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틀린의 테크네와 혁명적 폐허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1919~25)는 모험에 찬 혁명적 실험이었다. 비록 관습적 지혜와 달리, 그것에 담긴 "모험" "혁명" "실험"의 개념이 배타적인 것까지는 아니라도 종종 서로 모순적이었지만 말이다. - P17

예술과 삶사이의 모순을 날카롭게 의식하면서, 트로츠키는 포스트 혁명기의 "무목적성"이라는 목적을 폄하하고 있다. - P17

제3인터내셔널에 바치는 기념비는 극단적인 반-기념비가 되어야만 했다. 건축 혁명의 선언문으로서 타틀린의 탑은 "부르주아적인" 에펠탑과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양자 모두에 도전했다. - P20

실제로 탑은 영구적인 예술적 혁명의 짧게 지속된 유토피아를 기념했으며, 타틀린은 그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선언에 따르면, 혁명은 1917년이 아니라 예술적 변형이 발생했던 1914년에 일어났다. - P21

타틀린의 동시대인이자 잘 알려진 구축주의 이론가였던니콜라이 푸닌은 이 기념비를 탁월한 par excellence 반-폐허로 묘사했다. - P21

코르사바드의 프로젝트는 실제로 신전, 필시 바벨탑의 신화적 형상에 대응될, 꼭대기가 평평한 피라미드 구조물로, 에테메난키 Etemenanki라고 불리는 바빌론의 신전을 닮았다.¹³ 요컨대, 반-에펠탑이 되려는 시도 속에서 타틀린의 탑은 완결되지 못한채 신화적 폐허로 변해버린 유토피아의 기념비, 바벨탑을 떠올리게 한다.


13vol, 2, William G. Rosenberg(ed.), Ann Arbor: University ofMichigan, 1990, p. 183.
탑의 도상학에 관한 좀더 상세한 정보는 다음을 보라. JohnElderfield, "The Line of Free Men: Tatlin‘s Towers and the Ageof Invention." Studio International, vol 178, no. 916 (Nur 1969),
p. 165, 엘더필드가 지적하기를, 바빌론의 지구라트 성탑은
"하늘과 땅 그리고 성스러운 산과 정상을 향한 길인 나선 계단의상징주의의 기초가 되는 집이다." 또한 엘더필드는 나선 형태를매너리즘과 바로크 건축의 "뱀 형상과 비교하고, 타들린의탑과 산티보 알라 사피엔차 성당의 소용돌이 형태의 원주비교한 지그프리트 기디온Sigfried Giedion 에 관해 논의했다. 이에세이에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의식의 상징적 형태가 아니라이 세계와 인간의 창조성 속에 존재하는 형식이다. - P23

아마도 모든 기능적인 현대의 탑은 총체적 커뮤니케이션을 향한 이 최초의 꿈의 신화적인 오작동을 환기한다. 롤랑바르트가 쓰기를, 구스타브 에펠 스스로는 자신의 탑을 "합리적이고 유용하며 진지한 사물의 형태로 보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비이성의 경계에 맞닿아 있는 위대한 바로크식 꿈의 형태로 그에게 되돌려주었다."¹⁴

14Roland Barthes, "The Eiffel Tower," in The Eiffel Tower, and OtherMythologies, Richard Howard (trans.), New York: Noonday Press/Farrar, Straus & Giroux, 1979, pp. 3~18. - P25

 바르트는 에펠탑을 아무것도 담고 있지않은, 그러나 그 꼭대기에서 세계를 볼 수 있는 "텅 빈" 기념비로 간주했다. - P26

타틀린의 탑 또한 바벨의 방식을 따라 서구 언어들로 "번역"되었고 번역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소실되었다. 1920년에 뮌헨의 예술저널 『아라라트Der Ararat』에 이 탑에 관한 기사가 실렸고 막 부상하던 다다이스트들의 관심을 끌었다. "예술은 죽었다"고 다다이스트들은 선언했다. - P26

타틀린의 건축적이고 기술적인 프로젝트는 기능주의보다는 모험의 영역에 속한다. 타틀린과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그가 기념탑 이후에 기예technique의 이슈를 예술과 기술technology 사이의 세번째 항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 P31

비행 기계와 탑, 두 프로젝트 모두 매우 다른 기술사에속한다. 그것은 마법에 걸린 기술, 그러니까 미적분학 못지않게 카리스마에 기초를 두는, 근대 과학 못지않게 전근대의 신화들과 연결된 기술이다. - P34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중반까지 타틀린의 예술적 삶은 자신의 시대를 굴절시키는 온갖 모순들 속에서 풍요롭다. 그는 1930년에 자살한 러시아의 혁명 시인 블라디미르마야콥스키의 관을 디자인했다. - P35

자신의 문화적 타당성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예술가는무엇을 해야 하는가? - P35

 자신의 공식적 죽음이 선언된 이후에 아방가르드 예술가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타틀린의 "사후 postmortem" 작품들은 말 그대로 죽은 자연물들 [정물들]natures mortes, 그리고 대개는 갈색과 회색 팔레트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연극 무대의 배경막 위에 그려진 황량한 시골 풍경들로 구성되어 있다.  - P38

 게다가 우리가 타틀린의 정물화를 더 가까이 살펴볼수록, 그것이 이중적인 비전을 지닌 실행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는 단지 관습적 의미에서의 정치적 이중발화같은 것이 아니다. - P39

사실 타틀린 기념탑의 건축적 모험은 복원적 restorative노스탤지어와 성찰적 reflective 노스탤지어라는 두 가지 방향을 따라 전개되었다.²⁵

25 (옮긴이) 복원적 노스탤지어와 성찰적 노스텔지어는 보임의 가장 잘 알려진 유형론이다. 두 유형의 구별 자체는 공통의 장소 (1994)에서 이미 "유토피아적 향수"와 "반어적인 향수"라는 용어로 등장한 바 있지만 (pp. 477~78), 본격적인 고찰의 대상이 된 것은『 노스텔지어의 미래The Future of Nostalgia』 (2001)에서있다. 이어지는 소비에트 궁전 프로젝트가 타틀린 탑의 유토피아를 향한 첫 번째 방향(복원적 노스탤지어)을 대변한다면, 뒤에 상세히 다룰 전후의 비공식 예술은 두번째 방향(성찰적노스텔지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옮긴이해설을 참조하라. - P42

 소비에트 궁전은 역동적인 나선을 부동의 것으로 만들고, 헤겔의 변증법을 제국적인 합명제로 중단시키면서, 타틀린의 조형물이 재현의 개방성과 반항을 전시했던바로 그 장소에 레닌의 동상을 가져다 놓았다.²⁶




26 Svetlana Boym, The Future of Nostalgia, New York: Basic Books,2001, pp. 100-108을 보라. - P43

타틀린을 향한 이 근래의 헌사는 소비에트 연방의 끝과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 개혁 개방의 시작과 시기상 맞물려 있다. 결코 실현되지 못한 발본적인 혁명의 기념비인 그 기념탑은 "예술적 유산"의 일부로서 물리적 실존을 가지게 되었다. - P46

낯설게하기의 건축과 자유의 커브

타틀린의 탑은 애초부터 그것의 분신에 해당하는, 거의 건축 원본만큼이나 탁월한 담론적 기념비를 산출했다. 탑의 파격적인 건축 [양식]을 인정했던 소수의 당대인 중 한 명이었던 시클롭스키는 그것을 낯설게하기의 건축으로 여겼다. - P47

요컨대 그 탑은 단지 공학적 실패가 아니라 구축주의 건축의 모범적인 사례연구였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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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인간, 그리고 사이코패스



놀라운 진실과 맞닥뜨리다



(전략). 젊은 사이코패스의 뇌를 이해하기 위한 신경해부학적 배경Neuroanatomical Background to Understanding the Brain of a Young Psychopath내가 10년에 걸쳐 분석한 사이코패스 살인자들의 뇌 스캔 사진을 기초로 하는 논문이었다. - P8

나는 40년 넘게 신경과학자로 일해오면서 많은 뇌 스캔 사진을 보아왔지만, 이들의 사진은 달랐다. - P9

나는 살인자들의 뇌 스캔 사진을 연구하는 동시에, 알츠하이머병 연관 유전자가 있다면 과연 어떤 유전자일지를 탐색하는 연구도 별도로 진행하고 있었다. - P9

연구의 일환으로, 나는 동료들과 함께 여러 알츠하이머 환자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여럿의 유전자 검사와 뇌 스캔을 병행해왔다. 우리 가족은 정상 대조군이었다.
(중략). 사실 그 사진은 사진 임자가 사이코패스이거나 적어도 사이코패스와 불편할 정도로 많은 특성을 공유함을 시사하고 있었다. 나는 사진 임자가 우리 가족 중 하나일 거라고는 의심하지 않고, 당연히 우리 가족 뇌 스캔 사진에 어쩌다 테이블 위 다른 사진 더미가 섞였으리라 여겼다. - P10

그 뇌 스캔 사진의 주인공은 나였다. - P10

나는 사이코패스다

(전략).
당신이 여전히 관심을 보이는 것 같으면, 나는 또 미술, 건축, 음악, 교육, 의학 연구에 초점을 둔 여러 조직과 두뇌집단에도 발을 걸치고있으며, 전쟁이 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미 국방성 자문위원의 명함도 있노라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 P12

당신이 나를 다시 만나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친구가 될수도 있다. - P13

다만 한 가지, 내가 경계 사이코패스borderline psychopath라는 점만빼면. - P13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내가 내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하는 이유는 내 가계의 생물학적·심리학적 배경을 나의 가족, 친구, 동료와 공유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뇌 영상, 유전학, 정신의학의 포괄적인 과학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지만, 나 자신과 내 과거를 무자비하리만치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진리에 다가갈 것이다(내 지인들이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나와 의절하지 않기를). - P14

나는 충실한 과학자(뇌의 해부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이고, 이 사실이 내가 어른이 되어 사는 내내 나의 행동관, 동기관, 도덕관을 만들었다. 인간은 정밀한 기계다. - P15

내가 볼 때 성격과 행동은 본성(유전)이 80퍼센트 정도를 결정하고 양육(성장 환경)은 20퍼센트밖에 결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뇌와 행동에 관한 나의 일관된 사고방식이다. - P15

1장

사이코패스란무엇인가

사이코패스를 둘러싼 논란

"도대체 사이코패스psychopath가 뭘까?
나의 뇌 스캔 사진을 보고 나서, 과학자인 나는 경각심보다는 호기심이 일었다. 내가 정말로 사이코패스인지 알아보려 정신의학계 동료들에게 "도대체 사이코패스가 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 P18

UC 어바인의 동료이자 유명한 정신의학자인 내 친구 파비오 마치아르디Fabio Macciardi는 "사이코패스라는 정신의학적 진단명은 없어"라고 했다. - P19

의학적 진단 기준이 관례적임을 고려하면, 사실 사이코패시를 둘러싸고 논란이 그토록 많은 것도 이상할 게 없다. - P20

무엇보다, 정신병은 도대체가 병으로 여겨지질 않는다. 병이란 특정한 장애의 원인(병인학)과 몸에 있는 결과(병태생리학[병리생리학])에 대한 지식을 기초로 한다. 마음의 병은, 다른 기관 계통에 생기는 여러 실제 질병과는 달리, 이러한 호사를 누리지 못한다. - P20

사람들 간에 사이코패시를 정의하는 조건(또는 사이코패시가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가)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사이코패시의 기초 원인이 무언지 전문적합의가 없기 때문이다. - P21

사이코패시 같은 정신장애를 검사하는 정해진 방법 따위는 없지만, 환자의 정신 상태에서 일부 양상을 판정할 수는 있다. - P21

사이코패시가 진정한 장애인가, 그렇다면 사이코패시를 어떻게 정의하는가를 놓고는 논쟁이 있지만, 의학계에서 인정하는 어느 정도의 매개변수는 있다. - P22

사이코패시 특성은 네 가지 범주 또는 ‘요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 P22

사이코패시는 아무나 대충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공식‘ 진단용이 아니라 자기가 써 넣는 변형된 검사들도 있지만, 자기 기입식 진단표에 올라 있는 전형적 진술은 다음과 같을지도 모른다. (후략). - P23

영화와 책에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묘사가 가득하지만, 어떤 묘사는 정확하고 어떤 묘사는 덜 정확하다. - P23

어느 정도 합당한 성격 묘사로는 <좋은 친구들Goodfellas>에서 조페시가 연기한 토미 드비토, <블루 벨벳Blue Velvet>에서 데니스 호퍼가 연기한 프랭크 부스를 들 수 있다. - P24

사이코패스들은 살인을 한 뒤, 흔히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한 것처럼 느낀다거나, 희생자가 방아쇠를 당기게끔 자기를 부추겼노라고 말한다. 사이코패스들은 그들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저도 어쩔 수 없는 힘에 떠밀려 행동했다고 느낀다. - P25

완전히 진행된 명백한 사이코패스, 다시 말해 헤어의 PCL-R 점수가 30점 이상인 사이코패스는 지금껏 테스트 대상 여성의 약 1퍼센트와 남성의 3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헤어의 척도는 분류 체계가 광범위함에도 어쩌면 그 점 때문에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돼왔다. - P27

한 가지 비판은 헤어 척도가 계급과 민족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범죄가 들끓는 LA 도심에 있는 하류계급 동네에서의 규범적 행동과 미네소타 상류계급 동네에서의 규범적 행동은 다르다. - P27

 사이코패스는 대개 사람을 능숙하게 조종하고, 둘째가라면 서러운 거짓말쟁이에다, 말재주가 상당하고 상대가 경계심을 풀 만큼 매력적일 수 있다. - P28

 가장 위험한 사이코패스라도 때로는 명랑하고, 근심 걱정 없고, 사교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조만간 뚜렷한거리감, 소리 없는 냉담함,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낼 것이다. - P28

사람들이 흔히 묻는 한 가지는 소시오패스와 사이코패스⁶ 사이에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많은 심리학자가 둘 다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사실을 제쳐두면, 임상 배경의 차이는 순전히 그 의미에 있다.


6 sociopath‘와 ‘psychopath‘는 각각 ‘사회병질자‘와 ‘정신병질자‘로 옮기기도 하나, 책에서 말하는사이코패스는 엄밀히 말해 정신병질자와는 차이가 있으므로, 일관성을 위해 ‘소시오패스‘와 ‘사이코패스‘로 옮겼고, 또 같은 맥락에서 ‘sociopathy‘와 ‘psychopathy‘도 ‘사회병질‘과 ‘정신병질‘이 아닌 ‘소시오패시‘와 ‘사이코패스‘로 옮겼다. - P29

나는 뇌과학자이고 이 성격장애의 유전적 원인과 신경적 원인에 관심이 있는 터라, 이 책의 목적을 위해 사이코패스라는 용어를 쓰려 한다. 그리고 사이코패스 용어를 써서 헤어 진단표의 네 가지 측면 즉 대인관계 특성, 정서 특성, 행동 특성, 반사회 특성이 얼마간씩 조합된 사람들을 묘사할 것이다. - P30

나는 정말 사이코패스일까?


(전략).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는 사이코패시에 관해 아는 게 매우 적지만, 스캔 기술마저 없다면 아마 훨씬 더 적을 것이다. 사이코패스가 걱정과 후회를 가장하기는 쉽지만, 그럴 때 뇌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 P31

나는 사이코패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구를 마치고 그 연구의 대요를 밝히는 논문을 막 제출한 참이었다. 사이코패시의 신경해부학적 기초를 설명하는 이론을 펼쳤고 내가 직접 찾아낸 패턴을 확인하는 논문이었다. 그래 놓고 내가 무슨 수로 나의 뇌를 내가 방금 보고한 연구 결과와 화해시킬 수 있지?  - P32

2장

성장기의
불길한 징조

착한 소년의 어린 시절

대중매체와 대중문화는 사이코패스 기질이나 장애가 있는 아이가 성장해서 무자비한 살인자가 되는 그림을 오랜 세월에 걸쳐 훌륭하게 완성해왔다. - P33

처음에는 나의 뇌 스캔 사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어린 시절이 행복했던 터라서, 내가 다른소년들과 달랐다는 징후들은 내 연구와 개인적 발견의 맥락에서 몇 가지 일화들을 되돌아보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 P34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이따금 트로이에 있는 아버지와 삼촌의 약국에서 일을 도왔다. 과학, 수학, 공학에 적성이 있었고 일찍부터 자연계, 동물, 원예, 야외활동에 관심을 보인 덕분에 약사들과도 편하게대화할 수 있었다. - P37

짓궂은 장난에 대한 나의 기호는 학습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삼촌은 두 분 다 장난꾸러기였고, 아버지의 약국 동업자인 아널드 삼촌과 찰리 외종조부는 그 방면에 대가였다. 하지만 그들의 장난은 모든 경우에 유종의 미를 거뒀다. - P38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는 콜로니 근처 공립학교인 셰이커고등학교에 다녔다. 그곳은 신설된 실험학교였다 - P39

나는 사람을 겁주지도 않았고 공격적이지도 않았다(고등학교와 대학내내 키는 180센티미터에 몸무게는 82~100킬로그램이었다). 나는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고, 내 형제 중에서는 얌전한 축에 속했다.  - P40

나는 싸움꾼으로 유명하진 않았지만, 누군가를 괴롭히는 놈을 보면그를 쫓아가 끼어들어서 하는 짓을 그만두라고 말하곤 했다. 필요하다면 완력으로 놈을 들어 올려서는 죽여버리겠다고도 했다. - P40

우리 가족의 수컷 중 다수는 운동을 잘하고 몇몇은 단지 싸움을 사랑하지만, 나는 주먹싸움에는결코 취미가 붙지 않았고, 맨주먹으로 누군가를 연타하기보다는 정신적으로 그렇게 하기를 더 좋아한다. - P41

강박장애

중학교 동안에는 강박장애obsessive compulsive disorder, OCD가 생겼고, 장애의 일부는 종교 특히 어머니가 믿는 천주교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P41

강박장애 환자가 자신의 강박관념을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나의 더 기묘한 충동 하나는 내 개인 공간의 왼쪽 편에도 오른쪽 편에 기울이는 것만큼의 주의를 기울이려는 것이었다. - P42

내가 60대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나의 강박증에 관한 기억을 들려주었다. - P43

내가 어떤 식으로든 반사회적 행동을 보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네 아버지한테 얘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는 정신과의사한테 연락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지." 어머니가 말했다. - P44

나의 독실함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보상을 받았다. 해마다 열리는 뉴욕주 가톨릭청년회의에 나갈 ‘올해의 가톨릭 소년‘에 지명된것이다. 덕분에, 나는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 뉴욕대주교 스펠먼spellman 추기경, 주 정부의 공무원들과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 P44

고등학교 4년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보냈다. 나는 해마다 풋볼 팀에도 레슬링 팀에도, 육상 팀에도 속해 있었다. - P44

스포츠 정신은 부족했지만, 나는 대체로 괜찮은 놈이었다. 나는 매년 밴드에서 악기를 연주했고, 학교 영화 제작 팀에서 연기를 했고, 연극부에서 부장을 맡았으며, 학생 자치회에도 이름을 올렸다. - P45

 나에게는 사람들을 맥을 못 추게끔 하는 유머감각과 개방성과 낙천성이 있어서, 사람들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나는 총명한 아이였고, 고등학교 졸업반시절엔 ‘학급 광대‘로 이름이 났다. - P45

하지만 나의 마음 뒤편에서는 사악한 귀신이 잠복해 나를 외롭고 섬뜩한 곳으로 끌어들이고 있었음을. 그때에도 나는 알고 있었다. - P46

공황발작의 시작

(전략). 그해 여름에 아버지 심부름으로 배달을 간 곳은 정신병 환자들로 들어찬 양로원이었다. 양로원 복도를 걸으며 나는 놀라운 행동을여럿 목격했다. 어떤 할머니는 옷을 벗으면서 나더러 같이 침대로 뛰어들자고 졸라댔고, 어떤 사람은 내리 몇 시간 동안 똑같은 말을 하고또 하는 반향언어증(메아리증, echolalia) 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조현병, 어떤 사람은 말기 치매 등 끔찍한 행동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 P47

(전략).
이 사건은 내가 그 뒤로 수십 년에 걸쳐 850번쯤 경험하게 될 공황발작 panic attack의 시작이었고, 난 30대가 돼서야 그럭저럭 발작을 넘기는 법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 500번쯤까지 공황발작을 겪는 동안엔 내가 1, 2분 안에 죽을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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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 이 친구가 이야기한 건 좋은 영화를 만들자는 거야.
착각하지 말라고. 욕실 장면을 다시 찍자는 이야기가 아냐."
호소카와가 미스즈를 바라보며 못 박듯이 말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제대로 된 영화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역시 내가 범인이어야 해."
"무슨 소리! 당신 따위가 사람을 죽일 수나 있어?"
"어머머!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하네?" - P167

5장

범인이 너무 많다


1

오 분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회의가 열렸다. 사람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자마자 가장 먼저 손을 든 사람은 여느 때 같으면 나이든 집사처럼 조용히 있을 야부우치였다. - P171

"설마, 그래서 야부우치 씨까지 자신이 범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야부우치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특별히 다른 분들 의견에 반대할 생각은 아니지만, 열쇠를 보관하던 사람은 야부이입니다. 그러니 범인이 되기에 가장 적합하지 않나요?" - P172

"범죄는 단순할수록 성공하기 쉬운 법입니다. 잔재주를 부리면 쉽게 들통 나기 마련이에요."
특별히 독창적인 의견도 아닌데 왠지 모두를 납득시켜버리는 무게가 그 말투에 담겨 있었다. - P172

"지금은 상대방 추리의 결점을 지적하지 맙시다. -야부이가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일단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면 범행의 동기로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야부우치는 미소 지었지만 눈은 웃지 않는 것 같았다.
"복수겠죠." - P173

"그러면 다쓰미가 뒤쫓고 있는 남자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히사모토가 마무리가 될 질문을 던졌다. 야부우치는 답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아마 사기누마 준코의 자살 원인, ・・・・・・ 또 한 가지 원인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P174

나는 머릿속으로 완성된 필름을 떠올렸다. 고발하는 다쓰미 앞에서 담담하게 자백하는 야이 노인. 컷백 기법을 이용한 범행 현장은 폭력 묘사를 최대한 억제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래도 충분히 충격적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동기에는 구원이있다. - P175

느닷없이 히사모토에게 호명된 호소카와는 얼굴을 찌푸리며퉁명스럽게 말했다.
"마무리가 별로 산뜻하지 않아요. 아니, 이렇게 전형적인 집사가 범인이라니. 미스터리에서는 가장 낡은 수법 아닌가요? 난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 그래. 너무 뻔하잖아."
미스즈가 덧붙였다. 둘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 P176

히사모토는 누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 두려운지 빠른 말투로 이야기했다.
"잘 알았습니다. 몇 가지 수수께끼를 잘 풀어낸 시나리오였다고 생각합니다. 호소노 의사, 사기누마 이스즈, 야부이 노인. 이제 이렇게 세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됐군요." - P177

"....설마, 자네까지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닐 테지?"
히사모토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에는 이미 체념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다카히로는 소년답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P177

2


"전 추리소설을 별로 읽지 않지만 기본은 알아요. 첫째, 범인 같지 않은 인물이 범인이다. 그렇죠? 그렇다면 바로 저죠. 다들제가 범행을 저지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범행이 불가능하니까 자기라는 것이다. 분명히 말도 안 되는 논리지만 드라마 만들기라는 측면에서 보면 타당한 의견이다. - P178

설마하면서도 다카히로가 너무 자신 있게 말하는 바람에 나도 기대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밀실 트럭? 아무리 대단한 트릭이라고 해도 스토리앞부분과의 정합성이 없으면 곤란해." - P179

"이 저택의 문에 달린 잠금장치는 열쇠구멍이 있는 구식이잖아요? 다카오는 그 구멍으로 풍선을 밀어 넣었어요. 바람을 넣는 주둥이 부분은 밖에 남겨두고 밖에서 바람을 불어넣었죠." - P180

"풍선에 미리 형광도료로 악마의 얼굴처럼 무서운 그림을 그렸어요. (중략). 그러고는 패닉 상태에 빠져 비명을 지르며 창밖으로 도망치려다가 추락. 어때요? 대단한 트릭이죠?"
다들 입을 다물었다. - P180

"아, 그래. 그랬구나. 형광도료로 그린 무서운 얼굴이다. 이거지? 형광도료로 그린 무서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창밖으로 떨어졌다. 이런 이야기야?"
"네, 그렇습니다." - P181

왠지 탐정영화라기보다는 앙팡 테리블, 즉 ‘무서운 아이‘가 주제가 돼버린 듯하다. 뒤집어 말하면, 그런 영화라면 다카히로가 생각한 것 같은 프라버빌러티 (확률)의 트릭도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탐정영화>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82

"맞아요! 다카오는 윤리관이 부족한 아이였어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그렇게 무관심한 태도도 어딘가 이상하잖아요? 가까이서 지켜본 큰어머니의 죽음도 어떤 영향을 미쳤겠죠."
갈수록 앙팡 테리블이군. - P183

(전략).
"가장 중요한 가능성…………이라면?"
"가장 중요하고, 게다가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이죠. - 하야시 간호사는 자살한 거예요.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발상 아니겠어요? 어쨌든 방은 밀실 상태였잖아요." - P184

"물론 그건 저도 알아요. 살인이 아니라 사실은 자살이었다는 것만으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죠. 하지만 사건은 하나만이 아니에요. 행방불명이 한 건, 자살로 보이는 죽음이 한 건. 그게 모두 하야시 간호사가 저지른 살인이었다면 충분히 이야기가 되지 않겠어요?"
호소카와는 불편한지 꿈지럭꿈지럭 엉덩이를 움직였다. - P184

3

이렇게 제1회 ‘범인 맞히기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로 끝났다. 각자 내일까지 의견을 정리해 오기로 한다는 숙제를 안은 채 잠깐 의논하면 결정될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건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혼란스러웠다. - P186

(전략).
괜히 전화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부러 한숨을 푹 내쉬며 일걱정이나 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범인이다. - P189

여기서 마칠까 생각했지만 내친김에 모두 적어두기로 했다.

하야시 간호사 자살설

밀실이라며 소란을 떨어놓고 사실은 그냥 뛰어내려 자살한 것이라고 마무리하면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다만 사기누마 준코의 자살이 사실은 타살이고, 살인으로 보이는 하야시의 죽음은 그냥 자살이란 구도 자체는 재미있을 수도 있다. (흐략). - P191

여기서 잠깐 재미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다쓰미가 들은 비명이 혹시 이스즈가 지른 비명이었다면? 물론 실제로 그 비명은 모리 미키, 즉 하야시 간호사가 지른 것이지만, 관객은 그걸알 길이 없을 것이다. - P192

나는 노트를 다시 쭉 훑어보고, 역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모두 이 안에 있다는 확신을 품었다. 하지만 과연 어느 것일까? 어느 경우가 가장 재미있을까? 임팩트 있는 가능성은? 정합성은? - P193

인스턴트커피를 후룩거리면서 시나리오를 다시 읽던 나는 머릿속으로 러시 상영 때 봤던 영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 P194

4

"전화 연결이 안 된다고?"
호소노가 뒤돌아보며 야부이에게 야단치듯 물었다. - P194

다쓰미는 그렇게 말하고 곧바로 응접실에서 나가려고 했지만 입구에 있던 야부이 노인은 비켜서주지 않았다.
"사모님은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쓰미가 츠츠 혀를 차며 언성을 높였다.
"또 그 소리예요? 사람이 죽었잖습니까. 그런 핑계는 통하지않아요." - P197

"사, 사기누마 씨를 봤단 말인가?"
"아뇨, 야이 씨가 그분 방문을 잠그는 걸 봤죠. 밖에서 말입니다. 밖에서 문을 잠그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 P197

다쓰미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고발하듯 내뱉었다.
"혹시 사기누마 준코 씨가 여기 없는 거 아닙니까?"
"없다니 ・・・・・・ 대체 무슨 뜻이지? 여기가 사기누마 준코 씨 집인데 아니라고 우길 작정인가?"
파랗게 질린 호소노 의사가 언성을 높였다. 다쓰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죠. 저는 저 침실에 지금 사기누마 준코 씨가 없는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 P198

호소노는 시체를 흘끔 내려다보고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관계가 있다마다요. 그분이 방에 진짜 있다면 바로 옆방에서 난 비명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고, 들었다면 당연히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오거나 사람을 불렀을 겁니다. 그분은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 P199

5

(전략).
얼굴은 아주 잠깐 보였지만 뒷모습과 걸음걸이만 봐도 충분했다.
작은 머리통에 벗어지지는 않았어도 두피가 들여다보일 듯이 성긴 머리카락, 더부룩하게 엉클어진 머리. 곰 같은 등짝. 야구 글러브처럼 큼직한 손(그 손으로 탁 치면 무척 아프다). 짧고 굵은 다리. 고릴라 같은 걸음걸이. 틀림없다. 우라질 오야나기 도시조다! - P200

경찰? 적당히 둘러대서 감독을 붙잡아두게 할 순 없을까? ‘지난번에 제 가방을 날치기한 남자가 우연히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그러면 어떨까? 법적으로 문제가 될까? - P201

나는 쭈뼛쭈뼛 호텔 입구로 들어가려고 했다.
"야, 너 어디 가냐?"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제복경찰이 나를 불러 세웠다. 내가 아무리 번듯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다짜고짜 ‘야, 너‘라는 소리를 들으니 발끈했다. - P202

살찐 호텔 직원이 물었다.
"마키노 마사히로…………… 이런 이름을 쓸 텐데요."
직원은 숙박부를 뒤적이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 분은 투숙하지 않았는데요."
"어쩌면 가짜 이름으로…………… 아뇨, 다른 이름을 썼을지도 몰라요. 미조구치 겐지¹같은 이름으로・・・・・・ 어쨌든 이게 그 사람사진입니다. 묵고 있죠?"


5장

1. 미조구치 겐지, 溝口健二, 1898~1956.
- P329

"네, 투숙하셨습니다. 존함은...... 야마나카 사다오시군요."
그렇구나. 야마나카 사다오. 과연 그 감독 이름을 썼구나. 마키노 마사히로는 같은 촬영소를 쓰는 감독이다.

2. 야마나카 사다오, 山中貞雄, 1909-1938. - P203

"네. 이분은 직접 숙소를 구하겠다고 하시면서 손님이 오시기직전에 나가셨습니다."
그런 소릴 왜 이제 하는 건가! 속으로 버럭 소리쳤지만 겉으로는 방긋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하고 호텔에서 뛰어나왔다. - P204

6장

시나리오 콘테스트


1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는 보고를 하기는 내키지 않았지만 히사모토에게만은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텔레비전에 자기 모습이 비친 걸 눈치채고 도망친 거로군. 뭐. 그게 너 때문은 아니지." - P209

오늘은 회의를 통해 의견을 결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느낌이 회의하는 내내 가시지 않았다. - P210

2

"어제는 연기자들만 발언했으니 오늘은 우선 스태프의 의견을 중심으로 들어보고 싶군요. 그럼 먼저 연출부부터 하겠습니다. 어이, 서드."
가장 만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뜸 나를 지목했다. - P210

"좋긴 뭐가 좋아! 그 비명은 하야시 간호사가 지른거야. 이스즈 목소리가 아니라니까."
"아니, 호소카와 씨. 소리를 듣고 그게 모리라는 걸 알아? 여자비명은 누구 목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
"알고 모르고 문제가 아니잖아? 그 목소리가 이스즈-당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어 그 사실을 뒤엎는 결말은 만들어낼 수 없어." - P211

"하지만 성문이라는 것도 있잖아? 목소리에도 지문처럼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특성이 있어."
"물론 그렇죠. 하지만 그건 장비가 있어야만 알 수 있어요. 관객이 장비를 갖고 들어와 이스즈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말이 안된다고 주장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결국 호소카와도 항복했다. - P212

호소카와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전원 공범이라니, 그러면 의미가 없어. 그래야만 가능한 범죄도 아니고, 역시 이건 단독 범행이라야 해."
야부우치도 같은 의견인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P213

"저, 저는 야부이가 범인인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사기누마 준코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는 동기로 관객을 울릴 수도 있겠죠."
스도에게 좋은 영화란 ‘눈물이 나오는 영화이고 ‘눈물이 나오지 않는 영화‘는 좋지 않은 영화다 - P214

호소카와가 연기자를 대표하기라도 하듯 말했다.
"지금 단계에서 한 가지로 좁히는 건 성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몇 가지 후보를 남겨두고 그것들을 좀 더 구체화해보는 겁니다. 병행해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도 좋을지 모르겠군요. 어느 것으로 하느냐는 그 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 P215

호소카와의 의견은 옳았다. 세트도 이미 만들어져 있고, 스태프나 연기자도 충분할 정도로 작품에 녹아든 상태다. 정확한 지침만 있으면 촬영 자체는 단숨에 끝날 것이다. - P216

"다른 의견 있는 분, 계십니까?"
히사모토가 묻자 야부우치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한 가지 물읍시다. 그 시나리오 콘테스트는 대사나 장면이 멋지다는 이유로 우열을 가리진 않겠죠? 이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스토리일 테니까…………" - P217

히사모토가 덧붙였다.
"물론 혼자서 써도 괜찮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써도 상관없습니다. 최종 시나리오는 각 파트의 감독과 의논해서 결정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 P217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듯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위화감은 대체 뭐지? - P218

3

(전략).
미즈노가 이렇게 쓸데없는 참견을 즐기는 녀석인지 몰랐다.
"내가 몇 번을 얘기해! 화해고 뭐고 우린 애초에 다투지 않았다니까. 미나코 혼자 뭔가 오해하고 화내는 것뿐이라고. 어제 내가 미나코에게 전화까지 했다니까." - P219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상황과 딱 맞는 영화는 바로 떠올랐다. <개선문>,⁴ 여배우는 물론 잉그리드 버그먼이다.



6장


4. 개선문, Arch Of Triumph, 1948.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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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기에 오프모던의 건축은 모험의 건축이다. - P11

모험 속에서 우리는 마치 정복자처럼 "세계를 강제로 우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도 있지만 또한 단숨에 파괴할 수도 있는 위력과 우연에 완전히 자신을 맡겨버리는 것"을 허용한다.⁴


4 같은 글, pp. 189~94. [옮긴이]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모험과 더불어서 제3의 세계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험은 단순하고 돌발적인 사건과도, 일관된 삶의 연속성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제3의 세계인 것이다." 한국어본은 p.209. - P12

모험의 건축은 문지방, 임계 공간, 다공성, 문, 다리 그리고 창문의 건축이다. 그것은 숭고의 경험보다는 한계의 경험에 관한 것이다. - P12

모험은 시간 바깥의 시간이다. 시작과 끝으로 경계 지워진 채로 무제한한 힘과 삶의 잠재성을 드러낸다. - P12

다르게 말해, 모험은 국가와 기업의 관료제를 통해 강화된 근대 세계의 베버식 탈주술화disenchantment에 대한 응답으로서, 실존의 단음계 속에서 재주술화re-enchantment를 약속한다. 모험은 황홀경이 아니라 일종의 범속한 각성 profane illumination⁶이다.


6 [옮긴이] "범속한 각성"은 초현실주의에 관한 글에서 벤야민이 사용한 표현이다.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profane"과 "erleuchten"에서 파생된 명사 "Erleuchtung" (각성, 영감, 깨달음, 계몽]을 연결한 것으로, 서로 결합될 수 없을 것 같은 개념들(가령, 도취와 비판, 일상적인 것과 비밀스러운 것 등)을 하나로 묶는 벤야민 특유의 역설적 · 변증법적인 결합의 사례 중 하나다. - P13

오프모던의 관점은 로젤린드 크라우스가 정교화한 "아방가르드의 독창성" 개념에 도전할 뿐아니라,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이의 유토피아적 비전의 연속성을 말하는 보리스 그로이스의 개념⁷에도 도전한다.


7여기서는 아방가르드에 대한 서로 대립되는 태도를 만들어낸로린드 크라우스와 보리스 그로이스의 다음 저작들을 가리킨다.
Rosalind Krauss, The Originality of the Avant-Garde and OtherModernist Myths, Cambridge, MA: MIT Press, 1985: Boris Groys,
The Total Art of Stalinism: Avant-Garde, Aesthetic Dictatorship, and - P14

그 정의에 있어 다른 것보다 더 "자유로운" 스타일이나형식 요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P14

 건축에 대한 나의 접근은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방식, 그러니까 세계의 마스터 디자인을 만드는 단 한 명의 건축가라는 (토대주의적) 개념을 따르지도, "도래할 건축architecture à venir"에 관한 급진적인 반-토대주의적 이해를 주창했던 데리다의 방식을 따르지도 않는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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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중문화 속 셰이프시프터
그 신비로운 존재들은 어떻게 재탄생되었나

(전략).
그레고르의 변신은 자발적이지 않다. 또한 프란츠 카프키는 그 변신이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에 관해 독자에게 어떤 실마리도 주지 않는다. 그건 그냥 일어났을 뿐이다. (중략). 그레고르 잠자에게 일어난 ‘난데없는‘ 변신은 문학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일이며 카프카의 실존주의 사고방식과도 크게 배치된다. - P258

우리가 나체로 숲을 가로질러 달려가지 않는 이유, 달을 보고도 울부짖지 않는 이유는 사회가 우리를 법적·도덕적으로 구속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사회를 질서정연하게 유지하자는 암묵적인 약속이 상호 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P260

어떤 일을 하든 그것에 면죄부가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이드 씨와 같은 길을 가지 않을까? 이는 어렵지만 아주 중요한 도덕적 질문이다. - P261

이런 내용은 문학 속 셰이프시프터들 사이에서 새로운것이 아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신들, 특히 제우스가 다양한 동물로 변신하여 반항하는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이야기가 숱하게 등장한다. - P264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셰이프시프터들, 특히 뱀파이어는이따금 사회의 성적 관행이나 금기를 조명하는 역할을 한다. - P266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자신을 얼마나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지와 무관하게 몇 초 만에 그 사람에 대한 관찰을 마치며, 이 관찰이라는 것이 대개는 외모에 기초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키가 작은 사람보다는 큰 사람이, 과체중인 사람보다는 적정 체중인 사람이 직장에서 더 높이 승진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 P267

이러한 유형의 이야기에서 셰이프시프터가 직면하는 난관은 변신 전 평범한 상태였을 때 직면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중략). 하루아침에 쥐가 된 어린 소년이 쥐덫을 피하는 기가 막힌 방법이나 쥐꼬리를자르려는 요리사에게서 도망치는 방법 (《마녀를 잡아라》의 주인공 소년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미리 준비해두겠는가?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거대한 벌레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저 외면하려고만 했고, 그 결과 죽게 된다. - P271

이러한 역할을 맡기는 것이 문학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확실히 이야기 속에는, 모든 등장인물(셰이프시프터든 아니든)에게는 특별한 힘이 있어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P272

셰이프시프터 이야기를 연구할 때 재미있는 주제 가운데하나는 ‘작품 속의 다른 인물들이 셰이프시프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다. 저주 때문에 변신이 이루어지는 인물에게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욕을 할까? 아니면 측은하게 여길까? 동물로 변신한 모습에 혐오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 P273

스티븐 킹의 소설 《그것>에 등장하는 섬뜩하고 사악한어릿광대 페니와이즈 Pennywise (짧게 ‘그것‘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괴물)는 메인주의 작은 마을 데리에 재앙을 몰고 온다. 페니와이즈는 그저 무서운 광대가 아니라 수백만 년 전 소행성을 타고 지구에온 외계 셰이프시프터다. (중략). 페니와이즈는 아이들을 도와주려는 선량한 심리치료사가 아니다. 그것은 공포를 살인의 도구로 쓰는, 그야말로 악 그 자체다. 아이들의 환심을 사는 데 친근한 어릿광대의 모습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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