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리스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필로(philo-)‘라는 말에 꽂혔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친구‘를 ‘필로스(philos)‘라고 하는데, ‘사랑하는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 P5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막연히 철학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은 대학에 들어가 철학개론을 들으면서 꼭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굳어졌습니다. 철학을 부전공으로 삼아 공부하면서 철학으로 번역된 ‘필로소피아‘라는 말을만들어 낸 그리스 사람들에게 가장 강렬하게 끌렸고, 그래서 대학원을 철학과로 들어갔을 때는 큰 고민 없이 고대 그리스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 P5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Apologia Sökratous)」에서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합니다. ‘어떻게하면 인간이 덕 (aret)을 실현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 P6
지혜에 관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이름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다른 말로 ‘철학자‘라는 뜻이지요. - P7
참된 것들을 가장 많이 본 영혼은 장차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또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philokalos)‘ 또는 ‘음악적 재능이있는 사람(mousikos)‘ 또는 ‘사랑에 충만한 사람(erotikos)의 종족에 깃들 것입니다.
ἀλλὰ τὴν μὲν πλεῖστα ἰδοῦσαν εἰς γονὴν ἀνδρὸς γενησομένουφιλοσόφου ἢ φιλοκάλου ἢ μουσικοῦ τινος καὶ ἐρωτικοῦ, (『파이드로스』 248d2-3)
이 구절을 읽던 저의 가슴에는 특히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 즉 ‘필로칼로스‘가 깊게 새겨졌습니다. - P7
그리고 또 하나, 바로 신화입니다. 그리스어로 신화는 ‘뮈토스(muthos)‘라고 합니다. 단순하게 그냥 ‘이야기‘라는 뜻이지만, 그 옛날 그리스인들이 즐겼던 이야기에는 신과 영웅이 워낙에 많이 등장했기에 이야기는 곧 신화이기도 했습니다. - P8
그렇다면 신화는 어떤가요? 신들의 놀라운 세계와 영웅들의 기상천외한 활약이 그려져 있죠.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현상들에대해 궁금해하며 던진 질문들에 신비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로 답을 만들어 가며 세상을 설명하는 가운데 신화가 등장한 겁니다. - P9
과학은 물론, 신화와 시, 음악, 미술, 조각, 수사학까지도 모두, 그것이 단순히 유용성이나 돈벌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앎을 추구하는것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전부가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이라고 보았던 겁니다. - P9
즉, 지금 여기 우리를 둘러싼 그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라도, 그것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놀라움과 호기심을 느끼며 그 문제를 풀어 보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을 철학자라 부를수 있고, 그들의 작지만 진지한 노력 모두가 철학으로 인정되어야하는 이유를 우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 P10
이제 여러분을 신화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대부분 신과 영웅의 이야기입니다. 영웅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의존재로서 신적인 능력과 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려는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인간이기에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신과 인간의 경계선에서 추락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영웅이든 신이든 모두 인간의 본성을 비춰 주는 거울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P10
마지막으로 표기법에 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신과 영웅, 인간, 지역, 작품의 이름을 쓸 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지 않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표기법, 즉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표기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P11
가이아, 최초의 질서를 세우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땅에 시신을 묻는 장면을 보거나, 화장터로 들어간 시신이 희고 따뜻한 몇 줌의 재로 남는 걸 보면, 우리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실감하지않을 수 없습니다. - P36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리라는 뜻도 있지요.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의 아르케를 탐구하는데서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만물의 아르케는 무엇인가?" 이 질문을 처음으로 던지고 "그것은 물이다."라고 주장한 탈레스를 철학의 시조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지요. - P36
그런데 이런 철학자들에 앞서 활동한 시인 헤시오도스는 신들의 계보를 노래하는 「신통기」에서 다른 이야기를 해 줍니다. "태초에 가장 먼저 카오스가 생겼고, 그다음에 가이아가 생겼다."라고 했는데, 가이아는 땅, 대지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만물의 아르케는 흙이라고 본 것이 아닐까요? - P37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카오스의 자손들은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모습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 P37
그렇다면 가이아, 땅의 여신이야말로 만물의 아르케로 제격입니다. 카오스가 모든 것들을 품어 안는 공간이라면, 물질로서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은 땅이니까요. 카오스가 생기면서 텅 비어 있던 세상은 곧이어 땅이 생기면서 가장 먼저 흙으로 가득 차게 되었죠. - P37
어쨌든 가이아가 태어났을때 세상에는 카오스와 가이아, 즉 빈 공간과 땅만 있었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카오스가 가이아를 낳은 것은 아니니까, 맨처음에 공간의 신 카오스가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카오스를 채우며 태어난 대지의 여신 가이아도 혼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 P37
매우 생산력이 왕성한 여신이죠. 그녀는 맨 처음에 우라노스(Ouranos)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세포분열을 하듯이 혼자서낳은 건데요, 그렇게 태어난 우라노스는 하늘입니다. 땅의 여신 가이아는 하늘의 남신 우라노스를 낳아서 "자기 주위를 완전히 감싸도록(iva uv teQi távra nakutol)" 했지요(신통기] 127행). - P38
물론 대부분의 학자는 땅 위에 하늘이 펼쳐진 것으로 그리지만, 헤시오도스의 상상력은 훨씬 더 과감했을 수 있고, 저는 개인적으로 계란의 노른자와 흰자의 관계로 땅과 하늘이 자리 잡았을 거라는 해석에 한 표를 던집니다. - P38
하늘을 낳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그다음으로 ‘우레아(Ourea)‘를 낳는데, 산을 뜻합니다. 땅에서 울퉁불퉁 솟아난 산들은 땅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땅이 혼자서 낳은 자식들이기도 하지요. - P38
가이아가 거대한 대지의여신이듯이, 그녀가 낳은 하늘의 남신 우라노스도, 산들의 신 우레아도, 바다의 남신 폰토스도 모두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처럼 살아 숨 쉬는 생명체, 즉 영원한 생명을 가진 불멸의 신입니다. - P38
1979년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은 「가이아 : 지구 위의 생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Gaia: A New Look at Life on Earth)」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마치 헤시오도스의 이야기를 과학으로 입증하려는 것 같은 책입니다. 그에 따르면 이 지구는 그저 거대한 흙덩어리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 같은 유기체로서 움직입니다. - P39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이 거대한 유기체인 지구 안에서 어떤 존재로 살고 있을까요?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숲을 훼손하고 강과 바다, 대기를 오염시키는 모습은 흡사 우리 몸을 망치는 병균이나 바이러스처럼 보이진 않나요? - P39
참다못한 가이아 여신은 제우스에게 인간들을 쓸어 버리라고 부탁하지요. 제우스는 거대한 홍수를 일으켜 인간을 파멸시켰다고 합니다. 다행히 한 쌍의 착한 부부가 살아남아 인류가 멸종되지는 않았지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 P40
타르타로스, 지하 세계를 지배하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죽으면 우리는 흙으로 돌아가겠지요? 그런데 영혼이나 혼백, 넋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우리가 죽어서 흙이 되는 것은 몸뿐이고, 정신은 혼백으로 남아 어딘가에서 계속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다가 새로운 몸을 입고 환생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P41
그리스·로마 신화에도 어둠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신입니다. 어둠의 신은태초에 카오스가 생기고,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생겼을 때, 함께 생겼다고 합니다. - P41
그리스·로마 신화가 그려 주는 태초의 우주는 이런 모습이었지요. 우주의 한가운데 두툼한 땅이 있고,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표면에 울퉁불퉁한 산들의 신 우레아가 솟아나 있고요. 그녀의 주위를 바다의 신 폰토스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와 대지주위를 온통 감싸면서 하늘의 신 우라노스가 군림합니다. 대지 깊은 곳에 어둠의 구렁, 지하의 신 타르타로스가 자리를 잡고 있지요. - P42
이 원초적인 시기에는 아직 인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지하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후 세계가 아니었지요. 신들은 죽지 않으니까요. 처음에 그곳은 신들을 가두는 감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 P42
신들은 또 다른 이유로 타르타로스에 갇히게 됩니다. 땅 위의 세상과 타르타로스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 있는데, 그 강의 이름은 스틱스강입니다. 신들은 이 강에 대고 맹세를 하는데, 만약 그 맹세를 어기면 거짓말에 대한 엄중한 벌을 받습니다. - P42
이런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로마인들은 말과 약속, 맹세와 신의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말을 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 약속을 어기면 신들조차도 끔찍한 벌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이죠. - P43
타르타로스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은 신약성서에도 반영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천사들이 범죄를 저지르자, 여호와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지옥의 어두운 구덩이에두어 심판 때까지 가두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타르타로스에 던졌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 P43
그러나 나중에 인간들이 생겨났을 때, 신들이 갇히는 타르타로스와 구별하기 위해 그 위쪽에 죽은 인간들을 위한 하데스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 P43
하데스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뜻인데, 이 또한 죽은 사람들의 혼백이 갇히는 지하 세계이면서 동시에 그곳을 지배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 P43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이 죽으면 타르타로스의 입구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은 다음 그곳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했고,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도 죽은 자들의 혼백이 머무는 저승 세계를 타르타로스라고 노래했습니다. - P44
어두컴컴한 타르타로스가 존재하는지는모르겠지만, 그것을 상상한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이 땅 위의 우리 인생은 짧다는 것, 그리고 이곳에서의부귀영화를 위해 약속과 의리를 저버리고 범죄의 길을 가지 말라는 것, 정의롭고 올바르게 행동하되, 그 어떤 경쟁에서도 이겨 내는 강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 P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