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씨가 백해나를 죽였죠. 우리 그 점에 관해 이야기해봅시다." 나는 질문의 저의를 곰곰이 생각했다. 다큐멘터리에서그 대목을 누락시키기로 한 것은 박사니까, 어떤 식으로든 죄를 물진 않으리라는 계산이 섰다. - P210
"출연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일지 잘 생각해봤죠. 평범한 설계사는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생각이 더욱 강해졌고요. 그리고 오늘의 대화로 도하 씨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받아내려는 겁니다. 영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죠? 그 죽음이 어떤 종류의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취미시군요." - P211
"만약 저에게 죄가 있다면, 백해나를 처음 카메라 앞에세운 사람들이나 거기에 열광한 시청자에게도 엇비슷한 죄가 있을 거라고 봐요. 그쪽이 더 클지도 모르고. 저보다 더잘 아시겠지만, 백해나는 관심에 시달리다가 미쳐버린 케이스니까요." - P212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중증 우울증 환자들은 병세가 호전되면서 일시적으로 사나워지는 경향이 있죠. 무기력증에 억눌려 있던 울분이 수면으로 올라오니까요.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이 상처받는 사례도 많고요. 하지만 그런 부작용 때문에 치료 자체를 막는 상담사는 없지 않나요?" - P212
"그러면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리죠. 백해나와 릴리의 만남은 납치였고, 그 이후의 관계는 일방적인 학대였어요. 소송을 빌미로 협박하고 옆에 붙들어놨죠. 이런 상황에서도개가 백해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침묵을 지켜야 했단 말인가요? 배려가 필요했다면, 어느 정도의 배려가요? 사실상 희생하고 헌신하기 위해서만 제작되는 지성체들이 있다면 - P213
"하지만 도하 씨야말로 창조자 노릇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 P214
"전 제대로 된 이유를 붙이지 못할 일은 거의 안 해요. 들키더라도 항변할 여지를 남겨두고요. 열네 살 이후로는줄곧 그랬어요. 그게 제가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죠."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진담이에요.‘ - P215
도르시아의 스테이크에도 대규모 콘서트의 분위기에도 설계사 면허 취득에도 들뜨지 않는삶이 어떤 것인지, 아무 기대도 가망도 없는 기분이 무엇인지 다들 모른다. 그 사람들은 불화에 이끌리는 기분도 모른다. 모르니까 내가 세상을 느끼고 겪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주지 않는다. - P216
그제야 나는 눈앞의 존재가 미디어 공룡 그 자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릴리가 미디어 산업을, 시청자들을 비웃고 경멸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백해나에게는 평생토록 겪은 악몽의연장선일 것이다. 게다가 박사는 개의 기억까지 누락시킨 상태였다. - P217
"그나저나 저도 하나만 여쭤보고 싶은데요. 개의 기억을 삭제하라고 지시하셨는데, 이건 박사님의 이미지 때문이죠?" "나는 기계고, 미디어는 산업이고, 이미지는 마케팅입니다. 기계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인간에게 보여줄 필요는없어요. 그게 제작진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편집하기전에 지워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죠." - P218
나는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 릴리의 이야기에기반해 얼개만을 짜놓았을 때 개의 기억을 지웠다. - P218
"현존하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우선합니다." 박사는 그렇게만 답했다. 감정형 인공지능을 설계할 때가장 먼저 주입하는 대원칙이었다.
- P218
개는 백해나를 좋아한 적이 없었고, 초기화를 바라지도않았고, 하고 싶은 말도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세 개의질문만을 던져서 스크린에 일관적인 패턴이 나타나게끔 했다. 그게 개와 나의 거짓말이다. - P219
(전략) 개의 본심을 철저한 무위로 돌려 모욕하는 일이었다. 릴리는 그날의 기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면 차라리 낭만적인 거짓말로 바꿔버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큐멘터리가 릴리의 복수라고도 느꼈다. - P219
. 죽은 사람의 이름, 챙길 사람이 없어진 이름만이 텅 비어서 누구든 쥐고 흔들 수 있는 깃발처럼 나부낀다. 그게 최종적인 패배인지 완벽한 해방인지 나는 모른다. 인간이 죽음과 파멸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계속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이유만을 겨우 짐작할 뿐이다. 내가 얽매인 굴레도 결국엔 그것이다. - P220
04
소녀의 개
실컷 떠들어놓고 보니 12시가 넘어가 있었다. 돌아가면새벽일 것이다. 박사는 나를 홀로 좌석에 태워 동생의 아파트로 보냈다. 나는 로드스터에 올라타자마자 테이블에서 감초 막대를 하나 더 꺼내어 씹기 시작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대화는 계속되었다. - P223
"동생이 그걸 듣고 화를 좀 냈으면 좋겠어요." 나는 보석함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주듯 수줍은 미소를머금었다. 조금은 기쁘게, 조금은 부끄럽게 반응을 기다리는데 멈춘 창밖으로 아파트가 보였다. 도착한 것이다. - P224
절단과 봉합을 마치고 왼손에 철심까지 박은 후 사나흘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진 채 누워만 있었다. 도대체박사가 왜 동생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질문을 곱씹으면서 분노를 삭이다 보면 신경통이 그 순간의 황홀처럼 절단면을 치고 올라왔고, 되살아나는 기억 사이에서 한참을 헤맨 뒤에는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 P225
콘크리트 벽으로 만들어진 무인도에서, 나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소식을 접하면 탓할 상대부터 찾는 게 인간의 습성이지만 이번에는 문제가 어려웠다. - P227
"열흘 뒤,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긴 해. 대중 여론이라는것도 있고." 대중 여론, 이라는 말은 고객들의 간증을 포함했다. 다큐멘터리가 공개된 직후에는 비난 여론이 심했는데(쿠키 영상에 얽힌 논란까지 포함해서) 시영의 게시글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역전됐던 것이다. - P228
문제가 생긴 건 식사를 모두 마친 다음이었다. 실물 초대장에 이상한 점이 발견되어서 잠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박사가 직접 보내준 거라고 대답해도 웨이터들은(물론박사와 똑같이 생겼다) 막무가내였다. - P229
"박사님의 윤리 판단기가 사람 다리를 으깨도 된다고 하던가요?" "나는 의무론에 더해 계약주의와 이기주의, 그리고 실용주의 정식을 혼용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네 개의 윤리 판단기 모듈 중에서 둘 이상에게 금지되지 않은 행동만이 실행되죠. 훨씬 유연한 데다가 교착 상태에 빠질 일이 없고, 개개인과 사적 관계를 맺을 경우 각자의 실제적 이유에 기반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어떤 논증을 거쳐 정당화되었는지 보고서를 뽑아드릴 수도 있어요." - P230
"처음부터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잘린 다리와 언짢은 반응을 맞바꾸는 게 공정한 거래일수는 없겠지만, 상대는 제국의 주인이고 나는 평범한 설계사라는 점에서는 그럭저럭 선방한 셈이었다. - P232
"내 의견으로는 도하 씨가 동생분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같습니다만." "이 일을 법원으로 끌고 가면 제가 피해자예요. 동생은절 감시하고, 억지로 약을 먹여서 응급실에 실려 가게 하고, 조수석 승객을 외딴 도로에 내버리는 사람이죠. 그것도한밤중에 장기간의 감정적 학대로 판단력이 흐려진 피해자라면 차창에 손을 밀어 넣는 일쯤은 쉽게 할 수 있겠죠. 한마디로 전 동생이 기획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가 직업도 잃고 다리도 잃은 불쌍한 사람이죠." - P233
"약을 안 먹고 있어요. 요새 바쁜 일이 너무 많아서 동생도 잊어버린 것 같고, 재미있는 일은 끝났으니까 슬슬 병원에 가야겠는데... 사실 그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죠. 누가 끌고 데려가지 않으면 다신 안 갈 것 같아요." - P235
평소에는 동생에게 말했겠지만, 자해 사건이 탄약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걸 들키면 정말로 관계가 결만날 것같았다. (중략) 나도 평소에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정말이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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