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지소미아 (GSOMIA)가 끝나는지 아닌지 그 결과가 나오는 대한민국 외교 역사에 있어서 한 기준이 되는 달이다. 일본의 선제조치는 무익한 것으로 돌아갔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또 벌어질지는 모르는 가운데 WTO 소송과 끝없는 갈등의 길만이 그려져 있다. 일본이 이런 공격적인 수를 쓰는 이유는 국제법적으로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거나 법적으로 타당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자국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때문이다. 미묘한 것은 이때 역사성이라는 관념을 투사하고 해석하기 좋은 쪽은 오히려 국내정치라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민국가 (nation-state)의 대립구도에서 파생된 역사가 이제는 일본의 국내정치라는 틀에서 더 용이하게 해석되고 쓰인다. 현재 일본 내에서 여론조사를 하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의 결과가 나오곤 하는데, 이런 민족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태도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저 역사성이라는 소재가 참 적절히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역사를 타고 올라가 보면 국제정치가 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고 그 내용은 경제제재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미국과의 전쟁이라는 일본의 선제적인 선택으로 귀결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빨려들어가 파멸로 함께 끝난 암울한 역사는 여기서 시작된다. 일본은 그렇다면 동맹이던 다른 국가들에겐 의존할 수 없었을까. 이때 일본의 이익 (interest)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독일이 빠질 수 없다.
이 독일은 상당히 독특한 국가다. 현재 세계를 지배한다고도 볼 수 있는 국제적인 규범 UN은 독일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독일이 아닌 또 다른 국가가 전쟁을 일으켰을 수 있고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등장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가정은 역사서 앞에서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독일이 보편주의 국제법 체계와 강행규범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엄청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독일은 왜 그런 길로 빠진 것일까. 이 물음은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이 지난 100년에 있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소상히 알고 있다. 국가이익 (national interests)을 위해서이다. 이 국가이익이라는 국제경제학적 조어는 순간마다 그에 해당하는 가치가 달라지기에 실증적 사관과는 충돌하는 면도 없잖아 있지만 요즘에는 그것 또한 추량하는 방법론들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상당한 수의 방법과 기발한 분석틀로 일본의 국가이익을 알아냈고 각종 정치적 선택의 이유를 잘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관념 체계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독일의 경우이다. 왜 하필 유대인이지? 히틀러의 Mein Kampf에서 뜬금없이 유대인이 탄압과 차별이 대상이 된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다윈의 진화론이 사회에서 잘못 받아들여져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곧잘 오용되곤 한 개념은 사회진화론인데, 이 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어떤 민족이든 어떤 가치든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은, 히틀러는 거기에 유대인을 집어넣었다. 왜 유대인이었을까. 그리고 유대인인 이유를 알 수 있다면, 왜 그들을 학살해야 했을까. 학살해야만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학살이라는 말을 동아시아 전역으로 끌고 온다면 무참히 당한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의 사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반동적이었다든지 미쳐돌아가는 일본 대본영이나 지휘관들 개인의 문제 등 참화의 이유를 나름대로 규명할 수가 있다. 그것이 현대인의 시각에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라도 당대의 전쟁범죄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수준에선. 그러나 반항도 않았고 이미 공고히 점령된 강역 내에서 특정 민족만을 초점으로 해 학살한다는 것은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다. 교과서나 교양 유럽사 책들은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해서 피상적인 답만을 제공하는데 이번에 알았지만 그것은 한국만의 이야기였다.
이미 유럽 학계에서는 당연하게도 그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어 어떤 사람들은 그 책임을 군사국가화된 프로이센을 원형으로 보아 근본적인 책임을 거기에 묻기도 하고 그를 반박하는 연구도 상당수 존재한다. 분명 독일에서는 대다수의 시민이 히틀러와 그의 정당, 나아가 그의 국가와 체제를 지지했고 유대인에 배타적인 독일인들의 시각 또한 바탕이 되어 있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마티 출판사로부터 서평 이벤트로 받은 이 책이 답을 준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Clark의 전작 『몽유병자들』(2019)이 더 상세히 다루는 측면도 있지만, 이 책은 반대로 프로이센의 시작으로 내려가 그 동인을 탐구하고 수정주의적 논문 등을 근거로 편견을 없애나간다. 특히 군국주의, 군사적 토대가 처음부터 존재했었다는 식의 논리적 정합성이 낮은 주장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배척해나가는 솜씨가 일품이다. 문제라고 하나 짚어본다면, 한 주장과 그 근거를 자신이 소개하고 이어서 예고도 없이 그건 헛소리다 이러이러해서 해버리는데, 내가 그 전자에 놀라 오 역시 그랬었군 하자마자 바로 반대 주장에 납득돼 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전공 시대가 아닌 17-18c에서 더욱 그랬다. 프리드리히 대왕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해준 다음 문단은 꼭 인용해야 할 것이다.
감정적 동기를 강조하면 프리드리히의 이후 역사 기록에서 드러나는 특징과 충돌할지도 모른다. 기록들에서 그는 자신을 냉혹한 '국가 이성 (raison d’état)'의 초이성적 집행자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 변화의 배후에 작용하는 원동력에 대한 더 기본적인 그의 믿음과 완전히 일치한다. 프리드리히는 『브란덴부르크가의 역사』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사라는 것은 남자의 열정에 이끌리게 마련이다. 본디 유치한 이유들이 결국엔 대격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2019년 나온 작가의 전작은 프로이센 통사라기보다는 19c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를 중심으로 비추고 있으니 목적 측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거대한 역사가 테마인 책은 사실 그리 읽어본 경험이 많지는 않다. Ian Morris의 유머러스한 인류학 저서, 이 책에도 인용된 James C. Scott의 현대적인 감각의 장대한 길이의 역사 지적질, 그리고 국제정치학과 경제학 모두에 의미가 깊은 Charles Kindleburger의 책들이 먼저 떠오른다. 이 책의 의미는 물론 이런 명저에 이르지는 않는 것 같다. 경제적 관점이 빈약하고, 비스마르크를 평할 때에도 국제정치학적 사유가 충분하지 않다. 답답한 미괄식 태도와 절대 한 소제목 파트를 다 읽지 않는 한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도 단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하지만 이건 저자가 그리 해야 하는데 못한 것이 아니라, 서문에도 나와 있듯 자신은 딱딱한 언어로 자신이 제기한 질문을 풀어나가겠다고 전제하였는데 실제 그것들이 책을 읽으면 충분히 풀리는 것으로 봐선 큰 문제는 아니다.
독일은 '특수노선 (Sonderweg)'으로 나아갔고 이것이 12년간의 나치 독재로 절정에 올랐다. 프로이센은 소멸했지만, '프로이센'은 상징적이고 정치적인 징표로 되살아났다. […] 독일은 프로이센의 완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프로이센의 실패에서 나온 것이다. […] 그래서 나는 프로이센의 기록을 다루면서 선악을 나누거나 그 경중을 가리지 않으려 했다. '교훈'을 전하거나 현재 또는 미래 세대에게 도덕적·정치적 조언을 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내용을 좀 더 보충하겠지만 일단은 이런 식으로 적을 수밖에 없겠다. 읽으면서 모아둔 교정이 필요한 곳을 모았다. 번역 교열은 물론 있었겠지만 특히나 프로이센 역사서 같은 경우는 번역 시 저자가 국제정치학의 조어를 사용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걸 고려해서 적어줘야 하는데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영문판과 같이 읽으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해결했는데 이런 부분은 다음 쇄에서 수정이 필요하다. 몇 가지만 나열하겠다.
1장
1. The key lies partly in the prudence and ambition of the ruling dynasty. → 열쇠는 통치 왕조의 분별력과 야망에 있다.
여기서 prudence는 현실주의의 개념으로 비스마르크나 프로이센을 국제정치학적으로 읽어낼 때 잘 쓰이는 말로, 분별력이 아니라 '신중함', '신중성'으로 해석하는 게 맞다. Weber나 Morgenthau의 책 등을 참조하자.
2장
푸펜도르프는 저서 『만국법 요론』에서 인간의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자연법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주장했다. '통치권'이 확립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오직 폭력으로 안녕을 추구할 거라며 "어디나 위해를 가하는 자와 위해에 반발하는 자 사이의 싸움으로 요란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통치권에 대응하는 원본의 단어는 sovereignties인데, (국가)주권이 더욱 타당하다.
그리고 중간에 어딘지 모르겠는데, 예방전쟁을 예방 전쟁이라고 썼다가, war of precaution과 pre-emptive war를 헷갈리기도 하던데, 스타일은 하나로 통일해줬으면 좋겠고, 이 두 가지 개념도 전혀 다르다는 것을 고려해 번역해야 한다.
7장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침공은 사실상의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여긴 앞에서 외교 혁명이라는 국제정치학적 평가가 나왔지만, 저자가 프로이센이야말로 진짜 혁명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고 말하는 대목이므로, '사실상의 혁명이나 다름없었다'는 상당히 어색하다. 침공이야말로 진짜 혁명이었다는 식으로 번역해야 한다.
The long journey towards full membership of the European concert of powers that had begun with the reign of Peter the Great was now complete. → 표트르 대제의 즉위와 더불어 시작된, 유럽 권력 콘서트의 정회원 자격을 향한 긴 여정은 이때 마무리되었다.
콘서트가 나와서 일단 웃었다. Concert of Europe은 유럽의 세력균형을 기반으로 한 협조체제를 의미한다. 콘서트 정회원 같은 게 아니다. 맥락에서 혼자 따로 노는데 이게 이상하지 않았다니.
10장
그는 소통을 위한 매체를 개방하고 교육받은 대중을 공익을 위한 조화로운 대화의 장으로 불러들임으로써 그런 반대는 필요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도록 만들고 싶었다.
공익에 대응되는 말이 general good이던데, 이건 차라리 공동선에 가깝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
11장
힘의 균형은 프랑스에 불리한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balance of power인데, 이론 이름이다. 세력균형.
12장
p.538 메클렌부르크 공장 → 공작.
p.539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 맥락상 오스트리아 외교정책의 손실은 없고 단지 프로이센에 비해 뒤처진 것이므로 손실이라고 하면 안 됨. 원문은 undo the damage였나인데 늦은 출발, 뒤처진 것을 만회하기 위해 등으로 쓰는 게 자연스럽다.
p.540 internal disorder을 '국제적인 무질서'라고 번역했다.
particular interests → '특수한 관심'이라고 돼 있다. 관심이 아니라 계속 이익으로 해석한 만큼 이익으로 번역해야 함. 헤겔 때문에 현실주의와 '국가이성'이 민족주의의 힘을 얻은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이익이라고 보는 게 조금 더 적절하다. '특수한'보다는 '개별'로 해석하는 게 좋을 듯.
국가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보하는 유일무이한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 랑케가 정말 이런 말을 했는가?
원문은 In essays published in 1833 and 1836, Ranke declared that the state was a ‘moral good’, and an ‘idea of God’, an organic being with its ‘own original life’, which ‘penetrates its entire environment, identical only with itself’. 인데, 어디에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보한다는 말이 있는지? 이런 사관은 랑케에 반대되는 헤겔-막스의 역사관이 아닌가 한다.
13장
p.612 물음로
p.617 사회적 보주의자들
14장
p.665 단일 정치 제제
15장
p.703 보잘것없어 보였다. → 맥락상 말이 안 된다. 해석상으로도 외교정책이 그나마 다른 정책보다 나았다고 봐야 맞다.
p.731 National Liberals는 민족주의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국민자유주의자'이다.
p.735 분쟁이 휘말릴 → 분쟁에
p.736 베네디티 → 베네데티
16장
p.764 무서운 국내 요인 → 위협적인 국내 요인
오타나 해석이 이상하거나 혹은 학술용어상 구분이 필요한 몇몇 경우를 예시해보았는데, 실은 굉장히 해석이 깔끔해서 읽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헤겔 부분은 역자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듯 그 내용을 읽고 헤겔의 역사관을 역사는 진보한다 이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독자는 없을 듯하다. 헤겔철학은 청년헤겔학파 등 영향력도 그렇고 이 책의 주제인 민족주의의 역사성이라는 개념과도 맞닿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정치적 현실주의를 결합하게끔 만든 장본인이라 그 이해가 특별히 중요한데 이렇게밖에 번역되어 있지 않은 건 다소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다른 모든 부분은 유려하게 흘러가는 편이다.
서평단으로서 오늘까지 적어야 하는 터라 Greenberg 책이나 박상섭 교수, Mearsheimer의 저작과 관련해서 적용해보고 싶은 관점을 덮어둔 채 뒤죽박죽인 글로 마치려 한다. 한국인의 관념과 거리가 있는 프로이센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 통사라서 편견을 소개해주면 거기에 홀라당 넘어가고 바로 그걸 반박해주는 것에 충격에 빠지는 것을 반복하게 되는 구성 측면에서 재미난 책이다. 이런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면 다만 내용을 완벽히 꿰고 있어야 하고 중간 소제목들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 된다는 전제는 필요하다. 아날학파도 아니고 국내정치와 문화사 관점에서 프로이센을 까다롭게 읽어냈는데, 국제레짐 속에서, 혹은 경제사적 접근방법으로 프로이센을 들여다 보는 책도 출간됐으면 한다.
사실 프로이센과 바로 위에 붙은 덴마크는 왕 이름이 다 똑같아서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하기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저자도 지적했듯 19c 중반 급박한 시기의 덴마크에서 등장하는 사람 이름은 대부분 크리스티안 아니면 프레데리크인데, 일견 재밌기도 하지만 그만큼 읽기 힘들다는 말도 된다. 프로이센은 한 수 더 떠서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끝까지 프리드리히랑 빌헬름으로 점철돼 있다. 그중 프리드리히 빌헬름으로 이름이 합쳐진 왕도 상당수 존재하며, 칭호가 바뀌면서 프리드리히 3세가 어느 순간 1세로 되어 있기도 하다. 그에 반해 조선의 시호 제도는 얼마나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한가. 우스갯소리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프로이센 역사는 여러모로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먼 유럽 북해에 붙어 있던 작은 국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차고 넘침을 『강철왕국 프로이센』(2020)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9c 중후반부터는 자료 측면에서나 논리나 다소 힘이 달리는 듯한 감이 있지만, 그 부분은 전작에서 다루기도 해서 과감히 분량이 줄어든 듯하다. 19c에 모두가 놀랄 급성장을 해낸 프로이센이 20c에 독일로서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단순 설명에 그치지 않고 지정학적, 정치적 의미를 찾으러 끝까지 파고드는 책이니 교과서적 내용에서 벗어나 심도있는 이해를 목표로 한다면 상당히 도움이 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