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 없는 과학은 아무것도 아니다. 1965년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의 말을 들어보자.
"대개 새로운 법칙을 찾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법칙을 추론한다. 둘째,
추론한 법칙이 옳을 경우의 함의를 알아보기 위해 추론한 결과를 수학적으로 계산한다. 셋째, 실험이나 경험(세계의 관찰)을 통해 계산한 결과를 자연에 대입한다. 계산한 결과를 관찰 내용과 직접 비교함으로써 결과가 맞는지 살피는 일이다. 계산을 통한 법칙이 실험과 일치하지 않은 경우 그 법칙은 틀린 것이다.
이 간단한 언명 속에 과학의 열쇠가 들어 있다. 추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과학자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추론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의 명성이 얼마나 큰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실험과 일치하지 않는 법칙은 틀린 것이다."¹ - P7

1. Richard Feynman, The Keyto Science, Lectureat Cornell University, 1964 (www.youtube.com/watch?v=b240PGCMwV0) - P390

 고대 그리스인도 현대인 못지않은 지성의 소유자들이었고, 그 중 일부는 세계란 무엇인가에 관해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호기심과 여유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극히 적은 예외를 제외하고 고대 그리스인이 할 수 있었던것은 대개 철학적 사유가 전부였다. 철학을 폄훼하려는 게 아니다. - P7

"여기 표명한 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또 나의 역설 paradoxes (여기서는 어떤 주의나 주장에 반대되는 이론이나 말의 의미로 쓰였다_옮긴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수많은 실험과 발견만큼은 주목하시라. 우리는 이 실험과 발견들을 캐냈고, 엄청난 노고와 큰돈을 들여 밤잠을 설쳐가며 이들을 입증했다.
여러분은 우리가 제공하는 실험과 발견을 즐겁게 이용하시라. - P8

길버트의 말을 바꿔보자면, 실험과 일치하지 않는 법칙은 틀린 것이다. ‘큰돈‘에 대한 언급 또한, 과학이 진보하려면 가장작은 물질 구조를 탐색하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CERN의 대형강입자 충돌기 Large Hadron Collider나 우주 탄생의 원인인 빅뱅의 세부사항을 밝혀주는 우주 망원경 등 값비싼 도구를 만들어야 하는 이 시대에 전혀 낯설지 않다. - P8

과학과 실험 간의 의존 관계를 보여주는 더 극적인 예는 19세기의 증기기관이다. 증기기관은 원래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개발됐다. 증기기관은 기관내의 작용에 대한 과학자들의 탐구심을 부추겼다. - P10

많은 사람들은 처음에 진공펌프가 왜 그토록 중요한 기술적 성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진공펌프는 예로부터 여러 다른 형태로 존재해온 기구다. 효과적인 진공펌프가 없었다면, 19세기 진공 유리관 내부의 ‘음극선 cathode rays‘ 작용 연구나, 음극선이라는 ‘광선‘이 실제로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다고 알려져있던 원자에서 분리돼 나온 입자들, 즉 ‘전자electron‘의 연속체라는 발견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 P10

그러나 이제 우리는 원자뿐 아니라 원자보다 작은 입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론에 기댔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방식으로알고 있다. 추론을 검증하기 위해 실험을 실행할 수 있었고, 또한 실험을 실행할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 P10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때로 가설과 이론 사이의 구분을 혼동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용어를 잘못 쓰거나 엉성하게 쓰는 탓이다. 일상 언어의 용법에서 우리가 뭔가에 관한 ‘이론‘이 있는 경우, 예컨대 왜 어떤 사람들은 토스트에 땅콩버터를 발라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닌지에 관한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추측이거나 가설일 뿐 과학에서 말하는 ‘이론‘이 아니다. 찰스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학을 모르기 때문에 다윈의 이론이 "단지 이론일 뿐"이라고 말한다. - P11

중력은 과학의 작동방식에 대한 또 하나의 사례다. 뉴턴의 이론은 처음에 모든 검증을 통과했지만, 관측이 발전하면서 그 이론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이자 중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지점(강력한 중력장이 존재하는 지점)에서 궤도순환을 하는 수성 궤도의 미묘한 세부 요소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략).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현재까지 가장 완벽한, 과학계 최고의 중력이론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뉴턴의 이론을 폐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뉴턴의 이론은 여전히 특정 계에서 완벽하게 통하기 때문이다. - P12

우리가 배운 일반상식과 달리, 과학은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혁명적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과학은 기존에 발전한 것 위에 새로운 것을 쌓아나가는 점증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 P13

이 모든 것들은 과학의 역사적 발전을 밝힐 목적으로 이 책에 선정해놓은 실험을 통해 분명해진다. 과학의 발전은 단순한 철학적 추론을 극복했던 1,600년 이전의 예외적인 실험 사례 두 가지 정도에서 출발해, 우주의 구성요소에대한 오늘날의 발견에 이른다. 이 책에서 선정한 실험과 발견들은 부득이하게개인적인 선택의 결과물이며, 100개를 선정해야 하는 지면상의 한계에 제약을받는다. - P14

 대형 강입자 충돌기 속 진공의 기원은 17세기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 Evangelista Torricelli의 실험이다(실험 8을 보라). 그러나 토리첼리는 힉스 입자 Higgs particle의 존재를 발견하기 위한 실험을해보기는커녕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 P14

 여기서 설명하는 개념 중 일부가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길버트의 말을 떠올려보라.
"우리가 만든 많은 추론과 가설은 필시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견해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론과 가설은 "증명(실험)을 통해 권위"를 얻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명제, 실험과 일치하지 않는 법칙은 틀린 것이다. - P15

04. 강의를 위해 처형 시간을 맞추다.
•인체를 해부한 베살리우스

16세기 중반에 시작된 과학의 르네상스 시대에서 중대한 분기점은 1543년이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가 유명한 저서 《천구의회전에 관하여 Orbium Coelestium》를 출간함으로써 지구를 우주의 중심 위치에서 끌어내리고,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가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출간해 동물 세계에서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던 인간이라는 종의 지위를 끌어내린 해다. - P33

 당시의 이발사겸 외과의사는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도살업자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해부학 교수들은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서서 (말 그대로 손을 더럽히지 않고)실제 증거뿐 아니라 상상력을 이용한 해부를 통해 밝혀진 내용을 학생달에게 강의했다. - P33

베살리우스 전에 인체 해부에 대한 일반 지식은 고대 이후로 전승된 것이었고 이는 고대 로마의 의학자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Claudios Galenus (갈렌 Galen이라 알려져 있다)의 연구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중세 유럽인은 고대인이 자신들보다 훨씬 더 지혜로우며, 뛰어넘기는커녕 모방하기조차 불가능할 만큼 우월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 P35

베살리우스는 또한 고도로 숙련된 화가에게 자신의 강의에 쓸 커다란 그림을 그리게 했고, 그 중 여섯 점은 1538년 《여섯 점의 해부학 그림 TabulaeAnatomica Sex》이라는 책으로 발간됐다. 이 그림 중 세 점은 베살리우스가 직접 그렸고 나머지 세 점은 티치아노Titian의 제자였던 칼카르의 요한네스 스테파노 John Stephen of Kalkar가 그린 것이다. - P35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는 동료 교수와 의사를 비롯한 전문가용서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심지어 교육 수준이 떨어지는 평범한 사람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같은 해 《인체의 구조에 관한 요약집 De Humani Corporis Fabrica Librorum Epitome>이라는 공식 제목을 단 개괄서도 출간했다. 이 책은 줄여서 《요약집Epitome》으로 통한다. - P36

베살리우스가 직업을 바꿔야 했던 이유는 필시 그의 이론에 대한 일부 동료들의 반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파도바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파도바대학교로 오기 전 파리에서 베살리우스가 다니던 대학의 의사였던 자코부스 실비우스 Jacobus Sylvius는 베살리우스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비난을 퍼부어댔고, 갈레노스를 넘어서는 해부학 지식의 진보는 아예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 P36

008 공기의 무게를 측정하다
・토리첼리의 진공

164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의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 EvangelistaTorricelli는 30피트(약 9미터) 이상을 판 우물에서는 물을 펌프로끌어올릴 수 없다는 문제를 파고들었다. 펌프의 작동방식은 자전거펌프의 한쪽 끝(열린 쪽)을 물속에 담그고 펌프 속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원리와 비슷하다.  - P46

 실험에서 유리대롱의 한쪽 끝을 막고 수은을 가득 채운 다음, 수은이 들어 있는 통 속에 대롱을 거꾸로 세웠더니 대롱 속에 꽉 차 있던 수은의 높이가 수은이 차 있는 통의수면에서 30인치 (76센티미터)까지 내려오면서 대롱 속 수은 위쪽에 틈새 공간이 생겼다. 그의 예상과 맞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 틈새 공간에는 아무것도없었기 때문에 ‘토리첼리의 진공Torricelli Vacuum‘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P46

 토리첼리는 1647년에 사망했지만 프랑스인인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그의 발견들을 넘겨받아 더욱 발전시켰다. 파스칼은 이런 종류의 초기 기압계로 측정한 기압이 날씨에 따라 어떻게달라지는지 연구했다. 또 다른 프랑스인인 르네 데카르트는 1647년 파스칼을 찾아가 산으로 기압계를 가지고 올라가 고도에 따라 기압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보며 흥미로울 것이라고 제안했다.  - P47

흥미롭게도 퓌드돔 산 가장 아래쪽에 있던 신부 또한 그날 내내 그곳에 설치한 기압계 수치가 변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기압은 산 아래쪽보다 정상에서더 낮았던 것이다. 결국 이 실험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대기가 희박해진다는 것을 입증했고, 이는 고도가 더욱 높아지면 대기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 P48

009 진공에 매료된 과학자들

보일의 법칙


토리첼리 그리고 파스칼과 처남 페리에의 실험 이후 진공 관련 연구는 과학에서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 중 하나가 됐다. 과학자들은 진공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유리병이나 다른 용기에서 공기를 뽑아낼 수있는 효율적인 펌프가 필요했다. 17세기의 시대적 한계로 볼 때 이러한 펌프는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첨단기술 장비였다. - P49

. 1660년대 과학자들이 손에 넣을수 있는 최고의 펌프는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훅이 만든 것이었다. - P49

 그는 고도가 높은 곳의 저기압 현상의 원인을 공기의 밀도 저하로 추론했고, 훗날 ‘타우넬리의 가설 Towneley‘sHypothesis‘이라 알려지게 될 자신의 생각을보일에게 말했다. 보일은 이에 흥미를 느껴 조수였던 훅에게 그 가설을 시험해볼 실험의 임무를 줬다. - P50

위의 실험과 달리 보일과 훅이 실행했던 또 다른 실험들에는 공기 펌프가 쓰였다. 기압이 낮아지면 물이 더 낮은 온도에서 끓는다는 것을 보여준 실험이그 중 하나였다(이는 왜 산꼭대기에서 끓인 차가 맛이 없는지 설명해준다). - P50

실험 결과는 1660년 출간된 보일의 《공기의 탄성에 관한 물리역학적인 새로운 실험New Experiments Physico-Mechanical Touching the Spring of the Air》이라는 저서를 통해 세상에 처음 공표됐다. 그러나 당시 보일은 부피와 압력에 관한 반비례 법칙을 명시적으로 상술하지는 않았다. - P51

훅의 실험과 보일의 법칙은 과학적 사고에 매우 큰 함의를 띠고 있었다. 공기는 원자와 분자로 이뤄져 있으며 주변을 돌아다니며 서로 충돌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해줬기 때문이다. - P51

012 월식 주기의 차이는 왜 생기나
•광속을 계산한 올레 뢰머

실험뿐 아니라 ‘관찰‘에 대해 뉴턴이 한 말은 매우 중요하다. 때로 자연은 인간을 위해 직접 ‘실험‘을 시행해준다. 이때 과학자의 역할은 ‘그저‘ 진행 중인 사건을 관찰하고 왜 그 일이 발생했는지 알아내는 것뿐이다. 그러나 매우 총명한 과학자만이 그것을 알아낼 수 있다.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는것을 알아낸 올레 뢰머 Ole Romer가 좋은 사례다. - P59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뢰머는 목성의 위성들의 월식을 계속해서 점검했고,
월식 현상이 늘 예측한 시간대에 정확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이오라는 위성의 월식 현상에 특히 주목했다. - P61

(전략).
하지만 희한하게도 카시니는 이러한 생각을 더 발전시키지 않고 포기했다. 그러나 뢰머는 더 상세한 관측과 계산을 통해 이러한 가설을 발전시켰다. 1676년 8월 아직 그 생각을 버리지 않았던 카시니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French Academy of Sciences에 경도를 추산할 때 쓰는 이오 월식의 공식 일정표를 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빛이 이오에서 지구의 관측자에게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즉 빛이 지구 궤도의 절반 격인 거리를 오는데 약 10분에서 11분이 걸리는 듯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P61

불행히도 뢰머의 논문들은 대부분 1728년의 한 화재로 유실되는 바람에그의 발표에 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다소 왜곡된 보도 기사 정도다. - P62

 뢰머는 지구의 크기에 대해 당시 얻을 수 있었던 최상의 추정치를 통해 빛의 속도가 (현대의 단위로) 초속 22만 5,000킬로미터라고 추산했다. 우리가 뢰머의 관측을 이용해 동일한 계산을 할 경우, 그리고 현대 지구 궤도의 값을 끼워 넣을 경우 얻게 되는 빛의 속도는 초속 29만 8,000킬로미터다. - P62

021 지구의 무게를 재는 방법

・캐번디시의 중력 실험

지구의 무게를 재는 실험이 처음 시행된 것은 1790년대 말이었으며, 그결과는 1798년 왕립학회에 보고됐다. 사실 이 실험은 자연력 중에서 가장 약한 것으로 판명된 중력의 강도를 최초로 측정한 실험이었다. - P92

미첼은 1783년에 ‘블랙홀‘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생각해낸 인물이다. 그 무렵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는 사실(실험 12를 보라)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뉴턴의중력 법칙은 질량이 큰 물체일수록 그것을 벗어나려면 더 큰 속도가 필요하다는 것(질량이 클수록 움직이는 데 더 큰 힘의 작용이 필요하며, 속도를 변화시키기도 어렵다는 뉴턴의 운동 제2법칙인 가속도 법칙. 다시 말해 가속도는 질량과 반비례한다는 법칙_옮긴이)을 입증했다. - P92

미첼은 중력에 대한 추론뿐 아니라 중력 관련 실험에도 관심이 있어 중력을측정하는 실험을 고안해냈을 뿐 아니라, 실험에 필요한 대부분의 장치를 직접만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1793년, 실험을 하기 전에 사망했다. - P92

중력 실험은 이해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매우 어렵다. 실험은 당시런던의 변두리 마을이었던 클래펌커먼에 있는 캐번디시 저택의 별채에서 이뤄졌다. 실험의 핵심 장치는 6피트(1.8미터 길이의 나무로 제작한 튼튼하고 가벼운 막대였다. 양끝에는 납으로 된 작은 공을 매단다. 각 공의 무게는 1.61파운드(730그램)였다. 막대는 정중앙에서 볼 때 두 공의 균형이 맞도록 금속 줄로공중에 매달아놓았다. - P93

사실 캐번디시가 제시한 값은 지구의 질량이 아니라 지구의 밀도 값, 즉부피를 질량으로 나눈 값이다. 1798년 6월 21일 캐번디시는 1797년 8월과 9월에 이뤄진 여덟 차례의 실험 결과, 그리고 1798년 4월과 5월에 실행한 아홉 차례의 실험 결과를 종합한 내용을 왕립학회에 보고했다. 그가 보고한 지구의 밀도 값은 물의 밀도의 5.48배였다. 그러나 캐번디시는 약간의 계산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실험을 바탕으로 한 지구의 실제 밀도는 물 밀도의 5.45배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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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유는 글쓰기 또한 자아가 사라지고 자아를 지우는형식이라 상상했기에 멸절의 한 구성요소라고 보았다. 티봉의 설명대로 베유는 "혹독한 내면적 정화를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완벽한 표현을 획득할 수 없다"고 믿었다.(GG, 8) - P85

글쓰기가 번역이라는 이런 시각에서 보면, 베유가 숭모의 대상으로서든 동일시의 대상으로서든 작가의 "나"를 지우려한다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샤론 캐머런의 주장대로, 이멸절의 효과로 지극히 몰개성적인 문체가 드러난다. 베유가프랑스어의 대명사 ‘on‘을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것 역시 사적 대명사(‘on‘이 들어간 프랑스어 표현은 영어에서 주로 부정사구문으로 번역된다)를 피하려는 의도에서다.⁴⁷

47 예를 들어 매카시는 베유를 번역할 때 전형적으로 부정사 구문을 쓴다. - P86

베유의 산문에 미학적 흡인력을 주는 이런 자질들은 심적인 불편을 초래하기도 한다. - P86

마찬가지로 《중력과 은총》 전편에 걸쳐 근대 세계에서 도출되거나 근대 세계를 지칭하는 명사들은 몇 개 되지않는다. "무정부주의자들" "사회주의" "전체주의" "유럽"
그리고 "계급." 극단적인 희소성 덕분에 이런 단어들은 나타날 때마다 두드러지게 이목을 끌고 심지어 깜짝 놀랄 정도로 생경해 보인다. 베유가 자신을 반근대주의자로 설정했다는 말이 아니다. 베 - P88

베유의 산문에는 몹시 기초적이고 원소적인 구석이 있으며, 덕분에 베유는 친숙하고 아마 보편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아득하게 거리감이 있는 세계를 창조한다. 구체성의 결핍 덕분에 베유의 산문은 번역이 쉽다. 특정성의 결핍 덕분에 문화적·역사적 차이의 감각이 아니라 그저 시간적 거리감만 창출하기 때문이다. - P88

베유는 <말의 힘>에서 추상에 대한 공포를 상술했다.
<말의 힘>은 베유가 스페인 내전에서 돌아와서 쓴 에세이로스페인 전쟁과 유럽의 전쟁광들을 트로이전쟁에 비유한 글이다. 베유는 추상 때문에 전쟁에 어떤 의미 있는 동기가 존재한다는 착각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했다. - P89

베유는 자신의 시금석과 같은 개념들초연, 수난, 선악, 아름다움, 천형, 멸절, 죽음을 끝없이 되짚어 구체성의 질감을 부여한다. 명징하고 선명하게 설명하는 과정만이 이 "구체적 현실들"을 막대기, 동물, 연필과 같은 사물과 구분해줄수 있기에 꼭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개념을 구체화하는 시도가 소위 베유가 자기주장을 밀고 나가는 강직한 태도에 깔려 있다. - P90

이렇듯 정의를 강조하면서 베유의 글에는 권위가 각인된다. 베유 본인이 《어느 신부에게 보낸 편지 Letter to aPriest》에서 이 점을 주지시켰다. "앞으로 논하게 될 견해들은 내게 개연성이나 확실성의 정도가 몹시 다양합니다. 그러나모두가 내 마음속에서는 물음표를 수반하고 있지요. 그 의견들을 서술형으로 쓰는 건 오로지 언어가 빈곤한 탓이에요.
동사 활용형에 보완적 시제가 있어야 제 욕구가 충족되거든요. 성스러운 것들의 영역에서 나는 그 어떤 것도 범주적으로 긍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견해들도 내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똑같은 물음표를 수반하고 있습니다."⁵⁰

50 Simone Weil, Letter to a Priest (New York: Penguin Books, 2003), 12. - P91

고통스러운 선명성은 베유의 문체에 대한 티봉의 논의에서 보았듯,
그리고 그녀가 사후에 남긴 에세이와 글에서 보듯 베유 자신의 미학이기도 하다.
하지만 베유가 단순성과 선명성을 추구한 배후의 한편에는 정치적 목표가 있다. 그리고 이 정치적 목표는 고통을주는 게 아니라 민주적이어야 한다.  - P91

베유의 전작은 물론이고 이 에세이의 직설과 명징성은 고유한 어법에서 나온다. 예컨대 선언문의 활용, 종속절보다는 등위절을 선호하는 경향, 병행 구문의 강조, 비유의 빈번한 활용(A와 B의 관계는 C와 D의 관계와 같다)이다. 이러한 패턴의 어법은 베유 글의 균형과 수학적 엄정함을 생성하는 한편으로 권위적이고 가차 없는 어조를 창출한다. - P92

 베유의 산문 문체는 엄준한 단어 선택, 단순하고 직설적인 어법, 몰개성적인 대상을 상정한 화법, 반복과 재정의ㅡ 독자를 위로하고 꼬드기고 설득하거나 축소하고 미화하려는 일말의 시도도 하지 않고 난해한 화두에 곧장 직면하게 만든다. 베유가 빚어낸 명징하고 도발적인 문체는 윤리학이고 고통스러운 선명성의 정치학일 뿐 아니라 수난을 재현하기 위해 특별히 개발한 미학이기도 하다. - P93

베유는 산업 노동의 현실을 "미스터리"라고 부른다.
인민전선 Popular Front의 멤버들이 노동자의 일상을 직접 체험해본 경험이 없다는, 그런 단순한 말이 아니다. "노동자 본인들도 그런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말하고 심지어 사색하는일을 쉽다고 느끼지 않는다. 수난의 일차적 효과는 생각으로하여금 꾸준히 도피를 시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유는 자신을 얽어매는 역경을 직시하지 않으려 한다." (SWR, 54, 강조는 필자) - P94

베유의 사유-동물은 욕망과 탐욕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구별된다. 사유-동물은 도망칠 수는 있으나 추구할 수 없다. 사유는 지극히 편협한 동물적 자질-고통의 자극에 반응하는 능력-로만 인간의 운동성을갖는다. 노동자는 기계보다 못한 존재이기도 하다. 노동자는 도구이거나 심지어 무용한 도구다. - P95

 베유는 당대의 여러 다른 지식인들보다 자동화 공정에 격렬하게 불쾌감을 표시했는데 그 이유는 베유의 시각에서 인간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기계의 부품에 불과해 보였기 때문이다. 로버트 스팔링 Robert Sparling⁵⁵에 따르면 자동화가 노동 혹은 소외된 노동에서의 해방이라는 시각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베유는 마르크스와 중대한 차이가 있다.

55 노동의 화두에 관해 베유와 마르크스의 관계에 대한 온전한 논의를 참조하려면 로버트 스팔링의 이론과 실천 노동의 품격에 대한 베유와 마르크스의 견해 Theory and Praxis: Simone Weil and Marks on the Dignity of Labor",
Review of Politics 74, no, 1 (2012년 1월호), 87-107쪽 참조 - P95

게다가 도구나 쓰레기라면 인간 행위주체의 인정이 필요하지 않다. 이 인정(베유는 이 문제를 <힘의 시, 《일리아드》>에서 더욱 상세히 묘사할것이다)이 없다면 노동자들은 자신을 사물로 보게 된다.
그렇다면 사유는 사물, 몸에 살게 된 고통받는 동물이다. 사물인 몸 역시 자상, 타박상, 화상, 열기, 피로, 소음으로 늘 고난을 받고 있다. - P96

베유는 논의를 중간에 끊고 다시 한번 수난의 불가해성을 경고한다. 여기서 베유는 공장노동의 상황에 국한하지않고 수난과 사유를 좀 더 보편적으로 논한다. - P96

 공장노동자들이 경험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서는 그 어떤 의미 있는 개혁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앎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 불행의 조건은 모두 은근히 인용되는 침묵의 영역을 창출하며, 이 침묵의 영역에서 불행한 개인은 섬처럼 외따로 격리된다. 섬에서 탈출하는사람은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SWR, 64) 테니까 - P98

<공장노동>이 초연한 거리감을 유지한다고 해서 이에세이에 고통을 함께 하려는 감정(동정)이 결여된 건 아니다.
오히려 감상주의를 배제한 동정을 담고 있다.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베유는 작업에서 공감(감정)이 아니라 사려 깊음(사유)을 요구하고 있다. 더욱이 수난의 사정 혹은 조건을 안다는 것을 수난자들을 안다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 P99

베유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이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나요?" 라는 물음이다. 그것은 수난자가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집단의 한 단위로서나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사회적 범주에 속하는 표본으로서 존재하는 게아니라, 우리와 다를 바 하나 없지만, 어느 날 천형이라는 특별한 낙인이 찍혀버린, 한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인식 말이다."⁵⁷

57 Weil, Waiting for God, in Simone Weil Reader, 64. - P100

 무엇을 느끼느냐, 혹은 어떤 감정이 드느냐는 물음이아니라 바로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살아있는 것에 인간성을 복원해줄 수 있다. 이 물음은 서사를 도출하며, 고통을 이야기함으로써 수난자가 사유와 행동을 통합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수난자는 베유가 <공장노동)에서언급한 정신을 창출하게 된다. 사유와 행동이 동기화될 때사람은 정신mind을 갖게 된다. - P100

《중력과 은총》도 <공장노동>과 다름없는 몰개성적 자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공장노동>에서 주장하듯 수난자에게 의지력을 발휘해 주의를 기울이라는 언명을 주창한다.
흔히 나오지 않지만, "나"라는 일인칭이 보편적이거나 대표적인 "나"로 기능한다는 사실은 개인적인 "나"가 끼어드는극소수의 순간들에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 P101

《중력과 은총》은 베유 신학의 역설을 조심스럽게 제련하는 사유 실험에서 수난의 본질과 신에 대한 베유의 사상을 시험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논리적인 강제와 순종하라는 간곡한 권고를 혼합한 구속적 의무들을 공표한다. 각각의 글과 나란히 한 세트를 이루는 단상들은 거의 항상 직설법으로 시작되며, 영의 자연법칙(예를 들어 중력 같은 것)에서도 종종 끌어오곤 한다. - P102

연역법

똑같은 수난이라도 동기가 저열할 때보다 고고할 때훨씬 견디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면... 군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거나 진작하기 위해 잔인성을 구실로 삼는이유가 된다. 도덕적 취약성과 관련해 잊어서는 안 될중요한 사실이다. 이것은 저열한 측에 힘을 보태주는 법칙의 구체적인 사례다. 중력은, 그 자체로, 그 힘의 상징이다. (GG, 46) - P103

. 베유의 글은, 형식적으로나 실체적으로나, 의지를 에워싸고 설득해 움직이게 만드는 논리와 의무의 비계를 거듭거듭 쌓고 지어 의지를 지탱하고 강화한다. 베유의 진화하는신학과 정치학에서 수난에 주목하고 수난을 체험하는 일, 특히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수난에 주목하고 실제로 겪는 일은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의지에 따라야 하며, 의지만으로는부족하다. - P104

 <힘의 시, 《일리아드》>에서 그랬듯 베유가 그 강력한 힘들을 직시하고자 자신을 단련할 때,
베유는 고통받는 타인을 거의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 상호작용의 물리학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이 무관심의 자연법칙은 <공장노동>에서 묘사한 도망치는 사유와 침묵의 영역과 상당히 비슷하게 보인다.  - P105

《일리아드》는 베유가 보기에 서구의 전통에서 가장위대한 시다. 그러나 서구는 이러한 전통을 대부분 잃어버렸다는 게 베유의 주장이다. - P105

 말 그대로, 진짜 시체가 에세이의 배경에 널려 있긴 하지만 베유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힘은 "죽이지 않는, 그러나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힘이다.(SWR, 165) 베유는 정복당한 전사, 사제, 노예와 병사들이두려움과 무력감에 금세 사물이 되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러나 사물로 존재하면 시간을 가로지르고 뛰어넘는다. - P106

승자의 자동적인 무관심은 전쟁에서 참담한 정치적결과를 낳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충동과 행동 사이에서 반추라는 아주 작은 간극을 끼워 넣을 능력이 있다. 반추의 여지가 없는 곳에는 정의나 신중한 배려가 끼어들 여유도 없다"(SWR, 173) - P107

"아마 인간은 모두, 출생이라는 행위 그 자체로, 폭력의 희생자가 될 운명에 처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이런 진실에 눈을 감을 수 있다."
(SWR, 173)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을 때, 우리가 고통스럽지않을 때, 우리가 치욕을 당하지 않고 있을 때는 어김없이 우리와 천형을 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우리는 수난자들을 알아볼 수 없고 그들 역시 우리를 알아볼수 없다. - P108

 본질적으로 베유는 기독교의 비극적 감수성을 복원하고자 한다. 에세이 말미에서 베유는이러한 비극의 상실을 슬퍼하며 무섭게 불타는 분노를 아껴두었다가 인간이 지닌 자기기만의 능력에 쏟아붓는다. 그리스인의 삶에는 자기를 기만하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 P109

자기망상의 문제는 베유의 글에서도 주된 관심사지만,
<힘의 시, 《일리아드》>에서는 수난을 묵살하고 회피하고자하는 유혹이 특히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이번에도 베유는 일단 비극이 현실의 시험이라는 논의에서 시작한다. 수난은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공간의 표식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현실을 부과한다.  - P110

 현실 파악 자체를 어려워하는 경우와 고통스러운 현실에 무방비로 노출되는것을 두려워하는 경우다. 두 경우 모두에서 현실 파악을 막거나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을 뭔가 비현실적인 것으로 대체해서 아픔을 덜어내는 기제는 상상력이다. 베유는 끊임없이 상상력을 의심하는데, 이는 미학적 창조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런 상상력의 일차적 목적이 우리를 방어막으로 에워싸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차단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 P111

 베유는 주관성을 꿈의 세계라고 부르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세계를 통제하고 세계의 주인노릇을 한다는 인간의 망상에 대한 질책이고, 부분적으로는자아로부터의 해방이다. 우리는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창조된 세계를 사랑해야 하고, 필연에 순종할 때에만 신이 창조한 세계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 P111

죽어간다는 것은 물리적 죽음은 물론이고 우리 각자의 자질과 이세계의 사물들에 대한 애착이 영적으로 죽음을 맞는 것을 포괄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공허를 채우려고 상상력이 나래를 펴지 않도록 계속해서 막아야 한다. 그 공허가 무엇이든 무조건 받아들인다면, 과연 어떤 운명의 장난이 우리가 우주를 사랑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우주는 충만하다고 확신하게 된다." (GG, 64) - P112

《중력과 은총》에서 상상력은 그 자체로는 실체가 없는 현실에 대체재를 만들어낸다. 상상력은 창조적 기관 organ이 아니라, 우리의 눈을 가려 두려움의 대상인 현실을, 그 아름다움과 공포 모두를 보지 못하게 하는 파괴적 기관이다. - P112

 무기력의 신학적 쓸모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유약하고 제한적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천형이 지나고 남는 게 있다면,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고개를 들어 부재하는 신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수난을 활용"하려면 수난의 변모와 초월을 끌어낼 수도 있다.  - P113

우리는 이성을 따라 비극을 선택할 수 있고(그리고 베유는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논리로 우리를 설득했다) 논리적으로 더 정의로운 세계를, 그리고 더 직접적인 신의 체험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야만 한다. - P114

다이앤 아버스

카메라를 위한 감정

사진 찍힌다는 것은,
조금,
상처가 되는 것 같아.


다이앤 아버스,
마빈 이스라엘 Marvin Israel에게 보낸 편지 - P298

스타일과 공감의 문제

(전략). 왼쪽 구석에는 아이들로 보이는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아이는 사진의 전경, 중앙에서 살짝 왼쪽이자 여러 등장인물이 만든 삼각형의 끝부분에 선명히 초점이 맞춰진 채, 다른 인물들이 없다면 텅 비어 있을 공원에 보호자도 없이 혼자 있는 느낌을 준다. - P299

이 사진은 다이앤 아버스가 찍은 <뉴욕 센트럴파크,
장난감 수류탄을 든 소년>(1962)으로, 가장 잘 알려진 아버스의 사진들 중 하나이다. 아버스의 사진과 글들이 최대 규모로 전시된 2003년 아버스 회고전 ‘폭로 Revelations‘의 박물관 도록에는 이 사진을 촬영했을 때의 밀착 인화지 contact sheet가 실려 있다. 이 아이를 찍은 11장의 사진들 중 오직 이 사진에만 뭔가 특출한 데가 있다. - P300

밀착 인화지는 아버스의 작업방식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이 촬영은 다른 많은 촬영에 비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는데도 아버스의 인내심, 낯선 인물과 신뢰를 쌓는 그녀의 능력이 분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밀착 인화지는 작업과정의 기록 이상을 보여준다. 이 사진을 연사로 보면 이 소년이 얼마나 특별하지 않았는지가 보인다. - P301

1972년 유작전 ‘다이앤 아버스‘와 2003년 회고전 ‘폭로‘ 사이에 두 권의 주요 사진집이 나왔음에도 이러한 분류가 계속 지배적이었다. 첫 번째사진집 《다이앤 아버스: 잡지 사진》 (1984) [이하 《잡지 사진》은 많은 잡지 중) 《하퍼스》와 《에스콰이어》, 《런던 선데이타임스》에 실린 사진과 에세이들을 모아 아버스의 상업적 커리어를 강조했다. - P302

 두 번째 사진집 《가족앨범》 (2003)은 아버스의 가족사진들을 모으고 아주 긴 시간동안 이루어졌던 가족 초상 촬영 작업에서 나온 밀착 인화지들을 복제함으로써 아버스가 가족 앨범과 스냅사진에 가졌던 지대한 관심에 집중했다.²

2 Diane Arbus, Family Album, ed. Anthony W. Lee and Hohn Putz (New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03). - P302

1967년의 ‘새로운 기록들 New Documents‘ 은아버스를 게리 위노그래드 Garry Winograd와 리 프리트랜더 LeeFriedlander와 함께 묶어 전시했는데, 이는 자르코우스키에 의하면 "삶을 개혁하는 게 아니라 아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 전시회는 5년 후에 열린 유작전 ‘다이앤 아버스‘로, 아버스를 일약 아이콘으로 만든 전시회였다. - P303

 자르코우스키는 아버스의 작품을 다큐멘터리 전통, 미국 개혁파와 (1960년대에 미국에 알려지게 된) 어거스트 샌더스August Sanders로 대표되는 유럽 분류파 양쪽 모두와 동일시하면서도 이에 들어맞지 않은 아버스의 작품 방식들도 지적했다. - P303

아버스가 다큐멘터리 전통의 사실주의적 충동을 이행했다는 것은 작품의 소재가 무엇이건 간에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르코우스키뿐만 아니라 최초의 아버스 비평가이자 지금까지도 가장 높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전 손택을 통해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아버스와 끈질기게 연관되었다. - P304

 손택은 아버스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사진으로 찍고 수집하면서도 관객들에게 어떤
"온정적 목적"도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견지에서 아버스는 공감이 결여되었고, 그 사진들은 "무정함을 시험하는 제멋대로의 테스트", 즉 관객들을 추함과 고통에 익숙하게 해서 단련시키는 테스트였다.⁵

5 மSusan Sontag, On Photography (New York: Picador, 1973), 40. - P305

아버스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불러일으켰던, 그리고 다큐멘터리 장르를 통해 주목했던 불편함은 아버스를 20세기 최고의 사진가 중 하나로 공인한 2003년 전시회 ‘폭로‘에거의 만장일치의 찬사가 쏟아지면서 일소되었다.  - P305

 우선 그 불편한 강렬함은 아버스의 천재성의 일부로 당연시되었고, 천재라는 꼬리표 자체가 그녀의 독창성이 불러일으킬 호기심에 대한 대답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1960년대부터 나오기 시작한 미국의 대중적 이미지들이 더욱 광범위하고 다양해지면서 아버스의 소재들을 더 친숙하게 만들어주어 그녀의 작품을 변형시켜버렸다. - P306

하지만 결국 아버스를 온순하게 만든 것은 아버스의프로젝트에 부드러움, 열린 태도, 온정이라는 말로도 묘사될 수 있는 공감적 모티브를 귀속시킨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온정적 목적"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아버스가 위치한 지점이 어디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비평적 문제였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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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인 콘크리트 보수
(연방 콘크리트 산업 협회, 1985)


손상 부분의 클로즈업:
a 구조 콘크리트 부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손상 부분의 발견과 노출
b 노출된 철근의 녹 제거.
보수할 표면 청소.
그리고 접착 능력을 저해하는 나머지 부분들의 제거
c이중층 부식 방지 코팅을 통한녹 제거를 마친 철근의 보존
d기존 콘크리트와 보수 모르타르 사이에 접착제 적용
e 보수 모르타르로 허물어진 부분을 다시 채움

확장된 부분:
f 프리씰(표면의 구멍 메우기), 그리고 필요한 경우,
속건성 회반죽 화합물(spackling compound),
초벽 바르기 또는 탄화 방지,
여러 층 코팅으로 색상 조절을 통해 표면 보충하기 - P8

대규모의 콘크리트 보수

콘크리트 표면의 악화된 정도가 표면 전체에서 특정비율(대략 20퍼센트 기준)을 넘으면, 기술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부분적인 복구에 대한 결정이 내려질 필요가 있다. 전체 외벽 표면의 대규모 복구의 흔한 예로는 바젤에 위치한 성(聖) 앤터니 (St. Anthony)교회(건축 설계: Karl Moser, 1925-1927)와도르나흐(Dornach)에 위치한 건축가 RudolfSteiner가 설계한 괴테아눔 (Goetheanum, 1924-1928)을 들 수 있다. - P8

기존의 콘크리트는 3cm에서 5cm 정도의 두께로 제거되었다. 철근들이 노출되었고, 녹이 제거되었다. 그리고 6cm 두께의 새로운 콘크리트 층이 성형되었다. 와이어 메시 접착앵커(그림 4b)와 24시간 동안의 물 뿌림(그림 4c)은 기존 콘크리트와의 내구성 있는 접합을만들어 냈다. 액체 콘크리트가 90 cm 깊이의 지층(stratum)에 타설되었다(그림 4e, 4f). - P8

4 a 건물 외표면(4-8cm), 도드락 다듬
b 에폭시 접착 앵커의 위치를 고침,
콘크리트의 샌드블라스트 마감과 강화,
새로운 와이어 메쉬 강화, 필요시에 추가적인 강화
c 콘크리트 표면에 물 분사(24시간)
d 고무 몰드 붙이기(높이 90 cm)
e 액체 콘크리트 채우기, 다지기,
7일 동안 물에 담근 상태로 두거나 물 뿌리기
f 채운 부분의 돌출부 제거하기, 성형 모르타르로 덧대기 - P9

소규모의 ‘조심성 있는 콘크리트 보수

앞서 열거된 건물 전면 노출 콘크리트 외관의 경우,
위에서 기술한 보수 절차와는 반대로, 손상된 특별한부위와 관련해서는 소규모 보수 과정이 선호되고있다. 이 소규모 보수 과정의 초기 사례로는 1991-1993년 사이에 시행된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Liederhalle 문화 센터의 부분 수리 작업을들 수 있겠다(사진 7, 9). - P9

Liederhalle의 문화와 의회 센터를 겸하는 이건물은 건축가 Rolf Gutbrod와 Adolf Abel의설계에 의해서 1955/1956에 걸쳐 건축되었다.
한편 당시 이 건물은 서로 다른 구조를 갖춘 3개의음악당을 포함하는 복합 용도의 건물로 설계되었다. - P9

 기본 아이디어는 전통적인 자연석 복원에 적용하는 보수 방식을 철근 콘크리트복원 방식에 변환시켜 대입해 보자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정사각형 구조의 벽면 공동(空洞)부분들을 제거하는 기법으로 손상을 입은 부분들은개조해 낼 수 있었다. 이는 석재 가공 커터 (cutter)를 이용하여 돌 조각 장식을 다듬어 내는 기법과유사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 P10

우선 청소 작업을 통해, 외피 면을 깨끗하게 다듬고,
이어 수리해야 될 부분의 윤곽을 검토해 나갔다.
그리고 건축적으로 정의가 내려진 표면 구조의 결과값에 따라 구획된 수평 및 수직선으로 표면을 단락짓는 작업을 진행했다. (중략). 향후 시공과 관련된 이유로 인해, 굳이 필요치 않은 보강 작업 (예, 수축 균열 방지 시공)은 이 과정에서 제외시켰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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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kmalgerechte Betoninstand-setzung - Verfahren, Methoden, Erfolgeund Misserfolge

역사적 건축물 보존을 위한 콘크리트 보수-적용, 방법, 성공과 실패


서술: Hartwig Schmidt, 건축가(p.10 참조) - P8

역사적 건축물을 보수하고자 하는 목적은 건물의내구성을 높이는 것 외에도, 건축가가 건축물에있어, 의도적이며 예술적 표현을 남겨 놓은 건축물의독창적인 노출 콘크리트 표면을 지키고자 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래의 건축물 표면을지키면서도 노출 콘크리트 전면 외관을 보수할 수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답변을 구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역사적보존을 위한 건축물 복구 작업의 성공 여부는 무수한요인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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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

비극적 감수성

나의 시련이 쓸모 있기에 사랑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나의 시련은 존재하기에 사랑해야 한다.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Gravity and Grace) - P44

불가사의한 매력

1951년과 1952년에 어느 프랑스 여성이 쓴 세 권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었다. 이 여성은 작가이자 교사이자 철학자이자 노동운동가이자 기독교 신비주의로 개종한 유대인이었다. - P45

 매카시는 훗날 베유의 에세이와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우한 경험을 통해 "이항대립적 사유" 에 종지부를 찍었다고말했다. 《폴리틱스》의 편집장이었던 드와이트 맥도널드는
"<힘의 시, 《일리아드》>는 잡지 역사상 최고의 기고문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³

3 Carol Brightman, Writing Dangerously: Mary McCarthy and HerWorld (New York: Harcourt, Brace, 1992). - P46

 엘리자베스 하드윅은 1970년대 초반 출간된 시몬 페트르망의 베유 전기를 평하면서,
하드윅이 당시 어울리던 친구들, 소위 "뉴욕 지식인 그룹"
과 《파르티잔 리뷰》의 편집진들에게 베유가 끼친 심오한 영향에 주목했다.⁴

4 Elizabeth Hardwock, Bartleby in Manhattan and Other Essays (New York: Random House, 1983). - P46

《하느님을 기다리며》와 《중력과 은총》은 각각 라 콜롬브와 플론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는데, 모두 성녀와 같은 베유의 면모를 우러러보았던 가톨릭의 친우들이 모아 편집했다. 이 저작들을 비롯해 갈리마르의 임프린트에서 시리즈로 출간된 《뿌리내림 Need for Roots》은 베유의 문학을 대리로 집행하고 있던 알베르 카뮈가 재량껏 편집권을행사한 결과를 보여준다. - P48

데이비드 맥렐런 David McLellan의 주장대로, 베유는 대중에게 정치적 급진주의자가 아니라 종교적 신비주의자로 소개되었지만, 실제로 이 두 가지 면모는 공존했다.¹⁰


10 베유전기로는 훌륭한 저서들이 다수 있으며 그녀의 작품에 대한 논문에도 개략적인 생애가 거의 항상 기술되곤 한다. 베유의 친구였던 시몬 페트르망Simonc Pétrement이 최초의 공인된 전기 Simone Weil: A Life(NewYork: Pantheon Books, 1976)를 출간했다. David McLellan의 Utopian Pes-simist: The Life and Thought of Simone Weil (New York: Simon & Schuster,
1990)가 아마 현재로서는 결정판일 것이다. Francine du Plessix Gray가펭귄의 라이브즈Lives 시리즈의 일환으로 쓴 짧은 전기 Simone Weil(New York: Penguin Group, 2001)는 가장 널리 유통되었다. Robert Cole의 평전Simone Weil: A Modern Pilgrimage (Woodstock, VT: Skylight Paths, 2001) 또한 언급할 가치가 있다. Sylvie Courtine-Denamy의 Three Women in DarkTimes, trans. G. M. Goshgarian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2000)는 그녀의 작품과 삶을 다른 두 인물 이디스 스타인 Edith Stein과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맥락에서 고찰한다. 기본적인 베유의 경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견이 없지만, 그녀의 저작이 사후에 수용된 역사를 고찰한 평자는 한 명도 없다. Sisela Bok은 베유의 유산에 대한 논문을 한 편썼으나 소수의 저명한 독자들을 다루었을 뿐이다. Sisela Bok, "No Oneto Receive It? Simone Weil‘s Unforeseen Legacy", Common Knowledge 12, no.2(Spring 2006), 252-260쪽. - P49

파리외곽의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베유는 자신의 입으로또 베유의 모든 전기 작가가 표현한 대로 "노예의 낙인"을 얻었고, 이는 수난을 바라보는 관점을 영원히 변화시키고 개종의 동기에 불을 붙였다. 허약한 육체와 끝없이 달고 살았던 편두통 덕분에 공장노동은 그녀에게 유달리 끔찍한 고통일 수밖에 없었고 수난의 주제에 대한 강박적 집착과 명료한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 - P50

나는 베유의 성자다운 태도와 마조히즘에 대해 불가지론적 관점을 취하면서, 이 장에서는 베유가 종교적·정치적전통 양면에 비극을 주입하는 수단으로서 수난을 몹시 강조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베유의 작업이 기독교와 좌파 정치운동 양측을 분개하게 만든 건, 수난 그 자체가 아니라 베유가 견지한 수난에 관한 비극적 관점이었다. - P51

베유의 가장특징적이며 충격적인 에세이인 <하느님의 사랑과 천형L‘amour de Dieu et le Malheur>은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과 천형 TheLove of God and Affliction>으로 번역되었으나 <하느님의 사랑과 비극 The Love of God and Tragedy>이라고 번역해도 좋았을 것이다.
비극에 대한 사랑이 베유의 독특한 신학과 정치성에 부합할뿐 아니라 세속적 근대성 비판을 훨씬 명료하게 해명해주기 때문이다. - P52

종교적 저작의 출간은 프랑스와 미국 양쪽에서 전후의 종교 부흥으로 한껏 자극된 독자들의 입맛을 충족시켰지만, 미국의 비평가들은 베유가 어째서인기를 얻었는지 모르겠다고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시몬 베유처럼 수난을 기꺼이 포용하는 작가가 어째서 대중적 독자의 인기를 얻는지 그 이유를, 특히나 그 시대의 종교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 P52

일부 역사가에 의하면 전후의 미국 문화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과 유사한 데가 있었다.¹²

12 David CastronovoBeyond the Gray Flannel Suit: Books from the1950s That Made American Culture (New York: Bloomsbury Academic, 2004)는 이런 식의 설명을 발전시킨다. 그의 요약을 살펴보면 The Man in the Gray Flannel Suit는 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감정적으로 회복하는 탄력성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평화 시에 왜 이렇게 두려움을 느끼는지 알수 없어 괴로워하는" 남자를 나타내는 패러다임이다.(11, 강조는 필자)Castronovo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는 걱정할 만한 신문물이 놀랍게 많이 등장한" 시기라는 대답을 제시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공산당 간첩과 원자폭탄으로 인한 종말을 꼽았다. 이는 우리를 익숙한 영역으로 되돌려 놓는다. - P53

 이런 생각의 한 가지 관점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내면을 지향하며 가장 인습적인 형태의 가정생활로 돌아갔다. 이러한 정신 상태를 엘레인 타일러 메이Elaine Tyler May는 공습대피소 정신상태 bomb shelter mentality¹³라는 그럴싸한 명칭으로 설명하고 있다.

13 Elaine Tyler May, Homeward Bound: American Families in the Cold WarEra (New York: Basic Books, 1988). - P53

미국인들은 제도화된 종교의 요새로 퇴각했고, 성전은 이상화된 50년대의 가정과 같은 미덕을 제시해주었다. 강력한 아버지(목사), 위로를 주는 어머니(반가이 맞아주는 신도들)는 위험한 외부인들을 막아주고 적대적이고 낯선 전후의 세계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었다. - P54

그런데 로버트 엘우드 Robert Ellwood의 가설대로 50년대의 종교적 부흥은 "고급문화"와 "하급문화" (아니 정확하게말하면 "중급문화"라고 해야겠다)의 형태로 양분되었고, 대중종교는 라인홀트 니부어, 폴 틸리히, 토머스 머튼, 그리고 손꼽지 않을 수 없는 시몬 베유와 같은 학문적 신학자와 비교해 훨씬 달콤한 사카린 범벅의 종교를 팔았다.  - P54

조직화된 종교가 위로와 위안을 주려 했음을 고려하면 베유의 신학은 당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개인적인 금욕뿐 아니라 수난을 고집하고, 인간의 개입에 한계가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천형을 포용하고, 정의라는 의무를 타협할 수 없는 비전으로 바라보며, 어떤 형태의 보상과 위로도거부하는 입장 모두가 총체적으로 종교적 사상의 주류로부터 베유를 배제했다. - P55

1951년 <타임>지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발췌된 피들러의 에세이는어째서 베유가 미국에서 호의적인 독자들을 찾을 수 없을지를 정확히 짚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난해한 교리이지만, 고뇌가 막연히 비- 미국적이라고 간주되는 현대 미국에서는 특히 생경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극복하거나 분석하고 넘어가야 하거나 심지어검열을 통해 추방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게다가 우리는 교회가 천형의 효용을 설교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 종교가 경쟁적인 시장에서 제공하는 건 위로이며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평화‘다."¹⁷

19 John Cogley, "Sister to All Sufferers", review of Waiting for God, by Si-mone Weil, New York Times, September 16, 1951, Sunday Book Review.
John Cogley는 Commonweal의 편집진이었다. - P56

베유의 매력을 설명할 수 없었던 비평가들은 그녀의전기로 눈을 돌렸는데, 이는 20세기의 여성 작가들에 관한한 전혀 놀랍지 않은 반응이다. 강렬한 감정으로 파격적인공감능력을 보여준 순간들을 지목하며, 비평가들은 베유의
"유행"이 일부 전문가 그룹을 벗어나 퍼져나간 이유를 그 공감능력과 삶의 이야기에서 찾으려 했다. - P57

게다가 베유가 수난과 맺는, 가끔 극단적인 형태를 띠기까지 하는 관계는 19세기 도덕철학의 유산으로서 미국의 감상적 전통에서 부활한 감상과 공감의 인습적 테두리를 너무나 훌쩍 벗어나 있어서, 20세기 중반에서 현재까지, 작금의 독자들에게는 철저히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 P57

독자가 베유를 처음 만나게 된 계기가 <타임> 지나 《뉴욕타임스 북리뷰》 같은 대량 판매 시장을 겨냥하는 매체든,
《코멘터리》나 《파르티잔 리뷰》 같은 소규모 잡지든, 《커먼월》이나 《가톨릭 워커》 같은 천주교의 간행물이건, 일단 처음에는 베유의 전기적 사실을 접할 테고, 그다음에는 문체,
세 번째로는 신학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베유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 요소다.  - P58

"다수의척도로 볼 때"라는 <타임>의 표현은 비평가의 회의주의와반감이 잡지가 표적으로 삼는 독자층을 대변한다는 사실을은근히 드러낸다. 소위 영적 비관주의의 "유행" 이나 "열광적 반응" 에 면역이 되어 있는 독자층을 상정하는 것이다.
그런 못생긴 여자가 이토록 설득력이 있다니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매력 없고 몸도 약한 여자가 이토록 강고한 권위를 각인하며 자기표현을 했다는 사실이 혼란과 짜증을 유발했다 - P59

《파르티잔 리뷰》의 아이작 로젠펠트Issac Rosenfeld는 베유의 ‘고집‘이신념의 소산일 뿐 아니라 일종의 추파라고 보았다. 그는 베유가 세례에 관해 페랭 신부와 나눈 서한을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구애를 받고 추종의 대상이 되기를 원했으며" "구애의 과정을 종료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고 썼다. - P60

그러나 베유의 매력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러한 맥락을 기억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이 책이 다루는 여성들이 받아들여진 수용의 조건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늘 이처럼 극적이고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여성 작가들이 수용되는 맥락과 조건도 잘 보여준다.  - P60

피들러는 심지어베유의 글쓰기가 "자기 자신을 거스르는 매력을 발산한다"
고까지 표현했으나, 그녀의 사적인 삶은 이를 결연히 부정한다.²³

23 Fiedler, introduction to Weil, Waiting for God, xvii. - P61

스물아홉 살의 수전 손택이 1963년 《뉴욕 리뷰 오브북스》의 창간호에 베유의 에세이 선집에 대한 비평을 기고했을 때, 냉전 초기의 종교적 부흥은 끝물에 다다라 있었다.
수난에 대한 베유의 헌신은 손택에게 지독한 괴벽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사상가로서 베유의 힘을 설명하기위해 스타일을 참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 P61

. 베유의 초기 평자들과 달리 손택은 베유가 인간삶의 중심에 수난을 두었다는 사실 자체를 숭모하지 않고 그진지함을 높이 평가했다. 후에 《해석에 반대한다》 (진지한 여성지식인으로서 손택 자신의 도래를 알린 획기적 저작)에 포함된이 베유에 관한 에세이는 손택이 이해한 전후의 감수성에서가장 중요한 차원 한 가지를 공표했다. - P62

요약하자면, 손택은 베유의 난해한 주제 목록에 붙어 있던 경고 딱지를 없애버리면서 난해한 주제 자체를 폐기해버린다. 베유의 매력을 유일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건 문체뿐이며, 그 문체는 매력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고 무례하며 성마르고 광신적이다. - P63

미국 비평가들이 결국 아무도 베유의 매력이 어디서나오는지 원천을 찾아내지 못했던 반면,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이자 지식인인 니콜라키아로몬테 Nicola Chiaromonte는 베유의 사상이 살아온 삶이나 아름다운 산문이 아니라어째서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아니 적어도 지식인의 마음을 열렬하게 사로잡는지 이해한다고 믿었다. - P63

(전략). 그리하여 이 세계에서 인간의 운명이란 무엇인지 어째서 운명이 인간의 욕망과 의지와 대담무쌍한 투지에도 끄떡없는지를 다루었다.²⁵ "키아로몬테는이 에세이가 "안락한 허구도, 불멸의 전망이라는 위안도 없이" 인간이 운명에 개입할 수 있는 한계를 대면한다고 이해했다." 비록 정확한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키아로몬테는베유의 비극적 감수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25 Nicola Chiaromonte, The Worm of Consciousness and Other Essays (NewYork: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6), 184-186쪽. - P64

 베유는 《중력과 은총》에서 "우리는 가상의 낙원보다 실재하는 지옥을 선호해야만 한다"고 썼다.²⁹ 당대의 공습대피소 혹은 요새 심리도 매한가지로, 맹목적 필연은 물론이고 우연과 예측불가능성이라는 위험성을 좀처럼 시인하려 들지 않았다. 

29 Simone Weil, Gravity and Grace (Lincoln: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7),
53; 앞으로는 GG로 쓰고 쪽수를 병기함. - P65

전후 시기의 문화적 풍광을 보면 국가, 정신과 몸을 담으려 했던 얇은 막이 새거나 터지는 은유를 사방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20세기 후반을 파악하려 씨름하던 최초의 학자들이 냉전 시대의 외교정책에서 "봉쇄"라는 어휘를 빌려와 예술과 대중문화를 묘사하는 빌미를 주었다. - P66

우리가 지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의 시민이실감한 역할의 위기를 고려한다면, 인간의 개입 능력에 대한베유의 비판을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한편으로 더 쉬워지기도 한다. - P66

(전략). 그러나 인간의 개입이 불가피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베유의 주장이 그런 낙인을 지운다는 추정을 해볼 수는 있다. 심지어 인간의 취약성이 지니는 범상함을 숙고하는 데서 - 싸늘한 위로일지 모르나 일말의 역설적 위안을 상상해볼 수도 있다. - P66

트라우마의 시대에 비극적으로 사유하기

양차 대전 이후로 인간의 한계와 지배력, 완벽가능성, 사회적 유토피아주의 미학적·지적·정치적 삶에 편재했다. 각종 "현실주의"를 비롯해 변화보다는 한계, 혁명보다는 수정을 강조하는 현실주의적 방향 전환은 1930년대 진보주의에대한 반동이자,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에서 전체주의의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던 유토피아적 기획 (한나 아렌트의 표현대로)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다. - P67

30 그리스 비극의 번안 작품들이 물밀 듯 쏟아져 나왔고 새로운 양식의 비극이라 할 만한 작품도 등장했다. 아서 밀러가 한 축을 맡았다면 사무엘 베케트가 다른 축을 맡아 썼다. 사무엘 모인 Samuel Moyn은 그리스인과 그리스 비극을 인권의 전통을 상상하는 방식으로 삼은 독일 고전주의자들사이의 대화에 주목한다. Moyn, "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Rights of 1948 in the History of Cosmopolitanism" (2011년 11월 29일 시카고 대학의 소여 세미나 "1948년경의 일환으로 했던 강의)을 참조할 것.
참고서적 목록을 보면 카뮈와 스타이너뿐 아니라 H. D. F. Kitto와 G.
Wilson Knight를 비롯해 1950년대와 60년대에 비극에 관해 글을 썼던 여러 고전주의자와 셰익스피어 학자들의 저작이 수록되어 있다. - P68

 인간의 완벽가능성을 전제로 한 근대성은 인간역할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근대세계는 종말을 맞을 운명인가? 근대 사회는 적국이나 자국의 시민들에게 야만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지 않고도 수난이 온전히 치유되거나 도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드라마로서의 비극은흘러간 시대가 지닌 우월한 도덕성을 반추하는 동시에 그도덕성의 원천이라는 함의가 있었다. ㅣ - P69

베유의 후기 저작은 비극에 관한 사색으로 간주될 수있으며 비극을 포용하기 위해 도덕적·영적으로 요구되는 바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실제로 베유는 극적 비극을 쓰려고시도하기도 했다. 《구원받은 베니스 Venice Saved》는 베유의 창작중에서 가장 야심만만한 작품으로,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한‘ 몇 편의 시도 수록되어 있다.  - P70

예컨대 카타르시스, 프로타고니스트의 자기분열, 도덕적으로 동등한 가치들의 경쟁과 같은 장르의 다른 면들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비극에 대해 글을 쓴 대다수 작가가 입을 모아 말하듯, 유대-기독교 전통은 맹목적 필연의 비합리성과 무의미에 호의적일수 없었다. - P72

이 비극,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절망하는 순간의 비극은 <하느님의 사랑과 천형>의 주제이다. 베유의 사후 이 에세이 전반부는 《하느님을 기다리며 Waiting for God》에 수록되었고, 후반부는 베유가 세상을 떠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발견되어 1962년 《신의 사랑에 관한 두서없는 생각들 Pensées sans ordre concernant lamour deDict》에 실려 출간되었다. - P74

극단적 고통, 슬픔, 상실, 가난이나 공포 대신 천형/비극은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삶을 움켜쥐고 뿌리를 뽑은 사건이 직접적, 간접적으로 모든 면에서, 즉 사회적·심리적·육체적 면으로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진정한 천형이라 할 수 없다."(SWR, 440-441) - P76

천형이 "기독교의 중심" (SWR, 471)이라고 주장하며베유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한 인류의 구원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번뇌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베유가 보기에 구원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야만 하는 천형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보상이다. - P76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 교회의 복음주의가 닿은 범위 밖의 사람들, 다른 종교를 믿는 신도들, 특히 유럽의 식민지 사람들이 모두 포함된다. 베유가 주목한 이단성은 구원이 아니라 ‘비극‘이 하느님의 신성한 사랑의 증거라는 주장에서 나온다. - P77

비극과 함께 살아가기

비극적 기독교는 베유 정치학을 다듬었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다. 성인이 된 후로 평생 좌파 작가이자 운동가로 살아간 베유는 개종이전 자신의 삶을 헌신했던 명분들을 버리지 않았지만, 당연히 이런 노력의 방향은 필연적으로 전쟁 중에 재조정되었다. - P78

 베유 본인도 마르크스의 유명한 경구를 "종교가 아니라 혁명이 대중의 아편"이라고 바꿔 썼다.
혁명은 맹목적 필연에서 해방된 세계를 약속하기 때문에 진통제의 역할을 한다. 

42Miles, Simone Weil: An Anthology, 16. - P79

근대성은 힘을 제어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은폐했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타자의 지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세계가 완벽해질 수 있다는 믿음은 여러 가지심각한 함의를 지닌 착오다. 이 믿음은 궁극의 비극적 결함인 휴브리스Hubris⁴³로 귀결되고, 수많은 기독교 현실주의자는 2차대전 후에 오만한 선포를 했다.

43 지나친 자신감, 오만에서 생겨나는 폭력. 그리스어 Hybris가 어원으로서,
당대에도 타자에게 굴욕감을 주면서 느끼는 만족감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쓴 말. (옮긴이) - P79

 맹목적 필연성의 신학에 다다라 극단적 무력감, 고뇌와 굴욕을인간이 은총을 누리는 순간이라고 주장하고 나서야, 베유는 비극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계획을 고안하는 정치적 영역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 P80

《뿌리내림》 첫머리에서 베유는 1940년 말 정의와 사회적 진보를 상징하게 된 조건인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했다. 그 대신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정치적 기관이 다른인간을 위해 짊어질 "당위"를 주장했다. 훗날 아렌트의 주장과 흡사하게 베유 역시, 권리란 언제나 그 권리를 인정할 삼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P81

이런 판타지는 온갖 종류의 자기망상, 과대망상,
그리고 압제를 낳는 휴브리스로만 유지된다. 당위에 구속된다는 것은 자신과 타인의 주권 부재를 인정하고 신학적 작업의 조건을 창출하여 고통과 수난을 가속하거나 불필요하게 가중하지 않는 것이다. - P81

 탈랄 아사드가 《세속의 형성》에서 논했듯
"수난이라는 의미에서, 고통은 세속적 주체가 보편적으로제거해야만 하는 인간의 조건으로 간주된다".⁴⁵ 베유에게 고통은 인간의 힘과 인간의 주권이라는 환상이 박살 나는 근거다. 고통은 야만적 물질성의 세계가, 그 세계의 ‘내가 아닌것‘이 사람에게 틈입하는 장소다.

45 Talal Asad, Formations of the Secular: Christianity, Islam, Modernity (PaloAlto,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67. - P82

 베유는 수난이란 지극히 보기 힘들고 (엘레인 스캐리 Elaine Scarry에게서 익히 들은 바대로) 소통할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스캐리에 따르면 "고통이 있는 자에게는 확신이 있다. 고통을 풍문으로 듣는 자에게는 의구심이 깃든다."⁴⁶

46 Elain Scarry, The Body in Pain: The Making and Unmaking of theWorl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4. - P83

베유의 사유가 의존하는 미학적·도덕적 근거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중략). 나는 이를 "선명성 clarity" 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선명성은베유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했고, "고통스러운 선명성"은 20세기에 비극적 감수성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베유의 목표에 봉사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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