전 일은 아무것도 생각이안 납니다."
"어젯밤에 폭풍이 불었지."
"난파된 걸까요." - P276

"여기는 섬입니까?"
"아, 그것도 모르는군. 여기는 섬이야. 자세한 설명은 ‘관측소‘로 돌아가서 해주기로 하고…………. 그나저나 난 사야마 쇼이치라고 해. 도와주는 대신 댁은 내 조수가 되어 줘야겠어."
"・・・・・・ 조수라고요?" - P276

"네모 군, 설마 마왕의 자객은 아니겠지?"
바닷바람이 그의 뻣뻣한 곱슬머리를 날렸다.
"......마왕? 자객?"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자 사야마는 긴장이 풀린 것처럼 웃었다.
"아니겠지. 자객치곤 너무 얼이 빠졌으니까." - P277

"언제부터 이 섬에 있었죠?"
내가 묻자 사야마는 풀줄기를 씹으며 이야기했다.
"그게 언제였더라. 이젠 모르겠군. 이런 섬에서 혼자 살다 보면 모든 게 모호해지거든. 이 부근은 우기도 없고, 애초에 계절의 변화란 게 거의 없어. 하루하루가 판에 박힌 것처럼 지나가 정말로 오늘 다음엔 ‘내일‘이 오나 혹시 오늘 다음에 ‘어제‘가오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 P278

후미에서 산꼭대기의 관측소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어이구, 겨우 다 왔네."
사야마는 기쁜 듯이 말했다.
숲을 베어 인공적으로 만든 듯한 초지 안쪽에 사야마 쇼이치가 말하는 관측소가 있었다. 꽤 그럴싸한 건물이었다.  - P279

건물 입구에는 좌우로 열리는 커다란 자동문이 있고, 문 위에 박힌 금속 플레이트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어째 수수께끼 같은 말이군요."
"의미심장하지. 이 관측소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저기 있었던 거야." - P279

 오래된 탐정 사무소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법한 게 있는가 하면미래의 우주 정거장에 있을 법한 것도 있었다. 전부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놓여 있었다.
"왜 의자가 이렇게 많죠?"
"사람에게는 저마다 앉아야 할 의자가 있으니까."
사야마는 로비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갔다. - P280

 아까 사야마를 만난 후미와 잔교가 보였다. 앞바다에는 자동판매기가 있는 작은 섬이떠 있었다. 그 밖에 보이는 것이라곤 울창한 밀림과 섬 하나 없는 바다 그리고 파란 하늘뿐이었다.
작은 섬이지? 두 시간이면 해안을 따라서 한 바퀴 돌 수 있어, 해안선을 조사하는 것도 내 일이라서." - P281

"자기가 어디에 있는 건지 궁금하겠지. 정확한 위치를 알려줄 순 없지만 이 섬은 대략 북위 28도에 위치하고 있어. 적도바로 밑은 아니지만 해류의 영향도 있어서 기후 면에서는 열대라 해도 될 테지. 1년 내내 기온이 섭씨 15도 밑으로 내려가는일은 없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기다운 우기는 없지만 가끔씩맹렬한 스콜이나 폭풍이 올 때가 있어. 어젯밤 폭풍은 꼭 세계의 종말 같았지. 아주 무시무시했어." 
나는 폭풍을 만난 배를 상상해 봤다. - P282

"자네는 얼마 동안 여기 관측소에서 살게 될 거야. 죄수가 아니니까 일이 없을 땐 마음대로 지내도 돼. 관측소 안을 자유롭게 다녀도 되고. 하지만 밤에는 밖으로 나가지 말아줘. 위험하니까."
"맹수라도 나옵니까?"
"그런 거지."
"주의하죠." - P284

"본 적 있는 여자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실제로 기억에 없었다.
"그런 것치곤 꽤나 열심히 쳐다보던데. 반했군?"
"설마요."
"감출 것 없어. 자네 기분은 잘 아니까."
나는 사진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사야마는 "그냥 갖고 있어"라고 했다. - P285

창가에 작은 책상과 전기스탠드가 있었다.
스탠드를 켜자 어두운 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지저분한 셔츠를 입고 수염이 꺼칠하게 자랐다. 이게 정말 나일까. 낯선 타인으로만 보이는데.
너는 대체 누구지?
나는 오랫동안 그 모습을 응시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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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제정된 정신보건법은 실제 정신장애인감금법으로 작동하였다. 이 법은 인권적 절차가 미비한 채 강압적 치료를 합법화함으로써 급격한 정신병상 증가와 감금된 정신장애인의 양산을 가져다주었다. - P3

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으로 시작된 대규모 감금은 상당히 견고하게 구조화되어 있어 강제입원제도의 개선만으로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감금의 해소를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 P3

실제 정신장애인의 감금을 유인하는 체계는 20~3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강제입원제도 자체뿐만 아니라 관련 제도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정신의료기관 감금으로 다른 가족들이 부당한 이익을 가질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 P4

 실제 장기간 입원생활을 하고 있는 정신장애인이 개정된 법률을 인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사 인지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권익을 구체적으로 옹호할 방법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이다. - P4

강제입원 요건의 강화는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이 지역사회에 머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지만 지역사회서비스나 돌봄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단지 입원시간 연장에 불과할 수 있으며, 장기 입원자가 퇴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 삶의 조건을 형성하는 복지서비스를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확충하는가 하는 문제가 감금없는 정신보건의 실현에 핵심이 될 수 있다. - P5

 구체적으로 제1장에서는 강압적 치료방식에 의한 몸의 감금문제를 철학적 담론을 통해 검토하고 우리나라의 정신장애인 감금구조 형성과정을 정리하였다. 제2장에서는 감금 없는 정신보건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정책패러다임을 모색하기 위하여 ‘질병‘이면서동시에 ‘장애‘라는 정신장애의 인식론적 문제를 검토하고 인식론적 차이가 가져오는 정책적 접근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 P5

 제4장에서는 정신장애인 감금의 시발점이 되는 정신의료기관 입원제도의 문제점을 인권적 관점에서 검토하였다. 제5장에서는 입원과 관련된 정신장애인의 자기결정권 문제를 검토하고 강제입원자의 권리옹호를 위한 의사결정지원의 발전방안을 모색하였다.  - P6

제8장에서는 정신장애인의 지역사회생활의 권리 실현을 위한 법제와 프로그램의 개혁방안을 권익옹호와 장애인복지법 제15조 폐지 이후 대체입법의 필요성을 중심으로 제안하였다 - P6

아무쪼록 본서가 인권과 당사자의 자유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감금 없는 정신보건‘의 이념이나 실천방법을 구상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서문에 갈음하고자 한다.

위기에 처한 당사자가 병원에 갈 마음이 없다면 병원이 아닌 위기지원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2021. 2. 3.
저자 대표 이용표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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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무뚝뚝한 대학 건물 사이에는 어스름이 숨어 들어와 있었습니다. 주위는 한층어두워져 흐린 하늘 아래 솟은 시계탑 주위에서 눈송이가 춤추고 있었습니다. 정문 밖으로 길을 따라 노점이 늘어섰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시다 신사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 P232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습니까?"
이마니시 씨는 "없었습니다"라며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잠깐 이야기한 다음 우리는 지요 씨의 집에서 나와 요시다산 서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와는 정반대 방향, 신사 뒤쪽에서 축제 속으로 들어간 셈이죠. 숲의 어스름에서 노점의 불빛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날도 눈이 왔습니다." - P232

이마니시 씨는 멈춰 서서 도리이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산 위의 다이겐궁에서 참배를 드리고 본당으로 내려올 때까지는 같이 있었단 말이죠. 그런데 저 도리이를 향해 이 참배길을 걷다 말고 사야마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도리이 밑에서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서로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으면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까요......" - P234

본궁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을 올라가며 이마니시 씨는 말했습니다.
"지요 씨는 나를 의심하는 것 같더군요. 사야마가 모습을 감춘 이유를 숨기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아마사야마에게 배신당한 기분이었을 테죠. 화낼 상대가 없으니까나를 탓한 겁니다. 하지만 나도 나대로 지요 씨가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 P233

"이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이마니시 씨가 하얀 입김을 불며 말했습니다. "도쿄로 돌아가야 하죠?"
아닌 게 아니라 제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열대』와 사야마 쇼이치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감당할 수없을 만큼 커지고 말았습니다. 『천일야화』와의 연관성, <보름달의 마녀>를 그린 화가, 에이조 씨의 카드 상자 그리고 사야마 쇼이치의 실종...…….
"지요 씨는 왜 저를 교토로 불렀을까요."  - P234

"헌책방이랍니다. ‘날뛰는 밤‘이라고 써서 ‘아라비야 책방‘
"이죠."
노점으로 다가가니 주인은 멍하니 저를 쳐다봤습니다. 저를알아본 듯 한바탕 웃었습니다. 이마니시 씨는 신기한 듯 책꽂이를 구경하면서 "헌책방 포장마차는 처음 보는군요"라며 중얼거렸습니다. - P236

저는 『천일야화』를 꺼내 주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거 읽는 중입니다."
"훌륭한데. 하지만 「대단원」까지 읽으려면 여간 일이 아닐걸. 어쨌거나 천 날 밤의 분량이니까."
"셰에라자드는 용케도 이야기를 계속한다 싶군요."
"좌우지간 위대한 사람이야." - P236

추적의 실마리.
저는 생각해 봤습니다.
지요 씨의 그림엽서, 호렌도에서의 기묘한 행동, ‘보름달의 마녀에게 간다‘라는 말. 그건 지요 씨가 남겨준 ‘추적의 실마리‘
인 겁니다. 지요 씨는 어디론가 저를 인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미궁에 갇힌 채 끝나는 건지요 씨가 의도하는 바가 결코 아닐 테죠. 저는 뭔가 중요한 실마리를 빠뜨린 겁니다. - P237

전주인의 컬렉션이 놓인 선반.
먼지를 쓴 달마 인형들, 석상의 파편, 작은 조개껍데기, 작은 과즙 우유병.
그리고 낡은 카드 상자 - P237

"뭔가 중대한 단서를 놓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카드 상자안을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귀중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감사합니다."
저는 이마니시 씨에게 머리 숙여 정중히 인사했습니다. - P238

"만약 살아 있다면 사야마는 왜 연락을 주지 않는 걸까요."
이마니시 씨는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오래 우리가 기다리고있는데."
"사야마 씨가 남긴 건 『열대』뿐입니다."
"나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게 그 친구 꿈의 결정일 테니까요."
이마니시 씨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했습니다. - P239

"그런 이야기를 두고 사야마와 여러 번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 친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겠죠. 지금 생각하면 좀 더 순순히 귀 기울여 들어볼 걸 그랬다 싶습니다. 『열대』라는 작품이 그 친구 몽상의 결정이었다면 나 같은 사람에게 읽힌들 의미가 없다고 사야마는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좁은 소견 아닙니까." - P240

저는 선반에 놓인 카드 상자에 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유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개인적인 물건이라고만 생각했다는 겁니다.
"나가세 에이조 씨의 물건일지도 모릅니다." - P240

호렌도 주인이 걱정스레 소곤거렸습니다.
저는 카드를 계산대 위에 늘어 놓았습니다. 주인과 이마니시씨는 숨죽이고 제 동작을 지켜봤습니다. 저는 카드가 ‘올바른‘
순서로 나열될 때까지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 P241

경이의 방에서
봐야 할 것을 놓치고 지나가다
고물상 주인의 이야기 산다이바나시 마왕
남자를 두고 가다
작은 문을 지나 - P242

커피집에서
두고 간 남자와의 대화
수수께끼의 창조에 대해
방 안의 방 - P243

이치하라역에서
또다시 천일 밤의 여자
마지막 대화
도서실의 문이 닫힌다
대단원 - P244

이 카드는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제가 묻자 호렌도 주인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옛날부터 여기 계속 있었던 거라………… 뭐가 쓰여 있었는지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거든요."
저희는 나열된 카드를 보며 침묵했습니다.
"이 모든 게 예언됐다는 겁니까?" 이마니시 씨는 당혹한 듯중얼거렸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리 없어요." - P244

"거기 갈 겁니까?"
이마니시 씨의 물음에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지요 씨는 거기에 있을까요."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가야죠."
"그럼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괜찮겠죠?" - P246

이마니시 씨는 불안한 듯 차창을 응시하며 말했습니다.
"전부 당신이 꾸민 일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카드는 당신이 사전에 써서 호렌도 카드 상자에 넣어놓았을지도 모릅니다. 지요 씨의 실종도 뒤에서 당신이 조종한 일일지도 모르죠."
"의심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부정하지 않는 겁니까?" - P247

저를 교토로 부른 지요 씨일까요. 하지만 지요 씨도 사야마 쇼이치가 남긴 『열대』라는 소설을 뒤쫓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모두 사야마 쇼이치가 꾸민 일일까요. 하지만 호렌도 주인이나이마니시 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돌이켜보면 사야마 쇼이치의 배후에는 지요 씨 아버지, 에이조 씨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거든요. 에이조 씨의 배후에는 커다란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그걸 우리는 ‘보름달의 마녀‘라고 부르는지도 모릅니다. - P247

이윽고 열차가 정차해 우리는 내렸습니다.
눈이 얇게 쌓인 플랫폼이 허옇게 보였습니다. 마키 씨는 플랫폼 끝에 서서 우산을 들고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열차가 떠나고 나자 밤의 밑바닥 같은 정적이 주위를 감쌌습니다. 아주 멀리 여행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키 씨, 기억하실까요? 이케우치입니다. 어젯밤에 만났죠."
"물론 기억해요." - P248

"할아버지 도서실을 조사하러 오셨죠?"
"네."
"그럴 것 같았어요."
"우리가 올 줄 아셨습니까?"
이마니시 씨가 놀란 듯 물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조만간 찾아오시리라는 건 알고 있었답니다." - P249

"지요 씨가 작업실에 찾아왔군요?"
제가 묻자 마키 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도서실에서 사라진 거예요."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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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경비원이 다가왔습니다.
전시실에 들어온 지 30분 가까이 지난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동안 저는 내내 그 그림 앞에 서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경비원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 P203

택시를 타고 신신도에 가기로 했습니다.
차 안에서 시라이시 씨에게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일요일 정오 지나서 제가 갑자기 전화한 것 기억나시는지요. - P204

제가 아까 겪은 불가사의한 일들을 설명한들 믿어줄 리 없었겠죠.
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으니까요.
"아뇨, 교토에서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봐서 말입니다."
"전 유리쿠정에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당신은 웃었습니다. - P204

하지만 시라이시 씨는 틀림없이 도쿄에 있었습니다. 구태여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럼 제가 착각한 거군요."
"그럴걸요."
"이거야원, 죄송합니다." - P205

사막의 궁전도 폭풍의 이미지도 모두 시라이시 씨가 인양작업으로 건져낸 것을 되풀이한 것이었습니다. 시라이시 씨의
‘목소리‘가 이야기해 준 것도 제 은밀한 망상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키 노부오 씨의 <보름달의 마녀>를 발견하고 흥분해서 제 망상이 그런 백일몽을 지어낸 게 아닐까요. - P205

저는 커피를 주문하고 노트를 폈습니다.
보름달의 마녀에게 간다.
지요 씨는 호렌도에서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물이 아니라 작품 이야기였을지도 모릅니다. - P206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온갖 것이 서로 연결된다는 말이죠.
이 세계의 온갖 것이 『열대』와 관계있다.
우리는 『열대』 안에 있다. - P206

이마니시 씨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코트를 벗고 제맞은편 자리에 앉았습니다.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그는 "바로 알아보겠더군요"라며 미소 지었습니다. "인상이 지요 씨에게들은 그대로입니다."
"저에 대해 아십니까?"
"당신이 뒤따라 올 거라고 했거든요. 이렇게 금방 따라잡을줄은 몰랐습니다만." - P207

"유감이지만 모릅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래서 호렌도에서 이야기를 듣고 당신에게 연락한 겁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주인에게 들었죠? 지요 씨의 행동은 참으로 불가해했습니다." - P208

"약속 시간에 와봤더니 지요 씨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로 근황을 보고한 뒤 지요 씨는 『열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P208

하지만 『열대』라는 책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어젯밤 전화했을 때 먼저 『열대』에 관해 물었던 겁니다. 덕분에 지요 씨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만." - P209

"사야마는 연구와 관련된 책 외에는 곁에 잘 두지 않는 주의라 말이죠, 바로 팔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곧잘 내 방에 와서 책을 빌려가곤 했습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던 터라 책은 다양하게 많이 있었죠. 아동문학에서 사회학책까지 말입니다. 소설도 이것저것 있었군요. 나는 현대문학을못 읽는 사람이라 목가적인 작품들이었답니다. 『로빈슨 크루소』, 『해저 2만 리』, 『보물섬』・・・・・ 하지만 사야마도 그런 책을 좋아해서 내 책꽂이를 종종 칭찬하곤 했습니다. 농담조로 나를
‘도서관장‘이라고 불렀지 뭡니까. 읽은 책에 관해 밤새도록 토론한 적도 있고, 둘이 레코드를 틀어놓고 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불가사의한 시간이었군요. 그런 시간은 이제 두 번 다시 누리지 못할 테죠." - P211

"사야마 씨는 왜 모습을 감췄을까요."
"나는 모르겠군요."
"뭔가 비밀이 있었을까요."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특히 사야마 같은 인간은 더 그럴 테죠." - P212

이마니시 씨는 한숨을 쉬더니 저를 응시했습니다.
"그나저나 나는 도무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지요 씨를 따라 일부러 교토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전에 모습을 감춘 사람에 관해 알고 싶어 합니다. 전부 열대라는 소설 때문 아닙니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싶습니다."
"『열대』라는 소설에 관해 알면 알수록 수수께끼 같은 세계가 확장되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뭐랄까. 이렇게 『열대』에 관해 조사하는 행위 자체가 『열대』의 연장 같습니다."
"꼭 그 책에 홀린 것처럼 들리는군요." - P213

그동안 이마니시 씨는 잠자코 듣고 있었습니다만, 그가 동요한 듯한 순간이 한 번 있었습니다. 제가 ‘보름달의 마녀‘라는 단어를 말했을 때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동요를 감추고 그 뒤로는 표정이 달라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 P214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가는 데마다 참으로 편리하게 단서가 나타난단 말이죠. 어떻게 그렇게 술술 풀립니까.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당신은 단서를 ‘발견‘한 게 아닙니다. 그야말로 ‘창조‘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 P214

이마니시 씨는 저를 달래듯 말했습니다.
"인간은 원래 해석이라는 이름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봅니다. 그런데 그 렌즈가 어떤 이유로 일그러지거나 흠집이 나면 기묘한 세계가 나타나는 거죠. 그건 음모론의 형태를 띨 수도있고 병적인 망상의 형태를 띨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세계를 보는 당사자에게는 그게 현실 그 자체인 겁니다. 당신은 『열대』라는 일그러진 렌즈를 통해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십중팔구 지요 씨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테죠." - P215

"보름달의 마녀."
제가 중얼거리자 이마니시 씨는 눈을 치켜떴습니다.
(중략)
역시 이마니시 씨는 감추는 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질문에 답해 주시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시시한 이야기인데요.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꼭 듣고 싶습니다." - P216

사야마 쇼이치가 모습을 감추기 일주일쯤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날 내가 경험한 일은 사야마 쇼이치와도 관계가 없고 『열대』라는 소설과도 관계없습니다. 지요 씨와 나그리고 지요 씨의 아버지인 나가세 에이조 씨와 관련된 이야기죠. 그 점만은 미리 못 박아 두겠습니다. - P217

찾아가보니 부모님은 외출 중이고 지요 씨 혼자 있었습니다.
되레 긴장되더군요.
한 시간 정도 방에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요 씨는 마침책 몇 권을 준비해 놨고, 나도 내 서가에서 책을 골라 가져갔거든요. 도서관장님은 역시 다르네, 라고 하더군요. - P218

서가에는 에이조 씨의 일과 관련된 화학 서적 외에 문학, 철학, 역사 서적 등도 많았습니다. 그런 책들에 관해 한바탕 이야기를 한 다음 지요 씨가 꺼내든 것은 『천일야화』 번역서였습니다. 어렸을 때 서재에 몰래 들어와서 읽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나도 제목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읽어볼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책이었습니다. - P219

서재에 들어갔을 때부터 신경이 쓰였습니다만, 서재 남쪽에묘한 중 2층의 ‘곁방‘이 있었습니다. 넓이는 아마 겨우 한 평정도 될 겁니다. 작은 계단식 사다리를 이용해서 드나들고, 결방밑 공간은 창고처럼 쓰는 듯했습니다. - P220

분명히 죄책감도 있었습니다만, 그때 내 마음에 파고든 건 뭐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시금 보니 ‘방 안의 방‘이 영 기묘한 겁니다. - P220

방 안을 들여다보니 지요 씨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어쩐지 그 방에 사는 요정 같더군요. 나까지 들어갈 공간은 없어서 사다리 중간에 선 채 상반신만 숙여 방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몇 개 있는 선반에는 낡은 노트며 책, 옛날 물건들이 대충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게 『천일야화』 사본인가?"
지요 씨는 흰 종이로 싼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 P221

 지요 씨의 체온과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괜찮을까."
"응, 괜찮아. 열어 봐."
지요 씨가 재촉하듯 말했습니다.
그때 서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아보니 에이조 씨가 서재에 서서 미소 짓고 있는 겁니다. - P222

이윽고 내려온 에이조 씨는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를 보며소파에 앉으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허락 없이 서재에 들어온 것을 사죄했습니다.
"저 때문이에요."
지요 씨가 면목 없다는 듯 중얼거렸습니다.
하지만 에이조 씨는 우리를 탓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있습니다. "뭐 재미있는 게 나왔나?"라고 하는 겁니다. - P223

이윽고 에이조 씨는 정신이 든 사람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옛날이야기를 하나 할까."
"옛날이야기요?"
"예전에 내가 만주에 있었다는 건 너도 알겠지."
지요 씨는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년쯤 전 일이지." - P224

(전략). 그러는 동안에도 소련군 군용기가 매일 날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으니, 언제 공격이 시작돼서 옥쇄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차츰 마음이 마비돼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약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패전 소식을 들었다.
나는 동료 몇 명과 함께 귀대했다. 호텔을 향해 만주 벌판을 달려가는 유개화차를 타고 가며 곳곳에 펼쳐지는 수수밭, 그속에 동그마니 자리하는 만주인 촌락, 흙탕물 같은 하천, 지평선에 지는 태양, 저녁 하늘에 먹구름처럼 소용돌이치는 까마귀대군을 봤다. - P226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문득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회색 옷을입은 소련군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잘 모르겠다. 민가의 산울타리와 담장이 복잡하게 이어지는 뒷골목으로 도망치다가 어느새 동료들과도 헤어지고 말았다.
그 기묘한 남자를 만난 건 바로 그때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쪽."
옆길에서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P227

남자는 "헤헤" 하고 웃었다.
하세가와 겐이치와의 첫 만남이었다.
내가 분칸톤으로 갈 생각이라고 하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말했다. - P228

하세가와는 벌판을 걸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전에 만테쓰(남만주 철도주식회사)의 직원이었다고 했다. 오지에서 근무하다가 싫어져서 퇴직하고 호텐에서 다다미 상점을 운영하는 친척을 만나러 왔다가 패전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 P228

이윽고 하세가와가 걸으면서 시 같은 것을 읊는 소리가 들렸다.
비밀이 있으면 밝히지 말라.
남에게 말하면 비밀은어느새 비밀의 향기도 없을 것이다.
자기 가슴 속에 감추지 못한비밀을 어찌해서남의 가슴이 지켜주겠는가.
하세가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언덕을 기어 올라갔을때, 그 너머 초지에 더없이 불가사의한 것이 보였다. - P229

망연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하세가와가 속삭였다.
"저게 보이는군요?"
"저게 뭡니까?"
"보름달의 마녀입니다."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까?"
"나를 줄곧 따라왔거든요." 하세가와가 말했다. - P229

그렇게 말없이 어스름 속을 나아갔다. 나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달의 불가사의한 빛이 눈에 아로새겨져 지워지지않았다. ‘보름달의 마녀‘라니, 뭘까. 이 세상 것 같지 않다. 혹시나는 이미 죽은 걸까. - P230

거기까지 이야기한 뒤 이마니시 씨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36년 전 교토를 발판으로 만주로까지 도약한 이야기는 거기에서 갑자기 중단된 겁니다. 느닷없이 허공에 내던져진 기분이었습니다. - P230

그는 이마에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이마니시 씨?"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서재에 몰래 들어갔던 것도, 에이조 씨가 이야기한 만주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기억조차 떠올려 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날 만주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나서 에이조 씨는 말했습니다. 그 카드상자에는 마녀가 산다고."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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