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O
부활절 연휴의 첫날 나는 네 시에 일어났다. 한나는 그날 새벽 근무였다. - P50
전차는 정거장이 나와도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했다. 정거장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날은 아직 밝지 않았고 하얀 하늘 아래로 모든 것이 창백한 대기 속에 창백하게 놓여 있었다. - P51
에펠하임을 지나자 전차의 선로는 도로 가운데를 벗어나 도로 옆의 자갈이 깔린 둑 위로 나 있었다. 전차는 여느 기차처럼 규칙적인 덜커덩 소리를 내며 점점 더 빠르게 달렸다. - P51
그러던 중 나는 정거장 하나를 발견했다. 넓은 벌판에 자리잡은 조그만 승차 대기소였다. - P52
나는 열두 시 정각에 그녀의 아파트 앞 층계참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슬퍼하면서 초조하게, 그리고 분을 삼키면서. "너 학교 또 빼먹었니?" "연휴잖아요. 오늘 아침엔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는 열쇠로 문을 열었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 부엌으로 갔다. "뭐가 잘못됐다는 거니?" "왜 나를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어요? 나는......." - P53
"너 정말 딱한 애구나. 네 시 반에 일어나다니. 그것도 연휴에 말이야." 그때까지 그녀가 그렇게 야비하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녀는머리를 가로저었다. "네가 왜 슈베칭엔으로 가는 전차를 탔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네가 왜 나를 모른 척했는지 어떻게 알아. 그건 네 일이지내 일이 아냐. 이제 좀 돌아가주지 않을래?" - P54
"미안해요. 한나, 모든 게 엉뚱하게 돌아갔어요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내 생각으로는..... "‘내 생각으로는‘이라고? 너 네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다고 말하려는 거지? 넌 내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어. 넌 그렇게 할 수 없어. 이제 제발 좀 가줄래? 난 일하고 왔어. 목욕하고 좀 쉬고 싶어." - P55
"나를 용서해주는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 사랑해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욕조에 물이 아직 그대로 있어. 자, 목욕시켜줄게." 나중에 나는, 그녀가 내가 돌아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욕조의 물을 그냥 그대로 둔 것은 아닌지, 그녀가 내 앞에서 옷을 벗은 것도 그렇게 하면 그 장면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결국은 내가 돌아오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지, 그녀가 오직 파워 게임에서 승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해 자문해보았다. - P56
. 한 번인가 두 번 나는 그녀에게 긴 편지를썼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내게 이렇게 되물었다. "너 또 시작하는 거니?" - P57
II
한나와 내가 부활절 연휴의 첫날 이후로 다시는 행복하지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4월의 그 몇 주처럼 행복한 적은 없었다. 그 첫 싸움은 전혀 엉뚱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의 싸움은 늘 그랬다. - P58
나는 앓아누워 있는 동안 용돈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한나의 몫까지 돈을 쓰려면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하일리히가이스트 교회 옆에 있는 우표 가게를 찾아가서 우표첩을 팔겠다고 내놓았다. - P59
나만 여행의 열병에 걸려 있던 건 아니었다. 놀랍게도 한나 역시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이리저리 궁리하고 내가 구해준 자전거 안장 밑에 매다는 자루와 배낭을 꼼꼼하게 꾸렸다. - P59
"나는 지금 너무 흥분돼 있어. 네가 다 알아서 해, 꼬마야." 우리는 부활절 월요일에 출발했다. 태양은 빛났다. - P60
우리는 대개 나란히 달렸다. 달려가면서 각자 본 것을 서로에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성, 낚시꾼, 강 위에 떠 있는 배, 텐트, 강가를 따라 한 줄로 걸어가고 있는 가족들, 지붕을 열어젖힌 미국산 대형 승용차 등등. 방향이나 길을 바꿀 때에는 내가 앞장서야 했다. - P60
한나는 내게 방향과 도로의 선택권만 넘겨준 게 아니었다. 우리가 밤새 묵을 여관도 내가 직접 골라 숙박인 명부에 우리를 어머니와 아들로 기입했고, 그녀는 거기에 서명만 했다. 메뉴에서 음식을 고르는 것도 내 몫이었다. "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걸 좋아해." - P61
"어떻게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간단히 가버릴 수 있어!" 나는 아침 식사와 장미가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서 그녀를끌어안으려 했다. "한나......." "건드리지 마." - P62
나는 그때 그녀를 두 팔로 끌어안아주었어야 했다. - P62
"우리 아침 먹을까?" 그녀는 내게서 몸을 풀었다. "맙소사, 꼬마야, 네 꼴 좀 봐!" 그녀는 손수건을 적셔 와 내 입과 턱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셔츠도 피투성이잖아." 그녀는 나의 셔츠를 벗기고 뒤이어 바지도 벗겼다. 그러더니 그녀도 옷을 벗었고 우리는 사랑을 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예요? 왜 그렇게 화가 났었어요?" - P63
"도무지 알 수 없군요. 아침 식사를 가지고 금방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써놓고 나갔거든요." "그랬어? 난 쪽지를 보지 못했어." "내 말을 못 믿겠어요?" "물론 널 믿지. 하지만 나는 쪽지를 보지 못했어." 우리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 P64
(전략). 그녀는 소설 내용에 대해 갈팡질팡하다가 내가 책 읽기를 마치면 그 후로 몇 시간 동안 내게 질문을 퍼부었다. "통행세 징수관? 그건 좋은 직업이 아니었나 봐?" 우리 사이의 싸움에 대해 다시 이렇게 자세하게 이야기했으니 이젠 우리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까 한다. 싸움은 우리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어주었다. - P65
나는 그때 쓴 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시라고 할 만한 게 못된다. 그 시절 나는 릴케*와 벤*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두 시인을 한꺼번에 닮고 싶어 했던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 시를 보며 우리가 그때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도 다시 깨닫는다. 그 시가 여기 있다.
(후략) - P65
12
한나와 여행을 떠나기 위해 부모님에게 둘러댔던 거짓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부활절 연휴의 마지막 주 동안 혼자서 집을 지키며 치러야 했던 대가는 아직도 생생하다.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형이 어디로 여행을 떠났었는지는 이제 모르겠다. - P66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 일주일씩이나 집을 보도록 맡겨두신 건 놀라운 일이었다. 한나와의 만남을 계기로 나의 가슴속에 자라나기 시작한 독립심을 눈치챘던 것일까? - P67
물건을 훔치는 일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쉬웠다. 나는 청바지를 여러 벌 입어보면서 여동생에게 맞을 만한 청바지도 한벌 집어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을 통이 넓은 양복바지의 안쪽 배 근처에 집어넣은 채 상점을 빠져나왔다. 벨풀오버 니키는 백화점에서 슬쩍했다. - P68
. 그녀의 눈길은 피곤해 보인다. "여기 이것들이 모두 너의 아버지가 읽거나 쓰신 책들이니?" 나는 아버지가 쓴 칸트 책과 헤겔 책을 알고 있었다. 나는그 책들을 찾아보았다. 마침내 두 권을 찾아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내게 그 책을 조금만 읽어줘. 꼬마야. 그렇게 해주지 않을래?" - P70
나는 그녀에게 그 비단 잠옷을 선물했다. 그것은 가지색이었고 가느다란 어깨 끈이 달려 있어서 어깨와 팔이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치맛단은 복사뼈까지 내려왔다. 잠옷은 반짝이면서 은은하게 속이 비쳤다. 한나가 기뻐하며 웃자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발밑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빙그르르 돌기도 했다. - P72
13
새 학년의 시작은 늘 하나의 분명한 단락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진급은 특히 하나의 시기를 칼로 자른 듯한 변화를 몰고 왔다. - P72
우리는 그 사실을 새 학년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우리를 한 교실에 모이게 한 다음 우리반이 흩어진다는 사실과 그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다른 급우 여섯 명과 함께 나는 텅 빈 복도를 지나 새 교실로 갔다. - P73
모든 사람이 다 그럴까? 나는 젊었을 때 지나치게 자신감을느끼거나 지나치게 자신 없어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 자신을 너무 무능력하고 초라하며 보잘것없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스스로 전체적으로 보아 성공했으니 모든 일에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 - P74
우리는 《오디세이》를 번역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작품을 독일어로 읽었다. 나는 그 작품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나는 선생님에게 지명을 받으면 별로 지체하지 않고 번역할 곳을 찾아 마음을 가다듬은 후 우리 말로 옮겼다. - P76
14
비행기 엔진이 고장났다고 해서 그것이 비행의 끝은 아니다. 비행기는 날아가던 돌멩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미끄러지듯이 날아간다. 초대형 다발 여객기는착륙 시도 시에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반 시간에서 45분 정도까지는 날아간다. 승객들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다. - P76
우리는 책 읽기와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란히 눕기로 이어지는 우리의 의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전쟁과 평화》*를 읽어주었다. - P77
우리는 서로를 위해 애칭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이제 나를 꼬마라고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수식어나 축소형*명사들을 이용해 개구리나 두꺼비, 새끼 늑대, 돌멩이 그리고 장미 등으로 불렀다. 나는 한나라는 이름을 고집했다. 그러던중 그녀는 내게 물었다. - P78
나는 그녀에게 내가 왜 그런 연상을 하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그녀는 자기 장딴지 근육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말이라고."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모르겠어......." 그건 평소의 그녀 태도가 아니었다. 평소에는 동의나 거부의사를 아주 분명하게 표현했다. - P79
한번은 함께 가까운 도시에 있는 극장에 가서 《간계와 사랑》을 보았다. 한나는 연극 구경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연극의 상연부터 휴식 시간의 샴페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마음껏 즐겼다. - P80
한나에게 가기보다 차라리 수영장에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게 되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7월의 내 생일에 나는 수영장에서 친구들의 생일 축하를 받고 친구들이 아쉬워하는 가운데 그곳을 빠져나와 일 때문에 탈진한 한나에게서 형편없이 기분 나쁜 영접을 받았다. - P81
그녀는 그해 여름 나의 생활이 이제 더 이상 그녀와 학교 그리고 공부 주변만을 맴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늦은 오후 그녀에게 갈 때면 나는 수영장에 들렀다가 가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 P80
15
그 후 나는 그녀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한나와 나 사이의 비밀을 세상에 알렸거나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내가 침묵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은 어느 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 P82
내가 나의 속을 완전히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친구들이눈치 챈 것은 상황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 P83
"너 오랫동안 아팠지. 간염 때문에 말야. 너를 괴롭히는 게바로 그거니? 넌 다시 전처럼 건강을 되찾지 못할까 봐 겁나니? 의사 선생님들이 무슨 말이라도 했니? 그래서 넌 매일 병원에 가서 피를 바꾸어 넣거나 주사를 맞아야 하니?" 한나를 병으로 생각하다니. 나는 부끄러웠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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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우리는 함께 공유하는 생활 세계가 없었으며, 그녀는 그녀 인생에서 내게 허용하고 싶은 만큼의 자리만 내주었을 뿐이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P85
게다가 나는 그녀가 자주 즐겨 간다고 말한 거리나 상점, 영화관에서 그녀를 단 한 번도 우연히 마주친 적이 없다. 만나고 처음 몇 달 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곳에 함께 가자고 졸랐지만, 그녀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 P86
한나는 하루 종일 평소와 다른 특이한 기분이었다. 변덕스러웠고, 고압적이었으며, 동시에 그녀를 극도로 괴롭히고 예민하게 만드는 무슨 압박감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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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그녀는 떠났다. 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그녀의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 P90
나는 이름 하나와 키르히하임에 있는 주소를 얻었다. 나는 차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슈미츠 부인이요? 그 여자는 오늘 아침에 집을 비웠어요." "그러면 가구들은요?" "그건 그 여자 물건이 아니에요." - P90
"그녀가 오늘 아침에 전화를 걸었어요. 그래도 제때 전화를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신 투입할 수 있었지요. 이제 안나온다고 하더군요. 영원히."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2주 전에 그녀는 바로 여기에 앉아 있었어요.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에 말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전차 운전기사 교육을 받아보라고 제안했지요. 그런데 그녀는 모든 것을 내팽개친 겁니다." - P91
몇 번이고 나는 내가 본 것은 그녀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켜보려고 했다. 얼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녀였다고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 P92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녀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 P92
제2부
나는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서 떠나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단지 전차 회사에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까 봐 두려워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쫓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바꾸어놓지는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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