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한 위스키

 잭 다니엘스 Jack Daniel‘s와 짐빔 Jim Beam을 미국 위스키의 전부로 알던 시절, 나보다 인생 경험도 많고 음주 경험도 풍부한 선배는
"메이커스 마크를 모르면 위스키를 안다고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위스키이기에 저렇게 얘기하나‘ 싶었다. - P47

 방문자 센터로 들어가 잠시 몸을 녹이려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처음엔 다른 방문객 누군가가 데려왔나 싶었다. 그런데 녀석이 하는 짓을 보니 그건 아닌 게 분명했다. 태도와 자세가 여유 있고 당당했다. "이봐 얼뜨기, 여긴 바로 내 구역이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녀석은 한동안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러더니 탁자 위로 냉큼 뛰어올랐다. 앉아 있는 모습도 기품이 넘치고 우아했다. - P48

고양이 얘기가 나온 김에 잠깐 설명을 하자면 증류소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건 일종의 전통이다. 물론 이유가있다. 증류소엔 위스키 제조에 필요한곡물이 잔뜩 쌓여 있다. 그러다보니과거엔 증류소 주변에 쥐가 들끓었다.
곡물 창고를 들락거리는 쥐를 잡으려고 증류소에선 고양이나 개를 길렀다.
이처럼 증류소에서 쥐를 잡는 고양이를
‘워킹 캣Working Cat‘, 즉 ‘일하는 고양이‘라고 불렀다. - P49

이 증류소 부지만 808에이커, 주변의다른 땅까지 다 합하면 무려 1000에이커(약 400만 제곱미터)라고 한다. 1000에이커면 도대체 얼마나 넓은 거야?‘ 싶어 잠깐 계산을 해봤다. 축구장 570개 면적이다.
이 드넓은 땅에 증류소 시설은 5퍼센트밖에 안 된다. 나머지 95퍼센트 땅은 건드리지 않고 놀리고 있다. 왜 그냥 두느냐고 물었더니 환경 보호 때문이란다. 개발을 할수록 자연은 파괴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위스키 품질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 P50

철저히 환경을 보호해서일까? 증류소 건물 사이로 흐르는 개울만봐도 깊은 산속 계곡물처럼 맑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지리산 뱀사골이나 덕유산 구천동 계곡 수준이다. 증류소 직원은 "우리는 이곳을 위스키 개울 Whisky Creek이라고 불러요. 매일 아침이면 주변에 서식하는사슴들이 몰려와서 맑은 물을 마시고 돌아가죠. 내일 아침에 한번 와보세요. 사슴이 아주 많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 P51

새뮤얼스 가문의 땀과 눈물

이 멋진 증류소는 누가 세운 걸까? 증류시설로 이어지는 호젓한 오솔길을 걸으며 메이커스 마크 탄생 일화를 들었다. 메이커스 마크의 역사는 스코틀랜드계 이민자인 새뮤얼스와 그 후손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이야기다. - P53

새뮤얼스 증류소는 4년 숙성 위스키를 제조해 판매하다가, 금주법시행으로 1919년에 문을 닫는다. 1933년 금주법 폐지 이후 생산을재개했지만, 오랜 공백 때문인지 위스키 품질은 엉망이었다. 한마디로 거칠고 쓰기만 한 맛없는 위스키였다. - P54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다름이 아니라 메이커스 마크증류소에 있는 증류실 세 곳은 크기나 구조, 설비까지 모두 똑같다는 점이다. 거울에 비춘 듯 세 곳의 증류실은 모든 게 똑같다. 내부에 있는 당화조 cooker, 발효조fermenter, 증류기의 크기와 모양이 똑같을뿐더러 놓여 있는 자리도 똑같다. 완벽히 닮은 증류실 세 곳을 가리켜 롭새뮤얼스는 "일란성 세쌍둥이"라고 표현했다. - P56

그렇다면 메이커스 마크는 왜 똑같은 증류 시설을 세 개나 지어서 따로따로 가동하는 걸까? 누가 봐도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데 말이다. 롭 새뮤얼스는 이렇게 답했다.

"이 증류소를 세운 제 할아버지와 저에게 증류소를 물려준 아버지의 생각은 똑같았습니다. 장인으로서 그들의 목표는 기업을 키우는것도 아니었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비용이 더들더라도 맛있는 위스키를 만드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기업이성장해 시설을 확장해야 할 때도 이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원래 있던것과 똑같은 증류 시설을 지어서 똑같은 공정으로 만들면 당연히 맛도 똑같을 테니까요. 더 큰 발효조와 더 큰 증류기를 쓰면 돈이 덜 든다는 건 우리도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칫 위스키 품질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 P57

‘황금 레시피‘를 찾아서

대대로 전해온 제조법을 태워버렸으니, 이젠 새로운 길을 갈 수밖에없었다. 다음날부터 빌 새뮤얼스는 "새롭고 부드러운"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본격적으로 레시피 개발에 착수한다.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곡물 배합 레시피인 매시빌mash bill을 찾는 것이었다. 어떤 곡물을 어떤비율로 섞어야 할지를 결정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 P59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빌 새뮤얼스는 결국 해법을 찾아냈다. 바로
‘빵‘이었다. 진짜 위스키를 만드는 대신, 이런저런 곡물 조합으로 빵을 구워본 것이다. - P59

낡아빠진 곡물 분쇄기

증류소 직원 애기가 곡물을 빻을 때 쓰는 분쇄기를 보여줬다. 한눈에봐도 상당히 낡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구석기 유물‘이나 다름없다.
대체 언제부터 이 기계를 썼는지 물었다. 직원들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만큼 오래됐다는 얘기다. 위스키도 잘팔리는데, 왜 이런 골동품을 계속 쓰고 있는지 궁금했다. 다 이유가 있었다. - P61

호밀 대신 밀을 써서 만든 버번 위스키°는 많지 않다. 버번의 본고장인 켄터키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밀을 쓰는 가장 대중적인 브랜드로는 당연히메이커스 마크를 들 수 있다. 또 돈이 있어도 못 구할 만큼 희소하고 천정부지로가격이 오른 패피 밴 윙클Pappy Van Winkle°° 도 호밀 대신 밀을 넣는다. 이 두 제품말고는 웰러W. L. Weller (버팔로 증류소)와 라서니Larceny(헤븐힐 증류소) 정도가 유명하다.

° 이처럼 호밀 대신 밀을 사용한 버번 위스키를 ‘휘티드 버번wheated bourbon‘ 혹은 ‘휘터wheater‘라고 부른다.
°°『빅 위스키Big Whiskey』라는 책에 따르면, 메이커스 마크 증류소 창업자인 빌 새뮤얼스에게 호밀 대신 밀을 쓰라고 조언한 사람이 버번 위스키 장인 패피 밴 윙클이다. - P60

솔직히 여기 오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증류할때도 다른 곳과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도수를 많이 끌어올리지 않는 점이 눈에 띄었다. 1차 증류를 마치면 60도(120프루프), 2차 증류까지 다 끝낸 뒤에도 65도(130프루프)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버번 업계에선 거의 최저 도수라고 할 수 있다. 최종 증류 도수를 기준으로우드포드 리저브 79도, 버팔로 트레이스 74도, 포 로지스Four Roses 역시 70도까지 증류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낮다. - P63

미국 생물학자 로버트 더들리 Robert Dudley가 쓴 『술 취한 원숭이 TheDrunken Monkey』라는 책에 따르면, 영장류와 인간의 후각이 발달하게된 건 알코올 때문이라고 한다. 땅에 떨어져 자연 발효된 과일을 먹고싶어 했던 원시인들이 코를 킁킁대며 알코올 냄새가 나는 곳을 찾다보니 저절로 후각 능력이 진화했다는 거다. 그러니 증류소 숙성고에서 코를 킁킁대게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천수만 년 동안 알코올에 탐닉해온 인류가 대대로 이어온 DNA 때문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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