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 제 3장 광기의 형상들

광기에 대한 추론적 (推論的) 인식은 이러한 모순(矛盾)에 의해 제한되고 확정된 공간에서 펼쳐진다. 의학적 분석의 정돈된 형상 아래까다로운 관계가 작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광기의 최종적 의미로서의
‘비이성‘과 광기의 진실이 표현되는 형식으로서의 ‘합리성‘ 사이의 관계로서, 역사의 변전은 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 P415

이 장에서 문제되는 것은 정신의학의 갖가지 개념을 같은 시대에 탄생하는 의학적 지식, 이론, 관찰사항 전체와 관련시키면서 개념들의 역사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기(精氣)의 의학이나 고체의 생리학을 고려하면서 정신의학에 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전주의 시대를 따라 지속되어 온 주요한 광기의 형상들을 차례차례 다시 다룸으로써, 어떻게 그것들이 비이성의 경험 내부에 자리잡았을까.
어떻게 그것들이 거기에서 제각기 고유한 일관성을 획득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광기의 ‘부정성‘을 ‘실증적‘ 방식으로 나타내기에이르렀을까를 보여주려고 애쓸 생각이다. - P416

 가령 ‘정신장애‘ 개념의 경우에 실증성은 가느다랗고 얇고 투명하며 여전히 부정성에 아주 가깝고, 이미지들의 체계를 가로질러 ‘조광증‘과 ‘우울증‘에 의해 획득된 실증성은 벌써 좀더치밀해진 것이며, 가장 견고하고 비이성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비이성에 대해 가장 위험한 실증성은 도덕과 의학의 경계에서 행해진 성찰을 통해, 유기적인 만큼이나 윤리적인 일종의 육체적 공간에 관한 착상 (想)을 통해, ‘히스테리‘와 ‘심기증‘이라는 개념에, 그리고 곧바로 ‘신경질환‘이라고 불리게 될 것에 내용을 부여하는 실증성인데, 이 실증성은 비이성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에서 그토록멀리 떨어져 있고 비이성의 구조에 그토록 통합되어 있지 않아서, 결국에는 비이성을 다시 문제삼게 만들고 고전주의 시대의 말기에 비이성을 전적으로 뒤흔들어 놓게 된다. - P416

1. 정신장애의 계열

 어떤 점에서 정신장애는 모든 정신질환 중에서 계속해서 광기의 본질과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의 광기는 일반적 견지에서 이해된 광기,
광기가 지닐 수 있는 부정적인 것 전체, 예컨대 무질서, 사유의 붕괴,
오류, 환각, 비이성, 비진실을 통해 경험된 것이다. - P417

그러므로 정신장애는 정신 속에서 극단적 우연성이자 동시에 완전한 결정론이고, 온갖 원인이 정신장애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장애에서는 온갖 결과가 산출될 수 있다. 사유(思惟)의 기관(器官)에서 발생하는 장애는 어떤 것이건 정신장애의 양상들 가운데 하나를 야기할 수 있다. - P417

 합리적 정신에서 육체까지, 넓이를 갖고 동시에 절(點)으로 나타나며 육체적이고 동시에 이미 사고력을 갖춘 혼합적 공간 안에서, 상상력과 기억력을 매개하고 중재하는 힘을 갖는 그 ‘감각적이거나 육체적인 아니마가 펼쳐지는데, 바로 이 힘은 상상력과기억력을 형성하도록 해주는 관념 또는 적어도 요소를 정신에 제공하는 것이며, 관념이나 요소의 작용, 육체적 작용이 흐트러질 때, ‘날카로운 지성‘⁶은 "마치 눈이 가려지는 듯이,대개의 경우 둔해지거나 적어도 흐려지게 된다."⁷

6) *intellectus acies.
7) Ibid., p. 265. - P418

 대뇌만이 질병의 유일한 원인이라면, 대뇌물질이 적합하게 기능하기에는 너무 작건, 반대로 대뇌물질이 너무 많고 이로 인해 덜 단단하며 대뇌물질의 질이 더 낮건 상관없이, 우선 ‘정신의 날카로움에 덜 적합한⁸ 대뇌물질의 차원에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때때로 대뇌의 형태를 의심해볼 필요도 있는데, 대뇌가 이른바 ‘둥근‘⁹ 형태를 갖지 않으면, 비정상적인 침하(下)나 팽창이 일어났다면, 그때 정기는 불규칙적 방향으로 되돌려 보내지고, 순탄한 경로를 통해 사물들의 진정으로 충실한 이미지를 더 이상 전달할 수 없으며, 진실의 지각가능한 성상(聖)을 합리적 정신에 맡길 수도 없다.

8) *mentis acumini minus accomodum.
9) *globosa. 원래는 "둥근 형태가 많은"의 뜻이다. - P419

처음에 정기의 장애와 대뇌의 장애는 분리될 수 있지만 결코 계속해서 분리되지는 않고, 결함 있는 대뇌물질의 영향으로 정기의 질이 변하건,반대로 대뇌물질이 정기의 결함으로 인해 변모되건 교란현상들은 어김없이 서로 결합된다. 정기가 무겁고 정기의 움직임이 너무 느릴 때, 또는 정기가 너무 불안정하면, 대뇌의 미세공(微細孔)과 정기가 통과하는 도관(導管)은 막히거나 이상한 형태를 띠기에 이르고, 반대로 대뇌 자체에 결함이 있으면, 정기는 대뇌의 여기저기를 정상적으로 통과할 수 없으며, 따라서 결함의 소질(素質)을 생겨나게 한다.
윌리스의 이러한 분석 전체에서 정신장애의 정확한 모습, 정신장애에 고유한 증후 또는 특별한 원인의 윤곽을 찾는 것은 헛수고일 것이다. 이는 서술(敍述)에 정확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장애가 ‘신경계통의 어느 하나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변질을 포괄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 P420

 《백과전서》의 ‘정신장애‘ 항목 첫머리에서 오몽은 지각할 수 있는 인상들의 변형에 자연상태의 이성이 있다고 설명하는데, 그것들은 신경섬유에 의해 전달되어 대뇌로 이르고, 대뇌는 그것들을 정기의 내부 주향로(走向路)에 따라 관념으로 변화시킨다. 비이성, 더 정확히 말해서 광기는 이러한 변화가 통상적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과도해지거나 비정상적이게 되거나 더 나아가 일어나지않게 되자마자 발생하기 시작한다. 기능의 정지(停止)는 순수상태의광기, 가장 강렬한 진실의 지점에 이른 듯한 절정상태의 광기, 즉 정신장애이다.  - P421

 정기 자체는 고갈되고무력하며 활기가 없기 때문에, 또는 탁해지고 장액 (漿液)과다로 끈적끈적해졌기 때문에 정신장애의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정신장애의 가장 빈번한 원인은 인상들을 더 이상 감당할 수도, 인상들을 전달할 수도 없는 신경섬유의 상태에 있다. 감각에 의해 시발(始發) 되게 마련인 진동(動)은 일어나지 않고, 신경섬유는 아마 너무 이완되어 있거나너무 팽팽하기 때문에, 또는 완전히 경직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미동도하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는 너무 경결 (硬結) 되어 더 이상 감각에 호응하지 않는다. 어쨌든 ‘탄성‘이 상실되었다. - P422

소바주가 체계적 질병 분류학》의 아멘티아¹² 항목을 기술하고자할 때, 증후학(症候學)의 맥락은 그의 역량을 벗어나게 되고, 그는 자신의 저서를 주재(主宰)하게 되어 있는 이른바 ‘식물학자의 정신‘에 더이상 충실할 수 없게 되며, 정신장애의 형태들을 원인에 따라서만 구별할 수 있을 뿐이다.

12) *amentia. 이성의 부재, 미망(迷妄)을 의미하는 라틴어. - P422

 정신장애의 진실은 병치 (竝置)로 형성될 뿐이다. 한편에는 축적된 불확정 원인들이 있는데, 이것들의 층위, 순서, 성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각양각색이고, 다른 한편에는 일련의 결과들이 있는데, 이것들의 공통된 특성은 오로지 이성의부재 또는 이성의 미미한 작동, 사물의 현실성과 관념의 진실에 대한이성의 접근 불가능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 P424

언제나 스스로에게서 벗어나는 이 현존을 뒤푸르는 《인간 오성론》에서 가장 엄밀하게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정신장애에 관해 원용될 수 있었던 부분적 결정론들을끌어들임으로써, 보네가 내세우고자 한 신경섬유의 경직, 대뇌의 메마름, 힐다누스가 가리킨 뇌의 물렁물렁함과 장액성(漿液性), 사리풀이나 흰독말풀 또는 아편이나 사프란 가루의 복용(復用) (레,²⁸  보탱,
바레르의 관찰), 종양이나 뇌의 벌레, 두개골의 기형(畸形) 등 있을수 있는 원인들의 다수성을 강조한다. 그만큼 많은 실증적 원인이 제시되지만, 이것들은 오로지 동일한 부정적 결과, 이를테면 외부 세계와 진실에 대한 정신의 단절로만 귀착할 뿐이다.  - P424

이처럼 자연의 단편적 실증성과 비이성의 일반적 부정성은 서로 중첩되지만, 이 양자사이에 실질적 통일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장애는 광기의 형태로서, 오직 외부로부터만, 즉 접근 불가능한 부재 속으로 이성이 사라지는 한계로부터만 체험되고 사유되며, 이 선험적 개념은 서술의 일관성에도 불구하고 통합력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존재와 비이성의 비존재는 거기에서 통일성을 발견하지못한다. - P425

그렇지만 정신장애라는 선험적 개념은 완전한 무관심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두 계열의 인접개념들에 의해 한정되는데,
그 중의 하나는 아주 먼 옛날부터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고전주의 시대에 분리되어 정의되기 시작한다.
정신장애와 광란의 구별은 전통적이다. 정신장애는 무열성(無熱性)질환인 반면에, 광란은 언제나 열을 수반하므로, 징후의 차원에서 확정하기가 쉬운 구별. 광란을 특징짓는 열은 광란의 가까운 원인과 본질을 지정할 수 있게 해준다. - P425

두 가지 주요한 문제는 광란이 대뇌 자체에서 생겨날수 있는가, 아니면 대뇌로 전달된 특성일 뿐인가, 그리고 광란이 오히려 피의 지나친 흐름 때문에 유발되는가, 아니면 피의 정체(停滯) 때문에 유발되는가를 아는 것이다. - P426

 펨의 학위논문은 언급할 만한 예외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의견해에 따르면 광란은 너무 많은 것이 들어찬 내장의 체증滯),
리고 "내장의 혼란이 신경을 통해 대뇌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기인한다.³³ 18세기의 저자들 대다수에 의하면, 광란의 중추와 원인은 열의중추들 가운데 하나가 된 대뇌 자체에 있다. 가령 제임스의 《사전》은광란의 원인을 정확히 ‘대뇌의 막‘에서 찾고,³⁴ 컬렌은 목 부위의 물질도 인화(引火)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광란은 "드러나지않은 부위들의 발화이고, 대뇌의 막이나 아니면 대뇌의 물질 자체에해를 끼칠 수 있다."³⁵ - P426

33) Fem, De la nature et du siège de la phrénésie et de la paraphrénésie.
씨의 주재(主宰) 아래 괴팅겐에서 심사된 학위논문. Gazette salutaire, 27mars 1766, nº 13.
34) James, Dictionnaire de médecine, traduction française, t. V, p. 547.
35) Cullen, loc. cit.,.p. 142 - P427

정신장애와 연관되는 두 번째 계열의 개념들은 ‘어리석음‘, ‘저능‘(低能), ‘백치‘, ‘우둔(愚鈍) 등이다. 일상적으로 정신장애와 저능은 동의어로 취급된다.³⁸ ‘(중략). 이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문제되는 것은 기억력, 상상력, 판단력과 동시적으로 관련되는 손상이다.³⁹

38) 예컨대 "나는 다르델이라는 자가 처해 있는 저능과 정신장애의 상태에 관해 당신이 영광스럽게도 나에게 말한 바를 오를레앙 공각하에게 설명했습니다." 바스티유 고문서 (Arsenal 10808, f⁰ 137) 참조.
39) Willis, loc. cit., II, p. 265. - P428

소바주가 《질병 분류학》에서 거의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분인데, 그의 견해에 따르면 "정신장애에 걸린 사람들은 얼간이와는 달리 대상의 인상을 완벽하게 느낀다는 점에서", 정신장애는 "무감각 상태와 다르지만, 그들은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대상에 관해 염려하지 않으며 완전히 무관심하게 대상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대상으로 인해 초래될 여파(餘波)를 무시하며 대상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⁴³

43) Sauvages, loc. cit., VII, pp. 334-335. - P429

그리고 18세기 말에 이르면, 더 이상 저능과 정신장애의 대립이 시기상조라는점 때문이 아니라, 심지어는 훼손된 능력 때문라는이 아니라, 저능과 정신장애에 속하게 되고 저능과 정신장애의 발현현상들 전체를 은밀하게 요구하게 될 고유한 특성 때문에 저능과 정신장애가 구별되기에 이른다. - P430

백치의 경우에 "오성의 모든 기능과 심적 감정"은 마비되거나 무기력 상태로 떨어지고, 그의 정신은 일종의 혼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정신장애에서는 정신의 핵심적 기능이 사유활동으로 이어지긴 하지만, 사유는 헛되이, 따라서 극단적인 다변 속에서 이루어진다. - P431

 정신장애는 정신이상의 의학적 개념들 중에서 가장 단순한것, 이를테면 신화, 도덕적 가치평가, 상상적 꿈으로 가장 덜 빠져드는 것이다. 그래도 역시 정신장애의 개념은 그런 식으로 사로잡힐 모든 위험에서 벗어남에 따라 가장 은밀하게 일관성 없는 것이며, 이 개념 속에서 본성과 비이성은 조광증과 우울증이라는 선험적 개념이 활기를 띠는 상상계의 심층에서 구성되기에 이르지 못하고 여전히 추상적 일반성의 표면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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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다. 검게 그을린 철판을 자세히보니 로크 바닥에 지름이 2미터쯤 되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중략)
마샬이 말했다. "그렇네. 저게 갤러허일세. 머더홀(밀폐된 공간에 화력, 무기 등을 쏟아부어 침입자의 절멸을 꾀하는 전술 옮긴이)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네." - P143

"나머지 인원들은 도보로 15분 이내에 보조 로크로 탈출할 준비를 해 두고, 듀건, 놈들의 정체가 무엇이고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려면 실험실에 표본을 마련해야 할 거야."
마샬은 미소 지었지만 행복해 보이기보다는 오싹한 느낌이들었다.
"제군들, 이제 사냥이 시작되겠군." - P146

듀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략)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도 나름 무장하고 있었지만 추운 날씨를 이겨 내기 위한 방한복만 몇 겹 입고 있었다. 듀건은 양 허리춤의 권총집에 버너 두 개를 차고 있었다. 나는 선형 가속기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  - P147

듀건이 말했다. "조언은 고마워. 하지만 그것들이 갤러허 다리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내 눈으로 봤어. 방한복 말고 그것들을 막을 수 있는 확실한 보호막이 필요할 것 같은데."
"갤러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봤지? 메인 로크 바닥에무슨 짓을 했는지도 봤어?" - P148

 "이해해. 너한테는 별거 아니겠지. 그래도 이해해 줘.
우리는 죽어도 리셋 버튼을 눌러 다시 살아날 수 없어. 우리한테 죽음은 그냥 끝이야. 그래서 난 전투복이 필요해."
나는 웃음이 났다. "리셋 버튼이라고? 재생 탱크에서 나오는게 그렇게 간단한 일 같아?" - P148

마지막으로 행성 토착 생명체가 착륙을 방해한 것은 거의200년 전, 여기에서 동쪽으로 50광년 떨어진 우주에서였다. - P149

개척지에 착륙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개척민들은 무언가에 쫓기기 시작했다. 미지의 생명체가 바람에 실려 와 노출된 피부를 파고들었고, 그러면 가려운 발진이 돋다가 고름이 찬 물집이 생기고 결국은 패혈증에 걸려 죽게 되었다. 모래속에 굴을 뚫고 사는, 갑옷도 뚫을 만한 송곳니가 달린 불가사리 같은 생명체도 있었다. - P150

 그 행성에 살던 생명체는 대부분 개척지 주민들의 방어를 뚫을 수 있도록 진화한 것 같아 보였고, 로어노크 사령부에서 개척지가 잠식당하기 전 기록을 전송해 둔 덕분에 우리는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 P151

그들은 결국 지상 기지를 단단히 걸어 잠그고 최대한 조심하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연구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돔 안에서 무언가 번식하기 시작한 뒤였다. 사령부에서는 멸균 프로토콜을 대여섯 차례 시도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들은 어떻게 해도 되살아났고 결국 복제한 익스펜더블이 개척지 전체 인구를 채우게 되었다. 중앙 프로세서는 아미노산이 모자라게 될 때까지 익스펜더블을 찍어 냈다.
마지막까지 살아 있던 익스펜더블 중 하나는 죽기 직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희미하게마나 짐작할 수 있었다. - P151

나는 눈밭으로 걸어 나가며 200번 넘게 고쳐 죽은 로어노크의 익스펜더블 제롤을 생각했다. 로어노크의 토착 생명체들은 개척민들에게 어떤 경고도 하지 않았다. - P152

캣이 물었다. "저기, 가속기를 챙긴 거야? 난 다들 버너를 가져오는 줄 알았는데."
(중략)
"별 이유는 없어. 그냥 감으로 선택한 거지." 내가 대답했다. - P153

어차피 호흡기에 가려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미소 지었다. "맨날 똑같은 무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놈들한테 두 번이나 당했어. 그래서 이번에는 반대로 해 본 거야."
그녀는 끄덕였다. "알겠어. 굉장히 철학적이네."
"뭐, 저승문을 몇 번 두드리다 보니."
"그렇네. 극락을 찾아가는 중이겠구나?"
농담하기에 좋은 때는 아니지만 상관없었다. - P154

캣이 말했다. "있잖아, 여태 너랑 대화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닌가?"
나는 다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듀건을 주시한 채로 손은 버너에 올려 두고 있었다.
"없어.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 P155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일이 터지기 전 10분 동안 듀건 옆에서 걷고 있던 다른 경비대원 두 명이 듀건의 다리에 버너를 겨냥했다. 듀건은 처음에는 그들을 부추기는 듯했다. 하지만 갑옷이 벌겋게 달아올라 물렁해지면서 크리퍼의 이빨은 그의 다리에 점점 더 깊이 박혔고, 눈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증기가 올라와 시야에서 크리퍼들이 가려지자 듀건의 고함은 비명으로, 비명은 절규로 바뀌었다. 나는 그를 중심으로 빙 둘러 옆으로 이동했다. 한 30미터쯤 떨어진 곳에 회색 화강암이 눈을 뚫고 올라와 있었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 P157

 경비대원 둘은 아직 따라오고 있었지만 각각 크리퍼 둘에게 쫓기고 있어서 얼마 못 가 잡힐 것 같았다.
(중략) 나는 가속기를 조준한 뒤 발사했다.
가속기 반동 때문에 캣이 있는 곳까지 밀려났다. 그 순간 크리퍼의 앞쪽 세 마디가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되어 날렸다.
"젠장, 철학자가 맞았네?" 캣이 말했다.
다른 경비대원들이 아래에 있었지만 눈밭 아래에는 꿀렁이는 움직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 P158

"샘플 얻었어?" 통신기 너머에서 베르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체 일부만."
나는 바위 아래로 뛰어내려 크리퍼의 잔해를 집어 들었다. 베르토는 이미 구조용 갈고리를 내리고 있었다. - P158

10장

이쯤 되면 마샬이 왜 시키는 건지 알 수 없는 자살 임무는 일상의 일부가 된 지가 오래였다.
(중략)
나는 가끔 젬마가 익스펜더블의 삶이 어던 것인지 내게 ‘제대로‘ 알려 주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중략)
우주선에는 미드가르드가 그간 쌓아 온 상당한 자본이 투입되었고 시스템 설계자는 우주선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폭발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내가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처럼 심심풀이로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중략)
하지만 이 보호막도 티끌 알맹이보다 큰 물체와 충돌할 때의 충격은 견디지 못했다.
드라카를 만든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태양권 경계를 지나고 나면 티끌 알맹이보다 큰 물질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대형 물체와의 충돌로부터 우주선을 보호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보호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 P163

다행히도 우리와 부딪힌 물체가 그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충돌 후 충격으로 쿼크(양성자, 중성자와 같은 소립자를 구성한다고 여겨지는 기본 입자 옮긴이)와 글루온(쿼크 간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입자옮긴이)으로 쪼개졌기 때문이다. 질량이 15~20그램 사이인 물체였다는사실은 알아냈다. - P164

 매기 링이 내게 할 일을 설명하는 동안 그녀의 부하 직원두 명이 나를 진공 슈트 안에 밀어넣었다.
매기 링이 말했다. "전력 결합 장치가 타격을 입은 것 같아요. 확실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당신이가서 전체 유닛을 교체해요." - P165

"다 끝나면 예전 엔진은 되도록 가져오고요."
"되도록이요?"
"네. 그 전에 죽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그쪽 구역은 현재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요. 이 유닛이 작동할 때까지 3.5초마다 온몸으로 치사량의 방사능을 흡수하게 될 거예요." - P165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큐브 윗면에 주변이 검게 그을린 지름 2~3센티미터쯤 되는 구멍이 나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천장 쪽에 약간 더 큰 구멍이 나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구멍으로 새어 들어와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망가진 유닛을 비췄다.
그때부터 피부가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매기와 젬마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의 몸은 경이로울 정도로 급성 방사능 중독에 천천히 반응한다. - P167

 이승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몸을 덜덜 떨며 공중에 떠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달달 부딪는 이 사이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죽기 전에 반드시 업로드를 하라고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있었다. 젬마도 이야기한 적 있었다. 치명적인 상황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며, 내 재생본 하나가죽는다고 해서 그 죽음과 함께 사라져서는 안 됐다.
하지만 잊는 편이 더 나은 것들도 분명 있다. - P169

(전략)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다음 날 아침 미키3로 재생 탱크에서 나오자마자 슈트 카메라에 찍힌 영상 기록을 보고 들은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에어 로크로 돌아가다 말고 멈추더니 목 부분에 있던 헬멧 밀폐 장치를 풀고 우주에 내 맨얼굴을 드러냈던 것이다. - P171

11장

그가 말했다. "미안. 비난하려던 건 아니었어."
"퍽이나 변명 잘 들었어." 이 말했다.
베르토는 리프터 전원을 내리고 비행 종료 체크리스트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중략)
"밖에서 일어난 일은 정말로 유감이야. 할 수 있었으면 당연히 경고했을 거야. 그것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눈밭 아래로 다니는 게 아닌 것 같아. 마지막으로 너희쪽을 지날 때 레이더에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는데 1분도 안 돼서 공격이 시작됐어." - P173

"설명이 필요하겠군. 두 시간 만에 대원 세 명을, 갤러허를 포함하면 네 명, 토리첼리까지 포함하면 다섯 명을 잃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데 말이야. 정작 자네는 살아 있고." 마샬이 말했다.
(중략)
내 말에 마샬이 벌떡 일어섰다. "그따위 태도는 뭔가, 반스! 자네는 익스펜더블이야! 살아남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 P175

마샬은 나를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자네말은, 내가 고메즈의 영상 기록에서 본 자네는 겁을 집어먹고 비굴하게 살려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임무를 완수하고 개척지를 보호하기 위해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이건가?"
나는 캣을 쳐다봤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 P176

"그럼 가속기를 챙겨 나간 이유는 뭐지?"
"가장 큰 이유는 버너보다 가속기 사용하는 법을 더 자세히 배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전에 크리퍼를 마주쳤던 두 번의 임무에서 버너를 가지고 있었지만 두 번 다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략을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입니다."
마샬의 눈썹이 미간으로 모였고 잔뜩 오므려진 입술은 거의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 P177

마샬은 책상에서 몸을 뒤로 젖히고 짧게 자른 희끗희끗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전략)
첸, 지금 상황에서 자네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자네가 반스와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의심이 들어 그랬다면 출격 전에 보고했어야 하네. 다음부터는 임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개인적인 사정이 생기면 잊지 말고 사령부에 보고하게나."
캣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마샬은 한 손을 들어 묵살했다.
"듣고 싶지 않네. 앞으로 누구와 어울릴지 결정할 때는 좀더 신중하게."
사령관의 시선이 나에게서 캣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나에게돌아왔다. - P179

"그러니까 마샬은 우리가 잤다고 생각하는 거지?"
캣은 어두운 표정으로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엿이나 먹으라 그래"
"와우, 말이 좀 심하네. 익스펜더블이랑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게 그렇게 싫어?"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중략). 짜증이 났던 건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호르몬 때문에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처럼 말하니까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지. 너한테는 그따위로 말하지 않았잖아. 아냐?" - P180

나는 내 머그잔을 그녀의 잔에 부딪혔고, 우리는 각자 잔에든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물을 마시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나는 그녀의 접시에서 토마토 하나를 잽싸게 집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내 입속에 쑤셔 넣었다. - P181

"그래서 사령부와는 이야기가 잘 끝났어?" 나샤가 물었다.
나는 나에게 자리를 내주려고 옆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녀는 벤치를 넘어와 자리에 앉았다.
내가 말했다. "웅, 뭐 적당히 잘 끝난 것 같아. 마샬이 나를시체 구덩이에 빠뜨리겠다고 위협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어." - P182

캣이 대답했다. "고마워. 이미 고메즈에게 물어보기는 했지만………… 혹시 그것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낌새가 있었어?
갑자기 공중에서 튀어나올 수는 없는 거잖아, 안 그래?"
나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었어. 가시광선, 적외선, 지표 투과 레이더를 다 돌리고 있었는데, 내가 너희 위를 지날 때는 아무 위협도 감지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어." - P183

내가 말했다. "아주 좋았지. 다섯 사람이 더 죽어 나갔으니 곧 너도 온전히 네 몫을 할 수 있을지도"
"그래? 우리가 항상 소시오패스였던 거야, 아니면 업로드를 거치면서 얻은 기능이야?" 에잇은 태블릿을 책상 서랍에 넣고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방금 우리가 소시오패스였던 거냐고 했냐?" - P185

"그래서 말인데, 내가 방금 100킬로칼로리를 먹고 오는 길이야. 오늘 치 남은 배급이 200킬로칼로리밖에 안 남았다는 소리지. 미안"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좋은 놈인 척하려니 힘들었나 보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그러지 마. 네가 낮잠 자는 동안나는 거의 죽을 뻔했어.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잖아."
"내가 아직 이 말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지금 말그대로 배고파서 죽기 직전이야, 세븐" - P186

에잇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머더홀이라니, 뭣 때문에?"
(중략)
"말을 좀 제대로 들어. 크리퍼가 바닥을 뚫고 침입했다니까."
침입‘이라면......?"
"구멍을 뚫고 들어와서 바닥을 뜯기 시작했다고."
"뜯어? 네 말은 놈들이………… 바닥을 가져가려고 했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것 같아. 이 행성에는 금속이별로 없잖아. 필요했나 보지." - P187

"뭐, 뚫는 장면을 본 건 아니야. 대원들 전투복에 크리퍼가 붙어 있었고, 대원들은 살아남지 못했어. 전투복에 구멍이 뚫렸으리라는 건 내 추측이지."
에잇은 한쪽 팔꿈치에 체중을 실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채 반쯤 일어났다. "말도 안 돼. 생명체는 환경에 필요 없는 능력을 갖추도록 진화하지 않아. 얼음을 뚫고 사는 벌레가 10그램짜리 선형 가속기 탄환을 방어하라고 설계된 갑옷을 뚫도록 진화했을 리가 없잖아?" - P188

12장

미키2는 가장 짧게 산 재생본이었다.
미키3는 가장 길게 산 재생본이었다.
원에게 일어난 일에 무뎌지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첫 키스는 평생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 첫 죽음 역시 절대 잊히지 않는다. - P192

드라카 같은 우주선을 타고 여정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여정의 끝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반물질 물리학에 따르면 반물질은 충분한 양이 모여야만 동작하고, 생산이 엄청나게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용도 많이 든다. - P193

개척지 우주선에서는 데이트하기가 힘들다. 할 수 있는 활동에 선택지가 별로 없다. 같이 밥을 먹을 수는 있지만, 시장통 같은 곳에서 플라스틱 병에 담긴 음식을 빨며 마찬가지로 플라스틱 병에 담긴 음식을 빨고 있는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도록 케이블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로맨틱함은 기대하기가 매우 힘들다. 같이 걸을 수는 있다.  - P201

(전략), 만약 필드생성기 유닛에 다시 한번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를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로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도 역시 로맨틱한 분위기와는 거리가멀다.
그래서 보통은 섹스를 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대부분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샤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중략). 나샤의 가족은 30년 전 난민 신분으로 잃어버린 희망을 타고 미드가르드에 도착했다. 그들은 새로운 희망이라는, 미드가르드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행성 거주민들끼리 살육전이 일어나 폐허가 된 행성 출신이었다 - P202

정부는 이민자들에게 기본 소득을 배정하고 살 곳을 지정해 주었지만, 이들이 멀쩡한 직업을 찾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착륙한 지 2년이 지나고 스무 명 남짓 되는 이민자들이 농성을 시작했고, 농성은 곧 시위가 되었다가 작은폭동으로 바뀌었다. 그 후에는 이민자 자녀가 일반 학교에 들어가는 것조차 녹록지 않게 되었다.
그즈음 나샤가 태어났다. - P203

13장

 꼬박 30분 동안 애를 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침대를 빠져나와, 카페테리아로 가 책이나 읽으려고 책상에 있던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가끔씩 지나다니는 경비대원을 빼면 복도에 아무도 없다.  - P207

새로 읽을거리를 찾아 몇 분 동안 자료실을 뒤졌다. 그다지 흥미로워 보이는 자료가 없었고, 결국 호기심으로 새로운 희망 행성과 관련된 파일을 선택했다. 내 삶을 비관하며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한 이후로 새로운 희망 행성에 관한 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 P208

자료를 읽기 시작한 후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상당히 다른관점으로 이야기가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에서는 전쟁에 여러 이유를 붙였기에, 나는 인종이니, 종교니, 자원이니 정치 철학이니 하는 으레 시민전쟁의 원인이 되는 문제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 P209

마지막 10분을 카운트다운한 끝에 스캐너에 오큘러를 스캔할 수 있었다. 머그잔에 사이클러 페이스트와 함께 같은 양의 기대와 역겨움을 담고 있는데, 인사과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배정된 임무를 알리는 메시지였다.  - P210

[CChen0197]: 안녕 미키, 오늘 근무자 명단에 네 이름이 있더라.
나도 보안 경계선으로 나갈 거야. 파트너 안 필요해? 어제 우리 꽤 잘맞았잖아.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에잇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Mickey8]: 뭐, 저걸로 결정된 거네? 나는 어제 네가 첸이랑 뭘 했는지모르잖아. 5분만 이야기하면 다 들통나지 않겠어? 당연하지. 그러니까난 다시 잘게 알았지? 이따 어땠는지 알려 줘. - P211

이 말했다. "이해가 안 돼, 난 어제 널 봤다고. 너도 우리만큼 죽고 싶어 하지 않았어. 내가 알기로 너는 불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을 믿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 P212

 "너 종이 파쇄기에 손 넣어 본 적 있어?"
캣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라고? 당연히 없지."
나는 벽에서 가속기를 내려 충전이 되어 있는지, 장전이 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왜? 죽지는 않잖아. 그리고 의수가 네 진짜 손보다 더 튼튼하기도 하고, 의료팀에서 몇 시간만 손보면 너는 새것처럼 다시 태어날 텐데."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 P213

철탑은 보안 경계선을 빙 둘러 100미터 간격으로 서 있었다. 느릿느릿 다음 철탑에 도착했을 때 오큘러에서 알람이 울리더니 다른 두 팀보다 우리 팀의 이동 속도가 더 빨라서 속력을 10퍼센트 늦춰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 P216

오큘러에서 다시 알람이 울렸다. 더 나아가지 말고 12분을 기다리라는 사령부 명령이었다. 캣은 한숨을 쉬면서 철탑에 등을 기대고는 50미터 정도 떨어진 자리에 눈 더미 밖으로 불룩 튀어나온 바위를 향해 가속기를 조준하며 말했다.
"미드가르드에서 기초훈련 받을 때 이후로 한 번도 쏴 본 적이 없어. 기억이 나야 할 텐데." 이 말했다.
"겨냥하고 쏘면 돼. 타깃팅 소프트웨어가 다 알아서 하니까. 그리고 사출구가 커서 어차피 다 죽어" 내가 말했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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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전제정에 대한 매디슨의 명시적인 개념 정의를 받아들이고 전제정을 피해야 한다고 가정하게 되면, 조건 1은 단순히 정의상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① 전제정은 모든 권력의 집중 등을 의미한다(개념 정의). ② 전제는 바람직하지 않다(공리). ③ 따라서 모든 권력의 집중 등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개념 정의를 통해 이문제를 해결해 버리면 많은 중대한 문제점들이 미해결 상태로 남게 된다. - P26

매디슨주의 논리 체계를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기 위해 나는 임의로 그 결과란 바로 "자연권에 대한 심대한 박탈"²¹임이 분명하다고 명시한 바 있다. - P27

하지만 만약 이제 이 내포적 가설들과 개념 정의들을 추가해서 매디슨주의 논리 체계를 별 의미가 없는 주장이 되지 않도록 되살려 내려고 시도할 때, 우리는 어떤 딜레마에 빠진다. 만약 우리가 "권력"을 헌법에 규정된 권한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조건 1은 명백하게 오류다. - P27

예를 들어, 선거 과정은 어떤 개인들이 다른 이들을 통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즉 분명히 이는 지도자가 아닌 이들이 지도자들을 통제하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이 단순히 집중되었다고 해서 권리의 심대한 박탈이라는 의미에서의 전제정이 반드시 등장할 것인지는 명백하지 않다. - P27

가설 6: 빈번하게 치러지는 보통선거는 전제정을 방지할 만큼 충분한 외부 견제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 가설을 입증해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가설이 오류이고, 빈번하게 치러지는 보통선거가 전제정을 막을 만큼 충분한 외부 견제를 제공한다고 해보자. 그렇게 되면 전제정을 방지하기 위해 헌법을 통해서다른 방법을 통해서건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매디슨의 주장 역시 명백히 오류가 되기 때문이다. - P28

21 비록 이 개념 정의가 매디슨의 저술에서 명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내가 찾을수 있는 한에서 볼 때, 이는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정의롭고자유로운 정부......"에서 "...... 재산권과 인권은 모두 효과적으로 수호되어야한다."라고 여러 곳에서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보통선거권은 주어졌는데 시민 다수가재산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때에는 재산권이 보호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정부는재산권이 다수에 의해 침해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한다(Padover, 앞의 책, pp. 37-38). 그렇지 않다면 정부는 "정의롭고 자유롭지 않을것이다. 나는 단순히 "정의롭고 자유로운"을 "비전제적인"에 상응하는 것으로, 그리고
"전제정"을 "정의롭고 자유롭지 않음에, 즉 자연권의 박탈에 상응하는 것으로만들었을 뿐이다. 만약 매디슨의 "다수의 전제" 개념이 이와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 P277

분명히 『페더럴리스트』 49번²²은 선거 과정이 제공하는 견제만으로는 입법, 행정, 사법의 모든 권력이 동일한 세력에 집중되는 것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시도한다.  - P28

 이 주장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민중에게 자주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정부에 결함이 있음을 의미하게될 것이며 결국 정치 안정에 필요한 경외심을 약화시킬 것이다. ② 공공영역에서의 열정을 너무 강하게 고취시키는 것은 이 공공 영역의 평화로운 상태를 위험하리만치 흔들어 놓게 될 것이다. ③ 수적으로 극소수이다보니 행정부와 사법부의 구성원들은 유권자들의 아주 일부에게만 알려진다. - P29

이상에서 보듯, 유감스럽게도 조건 1의 타당성은 확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전제적인 공화정을 위해서는 이 조건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미국의 정치적 신조 가운데 하나다.  - P29

이런 조치들은, 대법원의 위헌법률심사권, 지방분권적인 정당들, 상원에서의 의사 진행 방해filibuster, [대통령이 자신이 임명한자에 관해 해당 주의 상원의원에게 미리 인준에 대한 승인을 요청하는 관례를 말하는] 상원 "예우"courtesy, 의회 상임위원장들의 막대한 권한, 그리고 이외에도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외부 견제로 기능하도록 고안된 거의 모든 조직 내부 구조상의 장치를 포함한다. - P30

VII

개념 정의 4: 파벌은 "다른 시민들의 권리나 공동체의 영속적이고 집합적인 이익에 반하는 어떤 정념이나 이해관계 등과 같은 공통의 욕구에의해 결합해 행동하는, 상당수의 시민들²⁵이다. - P31

22 한때는 이 논문의 진짜 저자에 대해 논란이 있었지만, 해밀턴이 아니라 매디슨이저자라는 것이 이제는 분명히 밝혀졌다(Irving Brant, James Madison, Vol. III: Father ofthe Constitution, 1787-1800 [New York: Bobbs-Merrill Co., 1950], p.184). - P278

25 The Federalist, No. 10, p. 54.; E, 80. - P278

즉 그 원인은, 인간 이성이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생겨나기 마련인 의견의 차이. 서로 다른 지도자들에 대한 애착심, "인간 재능의 다양성에서 생겨나는 재산상의 차이로부터 유래한다. 사람들이 똑같아질 수 없다면, 오직 사람들의 자유를 없애야만 파벌의 원인을 통제할 수 있다-하지만 이는 분명 비전제적인 공화정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취할 수 없는 해결 방안이다. - P31

가설 7: 만약 파벌을 통제하고 전제정을 피하고자 한다면, 이는 파벌의 폐해를 통제함으로써 성취되어야 한다.

전제정을 피할 수 있도록 파벌의 폐해가 통제될 수 있는가? 다음의 두 가지 추가 조건이 충족된다는 가정하에, 매디슨은 그렇다고 답한다.

가설 8: 만약 파벌이 수적으로 다수에 미치지 않으면, 입법기관에서 투표의 "공화주의 원칙", 즉 다수는 소수를 투표로 제압할 수 있다는 원칙에 따라 파벌을 통제할 수 있다.
가설 9: 전체 유권자의 수가 아주 많고, 널리 퍼져 있고, 이해관계가 다양해지면, 다수 파벌majority faction의 발달은 제한될 수 있다.

가설 8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디슨은 이 가설의 타당성은 자명하다고 보았음이 분명하다.  - P32

매디슨은 다수 파벌의 폐해는 오직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만 통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다수가 동일한열정이나 이익을 동시에 갖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수 파벌이 애초부터 형성되지 않을 것인데, 그렇다면 매디슨은 파벌의 원인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했던 자신의 이전 주장을 여기에서는 뒤집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혹시라도 다수 파벌이 존재한다면, 그 구성원들이 효과적으로 함께 행동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 P32

그런 다음 매디슨은 너무나도 중요한마지막 명제를 제시한다. "범위를 확대하면 엄청나게 다양한 당파들과집단들이 들어오게 되고, 다른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동기를 전체 중의 다수파가 공통으로 갖게 될 개연성은 아주 희박해질 것이다. 또는 만일 그런 공통의 동기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자신들의 힘을 발견하고 서로 일치단결해 행동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다."²⁶ - P33

26 The Federalist, No. 10, p. 61. 또한 The Federalist, No.51, pp. 339 ff의 마지막 문단을참조할 것. 「페더럴리스트」 10번, 87쪽. - P278

가설 10: 전체 유권자의 수가 아주 많고 널리 퍼져 있으며, 다양한 이해관계를 갖는 한, 다수 파벌이 존재할 가능성은 낮고, 그리고 설사 존재하더라도 하나의 통일체로 행동할 가능성이 낮다. - P33

가설 1: 외부의 견제를 받지 않는 한, 어떤 개인이든 집단이든 타인들이게 전제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중략)
가설 1은 특히 다음의 주장들을 함축하고 있다.

1. 정부의 통치 과정을 통해 타인들을 통제하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표다. 즉 그런 통제는 그것을 행사하는 이들에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는 보람 있는 일로 여겨진다.
2. 정치 지도자들이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전제정으로의 충동을 억제할만큼 충분한 자기 절제력을 갖게 되기란, 사회적 훈련으로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매디슨은 이렇게까지 얘기한다. "양심 - 유일하게 남아 있는 연결고리-은 개인들에게서 별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큰 무리를 이루고 있을 때, 양심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²⁷
3. 한 개인이 또 다른 개인에게 공감하고 자신과 동일시하는 범위는 너무 좁아서 결코 전제점으로의 충동을 제거할 수 없다. - P34

 "내부의 견제"-양심(초자아), 태도, 기본 성향 - 가 어떤 특정한 개인이타인들에 대해 전제적으로 행동할지의 여부를 정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이다. 그리고 이런 내부 견제는 개인에 따라, 사회집단에 따라, 때에 따라달라진다. - P35

27 Elliot‘s Debates, V, 162. - P278

 미국 독립 이전 시기의 저술가들은이미 공화정의 필요조건이 시민들의 덕성moral virtue이라는 점을 강조했었다. 시민들의 덕성은 다시 "사람들을 고양시키는 종교, 건전한 교육,
정직한 정부, 단순한 구조의 경제"²⁹를 필요로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매디슨의 명시적인 주장을 살펴보면, 그는 자신의 시대에 분명히 공유되었던 이런 가정을 무시하거나 경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 P36

29 Rossiter, Seedtime of the Republic (New York: Harcourt, Brace & Co., 1953), pp. 429-32. - P278

가설 1‘ : 어떤 개인이든 집단이든 외부의 견제를 받지 않는 한 타인들에 대해 전제적으로 행동할 확률이 아주 높다. 따라서 전제정을 오랜 기간 동안 피하고자 한다면, 어느 정부에서든 헌법에 규정된 장치들이 모든 공직자에 대해 어느 정도는 외부 견제를 가하는 역할을 계속 담당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다음과 같은 제안은 합당해 보인다. 설사 내부의 견제가 전제정으로의 충동을 자주 막아낼 수 있을지라도, 전제적이 될 수 있는 위치의 개인들 모두에게 항상 작동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 P36

IX

인간은 자신의 사회화된 욕구들에 부과될 수 있는 보상 및 처벌과 관련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예측을 하는데, 행위란 바로 그런 예측의 산물이라고 가정해 보자.³⁰  매디슨주의자들은 전제정을 억제하는 장치로서 어떤 종류의 외부 견제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 P37

30 심리에 관한 용어로 표현할 때, 행위에 대한 내부 통제와 외부 통제의 구분이 다소 흐릿해진다는 점에 주목하자. 양심에 의한 내부 통제의 경우에도, 고통스런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을 예상하게 만드는 계기가 외부 대상이나 행동일 수도있다. 더 나아가, 예를 들어, 수입이나 존경의 경우처럼 심지어 그 특정 개인 외부의 근원에 의해 보상과 처벌이 제어될 때조차, 통제를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만족감이나 박탈감에 대한 내적 예측 또는 실제 느낌이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자면, 매디슨주의 이론은, 이 책에서 "매디슨주의적"이라고 이름 붙인 사고방식과 더 이상 일치하지 않을 정도로 대대적으로 뜯어 고치지 않는 한, 십중팔구 현대 정치학으로 만족스럽게 변형될 수 없다. - P278

그렇다고 보상과 처벌이 정부 재정과 관련되어 있는 것 또한 아닌데, 왜냐하면 입법부가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헌법은 이 통제 수단을 제약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상과 처벌은 물리적인 강압의 위협을 의미하는가? 탄핵과 유죄판결, 무력의 사용이 아마도 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경우 공화정은 항상 언제라도 폭력과 내전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태가 될것이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강압이 전제정을 막는 중요한 수단이고, 매디슨의 주장이 가정하듯이 전제정이 근본적인 위협이라면, 물리적 강압의 위협과 이로 인한 폭력의 위협은 정치에서 결코 제거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P39

 분명 매디슨은 기본적인 개념, 즉 지도자들끼리의 상호 통제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매디슨주의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부족해 보인다.
1. 지도자들 간의 상호 통제가 전제정을 막을 만큼 충분하려면, 미국헌법이 그렇게 하듯이, 권력분립이 반드시 헌법에 규정되어 있어야 한다.
고 매디슨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런 목적으로 매디슨주의를 이용할 수도 없다.
2. 매디슨주의의 주장은, 외부 견제로서 헌법상의 규정이 갖는 중요성을 과장하거나, 행위에 대한 견제나 통제라는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인간 심리 차원의 요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 행위에 관한 명제들에 대한 것이건 비전제적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에 대한것이건 부정확한 전제로부터 추론된 주장은 오류다.
3. 매디슨주의의 주장은, 제정을 방지하는 데 있어, 어떤 정부 공직자들에 대해 다른 특정 정부 공직자들이 가하는 구체적인 견제 장치들의 중요성을 과장하고 있다. 결국 이는 모든 다원주의적 사회에 존재하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견제와 균형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한다. 사회적인 견제와 균형 없이도 공직자들에 대한 정부 내부의 견제가 실제로 작동하여 제정을 방지할 것인지 의문스럽다. 반대로 이런 사회적인 견제와균형이 존재한다면, 미국에서 실제 운영되고 있는 정부 내부 견제 장치들 즉 매디슨주의 논리 체계의 견제 장치들 모두가 전제정을 방지하는데 필요할지 의문스럽다. - P40

X

전제정은 자연권에 대한 모든 종류의 심대한 박탈을 의미한다고 했던정의가 기억날 것이다. 왜 이런 개념 정의가 필요해 보이는지에 관해서는이미 설명한 바 있다. 사실 다수의 전제라는 개념은 매디슨주의 논리 체계가 세워진 핵심 이유인데,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의미는, 다수가 선거와 입법, 다수 지배라는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행동함에도 불구하고 소수에게서 자연권을 박탈해 버리는 식으로 행동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P41

그렇다 하더라도 매디슨이 "제정"을 "자연권에 대한 모든 종류의 심대한 박탈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내 입장이 옳다면, 자연권 개념을 검토하지 않고 이 개념 정의의 유용성을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 - P41

 우리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내가 제시했던 전제의 개념 정의(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인 매디슨의 명시적인 개념정의]을 따르게 되면, 결국 매디슨에게 핵심적이었던 조건 1에 대한 부질없는변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였다)와 대략이라도 유사한 어떤 개이건, 그것이 매디슨주의 논리 체계에 유용한지의 여부다. - P42

다소 터무니없지만 만약 자연권을 모든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있는 권리를 의미한다고 정의하면, 모든 형태의 정부는 전제적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어떤 정부는 최소한 일부 개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제하기 때문이다. - P42

 한가지 가능성은 공동체의 모든 개인(혹은 모든 성인)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는 그런 종류의 행위만을 제약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 행위에 대한 만장일치가 필요할 것이고 결국 통치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 P43

그래서 그런 다툼은 통치 과정을 통해 해결된다. 그런데 개인들의 의견이 다를 때, 일부 구체적인 행동을 처벌하는 것이 전제적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려면 어떤 규칙을 사용해야 하는가? 한 가지 가능성은 다수가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규칙이 갖는 몇 가지 문제점은 2장에서 검토하겠다. 그런데 이런 결정 방식이 바로 매디슨이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고, 게다가 다수의 전제라는 개념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거부해야 한다. - P43

XI

파벌에 대한 매디슨의 명시적 개념으로 돌아가 보면, 이 역시 전제정에 대한 [앞절에서 설명한] 내포적 개념과 똑같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다수"³⁴에 대항하는 견제 장치들이 헌법에 규정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옹호하려는 많은 다른 시도 속에 파벌에 대한 매디슨의 명시적 개념과 유사한 어떤 인식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 개념도 어느 정도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 P44

34 그 어떤 국가에서건 그 어떤 사회조직에서건 그 언제이건, 일반적인 의미에서,
다수는 좀처럼 지배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데, 이런 나의 입장을 보여 주기 위해서인용부호를 붙였다. 따라서 다수 지배에 대한 옹호뿐만 아니라 다수 지배에 대한두려움 역시 정치적 현실에서 실제 가능할 상황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기초를두고 있다. 이 점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5장을 볼 것. - P279

파벌에 대한 이 개념 정의가 갖는 문제는 "전제"에서 우리가 마주쳤던 것과 유사하다. 이 개념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 - P45

(전략)
이런 어려움에 처할 때 좀 다른 접근 방식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파벌을 정의하는 특징들을 찾으려고 하는 대신, 파벌을 규정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떤 정치적 과정을 통해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그려 보는 것이다. 이는 매디슨이 염두에 두었던 방식이 아니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 자신이 우리에게 어떤 길잡이도 남겨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길을 따라가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 P45

그러나 만장일치가 필요하지 않다면 그보다는 덜 엄격한 다수결로 충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무엇이 파벌이라 할 수 있는지를 다수에게 결정하게 하고, 그 파벌에 대항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하자. 이 경우 현실적으로 다수는 결코 파벌일 수가 없다. - P46

만장일치와 다수결에 의한 결정 모두를 배제하고 나면, 유일하게 남는 대안은 어떤 소수가 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하지만 이런 힘을 다수에게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앞서의 논지는 분명 그 어떤 소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 P47

XII

지금까지 보았듯이 "파벌"과 "전제정"이라는 용어가 그 어떤 구체적인 의미도 갖지 않기 때문에, (중략) 결국 이들은 그저 검증 불가능한 주장에 머문다.
하지만 이 가설들을 이런 식으로 매몰차게 대해 버리는 것은 나도 그렇지만 독자들도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 P48

다음과 같은 방식이라면 어려움을 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선 자유의 박탈은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외부의 제약 없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개인의 자유"라고 정의하자. - P48

(전략), 예를 들어, 설령 범죄자들이 상당한 크기의 집단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거부권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예외가 허용되면, 여러 개인들이 예외로 치부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전제정과 파벌에 관한 앞서의 논의들에서 보았던 그 딜레마의 미로에 갇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서 매디슨주의 원칙들과 모순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따라서 모든 소수가 아니라 일부 소수에게만 효과적인 거부권을 부여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 P49

다수는 정책 결정 단계에서 쟁점들에 관해 정치적으로 소극적이라할 수 있는데,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일단 제쳐 두면, 아주 좁게해석하는 한 가설 8은 타당하다. 여기서 좁게 해석한다는 의미는, 이 가설이 다수는 소수보다 단 한 사람이라도 많으면 충분하다고 명확하게 밝혀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 P49

그런데 다수의 자유를 증대할 목적으로 제안된 그 조치를 거부권을 가진 소수가 싫어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소수는 이 거부권을 사용해 다수의 자유에 대한박탈을 온존시킬 수 있고, 결국 다수에 대해 전제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³⁵ 
아동노동, 저임금, 열악한 주거 상황, 게다가 제대로 된 노동조합이나 사회보장정책, 빈민가 재개발사업 등의 부재 등, 이 모든 문제는 자신들의 자유가 심각하게 박탈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다수는 믿을지도 모른다.
(중략)
그렇다면 가설 8은 오류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공화주의 원칙"이, 소수가 다수를 박탈하는 것을 방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P50

XIII

 하지만 매디슨 자신이이 가설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했던 주장을 검토해 보면, 분명히이 가설(가설 9)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전체 유권자가 아주 많고, 널리 퍼져 있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면, 어떤 다수이건 그효력은 크게 제한된다. 이런 제약은 그 다수가 파벌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 P51

XIV

헌법 제정 당시에 매디슨주의의 주장은, 자신들의 첨예한 적대자들-즉, 부지위·권력에서 열등하지만 스스로 "민중의 다수"를 구성한다고 생각했던 기능공과 농부들을 불신하고 두려워하고 있던, 부지위·권력을 가진 소수에게 만족스럽고 설득력 있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역사적으로 납득이 가는 이유들때문에)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압도적 숫자의 미국인들이 적어도 어떤 시기에는 자신들도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소수 - 더욱이 헌법상 보장된다수의 권위가 법률적으로 제한되지 않으면 자신들의 목표가 위협받을 수도 있는 소수에 속하게 된다고 믿고 있을 개연성이 크다. - P52

 한편에서 보면, 매디슨은 공화정의 모든 성인 시민들은 정부 정책의 일반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권리를 포함해, 동등한 권리를 부여 받아야 한다는 개념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의미에서 다수 지배는 "공화주의 원칙"이다. 다른 한편으로 매디슨은 헌법상 제약되지 않는 다수는 아마도 지위·권력·부에서 갖는 특정 소수의 우위를무기한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소수의 자유를 보장할 정치체제를 세우고 싶어 했다. 따라서 다수는 헌법상 억제되어야 했다. - P53

두 번째 대안은 정치적 평등을, 극대화할 목표로 삼는 것, 즉 공화정의 모든 성인 시민이 정부 정책을 결정하는 데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가 결정을 내리려면 어떤기본 조건들이 존재해야 하는가? 이것이 이제 우리가 살펴볼 대안이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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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절 정의의 질서 안에서는 노동은 소유를 파괴한다.

고립된 인간은 자신의 욕구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만족시킬 수있을 뿐이다. 그의 모든 힘은 사회 안에 있으며 모든 사람들의 노력의 현명한 결합 속에 있다. 노동의 분업과 협업은 생산물의 양과 종류를 증대시키며, 기능의 전문화는 소비재의 질을 높인다.
따라서 수천의 여러 생산자들의 생산품으로 살지 않는 자는 한명도 없다. - P223

 농사꾼의 수확은, 다른 이들이 그를 위해 헛간, 수레, 쟁기, 의복 따위를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학자에게 서적상이 없었다면, 출판업자에게 주물공과 기계공이 없었다면,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 또 다른 많은 일꾼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진부한 말을 늘어놓는다고 핀잔할 터이니 더 이상 길게 명단을 나열하지않겠다. 나열하기란 너무 쉬운 일이니 말이다. - P224

생산자 자신은 자기가 만든 생산물의 아주 작은 부분에 대해서만 권리를 가지며, 그 전체 분모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수와 맞먹는다. 반면에 이 생산자는 자기의 것이 아닌 모든 다른 생산물에 대해 권리를 가지며, 따라서 모든 다른 이들에 맞서 일종의 저당권을 갖는 셈이다. - P224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다 쓰지 않고 절약할 경우 누가 감히 그와 다툴 것이냐라고. 노동자는자기 노동의 값어치에 대한 소유자조차 아닐뿐더러 그것을 결코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없다. 잘못된 정의(正義)에 속아 넘어가지말자.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대가로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가 행한 노동에 대한 보수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노동에 대한 지급이자 선불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 P225

결론을 맺자.
일하는 자는 누구나 사회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지불불능 상태로 죽어 가는 채무자이다. 소유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수탁을 부인하고 일수, 월수, 연수로 보관료를 받기를 원하는 불성실한 보관자이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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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웬일로 상냥한 목소리로 아줌마, 하고 부르더니 묘한 얘기를 했다.
"저기, 사사하라 선생님에게 내 얘기 좀 해줄래요? 착하다,
지나칠 만큼 순수하다, 순정파다, 라고 말해주시면 돼요. 주간지에 실린 기사는 모두 거짓말이라고 하세요. 그러면 다음 달부터 월급도 더 올려드릴게."
누군가 병문안하며 들고 온 백장미 꽃잎을 한 장 한 장 뜯어내며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바닥에 흩어진 흰 꽃잎을 바라보며 이 여자가 이번에는 의사 선생의 백의를 갈기갈기 찢어놓을심산이구나, 하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래도 지시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 P56

"위자료를 2천만 엔이나 받아갔으면서 왜 징징거리는 거야!"
언젠가 레이코가 통화 중에 그런 말을 한 걸 보면 아마 사실일 것이다. 주간지에는 ‘사사하라는 이혼한 전처에게 위자료로 전 재산을 내주고 무일푼이었기 때문에 레이코의 2천만 엔을 말없이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나와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사사하라의 일 처리 방식도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아줌마, 그 남자가 집에 와도 절대 안에 들이지 말아요." - P57

"병원을 휴직하기로 했어. 어쩌면 사표를 내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레이코만 내게 돌아와 주면 다 잃어도 두렵지 않아."
그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겨우 스물세 살이지만 남자와 밀고 당기는 데 선수급인 여자 앞에서 평생을 성실하게 의사 일만 해온 남자는 어린애나 마찬가지였다. - P58

"아줌마는 이런 거밖에 못 해요?"
레이코의 말대로 한 시간 뒤에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를 든 미치코에게 사사하라는 사과부터 했다.
"아주머님, 조금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너무 지쳐서 나도모르게 불끈했어요."
그러고는 레이코가 전화를 안 받을 거라고 예상했는지 전언을 부탁했다.
"다음 주에 파리에 간다고 하던데 그전에 꼭 한번 만나자고 얘기해주십시오." - P59

. 실제로 15일 전에 사사하라가 연락을 했는지, 레이코가 거기에 응해 사사하라를 만났는지, 미치코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닷새 뒤인 11월 10일, 파리로 출발할 날이 다가오자 레이코가 말했다.
"오늘부터 월말까지 안 와도 돼요. 12월 1일에 귀국이니까 그 전날에 청소는 꼭 해주세요." - P59

"아차, 내가 11월 30일에는 집에 일이 좀 있어. 29일에 미리 와서 청소해도 되지?"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하루쯤 미리 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레이코의 표정이 갑작스레 험악해졌다.
"집안에 어떤 일이 있건 호출하면 꼭 온다는 조건으로 월급을 듬뿍 쥐여주잖아요. 반드시 30일에 오셔야 해요. 하루라도 더 일찍 왔다가는 절대 안 봐줘요. 내가 돌아와서 먼지 상태 보면 금세 알아요. 약속 안 지키면 당장 해고예요." - P60

그리고 11월 30일, 미치코는 별수 없이 시골 고향 집의 아버지 13주기 제사에는 아이들만 보내고 자신은 청소를 위해 맨션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치코가 현관문을 연 것은 정확히 오후 2시 8분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상한 냄새가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고기가 썩는 듯한 냄새였다. - P60

테이블 옆에 떨어진 담요를 짖어 들고 미치코난 침실로 다가갔다.
(중략)
미치코는 저도 모르게 담요로 얼굴 아랫부분을 가렸다. 냄새를 막으려고 했는지, 순간적으로 치민 구토를 막으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담요 너머로 침대를 가로지르듯이 반듯하게 누워 있는 사람의 몸이 보였다. 처음에는 다른 여자인 줄 알았다. 베갯머리의 스탠드는 불이 꺼졌고 창문에 두툼한 커튼이 드리워져 문밖에서 흘러든 거실의 연한 불빛은 침대에 쓰러진 여자의 얼굴까지는 비춰내지 못했다. - P63

몇 분이나 그곳에 서 있었을까, 이윽고 미치코는 자긴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깨달았다.
"아줌마, 그러고도 가사도우미라고 할 수 있어요?"
삼년 전, 이 여자가 처음 욕을 퍼부었을 때부터 언젠가는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날이 오기를 오래오래 기다려온 것 같기도 했다. - P64

한 시간 뒤, 미치코는 1층 관리실에서 형사 두 명을 마주하고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낱낱이 진술했다. 이미 죽은 사람이니 앞으로 단돈 1엔도 나올 리 없다. 이제 더 이상 감추고 말고할 것도 없었다. - P64

3장, 경찰

 사사하라 노부오의 이혼한 전처와 아이가 사는 요코하마에 가봤지만 아무수확도 없었다, 라는 신호였다. 한 시간 전에 이미 요코하마 역에서 전화 보고는 받았다. 지난 7월에 정식으로 이혼한 뒤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아무 연락도 없었다고 한다. 그 두 달 전인 5월,
사사하라와 미오리 레이코의 약혼이 전격 발표되기 직전부터 이미 아내 야스코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간 모양이었다.
"여간 쌀쌀한 게 아니더라고요. 그이가 죽였겠죠, 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던데요."
오니시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컹컹 기침을 했다. - P68

당연히 주요 용의자로 사사하라 노부오의 이름이 올랐다.
사건 현장에 남겨진 지문 중에서 특히 침실 문 앞의 깨진 유리잔조각과 붉은 약봉지에 찍혀 있던 게 가장 유력한 증거였다. 피해자의 사인으로 밝혀진 청산화합물이 약봉지에 극소량 남아 있었고 유리잔 파편이며 카펫 얼룩에서도 발견되었다. - P68

이제 곧 나올 부검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자세한 시각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아사이는 사건 발생 시각을 12일부터 14일 사이의 밤 시간으로 추정했다. - P69

밤이라는 건 사건 현장의 거실 조명이 계속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침실 침대 옆 스탠드도 스위치가 켜져 있었다. 즉, 사건 발생 이후에 전구가 끊긴 것으로 보였다.
사사하라는 11월 초 병원에 한 달간 휴가를 신청했다. 7일저녁에는 레이코의 맨션에 찾아와 "내 손으로 죽일 거야!"라고소리쳤고, 이어서 걸려온 전화에서는 파리로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만나자는 전언을 남겼다. 게다가 닷새 뒤인 12일 오후에는 병원에 나타나 한 시간쯤 머물렀다. - P69

오카베 게이조라는 스물여덟 살의 젊은 형사다.
"자살로 볼 수는 없을까요?"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자살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첫째로 파리에 갈 예정, 절대 자살할 사람은 아니라는 가사도우미의 증언, 그리고 약봉지에 미오리 레이코의 지문이 없었던 점 때문이잖습니까."
"그렇지. 게다가 청산가리 약봉지에 사사하라의 지문도 있었어. 그거면 충분하잖아?" - P71

이윽고 아사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오니시와 오카베에게 마지막에 들은 얘기부터 전했다.
"피해자 미오리 레이코의 얼굴에 성형수술 흔적이 있다는거야. 게다가 얼굴 각 부위를 아주 정교하게 수술했대." - P72

"진짜 실력 있는 명의가 수술해준 모양이네요. 다른 스캔들은 많았어도 성형 얘기는 나온 적이 없거든요. 차가운 인상이지만 성형 특유의 인공적인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와아, 그렇구나,
모든 남자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 얼굴이 성형이었다니."
오카베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P72

4장, 용의자

 하마노는 의자에 앉히고 그는 침대 끝에 자리를 잡았다.
(중략)
"괜찮습니다. 경찰에서는 아직 제가 선생님께 신세진 사이라는 건 알지 못해요. 4시쯤에 병원으로 형사 두 명이 찾아왔는데 저한테는 어떤 질문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전화로 말씀하신 대로 프런트를 통하지 않고 옆의 출입구로 들어와서 엘리베이터를 탔어요." - P74

"정말로 선생님이 죽였습니까?"
(중략)
 세상을 너무 고지식하게 바라보는 눈빛.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죽이지 않았어."
"하지만...." - P75

"그날 밤에 내가 레이코의 집에 갔던 것은 사실이야. 12일 오후에 병원에 잠깐 들렀었지? 그때 슬쩍 집어온 독약을 들고….
레이코가 문도 열어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순순히 안에 들여줬어. 빈틈을 노려 술잔에 그 독약을 타려고 했어. 하지만 약봉지를 뜯으려는 순간에 레이코에게 들켜버렸어. 그게 뭐냐고 캐묻는 바람에 결국 청산가리라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어. 그다음에는 오로지 자기를 죽이려고 했느냐는 비난만 듣다가 아무 변명도 못 하고 그 집에서 쫓겨났어.
그날 밤에 내가 그 집에서 한 일은 그게 전부야." - P75

"그러시다면 그런 얘기를 경찰에 가서...."
"그건 안 돼. (중략). 그날 밤에 내가 약봉지를 테이블에 남겨둔 채 그 집을 뛰쳐나왔고, 그 뒤에 거의나와 교대하듯이 레이코를 찾아간 자가 있었어. (중략)
아마 레이코는 방금 자신이 살해될 뻔했다는 얘기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그자에게 떠들어댔겠지. (중략), 청산가리 봉지를 일부러 내보이면서. 그리고 그 얘기를 들은 사람이 전부터 레이코가 죽기를 원했던 자라면 얘기가 어떻게 되겠나.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독약을 써먹으려고 하지 않았겠어?" - P76

 호텔 이름이 인쇄된 메모지에 여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약혼한 무렵에 레이코가 나한테 얘기해준 적이 있어. 자신을 죽이고 싶어할 만큼 미워하는 자가 일곱 명이라고. 한명 한명 이름을 들면서, 이유까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정확히 그렇게 얘기했어. 사진작가, 여성 디자이너, 신인 남성 디자이너, 광고 모델을 했던 회사의 젊은 사장, 동료 패션모델, 그리고 레이코의 음반을 제작해준 여성 디렉터 나야 거의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지만, 레이코를 사귀면서 차츰 누군지 알게 됐어. 틀림없이 여기 적힌 이 이름들을 말했어. 자네도 알 만한 사람이있지?" - P77

"방금 일곱 명이라고 하셨지요? 여기에는 여섯 명만 적혀있는데요."
(중략)
"그 얘기를 할 때 레이코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한명 한명이름을 알려줬어. 그런데 일곱 번째로 약지였나, 실은 한 명 더있는데 그 사람 이름은 지금은 말해줄 수 없다면서 손가락을 입에 댔어. 남자 같긴 한데 나는 누군지 짐작도 못 하겠어. 내가 아는건이 여섯 명뿐이야." - P78

그는 다시 침대 끝에 앉아 메모지에 적힌 이름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말했다.
"우선 한 명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반응을 살펴보자. 내가그날 밤 우연히 레이코의 맨션 뒤쪽에 있었는데, 당신이 안색이홱 변한 채 6층에서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와 도망치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게 얘기하면…."
"말하자면 포커의 블러핑 같은 거네요.‘ - P80

그렇게 대답하는 하마노를 지켜보다가 그는 가방에서 50만 엔을 꺼내 내밀었다.
"아뇨, 보수는 필요 없.."
"그게 아니라 실제로 비용이 들 거야. 그러기 위한 돈이야."
하마노는 잠시 말이 없었지만 이윽고 돈을 받아 레인코트안주머니에 넣었다. 그게 그의 대답이었다. - P81

일 분 뒤,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마노에게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전부터 자네에게 한 가지 충고하고 싶은 게 있었어. 자네는 나를 닮아 지나칠 만큼 성실하지. 행여나 나처럼 못된 여자에게 너무 진지하게 빠져들어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 - P82

그리고 다음 날 정오 뉴스에 그의 얼굴이 거의 확정적인 범인으로서 화면에 나왔다. (중략). 약사는 그가 12일에 병원에 왔을 때 약품실 보관창고에서 약병의 내용물을 호주머니에서 꺼낸 붉은 종이에 넣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야마네 하루코 약사가 틀림없었다. - P83

 그는 자신을 끼고 양쪽에 앉은 두 형사 중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상의 안주머니에 골루아즈 마지막 한 개비가 남았는데 그걸 피워도 괜찮겠습니까....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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