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오를 남겨 놓고 혼자 거실을 나선 사야카는 일단 자기 방으로 향했다. 뜨거운 물로 염원하던 샤워를 마치고 짙은 감색 바지에 흰셔츠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다시 거실로 향하는 도중에 복도에서 다카오와 딱 마주쳤다. 이제야 의뢰인에게서 해방된 모양이었다.
사야카는 다카오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술래잡기의 경위를 잘 설명했어요? 다들 납득하던가요?" - P287

"음, 도시로 씨 살해사건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뚝 떼겠다는 거로군요."
즉, 폭풍이 그치고 비탈섬에 경찰들이 출동해도 사이다이지 가문사람들은 과거의 살인사건에 관해서는 입을 꾹 다물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벌어진 쓰루오카 살해사건과 도라쿠 스님 상해사건만 수사를 요청할 작정이리라. - P288

"하, 하지만 오늘 밤에 나타난 빨간 도깨비의 정체는 사이다이지가문 사람이 아니잖아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요. 게이스케 씨는 저택에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저택에 모여 있었어요." - P289

5

야노 사야카는 탐정과 교대하듯 거실로 돌아갔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화장‘에 머무르는 사람 대부분이 모여 있었다. 쓰루오카가즈야가 죽은 현재, 총 열세 명이다. - P289

몇십 분 전에 거실은 긴장, 공포, 불안 등으로 가득했다. 쓰루오카 가즈야 살해사건에 이어 오늘 밤은 도라쿠 스님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P290

"보시면 알겠지만 저택 사람은 거의 다 거실에 모여 있어요. 어머니와 고이케 시노부 씨는 없지만, 두 사람은 어머니 방에 있고요.
그렇죠, 다카자와 선생님?"
"네, 그렇습니다." 벽 앞에 선 다카자와가 즉시 대답했다. "아까 잠깐 살펴보러 갔었는데, 두 분 다 방에 계셨습니다. 가나에 씨는 이미 잠드셨고요." - P291

"물론 쓰루오카 가즈야를 죽이기 위해서죠." 유코가 대답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섬에 건너올 이유로 충분해요. 그렇지 않나요?" - P292

"그럼 그 침입자는 왜 오늘 밤에 스님을 습격한 걸까요?"
이 질문은 외부인 범행설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꽤 어려운 문제였던 모양이다. (중략).
"저기, 침입자가 딱히 스님께 원한이 있었던 건 아니겠죠?" - P292

"하지만 비명을 들었잖아요?" 아쓰히코는 사야카에게 다가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리고 벼랑 위에는 도깨비 가면만 남아 있을 뿐,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죠?" - P294

 그리고 그자는 바다에 빠져서 죽었다. (중략). 저택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상적인 결말이다. 외부에서 침입한 누군가가 범인이라면, 사이다이지 가문의 명성에 금이 갈 일은없다. ‘그래도 돼? 이걸로 정말 사건은 끝난걸까?
의문을 품는 사야카와 달리 마사에가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으로말했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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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슈퍼리치 없즌 사회


어마어마한 부자가 나오는 것을 심각하게 막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흔들리는 사회 지반 위를 터벅터벅 걷게 될까? 우리가운데 부자가 하나 나오면 진정으로 합리적인 사회가 놓쳐서는 안 될 이점들이 생길까? - P75

큰 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그렇다는 주장을편다. 대단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뛰어난 인재들이 훌륭한 일을 하고자 하는 강한 동기를 얻는다고 그 지지자들은 공언한다. - P75

보수주의의 수호성인이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옮긴이)는 심지어 게으른 부자조차도 사회에서 건설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한때 주장했다.¹ - P76

3장 슈퍼리치 없는 사회

1 George Monbiot, "Neoliberalism: the deep story that lies beneath Donald Trump‘s triumph", Guardian, November 14, 2016. - P167

우리는 대부분 엄청난 부자와 접촉할 일이 평생 없다.  - P76

하지만 우리가 열심히 하는 모든 일은 사실 그런 행복을 전혀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코넬대학교 로버트 프랭크RobertFrank 경제학 교수는 말한다. (중략).
"결혼을 앞둔 커플이 더 행복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너무나 많은 돈을 더 쓰고 있기 때문이죠."² - P77

2 Sam Pizzigati, "Our grand fortunes, our grand waste", Inequality.org, February 8, 2015. - P167

 프랭크는 ‘최상층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돈을더 쓴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최상층 사람들이 자신의 축하 행사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쓰고 있는 게 왜 문제가 된단 말인가? - P77

‘주변 사람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이런 욕구가 우리 유전자속에 박혀 있기라도 한 걸까? 실제로 증명된 사실을 보면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여기서 유전자는 중요하지 않다. - P78

사람들 대부분이 같은 물건을 살 형편이 안 되는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물건이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강력한 표지가 된다. - P79

사회 내 불평등이 더 두드러질수록 우리가 느끼는 압박감은 더욱 커진다. 영국의 워릭대학교 소속 연구자들은 불평등이 심한 행정구역의 주민들이 더 평등한 지역의 주민들보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명품 브랜드를 더 많이 검색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⁴ - P79

4 Peter Ubel, "How the psychology of income inequality benefits luxury brands", Forbes, February 28, 2017. - P167

1999년에 출간되어 고전이 된 책 《사치 열병Luxury Fever》에서 로버트 프랭크는 부가 집중될수록 더 많은 유통업체가 명품 시장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매장에 명품을도입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해가 갈수록 제품들은 예전보다 더 값비싼 새로운 특성이나 기능을 포함하게 된다.  - P80

컬럼비아대학교 모셰 애들러 Moshe Adler 경제학 교수는 훨씬 더 깊이 들어가서 집중된 부가 어떻게 시장을 왜곡해 우리 삶을 더 ‘음울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중략). 그런데 그로부터 한 세대정도 지난 2003년 무렵에는 단지 26 퍼센트의 공연만이 전좌석에 동일한 가격을 적용했다. 나머지는 가장 좋은 좌석들의 가격을 엄청나게 인상했다. - P81

애들러는 이런 현상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말한다. 상대적으로 평등한 사회에서는 부자와 나머지 사람들 간의 소득차가 심하지 않기 때문에 판매자들이 ‘부자들만 상대해서는 거의 소득을 올리지 못한다‘.⁶ 하지만 우리 가운데 가장 부자인 사람들이 지나치게 부유해지면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 - P81

6 Moshe Adler, Economics for the Rest of Us: Debunking the Science That Makes Life Dismal (New York: New Press, 2011), p. 76. - P167

그런데 슈퍼리치들 때문에 비단 집값만 오르는 게 아니다. 이런 부자들이 모인 지역은 부자들에게 생명력을 다 빨린다. 상위 0.1퍼센트 미국인들은 평균 9채의 ‘해외‘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⁷ 이런 집들은 대부분 거의 비어 있다. - P82

7 Lucinda Shen, "Here‘s how many homes the average billionaire now owns", Fortune, December 2, 2016. - P166

 지금 이 세상은 한 층을 통째로 차지하고서 사방으로 훌륭한 전망을 볼 수 있는 초고층 아파트에 90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기꺼이 지불하는 슈퍼리치들로 차고 넘친다.⁸ - P83

8 "Sky high: the logic of luxury", a Skyscraper Museum exhibition(NewYork, October 9, 2013 through June 15, 2014). - P168

실제로 슈퍼리치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나쁜 쪽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뉴욕의 빌딩 협곡만이 아니다. 슈퍼리치들이 영위하는 호사스런 생활은 지구의 자원을 빠르게 소모시키면서 자연 파괴를 가속화한다.
1970년에서 2000년 사이, 개인 전용기 숫자는 전 세계적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¹⁰ - P83

10 Chuck Collins, John Cavanagh, Robert Weissman, Sam Bollier, andSarah Anderson, High Flyers: How Private Jet Travel is Strainingthe System, Warming the Planet, and Costing You Money(Wash-ington, DC: Institute for Policy Studies, 2008). - P168

옥스팜의 산출에 따르면, 세계 상위 1퍼센트 계층에 속하는 부자들은 극빈층 10퍼센트에 속하는 사람들보다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 (개인이나 단체가 직간접적으로 발생시키는 온실가스를이산화탄소의 총량으로 나타낸 지표 - 옮긴이)이 175배 더 심하게 찍힌다고 하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¹³ - P84

13 Timothy Gore, "Extreme carbon inequality", Oxfam International, December 2, 2015. - P168

 이 세상의 갑부들은 그저 늘하던 대로 ‘환경사업‘을 계속해야 할 동기를 차고 넘치게 가지고 있다.
그런 환경사업은 부자들을 계속 부유하게 만들어준다. 갑부들 상당수의 재산은 광산업과 화석연료산업에서 아주 흔히 자행되는 환경 파괴의 덕을 보고 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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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게이스케 씨? 빨간도깨비의 정체는 사이다이지 게이스케씨 아닐까요?"
탐정은 그 이름을 듣고도 전혀 웃지 않았다. 오히려 "호오"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뭐야, 당신도 나와 같은 가능성을 고려했나 보군. 뭐, 다카자와 선생의 이야기를 순수하게 해석하면 당연하게 도달할 생각이기는 하지만." - P278

"그럼 지금 여기서 확인해 볼까."
"확인하다니, 게이스케 씨에게 전화하려고요?"
"설마 마사에 씨에게 물어볼 거야. 저택에 게이스케가 있는지 없는지." - P278

"게이스케 씨는요?"
넌지시 라기보다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대담하게 다카오가 그 이름을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마사에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응? 게이스케?! 여기 없는데. 아직 자기 방에 있는 거 아닐까. 이불을 덮어쓰고 떨고 있으려나. 어쩌면 푹 잠들었을지도 모르지만." - P279

 "어쩌면 게이스케 씨는 이불 속에서 싸늘하게 식어 버렸을지도모릅니다. 빨간도깨비의 독수에 걸려서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아무 근거도 없는 허풍이 마사에한테는 효과적이었다.
(중략).
"가능성은 있겠죠. 애당초 빨간 도깨비가 오직 스님을 해코지하려고 저택에 침입했다고 보기는 힘드니까요." 다카오가 그럴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 P280

야노 사야카와 고바야카와 다카오는 왔던 길을 되짚어서 숲을 빠져나왔다. 이윽고 두 사람 앞에 ‘화장‘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특징적인 구체를 본 순간, 사야카는 오늘 밤에 보았던 수상한 인물이 한 명 더 생각났다. - P281

해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 앞에서 사야카는 다리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그런 사야카의 등을 떠밀 듯 다카오가 경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자, 생각은 나중에 하고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빗물에 양복이 흠뻑 젖었어. 한시라도 빨리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싶다고." - P283

"야노 변호사님. 다행이다. 다들 걱정하고 있었어요."
사이다이지 게이스케였다. 방금까지 그가 빨간도깨비가 아니겠느냐고 의심했던 사야카는 단번에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사야카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그, 그런가요. 걱정을 끼쳐서 죄송...."하고 고개 숙였다. - P284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에, 탐정은 의미심장하게 응했다.
"네....... 게이스케 씨도 무사해서 참 다행입니다.. - P284

4


(전략).
사야카와 다카오가 나타나자 거실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퍼져 나갔다.
그런 가운데 에이코가 소파에서 일어나 안심한 듯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돌아오셨군요. 다카자와 선생님과 스님께 이야기를 듣고 걱정했어요."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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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씨가 백해나를 죽였죠. 우리 그 점에 관해 이야기해봅시다."
나는 질문의 저의를 곰곰이 생각했다. 다큐멘터리에서그 대목을 누락시키기로 한 것은 박사니까, 어떤 식으로든 죄를 물진 않으리라는 계산이 섰다. - P210

"출연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일지 잘 생각해봤죠. 평범한 설계사는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생각이 더욱 강해졌고요. 그리고 오늘의 대화로 도하 씨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받아내려는 겁니다. 영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죠? 그 죽음이 어떤 종류의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취미시군요." - P211

"만약 저에게 죄가 있다면, 백해나를 처음 카메라 앞에세운 사람들이나 거기에 열광한 시청자에게도 엇비슷한 죄가 있을 거라고 봐요. 그쪽이 더 클지도 모르고. 저보다 더잘 아시겠지만, 백해나는 관심에 시달리다가 미쳐버린 케이스니까요." - P212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중증 우울증 환자들은 병세가 호전되면서 일시적으로 사나워지는 경향이 있죠. 무기력증에 억눌려 있던 울분이 수면으로 올라오니까요.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이 상처받는 사례도 많고요. 하지만 그런 부작용 때문에 치료 자체를 막는 상담사는 없지 않나요?" - P212

"그러면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리죠. 백해나와 릴리의 만남은 납치였고, 그 이후의 관계는 일방적인 학대였어요. 소송을 빌미로 협박하고 옆에 붙들어놨죠. 이런 상황에서도개가 백해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침묵을 지켜야 했단 말인가요? 배려가 필요했다면, 어느 정도의 배려가요? 사실상 희생하고 헌신하기 위해서만 제작되는 지성체들이 있다면 - P213

"하지만 도하 씨야말로 창조자 노릇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 P214

"전 제대로 된 이유를 붙이지 못할 일은 거의 안 해요.
들키더라도 항변할 여지를 남겨두고요. 열네 살 이후로는줄곧 그랬어요. 그게 제가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죠."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진담이에요.‘ - P215

도르시아의 스테이크에도 대규모 콘서트의 분위기에도 설계사 면허 취득에도 들뜨지 않는삶이 어떤 것인지, 아무 기대도 가망도 없는 기분이 무엇인지 다들 모른다. 그 사람들은 불화에 이끌리는 기분도 모른다. 모르니까 내가 세상을 느끼고 겪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주지 않는다. - P216

그제야 나는 눈앞의 존재가 미디어 공룡 그 자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릴리가 미디어 산업을, 시청자들을 비웃고 경멸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백해나에게는 평생토록 겪은 악몽의연장선일 것이다. 게다가 박사는 개의 기억까지 누락시킨 상태였다.
- P217

"그나저나 저도 하나만 여쭤보고 싶은데요. 개의 기억을 삭제하라고 지시하셨는데, 이건 박사님의 이미지 때문이죠?"
"나는 기계고, 미디어는 산업이고, 이미지는 마케팅입니다. 기계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인간에게 보여줄 필요는없어요. 그게 제작진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집하기전에 지워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죠." - P218

나는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 릴리의 이야기에기반해 얼개만을 짜놓았을 때 개의 기억을 지웠다. - P218

"현존하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우선합니다."
박사는 그렇게만 답했다. 감정형 인공지능을 설계할 때가장 먼저 주입하는 대원칙이었다.

- P218

개는 백해나를 좋아한 적이 없었고, 초기화를 바라지도않았고, 하고 싶은 말도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세 개의질문만을 던져서 스크린에 일관적인 패턴이 나타나게끔 했다. 그게 개와 나의 거짓말이다. - P219

(전략) 개의 본심을 철저한 무위로 돌려 모욕하는 일이었다. 릴리는 그날의 기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면 차라리 낭만적인 거짓말로 바꿔버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큐멘터리가 릴리의 복수라고도 느꼈다. - P219

. 죽은 사람의 이름, 챙길 사람이 없어진 이름만이 텅 비어서 누구든 쥐고 흔들 수 있는 깃발처럼 나부낀다. 그게 최종적인 패배인지 완벽한 해방인지 나는 모른다. 인간이 죽음과 파멸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계속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이유만을 겨우 짐작할 뿐이다.
내가 얽매인 굴레도 결국엔 그것이다. - P220

04

소녀의 개


실컷 떠들어놓고 보니 12시가 넘어가 있었다. 돌아가면새벽일 것이다. 박사는 나를 홀로 좌석에 태워 동생의 아파트로 보냈다. 나는 로드스터에 올라타자마자 테이블에서 감초 막대를 하나 더 꺼내어 씹기 시작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대화는 계속되었다. - P223

"동생이 그걸 듣고 화를 좀 냈으면 좋겠어요."
나는 보석함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주듯 수줍은 미소를머금었다. 조금은 기쁘게, 조금은 부끄럽게 반응을 기다리는데 멈춘 창밖으로 아파트가 보였다. 도착한 것이다. - P224

절단과 봉합을 마치고 왼손에 철심까지 박은 후 사나흘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진 채 누워만 있었다. 도대체박사가 왜 동생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질문을 곱씹으면서 분노를 삭이다 보면 신경통이 그 순간의 황홀처럼 절단면을 치고 올라왔고, 되살아나는 기억 사이에서 한참을 헤맨 뒤에는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 P225

콘크리트 벽으로 만들어진 무인도에서, 나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소식을 접하면 탓할 상대부터 찾는 게 인간의 습성이지만 이번에는 문제가 어려웠다. - P227

"열흘 뒤,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긴 해. 대중 여론이라는것도 있고."
대중 여론, 이라는 말은 고객들의 간증을 포함했다. 다큐멘터리가 공개된 직후에는 비난 여론이 심했는데(쿠키 영상에 얽힌 논란까지 포함해서) 시영의 게시글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역전됐던 것이다. - P228

문제가 생긴 건 식사를 모두 마친 다음이었다. 실물 초대장에 이상한 점이 발견되어서 잠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박사가 직접 보내준 거라고 대답해도 웨이터들은(물론박사와 똑같이 생겼다) 막무가내였다. - P229

"박사님의 윤리 판단기가 사람 다리를 으깨도 된다고 하던가요?"
"나는 의무론에 더해 계약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실용주의 정식을 혼용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네 개의 윤리 판단기 모듈 중에서 둘 이상에게 금지되지 않은 행동만이 실행되죠. 훨씬 유연한 데다가 교착 상태에 빠질 일이 없고, 개개인과 사적 관계를 맺을 경우 각자의 실제적 이유에 기반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어떤 논증을 거쳐 정당화되었는지 보고서를 뽑아드릴 수도 있어요." - P230

"처음부터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잘린 다리와 언짢은 반응을 맞바꾸는 게 공정한 거래일수는 없겠지만, 상대는 제국의 주인이고 나는 평범한 설계사라는 점에서는 그럭저럭 선방한 셈이었다. - P232

"내 의견으로는 도하 씨가 동생분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같습니다만."
"이 일을 법원으로 끌고 가면 제가 피해자예요. 동생은절 감시하고, 억지로 약을 먹여서 응급실에 실려 가게 하고, 조수석 승객을 외딴 도로에 내버리는 사람이죠. 그것도한밤중에 장기간의 감정적 학대로 판단력이 흐려진 피해자라면 차창에 손을 밀어 넣는 일쯤은 쉽게 할 수 있겠죠.
한마디로 전 동생이 기획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가 직업도 잃고 다리도 잃은 불쌍한 사람이죠." - P233

"약을 안 먹고 있어요. 요새 바쁜 일이 너무 많아서 동생도 잊어버린 것 같고, 재미있는 일은 끝났으니까 슬슬 병원에 가야겠는데... 사실 그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죠. 누가 끌고 데려가지 않으면 다신 안 갈 것 같아요." - P235

평소에는 동생에게 말했겠지만, 자해 사건이 탄약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걸 들키면 정말로 관계가 결만날 것같았다. (중략) 나도 평소에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정말이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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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

부활절 연휴의 첫날 나는 네 시에 일어났다. 한나는 그날 새벽 근무였다. - P50

전차는 정거장이 나와도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했다. 정거장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날은 아직 밝지 않았고 하얀 하늘 아래로 모든 것이 창백한 대기 속에 창백하게 놓여 있었다. - P51

 에펠하임을 지나자 전차의 선로는 도로 가운데를 벗어나 도로 옆의 자갈이 깔린 둑 위로 나 있었다. 전차는 여느 기차처럼 규칙적인 덜커덩 소리를 내며 점점 더 빠르게 달렸다. - P51

그러던 중 나는 정거장 하나를 발견했다. 넓은 벌판에 자리잡은 조그만 승차 대기소였다. - P52

나는 열두 시 정각에 그녀의 아파트 앞 층계참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슬퍼하면서 초조하게, 그리고 분을 삼키면서.
"너 학교 또 빼먹었니?"
"연휴잖아요. 오늘 아침엔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었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 부엌으로 갔다.
"뭐가 잘못됐다는 거니?"
"왜 나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어요? 나는......." - P53

"너 정말 딱한 애구나. 네 시 반에 일어나다니. 그것도 연휴에 말이야."
그때까지 그녀가 그렇게 야비하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녀는머리를 가로저었다.
"네가 왜 슈베칭엔으로 가는 전차를 탔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네가 왜 나를 모른 척했는지 어떻게 알아. 그건 네 일이지내 일이 아냐. 이제 좀 돌아가주지 않을래?" - P54

"미안해요. 한나, 모든 게 엉뚱하게 돌아갔어요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내 생각으로는.....
"‘내 생각으로는‘이라고? 너 네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다고 말하려는 거지? 넌 내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어. 넌 그렇게 할 수 없어. 이제 제발 좀 가줄래? 난 일하고 왔어. 목욕하고 좀 쉬고 싶어." - P55

"나를 용서해주는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 사랑해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욕조에 물이 아직 그대로 있어. 자, 목욕시켜줄게."
나중에 나는, 그녀가 내가 돌아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욕조의 물을 그냥 그대로 둔 것은 아닌지, 그녀가 내 앞에서 옷을 벗은 것도 그렇게 하면 그 장면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결국은 내가 돌아오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지, 그녀가 오직 파워 게임에서 승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해 자문해보았다. - P56

. 한 번인가 두 번 나는 그녀에게 긴 편지를썼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내게 이렇게 되물었다.
"너 또 시작하는 거니?" - P57

II

한나와 내가 부활절 연휴의 첫날 이후로 다시는 행복하지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4월의 그 몇 주처럼 행복한 적은 없었다. 그 첫 싸움은 전혀 엉뚱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의 싸움은 늘 그랬다. - P58

나는 앓아누워 있는 동안 용돈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한나의 몫까지 돈을 쓰려면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하일리히가이스트 교회 옆에 있는 우표 가게를 찾아가서 우표첩을 팔겠다고 내놓았다. - P59

나만 여행의 열병에 걸려 있던 건 아니었다. 놀랍게도 한나 역시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이리저리 궁리하고 내가 구해준 자전거 안장 밑에 매다는 자루와 배낭을 꼼꼼하게 꾸렸다. - P59

"나는 지금 너무 흥분돼 있어. 네가 다 알아서 해, 꼬마야."
우리는 부활절 월요일에 출발했다. 태양은 빛났다. - P60

우리는 대개 나란히 달렸다. 달려가면서 각자 본 것을 서로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성, 낚시꾼, 강 위에 떠 있는 배, 텐트, 강가를 따라 한 줄로 걸어가고 있는 가족들, 지붕을 열어젖힌 미국산 대형 승용차 등등. 방향이나 길을 바꿀 때에는 내가 앞장서야 했다.  - P60

한나는 내게 방향과 도로의 선택권만 넘겨준 게 아니었다. 우리가 밤새 묵을 여관도 내가 직접 골라 숙박인 명부에 우리를 어머니와 아들로 기입했고, 그녀는 거기에 서명만 했다. 메뉴에서 음식을 고르는 것도 내 몫이었다.
"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걸 좋아해." - P61

"어떻게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간단히 가버릴 수 있어!"
나는 아침 식사와 장미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서 그녀를끌어안으려 했다.
"한나......."
"건드리지 마." - P62

나는 그때 그녀를 두 팔로 끌어안아주었어야 했다. - P62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 P62

"우리 아침 먹을까?" 그녀는 내게서 몸을 풀었다. "맙소사,
꼬마야, 네 꼴 좀 봐!" 그녀는 손수건을 적셔 와 내 입과 턱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셔츠도 피투성이잖아."
그녀는 나의 셔츠를 벗기고 뒤이어 바지도 벗겼다. 그러더니 그녀도 옷을 벗었고 우리는 사랑을 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예요? 왜 그렇게 화가 났었어요?" - P63

"도무지 알 수 없군요. 아침 식사를 가지고 금방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써놓고 나갔거든요."
"그랬어? 난 쪽지를 보지 못했어."
"내 말을 못 믿겠어요?"
"물론 널 믿지. 하지만 나는 쪽지를 보지 못했어."
우리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 P64

(전략). 그녀는 소설 내용에 대해 갈팡질팡하다가 내가 책 읽기를 마치면 그 후로 몇 시간 동안 내게 질문을 퍼부었다.
"통행세 징수관? 그건 좋은 직업이 아니었나 봐?"
우리 사이의 싸움에 대해 다시 이렇게 자세하게 이야기했으니 이젠 우리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까 한다. 싸움은 우리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어주었다. - P65

나는 그때 쓴 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시라고 할 만한 게 못된다. 그 시절 나는 릴케*와 벤*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두 시인을 한꺼번에 닮고 싶어 했던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시를 보며 우리가 그때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도 다시 깨닫는다. 그 시가 여기 있다.

(후략) - P65

12

한나와 여행을 떠나기 위해 부모님에게 둘러댔던 거짓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부활절 연휴의 마지막 주 동안 혼자서 집을 지키며 치러야 했던 대가는 아직도 생생하다.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형이 어디로 여행을 떠났었는지는 이제 모르겠다.  - P66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 일주일씩이나 집을 보도록 맡겨두신 건 놀라운 일이었다. 한나와의 만남을 계기로 나의 가슴속에 자라나기 시작한 독립심을 눈치챘던 것일까? - P67

물건을 훔치는 일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쉬웠다. 나는 청바지를 여러 벌 입어보면서 여동생에게 맞을 만한 청바지도 한벌 집어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을 통이 넓은 양복바지의 안쪽 배 근처에 집어넣은 채 상점을 빠져나왔다. 벨풀오버 니키는 백화점에서 슬쩍했다. - P68

. 그녀의 눈길은 피곤해 보인다.
"여기 이것들이 모두 너의 아버지가 읽거나 쓰신 책들이니?"
나는 아버지가 쓴 칸트 책과 헤겔 책을 알고 있었다. 나는그 책들을 찾아보았다. 마침내 두 권을 찾아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내게 그 책을 조금만 읽어줘. 꼬마야. 그렇게 해주지 않을래?" - P70

나는 그녀에게 그 비단 잠옷을 선물했다. 그것은 가지색이었고 가느다란 어깨 끈이 달려 있어서 어깨와 팔이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치맛단은 복사뼈까지 내려왔다. 잠옷은 반짝이면서 은은하게 속이 비쳤다. 한나가 기뻐하며 웃자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발밑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빙그르르 돌기도 했다. - P72

13

새 학년의 시작은 늘 하나의 분명한 단락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진급은 특히 하나의 시기를 칼로 자른 듯한 변화를 몰고 왔다. - P72

우리는 그 사실을 새 학년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를 한 교실에 모이게 한 다음 우리반이 흩어진다는 사실과 그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다른 급우 여섯 명과 함께 나는 텅 빈 복도를 지나 새 교실로 갔다. - P73

모든 사람이 다 그럴까? 나는 젊었을 때 지나치게 자신감을느끼거나 지나치게 자신 없어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 자신을 너무 무능력하고 초라하며 보잘것없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스스로 전체적으로 보아 성공했으니 모든 일에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 - P74

우리는 《오디세이》를 번역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작품을 독일어로 읽었다. 나는 그 작품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나는 선생님에게 지명을 받으면 별로 지체하지 않고 번역할 곳을 찾아 마음을 가다듬은 후 우리 말로 옮겼다. - P76

14

비행기 엔진이 고장났다고 해서 그것이 비행의 끝은 아니다. 비행기는 날아가던 돌멩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미끄러지듯이 날아간다. 초대형 다발 여객기는착륙 시도 시에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반 시간에서 45분 정도까지는 날아간다. 승객들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다. - P76

우리는 책 읽기와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란히 눕기로 이어지는 우리의 의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전쟁과 평화》*를 읽어주었다. - P77

우리는 서로를 위해 애칭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이제 나를 꼬마라고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수식어나 축소형*명사들을 이용해 개구리나 두꺼비, 새끼 늑대, 돌멩이 그리고 장미 등으로 불렀다. 나는 한나라는 이름을 고집했다. 그러던중 그녀는 내게 물었다. - P78

나는 그녀에게 내가 왜 그런 연상을 하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그녀는 자기 장딴지 근육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말이라고."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모르겠어......."
그건 평소의 그녀 태도가 아니었다. 평소에는 동의나 거부의사를 아주 분명하게 표현했다. - P79

한번은 함께 가까운 도시에 있는 극장에 가서 《간계와 사랑》을 보았다. 한나는 연극 구경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연극의 상연부터 휴식 시간의 샴페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마음껏 즐겼다. - P80

 한나에게 가기보다 차라리 수영장에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게 되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7월의 내 생일에 나는 수영장에서 친구들의 생일 축하를 받고 친구들이 아쉬워하는 가운데 그곳을 빠져나와 일 때문에 탈진한 한나에게서 형편없이 기분 나쁜 영접을 받았다. - P81

그녀는 그해 여름 나의 생활이 이제 더 이상 그녀와 학교 그리고 공부 주변만을 맴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늦은 오후 그녀에게 갈 때면 나는 수영장에 들렀다가 가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 P80

15

그 후 나는 그녀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한나와 나 사이의 비밀을 세상에 알렸거나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침묵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은 어느 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 P82

내가 나의 속을 완전히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친구들이눈치 챈 것은 상황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 P83

"너 오랫동안 아팠지. 간염 때문에 말야. 너를 괴롭히는 게바로 그거니? 넌 다시 전처럼 건강을 되찾지 못할까 봐 겁나니? 의사 선생님들이 무슨 말이라도 했니? 그래서 넌 매일 병원에 가서 피를 바꾸어 넣거나 주사를 맞아야 하니?"
한나를 병으로 생각하다니. 나는 부끄러웠다. - P84

16

(전략). 우리는 함께 공유하는 생활 세계가 없었으며, 그녀는 그녀 인생에서 내게 허용하고 싶은 만큼의 자리만 내주었을 뿐이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P85

게다가 나는 그녀가 자주 즐겨 간다고 말한 거리나 상점, 영화관에서 그녀를 단 한 번도 우연히 마주친 적이 없다. 만나고 처음 몇 달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곳에 함께 가자고 졸랐지만, 그녀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 P86

한나는 하루 종일 평소와 다른 특이한 기분이었다. 변덕스러웠고, 고압적이었으며, 동시에 그녀를 극도로 괴롭히고 예민하게 만드는 무슨 압박감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 P87

17

다음 날 그녀는 떠났다.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그녀의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 P90

나는 이름 하나와 키르히하임에 있는 주소를 얻었다. 나는 차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슈미츠 부인이요? 그 여자는 오늘 아침에 집을 비웠어요."
"그러면 가구들은요?"
"그건 그 여자 물건이 아니에요." - P90

"그녀가 오늘 아침에 전화를 걸었어요. 그래도 제때 전화를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신 투입할 수 있었지요. 이제 안나온다고 하더군요. 영원히."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2주 전에 그녀는 바로 여기에 앉아 있었어요.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에 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전차 운전기사 교육을 받아보라고 제안했지요. 그런데 그녀는 모든 것을 내팽개친 겁니다." - P91

몇 번이고 나는 내가 본 것은 그녀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켜보려고 했다. 얼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녀였다고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 P92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녀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 P92

제2부


나는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서 떠나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단지 전차 회사에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까 봐 두려워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쫓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바꾸어놓지는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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