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파티를 주최한 하나야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보석 체인점이다. 도쿄를 본거지로 오사카, 나고야, 삿포로, 후쿠오카 등 전국이 지점을 개설했다. 이 호텔에 오기 전 쿄코가 홀린 듯 쇼윈도를 들여다본 곳도 하나야의 긴자점이었다. - P14
파티 초대장이 일종의 상류층 자격처럼 여겨져서 참석하는 여자들은 온몸에 하나의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나온다. - P14
오늘도 아내즐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남의 보석 가곡을 가늠해보고 남편들은 그 모습에 씁쓸하게 바라보는 광경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 P15
그녀에게는 원대한 계획이 있는 것이다. 쿄코는 서서히 한 테이블 쪽으로 접근해갔다. 그곳이 점찍어둔 인물이 있었다. 그녀의 꿈을 이루게 해줄지도 모르는 인물이다. - P15
"아, 우리 지난번에도 여기서 봤었죠?" 드디어 알아본 모양이다. 내심 안도하면서도 교코는 웃는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그랬나요?" 평소 같으면 진짜로 시치미를 떼며 무시해버릴 상황이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다. "맞아요. 지난번 이 파티였어요. 내가 실수로 위스키인지뭔지 쏟았을 때 재빨리 닦아줬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제야 처음으로 생각난 척했다. - P16
그 작전이 효과가 있어서 오늘은 이렇게 그가 먼저 말을건네주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다음부터 잘 풀어나가기가 어렵다. 컴패니언은특정 고객만 지나치게 접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각 컴패니언의 근무 태도는 팀장이 정확히 체크한다. 팀장은 에자키 요코라는 베테랑이다. - P17
"이봐, 여기 스카치 한 잔 갖다줄래?" 교코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벽 같은남자가 나타났다. 얼굴이 큰 편치고는 눈이며 코가 지극히오목조목하다. 흰색 정장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나야 사장 니시하라 마사오의 셋째 아들 겐조였다. 망나니 아들이라고 지난번에 어떤 손님이 숙덕숙덕 험담을했었지만 사실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 P18
하나야의 셋째 아들도 물론 그리 나쁘지는 않다. 다카미슌스케와 나이도 비슷하고 재벌급인 데다가 무엇보다 보석이 쉽게 손에 들어올 것이다. 다만 생리적으로 도저히 좋아질 만한 타입이 아니었다. 이따금 ‘섹스하고 싶지 않은 탤런트 워스트 10‘ 이라는 앙케트가 여성지에 실리곤 하는데, 바로 그런 느낌이다. 부자와 결혼하는 게 교코의 원대한 계획이지만 이건 아무래도좀. - P19
"있잖아. 그 하나야 셋째 아들이라는 사람, 진짜 웃겨." ‘야카이(夜櫂)‘라고들 하는 컴패니언 특유의 헤어스타일을풀고 긴 머리를 빗질하면서 아사오카 아야코가 옆에서 말했다. 아야코는 약간 통통한 편에 오지랖 넓은 언니 타입이다. "젊은 여자만 봤다 하면 말을 걸더라고. 근데 아무도 상대를 안 해주니까 결국 우리한테까지 슬슬 수작을 부리는 거야." - P20
"글쎄 그렇다니까. 머지않아 간사이 쪽을 전담할 거래, 남의 일이지만 저런 사람을 위에 앉혀도 되는지 걱정스럽던데, 다행히 두뇌 명석한 충신을 붙여준 모양이야. 짙은 감색양복을 입은 호리호리한 남자가 계속 그 망나니 아들 옆에붙어있었잖아." "아, 그렇구나." 그 남자의 날카로운 눈매를 교코는 떠올렸다. "일종의 뒤처리 담당이야, 그 사타케라는 사람이 뭐, 그사람 덕분에 그럭저럭 잘될 거라나 봐." - P21
에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교코는 라운지로 향했다. 그리고 일부러 다카미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았다. 커피를 주문한 다음에야 무심코 고개를 드는 척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장 다카미와 눈이 마주쳤다. 뜻밖이라는 표정이었지만그래도 빙긋이 웃음을 건넸다. 교코도 가볍게 인사했다. "자주 마주치는군요."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무슨 약속있어요?" - P23
다카미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9시 15분 약속이니까 아직 40분이나 남았군요. 괜찮으면 합석할까요?" 기회다, 라고 교코는 생각했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이런 미인이라면 언제든 괜찮죠." 다카미가 자기 앞의 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그러시다면." - P24
(전략). "조예가 깊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요." 그가 수줍어하며 말했다. "하지만 네, 좋아해요. 회사 일로 피곤할 때는 클래식이좋거든요. 이따금 콘서트도 보러 갑니다. 얼마 전에도 N교향악단의 연주회에 다녀왔어요." 그리고 그는 클래식의 장점을 열심히 늘어놓았다. 교코는잘 알지 못하는 얘기였지만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컴패니언 업무상, 뭐가 뭔지 모르는 얘기를 들어주는 데도 능숙한것이다. - P25
예상보다 재미있게 이야기꽃을 피웠지만 그와 약속한 사람이 오는 것도 예상보다 빨랐다. 9시를 막 지났을 때, 다카미가 건너편을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교코가 돌아보니작은 너구리 같은 남자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참이었다. "호텔 앞 맞은편에 ‘위드‘라는 카페 있죠? 괜찮으시면 거기서 기다려줄래요? 30분쯤이면 얘기가 끝날 테니까." - P26
"뭔가 심상치 않아요. 호텔방에서 누군가 사망했답니다. 지금 여기는 발칵 뒤집혔어요. 교코 씨에게 연락한 건 사망자가 아무래도 교코 씨가 아는 사람인 것 같아서..." 심장이 꿈틀 뛰었다. "제가 아는 사람이라고요?" "네, 분명 아는 사람이에요. 오늘 파티의 컴패니언이라고하니까요. 마키무라라는 사람이라던데."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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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달려가자 경찰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다니고있었다. 직원들의 움직임에서는 침착성이 사라졌고 호텔을찾은 투숙객들은 완전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 P29
"방은 몇 호실이에요?" "내가 듣기로는 203호실이라던데." "203호실?" "예, 경찰이 분명 그런 얘기를 주고받았어요." 203호실이라고? 이상하다, 라고 교코는 생각했다. 그곳은 오늘 컴패니언대기실로 사용했던 방이 아닌가. 어째서 에리가 그 방에 다시 돌아갔고 게다가 거기서 죽었다는 것인가. - P30
"본청 수사1과의 시바타입니다." 젊은 남자는 이름을 밝히면서 코를 실룩거렸다. "화장품 냄새가 나는데요? 그것도 상당한 숫자의." "사건 현장과 이 방을 컴패니언들이 대기실로 사용했어. 얘기 못 들었어?" "아, 그래서..." - P31
"사인은 독극물입니다." 가토는 목에 뭔가 걸린 듯한 목소리를 냈다. "일단 청산화합물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최근에는이걸 많이 쓰더라니까. 텔레비전 드라마나 책 때문에 많이알려져서 그런지." - P32
"오늘은 하나야 보석점의 감사파티여서 에리도 크게 기대했거든요." "오호, 어떤 기대를?" "그야 보석점이 주최하는 파티니까 고객들도 상당히 값비싼 보석을 달고 나오고, 그런 걸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잖아 "여자들은 그런 시답잖은 것에 빠져든다니까." - P33
"헤어진 뒤에 교코 씨는 어디로?" 66 "저는......." 교코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라운지에서 차를 마셨어요. 좀 피곤해서 잠깐 쉬다 가려고그리고 거기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 얘기를 나눴고요." - P33
"교코 씨와 헤어질 때, 에리 씨가 어디로 간다든가 하는얘기는 없었어요?" "그런 얘기는 안 했어요. 곧장 집에 갈 거라고만 생각했거든요." "평소에는 그렇게 했었군요?" "네, 대개는 그렇죠." "따로 남자를 만난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어요?" 시바타가 배려 없는 질문을 던졌다. - P34
"이건 다른 얘기지만, 밤비 뱅큇 사장이 마루모토 히사오씨라던데 어떤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 나이는 아직 마흔 전이고 얼굴이 길고 안경을 썼어요. 항상 얼굴이 번들거린다고 할까…………." "여자관계는 어땠죠?" 옆에서 시바타가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건 좀 안 좋은 편이긴 했던 것 같아요." 교코는 머뭇머뭇 대답했다. - P35
"실은 마루모토 사장이 사체 발견자예요." "사장님이요? 왜 사장님이 이 호텔에 와있었죠?" 교코는 큰 눈으로 두 형사를 번갈아 보았다. 다른 때는 사장이 파티장에 나오는 일은 없었다. "이래저래 속사정이 있더라고요." 가토가 진정시키려는듯한 투로 말했다. "아무튼 마루모토 사장과 호텔 직원이최초 발견자예요." - P36
"우리 입으로 밝히기 어려운 것뿐이니까. 일단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돼요." 그의 말에 가토는 씁쓸한 얼굴을 보였다. 아무래도 그게본심인 모양이다. "그럼 하나만 더 알려주세요. 에리는 자살이에요? 아니면누군가에게 살해됐어요?" - P37
"에리 씨는 술은 어땠어요?" "술? 글쎄요......." 교코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리 센 편은 아니었어요. 맥주 한 잔 정도?" "그렇군." 시바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토를 보았다. "저는 오늘은 이 정도면 됐습니다. 앞으로 몇 번 더 만나야 할거고." - P38
"조사받는다는 컴패니언이 너였어? 아하, 그렇구나." 하나야의 망나니 아들 니시하라 겐조였다. 머리꼭지에서나는 듯한 목소리였다. 교코는 본능적으로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가 금세 거둬들였다. - P38
"응, 그랬지. 최상층 바에서 거래처와 한잔했거든. 2차를가려고 했더니만 이 소동이 났지 뭐야, 신분증을 내라느니뭐니, 귀찮게시리." 그러고 보니 어딘지 소란스러웠다. 손님 전원의 신분을확인 중인지도 모른다. - P39
"큰일을 겪는군요. 놀란 건 좀 진정됐습니까?" "네, 이제 좀." 차가 출발할 때, 교코는 무심코 호텔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밤비 뱅큇 사장 마루모토 히사오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약간 구부정한 어깨에 몹시 초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 P40
ㆍ2장 삼류 소설 같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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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아, 네,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인데요, 전화선이 아직 연결이 안 돼서요. 잠깐 전화 좀 쓸 수 있을까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전화요?" - P44
"당신은...... 어제 그 컴패니언?" "아, 어제 그 형사님? 이름이 뭐였더라, 까먹었네." "시바타에요. 근데 왜 이런 곳에 있어요?" "왜냐면," 교코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여기가 집이니까요." - P45
시바타가 전화한 곳은 경찰서인 것 같았다. 1시간쯤 늦는것에 대한 변명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요, 제가 어제도 오늘도 휴가였잖습니까. 이사를 했다고요. 어제 이사하던 중에 호출이 떨어진 거예요. 예에, 가구고 뭐고 뒤죽박죽이에요. 당연히 저도 가구 한두 개쯤은 있죠. 1시간입니다. 30분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요. 누울 자리도 없다니까요, 지금?" - P46
"그렇게 바쁜 건 어제 그 사건이 났기 때문이에요?" "그렇죠. 하지만 그리 길게 끌 것 같진 않아요. 자살로 처리될 모양이니까." "자살이에요?" "그야 모르죠. 하지만 정황으로만 보자면 자살 말고는 생각하기 어려워요." - P47
"아니, 나는 굳이 감출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뭘 알고싶은데요?" "전부 다 알고 싶죠." " "좋아요. 커피도 얻어 마셨으니." 그렇게 말하며 시바타는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 P47
물건을 깜빡 잊었다는 건 아마 거짓말일 거라고 교코는생각했다. 그때 자신이 마지막으로 방 안을 찬찬히 살펴봤던 것이다. 잊고 나온 물건 따위는 없을 터였다. "그러고는 20분쯤 지나서 이번에는 한 남자가 프런트에와서 마키무라 에리라는 여자가 203호실 열쇠를 가져가지않았느냐고 물었어요. 그 남자가 누군가 하면 바로 교코 씨회사 사장 마루모토예요." - P48
"그리고 방 안에 들어갔더니 에리가 죽어있었다는 건가요?" "맞아요. 그렇긴 한데 203호실 방문이 쉽게 열리지는 않았어요." - P48
교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물을 받아다 건넸다. 그것을 맛있게 비워버리고 시바타는 입가를 훔친 뒤에 말했다. "아까 교코 씨가 현관문을 열어줬을 때와 똑같아요. 마스터키로 문을 열었는데 안쪽에서 도어체인이 걸려있었어요."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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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가 말을 이어갔다. "체인이 걸렸다는 건 안에 사람이 있다는 얘기잖아요. 그래서 마루모토가 문 틈새로 에리 씨를 불렀다. 하지만 아무반응도 없었다. 그런데 좁은 틈새로 어렵게 안을 들여다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티테이블 앞에 에리 씨가 엎드려 있는게 살짝 보였으니까. 마루모토는 어떻게든 도어체인을 풀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당연하죠. 그래서 호텔 직원이지배인까지 데리고 왔어요. 지배인은 펜치를 들고 왔죠. 그리고 마루모토가 그 펜치로 도어체인을 끊고 문을 열었어요. 그렇게 마침내 에리 씨가 사망한 것을 알게 된 거예요." - P50
"이건 교코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담배는 얼른 끊는 게좋아요. 젊은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심리를 통 모르겠더라고, 노화를 앞당기는 것밖에 아무 메리트도 없잖아요." 교코는 천장을 향해 담배 연기를 토해내면서 그를 보았다. "시바타 씨는 혐연파?" "협연 운동 같은 것엔 관심 없고요. 단지 교코 씨처럼 아름다운 여성이 굳이 담배 추녀가 될 필요는 없잖아요?" - P51
"에리 씨를 발견하고 경찰에 연락했어요. 쓰키지 경찰서에서 수사원이 즉각 출동했고, 그다음에 본청의 우리가 호출됐죠." 한창 이사하던 중에?" "그렇다니까요. 옷이 든 박스도 아직 못 열었어요." - P52
깜빡 묻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마루모토 사장에 대한 얘기를 못 들었네요. 왜 사장이 에리를 찾아왔어요?" "서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죠." 시바타가 딱 잘라 말했다. "관계가 있었다니, 무슨 관계요?" "마루모토는 에리 씨와 사귀는 사이였어요. 어젯밤에도둘이 만나기로 약속했던 모양이에요." - P53
"둘이 사귀었다니, 언제부터요?" "바로 최근이라던데? 한 달 전쯤부터라고 했어요. 마루모토 쪽에서 먼저 고백했다고 실토했어요." "아, 진짜 말도 안 돼. 믿을 수가 없네." - P54
"아까도 말했지만 그 방은 안쪽에서 도어체인이 걸려있었어요. 그게 결정타예요." "동기는?" "아직은 모르지만..... 아마 치정으로 나올걸요?" - P55
시바타는 현관으로 향했지만, 도중에 문득 멈춰 서더니 "그런데 말이죠"라며 교코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아직 완전히 자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예?" "다음에 다시 찬찬히 얘기하죠." 시바타는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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