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들은 흔히, 회사를 옮긴 지인들에게 안부를 물으며 "회사 적응은 잘 하고 있어?"라고 묻는다. 여기서 회사는 단순히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회사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하는 내용이고 어떻게 보면 사람이야 말로 이 질문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회사 일이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 회사에서 하는 일이나 저 회사에서 하는 일이나 매한가지인 경우가 많다. 간혹, 사용하는 회사 내부 시스템이 달라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금방 적응이 가능하다. 정작 문제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은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가끔은 과연 사람이 적응 가능한 대상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만큼 어렵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고 그 변수로 인해 여러 갈등과 다툼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기고 다투기도 하지만, 정작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은 거리를 두고 외면하라고 한다. 상종하지 않는 것이 산책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문제를 피하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관계를 오히려 끊는 것이다. <담론>에 따르면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애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그 문제는 평생 그 사람을 따라다니게 된다.  

 

중요한 것은 세상은 수많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가장 기본 단위는 바로 나와 너의 관계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땅에 평화가 오기를 바란다면 먼저 나의 관계에 평화가 임해야 마땅하다.  

 

신영복 선생은 <담론>에서 문제 해결의 출발점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공감'이다. 공감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이 생각만큼 독단적이고 완고한 생각이 없다. 이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관계에서의 화쟁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공감은 단순히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넘어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상대방과 나를 이어주는 하나의 끈이 된다. 이 끈을 놓치지 않고 함께 끌어갈 때, 관계 가운데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그렇지만, '공감'은 한순간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감'을 위해서는 먼저 '나'를 알아야 하고 '세계'를 알아야 한다. 흔히 다른 사람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주고 품어주는 사람을 대인배라고 하는데 대인배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물의 이치,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 상대방이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 나의 상황 등 여러 요소들로 이루어진 큰 그림 안에서 상대방을 바라볼 때 그런 아량이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대인배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한 법이다.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누구이고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부모님을 이해해야 한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친한 친구들까지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그 모든 관계 속에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론>에서는 '성찰'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시각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기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를 깨닫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정체성은 외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나아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사람과도 관계를 맺고 있지만 환경과도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인간은 없다. 결국,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반드시 외부에 대한 이해로 향하게 되어 있다. 

 

신영복 선생은  20여 년 동안 감옥에서 이러한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재소자들과 이야기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는 한 사람의 인생사를 경청하는 것을 최고의 '독서'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몇 번에 나누어서라도 그 사람의 인생사를 끝까지 듣는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을 이해한 것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으로 연결이 된다. <담론>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바로 세상의 원리와 이치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원리는 바로 자신을 이해하고 돌아보는 거울이었다. 그 원리에 비추어 자신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 사회는 진정한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학교를 마치면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개울가에 가기도 하고 뒷산에 가기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많은 추억을 쌓았다. 당연히 시간이 지나도 그 관계는 지속되었다. 그래서 아버지 시대에만 해도 몇십 년 지기 친구가 흔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아버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끈끈한 관계는 사라진지 오래다. 아이들은 학군을 따라 이사를 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학교를 마치면 학교 앞에는 아이들을 태워가려는 학원버스와 부모들의 차가 길게 줄지어져 있다. 서로를 알아갈 시간도, 공감할 시간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 가운데 나를 정의해야 하는데 그 '관계'가 너무나도 빈약한 현대 사회가 되어 버렸다. 피상적인 관계와 만남만이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다. <담론>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지하철에서 앞에 할아버지가 서 계서도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 스쳐 지나가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나의 친할아버지였다면, 혹은 이웃집 친구네 할아버지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통신과 인터넷의 발달로 서울에서 미국에 있는 이들과 손쉽게 통화할 수 있는 시대인데 역설적이게도 의미 있는 관계는 더 좁아진 세상이다. 관계의 거울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이해해야 하는데, 이런 현대 사회에서는 나를 성찰하기가 어렵다.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자신의 이윤만을 추구하려고 한다. 심지어 연구 결과까지 돈으로 조작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가고 유아에게 유해한 온갖 상품을 소비하게 만든다.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위한 상품은 결코 그렇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폭력이며 갈등인 것이다. 그리고 화해의 시작은 바로 관계인 것이다. 
  
정상적인 관계는 서로 깨닫게 하고 서로 키워주는 관계이다. 즉, 나 혼자만의 성장은 없다. 같이 성장하는 것이다. 겸손과 진실, 배려로 사람을 만나고 대화할 때 그 가운데 공감을 일으키고 진정한 관계가 성립된다. 나아가, 그 시대와 시회를 포용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곧 내 안의 평화이자 세상의 평화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감 2017-12-20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

데굴데굴 2017-12-20 14:32   좋아요 1 | URL
저도 책을 읽으며 여러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