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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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만으로도 짜릿해지는 그것, 시간여행…. 항상 꿈꾸고 바라는 여행이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전제 조건이 항상 따라 붙는 비과학적 공상. 그래서 우리는 시간여행이란 소재를 다룬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인 경험으로 짜릿함을 즐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대부분이 꽤 재미있습니다. 매번 기본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는 소재, 시간여행. 그리고 매번 기본이상의 소설을 발표하는 작가, 스티븐 킹.

 

 

    하지만 시간여행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과 기존의 세상을 잘 융합한 소설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작가 입장에선 논리적 비약이 없는 시간여행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어려운 작업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볼 때 주로 시간여행이 보인 논리적 오류를 찾는데 주력합니다. 이렇게 틀린 그림 찾기 게임을 하듯 매의 눈을 뜨고서 시간여행 소설을 읽는 것은 다른 소설에선 경험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재미라고 봅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 『11/22/63』은 시간여행을 다룬 소설입니다. 과거 1958년의 어느 날로 돌아갈 수 있는 비밀스런 통로를 발견하고, 그 통로를 이용해 현재의 역사를 바로잡으려 한다는 것이 소설의 큰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현재로 돌아왔다가 다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가면, 일시적으로 재구성한 과거의 세상이 다시 리셋된다는 점,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왔을 때 이전에 바뀌었던 모든 것까지 리셋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원상복구가 가능하단 것.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자, 다른 시간여행 이야기와 차별화를 둔 전략적 요소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이야기는 더욱 쫄깃한 긴장감과 속도감을 얻고서 빠른 진행을 보입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소설 자체가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실제로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느낌을 제대로 잘 설명하지 못해서 어지럽게 보일 뿐이지, 소설은 이해하기 쉬운 구성과 빠른 전개로 흥미로운 시간여행을 경험하게 합니다.

 

 

    미래의 어떤 정보를 현재로 가져올 시간여행이라면 굉장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다시 돌아올 시간여행이라면 시간여행자가 갖는 이득이 어떤 것이 있을까, 조금 의아하긴 합니다.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은 1963년 11월 22일에 있었던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막으려 합니다. 현재의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려 한다는 기대를 품고. 그런데 그 결과 만들어진 세상이란 것도 다시 현재로 돌아온 후 확인해봐야 좋은지 어떤지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알 수 없는 미지의 세상, 예측 불가능한 세상, 미스터리한 세상이라는 소설의 분위기 전체를 만들어 내는데 일조합니다. 아무튼 시간여행은 일종의 도박이라는 것. 하지만 다시 리셋이 가능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

 

 

    자유자제로 시간 조종이 가능한 시간여행에도 치명적인 하나의 부작용이 있습니다. 정해져 있는 자신의 시간, 즉 수명이 반복된 시간여행을 통해 사라져버린다는 것. 계속해서 리셋 할 수 있더라도 양쪽 모든 시간대에 반납한 자신의 수명은 리셋되지 않는다는 것. 암살 저지를 위해 5년의 시간을 보냈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과거에서 보낸 시간만큼의 수명을 보상받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시간여행이 갖는 묘한 함정이라 봅니다. 그래서 앞으로 2권에서 이어질 이야기를 미리 예상해보자면 아마도…….

 

 

    나비효과. 같은 이름의 영화도 있지만, 보통 시간여행에서 말하는 나비효과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중국의 나비가 태풍을 일으킨다는 말은 있지만, 가뭄을 해소시킬 단비를 내려줬다는 말이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암살을 저지하기 위해 기다리는 5년의 시간, 이 시간이 주인공으로 하여금 과거에 충분히 물들게 합니다. 과거의 느낌들, 사소한 일상과 공기의 향, 과거의 사물과 사람들이 만들어 낸 풍경과 소리에 서서히 감각이 기울고 녹아드는 느낌. 이런 감각에 조금씩 빠져들다간 시간여행을 통해 거국적인 나비효과를 일으키겠다는 단호한 결심과 의지는커녕,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구분하지 못한 주인공이 과거에 그대로 정착해버리지나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이야기가 그런 전개를 보이더라도 저는 좋습니다. 미리 예상할 수 있다고 해서 흥을 깨트리진 않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욱 긴장감이 고조시킬 것으로 보입니다. 믿고 읽는 스티븐 킹의 소설. 그러나 일단은 이 시간대가 빠르게 흘러가야 합니다. 제 짐작으론 시간여행이 가능한 이 터널의 정체가 나중에 밝혀지길…….

 

 




 


    나는 그의 리포트 꼭대기에 빨간색으로 큼지막하게 A라고 적었다. 그 글자를 잠깐 쳐다보고 빨간색으로 큼지막하게 +를 덧붙였다. 훌륭한 작품이었고, 그의 아픔이 독자인 나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A+에 걸맞는 글이라면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 심금을 울려야 하는 것 아닐까? (13쪽)

 

 

    “옷이라는 게 그렇잖습니까.”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제는 얼굴이 창백하고 음울해 보였다. 데리의 다른 주민들처럼 바뀌었다고 할까. “피에로 옷을 입고 가짜 코를 달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법이죠.” (198쪽)

 

 

    아, 스텝 좀 꼬이면 어때. 이렇게 아름다운걸. 나는 7번 도로를 달려 켄두스케그 서안에 떡하니 자리 잡은 데리를 접한 이래 처음으로 행복해졌다. 나는 그 기분을 간직하고 싶어서 발걸음을 옮기며 오랜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돌아보지 마, 절대 돌아보지 마. 유난히 좋았던 일(혹은 유난히 나빴던 일)을 겪은 뒤에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인간은 돌아보게 되어 있다. 목에 회전이 되는 관절이 달린 이유가 그 때문이다. (218쪽)

 

 

    ‘들어가서 구경해 보자.’ 내 머릿속에서 이런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이런저런 생각 말고 들어가서 구경해보자, 제이크. 들어가 봐. 여기서 시간은 아무 의미 없어. 여기서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존재야. 너도 들어가 보고 싶잖아. 너도 궁금하잖아. 어쩌면 또 다른 토끼 굴일지 몰라. 또 다른 통로일지 몰라.’ (267쪽)

 

 

    천사. 그 소리를 들은 게 이번이 두 번째였다. 나는 그날 밤 잠이 오길 기다리면서, 다음날 겨울로 향해가는 차갑고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인 채 카누를 타고 일요일의 고요한 호수 위를 떠다니면서 마음속으로 곰곰이 그 단어를 생각해 보았다.

수호천사. (407쪽)

 

 

    ‘내가 그렇잖아.’ 나는 불을 끄며 생각했다. ‘완전히 버렸잖아.’ 그런데 잠시 후 귀뚜라미들이 들려주는 자장가를 듣는 순간, 이번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젖가슴만 좋았던 게 아니야. 그녀의 무게도 좋았어. 내 팔에 실리던 그녀의 무게도.’

알고 보니 나는 연애라는 습관을 버린 게 아니었다. (5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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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2
도진기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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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추리소설에 대한 선입견, 편견, 벽견, 색안경… 아무튼 좋지 않은 인상이 박혀 있는 한 명의 독자로서 국내 추리작가들의 단편 추리소설을 읽고 책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물론 좋지 않았던 기억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상처가 있다면 벌써 다 아물어 딱지가 검게 올라앉아 있을 시간이 지나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도 ‘한국’이라는 단어와 ‘추리’라는 단어가 함께 있는 글을 보면 머리보다 먼저 몸이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다. 상처가 아물려고 그러나 봅니다. 그래서 이제는 딱지를 떼어내도 되겠다 싶어서 가려운 곳을 계속 긁다보니, 헉! 또 다시 상처에서 피가…….

 

 

    많이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무언가를 미리 안다고 단정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는 단계, 지금의 저는 정확히 그 단계에 있는 듯합니다. 이유 없이 투정부리고, 이게 아니잖아 라며 집어 던지고, 제 화를 이기지 못해 울고불고, 정작 몸이 아프다기 보단 그저 서러운 마음에 꺼억꺼억 소리나 지르고, 그러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화를 내며 울기 시작했나 이유마저 기억나지 않음에 온몸엔 그저 짜증만이 그렁그렁.

 

 

    이 모든 반응은 한국 추리소설을 아끼고 사랑하는 데서 온 마음의 병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는 이번이 네 번째. 단편집의 장점이라면 무엇보다 짧은 분량의 글로 강한 여운의 번득임을 경험하게 하고, 다양한 작가의 글을 동시에 비교해 볼 수 있으며,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새로운 작가를 소개받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단편집은 굉장히 만족스럽습니다. 그래서 단편집에 이름을 올린 작가의 다른 장편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도진기 작가의 「악마의 증명」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이용해 법으로부터 보호받으려는 악마의 범죄를 법을 통해 증명하고 처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분리 가능한 얼굴을 붙였다가 떼어냈다 하는 단편집의 표지 디자인과 비슷한 느낌의 이야기가 적절한 반전을 통해 통쾌한 전개로 이어집니다.

 

 

    가끔 책 이야기를 하다 말고 이야기의 끝을 열린 결말로 남겨놓은 채 하던 이야기를 급히 끝내곤 했는데, 그런 제 모습을 깊이 반성합니다. 단지 스스로가 재미있어서 그랬던 것이고 다른 악의는 없었습니다. 다신 그러지 않겠습니다. 한이 작가의 「유실물」, 누가 이 이야기의 결말 좀 알려주세요. 이게 도대체 뭡니까. 너무 궁금하잖아요!

 

 

    살짝 기울어진 일상의 미스터리가 생활형 탐정의 시선을 통해 삐딱하게 그려집니다. 굳이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가장 긴 문장으로 요약해야할 정도의 많은 사건들이 단편 분량의 글에서 연이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이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는 과정이 좋습니다. 또한 각각의 짧은 이야기에도 탐정의 애환을 소박하게 담아 놓으려한 앙증맞고도 도도한 느낌이 일품입니다. 이나경 작가의 「오늘의 탐정」은 오늘의 단편.

 

 

    윤해환 작가의 「협찬은 아무나 받나」는 아무나 받을 수 없는 협찬을 둘러싼 질투와 암투, 걸그룹 맴버들 간의 분쟁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태가 발생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소설은 대단한 예지력을 보입니다. 물론 우리 명탐정 설록수라면 세상에 일어날 모든 일을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미리 알고 있었을 테니 문제 없습니다. 아무튼 하루 일찍 보는 신문이라 생각하고, 설록수의 활약을 기록했다던 그 싸이월드의 홈페이지를 한번 방문해보고 싶은데 그 주소가 너무 궁금합니다. 아아! 얼마나 궁금한가 하면, 궁금증 때문에 귓가에서 어떤 소리가 계속해서 들릴 정도인데 그 소리는 우쿨렐레의 딩가딩가.






 


    그건 형사소송법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두 사람 중 한 명이 범행을 한 것은 사실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확실한 입증이 안 된 상태에서는 두 사람 다 처벌할 수 없습니다. 절반의 혐의가 있지만 나머지 절반만큼은 무고한 것이니까요. 두 사람 다를 처벌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법률상 어쩔 수 없습니다. 실제와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법률의 관점에서 본 진실입니다. (악마의 증명, 33쪽)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저장해 두었던 휴대전화 알람이 주머니에서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유실물, 200쪽)

 

 

    근데 말이야. 내가 아무리 탐정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지만 허울이 좋아 탐정이지, 하는 일을 보면 심부름꾼하고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말씀이야. 죄 시답잖은 일만 들어온다니까. 우유 급식비나 연애편지의 출처를 찾아 달라는 경우는 이주 양반에 속하고, 가끔은 떼인 돈 받아 달라는 일도 있더라고. 그래, 떼인 돈 말이야. 아무리 의뢰인이 왕이라지만 도대체가 탐정을 뭘로 보는 건지. (오늘의 탐정, 236쪽)

 

 

    때문에 나는 오랜 시간 고민 끝에 한 가지 작정을 했다. 내 취업을 위해서라도 설록수를 세상에 알리겠다! 우리나라에 탐정이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만천하에 고해 탐정 제도를 부활시키는 운동을 촉발시켜…… 지금 내가 뭐라는 거지? (협찬은 아무나 하나,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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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의 천국 우먼스 머더 클럽
제임스 패터슨.맥신 패트로 지음, 이영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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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순전히 재미로 장편 추리소설을 집필해 보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장난쳤던 적이 있습니다. 탐정과 조수, 형사와 경감, 기자, 증인과 용의자, 범인들까지 모두 미소녀들로 버글버글한 추리소설. 배트맨의 고담시티를 능가하는 각종 사건사고들로 범죄가 끊이질 않는 이야기. 이제껏 본적이 없었던 독특한 등장인물로 만들어진 하렘 추리소설.

 

 

    제임스 패터슨맥신 패트로, 공저 스릴러 소설 『제7의 천국』의 주요인물 4명을 보고 있으니 하렘 추리소설을 써보겠다던 그때 그 시절의 장난이 생각납니다. 우먼스 머더 클럽이라고 하여, 샌프란시스코 경찰국 강력반 경사 린지, 특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의욕 넘치는 취재활동을 보이는 기자 신디, 사려 깊고 따뜻한 성격의 경찰국 수석 검시관 클레어, 말이 빠르고 매사에 열정적인 지방검사보 유키, 이 4명의 여성이 샌프란시스코 강력계 범죄를 해결하는 주요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소설 『제7의 천국』은 이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일곱 번째 시리즈입니다.

 

 

    소설의 이야기는 부잣집 도련님의 실종과 살해 의혹, 용의자에 대한 재판 과정을 보입니다. 그리고 중산층 동네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방화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병행해서 보입니다. 전반적으로 쉬운 구성이고, 간결한 문단과 담백한 문장을 통해 대단한 속도감을 보입니다. 절제된 문장들로 대단히 빠른 장면 전환을 보이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스릴러 할 때 ‘스’와 스피드 할 때 ‘스’는 같은 ‘스’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대단한 속도감은 글로 이루어진 소설을 마치 범죄 드라마의 한 장면을 영상으로 보고 있단 착각에 빠지도록 합니다. 현재 장면에 대한 간략한 설명에 이어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나오고, 주인공이 속으로 생각하는 내용을 짧은 독백으로 처리, 그리고 다시 다음 장면으로 전환. 다른 일 때문에 일시정지 해두었다가 마지막으로 읽었던 영상부터 플레이 버튼을 눌러 다시 보기 시작해도 무관한 소설. 소설 속 세상에 들어가기가 쉽고, 빠져 나오는 것 역시 쉬운, 범죄 스릴러 소설.

 

 

    이야기가 조금 심심해지려 하면 연쇄적으로 발생한 화려한 범죄장면들을 통해 두 눈을 즐겁게 합니다. 거대한 불길로 인해 활활 타오르다 사라지는 집들의 환영이 두 눈에 그대로 들어와 재가 되어 사라지고, 열기로 인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식어서 하얗게 될 때면 다시 다음 집에 불을 지펴 이야기를 태워갑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굉장히 추운 어느 야외 촬영장, 125개의 씬으로 이루어진 드라마 대본집을 읽으며 다음 촬영준비를 하다가 옆에 피워둔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빠르게 다 외운 대본을 뜯어 내어 불쏘시개로 사용한 느낌이기도 합니다. 그런 느낌이 뭐냐구요? 

 

 

 



 

    “대단하네요. 이게 뭡니까? 완전범죄예요?” (71쪽)

 

 

    어제 아침만 해도 그녀는 남편에게 입을 맞추고, 머리를 빗고, 아침식사를 만들고, 친구와 웃으며 통화했겠지. 그날 밤, 32년을 함께 산 그녀와 남편은 결박당한 채 불 속에서 죽었다. 아마도 그 몇 시간 전부터 멀론 부부는 자신들이 죽을 것임을 알았으리라. 그것이 바로 심적 공포다. 살인범들은 그 부부가 끔찍한 죽음을 맞기 전에 공포를 느끼기를 원했던 것이다.

    누가 이 잔혹한 살인을 저질렀을까? 도대체 왜? (88쪽)

 

 

    호크가 말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 최고라니까.”

    피지가 말했다.

    “속이 다 시원하지.” (282쪽)

 

 

    “이 아이들은 과시하기 좋아하는 똑똑한 녀석들이죠. Quidquid latine dictum sit, altum videtur.”

    “무슨 뜻이에요?”

    나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나만 빼고 다 라틴어를 아는 거야?

    조는 내게 씩 웃어 보였다.

    “‘라틴어로 쓰면 다 심오해 보인다.’라는 뜻이에요.”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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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1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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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죽박죽 얽혀 내동댕이쳐진 이 모든 운명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들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자, 그는 모든 암흑을 꿰뚫어 보는 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우리는 그를 가리켜 신이라 부릅니다.

 

 

    프랑스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 빅토르 위고의 세기의 걸작 『레 미제라블』은 역사와 사회, 철학과 종교, 그리고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인간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장 발장’으로 흔히 알려진 바로 그 이야기. 빵 한 조각. 40수의 동전 하나. 은촛대 두 개. 19년의 형벌. 기구한 운명을 기중기처럼 짊어지고 살아야만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 그 이야기의 주인공. 당신이 바로 그 사람, 장 발장이란 말이오?

 

 

    빅토르 위고의 글에선 젊음, 열정, 투쟁, 아픔과 같이 뜨거운 것이 느껴집니다. 날개만 보이지 않을 뿐 천사나 다름없는 성자 미리엘 주교에게선 따뜻한 빛이, 어린 딸 코제트를 위해 희생하다 병들고 지치고 미쳐가는 팡틴에게선 시련의 고통이, 법의 집행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않는 자베르에게선 강인한 신념과 날카로운 시선이, 스스로가 진실을 향해 내딛는 믿음과 다른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믿음 사이에서 방황하는 장발장에게선 내면의 갈등이, 이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읽는 이에게 전해집니다. 소설에서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인물, 인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과 설정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우연히 발생한 특정 사건들이, 훗날 그들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고 개인의 운명 전체를 결정짓게 한다는 소설의 설정, 어찌 보면 이것은 굉장히 전형적이라 할 수 있지만, 이만큼 기본을 잘 따른 소설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설은 굉장히 쉽습니다. 그리고 빠른 진행을 보입니다. 기본 중에서도 기본. 사회와 인간 사이의 가장 근원적이라 할 수 있는 철학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뱉어내고 있으면서 이야기를 쉽게 이어갈 수 있다는 건, 역시 대단하다는 말밖에 다른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쉬운 문장들 속에서도 문단과 단어의 유기적인 구조, 다양한 어휘를 통해 머릿속에선 어떤 번쩍임을 느끼도록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사회의 음지로 내몰려 버림받은 인물들의 내적 갈등에선 한숨이 절로 새어나오고, 성인의 말씀은 그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경건해지고, 한편으론 몸 전체가 청아해져 어떤 진리의 세상을 엿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글이 사람을 깨어나게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데서 오는 것 같습니다. 소설의 위대한 힘.

 

 

    빅토르 위고는 사회가 인위적으로 만든 지옥의 세상을 말하려 합니다. 우리는 그런 지옥을 필연적 운명이라 하지만, 사실 이 운명은 신이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가 사회를 이루어 만든 지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산 계급 남성의 추락. 기아로 인한 여성의 몰락. 무지와 암흑으로 인한 아이들의 고통. 시간이 흐르고 문명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절대로 변하지 않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어둠으로 자리한 지옥의 모습 그대로를 그립니다. 시대가 달라져 들판의 풍차는 사라졌지만 바람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시대도 마찬가지. 그러니 우리는 이 기본적인 이야기를 반드시 읽고 느껴야만 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 장 발장이기에.

 

 


 

 

 

    “도둑이나 살인자를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돼. 그건 외부의 위험이고 작은 위험이야. 우리들 자신을 두려워하자. 편견이야말로 도둑이고, 악덕이야말로 살인자야. 큰 위험은 우리들 내부에 있어. 우리들의 머리나 지갑을 위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영혼을 위협하는 것만을 생각하자.” (55쪽)

 

 

    이어서 그는 자문했다.

    이 불행한 사건에서 잘못은 나 한 사람에게만 있는가? 먼저, 노동자인 나에게 일거리가 없었고, 부지런한 나에게 빵이 없었던 것은 중대한 일이 아닌가? 다음으로, 과오를 범하고 자백하기는 했지만, 징벌이 가혹하고 과도하지는 않았던가? 범죄인 쪽에서 범행에 잘못이 있었던 것보다도, 법률 쪽에서 형벌에 더 많은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쪽의 저울판에, 속죄가 실려 있는 저울판에 과중한 무게가 실려 있지는 않았던가? 과중한 형벌은 범죄는 조금도 없애지 못하고, 입장을 뒤집어, 범죄자의 잘못을 억압의 잘못으로 바꾸어 놓고, 죄인을 희생자로 채무자를 채권자로 만들어 놓고, 바로 권리를 침범한 자 쪽에 결정적으로 권리를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던가? 탈옥 기도로 계속 가중된 그 형벌은 결국 최약자에 대한 최강자의 폭행 같은 것이 되고, 개인에 대한 사회의 죄악이 되고, 매밀 되풀이 되는 죄악이 되고, 십구 년간 계속된 죄악이 되지 않았던가?

    그는 자문했다. 과연 인간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경우에는 부조리한 무분별을, 또 어떤 경우에는 무자비한 경계를 모두 똑같이 받아들이게 하고, 결핍과 과다 사이에 노동의 결핍과 징벌의 과다 사이에 한 가련한 인간을 영원히 붙잡아 놓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우연에 의해 이루어지는 재산 분배에서 가장 적은 몫을 탄, 따라서 가장 배려를 받아 마땅한 구성원들을 사회가 그렇게 대우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닌가?

    이런 질문들이 제기되고 해결되었으므로, 그는 사회를 판결하여 유죄를 선고했다.

    그는 자신의 증오심으로 사회를 처벌했다. (164쪽)

 

 

    사랑은 과오다. 좋다. 팡틴은 과오 위에 떠 있는 순결이었다. (232쪽)

 

 

    이 팡틴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가 한 여자 노예를 사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서? 빈궁에게서.

    굶주림에게서, 추위에게서, 고독에게서, 버림에게서, 궁핍에게서, 비통한 매매. 한 영혼과 한 조각 빵과의 교환. 빈궁은 제공하고, 사회는 받아들인다. (334쪽)

 

 

    생각이 하나의 관념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은 바닷물이 해변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선원은 그것을 밀물이라 부르고, 죄인은 그것을 후회라 부른다. 신은 바다처럼 영혼을 밀어 올린다. (3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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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책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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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 속의 인물이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고 있다면 그 소설은 순수소설입니다. 그런데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이나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을 읽고 있다면 그 소설은 추리소설이 됩니다. 대개 소설 속에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특정 인물이 등장하면, 그 소설은 추리소설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나중에는 결국 이야기의 전개가 언급했던 추리소설과 비슷한 모양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사라진 아내 뤼야, 그리고 함께 사라진 칼럼 작가 제랄. 그들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이스탄불 시내를 배회하는 변호사 갈립. 소설은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키며 추리소설의 추리와 추적을 보는 듯한 출발을 보입니다. 그런데 추리소설에도 고유의 원리와 원칙이 있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은 채, 이야기는 계속해서 샛길로 빠집니다. 소설을 추리소설이라 여기고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추리소설로서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고, 이유를 분명히 밝혀두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에 대한 언급을 피합니다. 하지만 갈립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조사하고 추적합니다. 그런 과정을 한참동안 지켜보다가 비로소 저는 깨달았습니다. 추리소설을 이해한다는 것과 추리소설을 집필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구나! 아니다! 그저 『검은 책』오르한 파묵의 소설이구나! 라고.

 

 

    소설은 갈립의 조사와 제랄이 기재한 칼럼을 병행해서 보이는 구조입니다. 제랄의 칼럼은 암호와 공식, 일종의 글자 게임이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려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립의 추적 또한 추적하는 대상이 누군지 잊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단순히 배회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서로 완전히 무관할 것 같은 글과 행동. 그래서 소설은 단지 하나의 실종 사건이라는 가느다란 실을 갖고서 무언가를 잔뜩 꿰매어 어렵사리 붙여 놓은 이야기보따리 같은 느낌입니다. 강한 수집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데 엮어둘 수밖에 없었다는 느낌으로.

 

 

    오르한 파묵의 소설에선 매번 한 권의 소설로 하나의 박물관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수집력을 보입니다. 『검은 책』에선 이스탄불 시내의 풍경을 수집품처럼 담았습니다. 이웃의 모습, 길거리의 여러 가게, 신문사, 나이트클럽, 극장 등, 시대의 풍경을 담으려한 노력이 보입니다. 갈립이 시내를 이유 없이 배회했던 이유는, 가능한 많은 것을 수집해 담으려 했던 파묵의 집착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갈립의 입장을 빌려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은 곧 자기가 사는 곳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고, 그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의혹을 푸는 해결의 실마리라 말하려 합니다. 그래서 소설은 관찰을 통해 발견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곧 이스탄불의 얼굴이 되고, 도시의 지도가 된다는 말을 슬쩍 흘립니다.

 

 

    파묵의 소설이 흔히 그렇듯, 소설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 자신일 순 없다.’라는 말은 터키 사회가 점차 터키의 순수함을 잃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터키는 터키라고 할 수 없단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상과 문화, 거리의 풍경, 생활양식까지, 모든 것이 터키의 것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이스탄불의 모습을 비밀스럽게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신비라는 이름의 도시, 이스탄불을 부정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대단히 아름다운 무언가로 인식하는 동시에 특별할 것도 없는 익숙한 무언가를 보는 것이라는 놀랍고 신비로운 경험.

 

 

    그건 다시 도시의 풍경에서 인간 그 자체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던 것과 반대로, 갈립은 ‘나는 결국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합니다. 집단과 달리 개인이 정체성을 찾는 일은 민족을 이해하면서부터 시작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결국 같은 이상을 꿈꾸며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서로 크게 의견충돌을 보이는 상황. 그건 소설에서 전화상으로 격렬한 논쟁을 보인 갈립과 마호메트의 상황과 같다고 봅니다. ‘당장 주소를 대시오!’라는 외침은, 곧 이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총과 칼의 주먹다짐만큼 강한 분리를 만들어 냅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글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검은 책』은 소설 스스로가 암호화하고 있어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만약 작가와 독자 사이에 어떤 공간이 있고 그 사이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다면, 파묵의 소설은 독자들보다 파묵 자신에게 더 가까이 있는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잠깐 파묵 자신이 불쑥 소설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검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그 전까지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아 소설을 읽는 내내 혼란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도대체 이 많은 것들이 다 무슨 이야기이고, 결국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라며 어렴풋한 느낌과 분위기만으로 대충 짐작하며 읽어야 했습니다. 결국 『검은 책』은 추리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추리하며 추적할 어떤 대상이 있다면, 그건 민족의 정체성이라고 봅니다.

 

 



 

    추리소설에서 세부 사항은 항상 어떤 목적을 가리키고 있다면서 말이다. (1권, 80쪽)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삶이 다른 누군가의 꿈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야. (1권, 121쪽)

 

 

    사람들은 대부분 대상이 바로 코앞에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의 본질적 특징을 알아채지 못하고, 가장자리나 구석에 있고, 그래서 주의를 끄는 부차적인 특징을 보고 알게 되지. 이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은 확연히 드러나게 하지 않고 칼럼 한구석에 쑤셔 놓곤 해. 물론 아주 꼭꼭 숨겨진 구석은 아니야. 아이들을 속아 넘기는 것 같은 숨바꼭질이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 찬은 것을 아이들처럼 곧장 믿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야. 게다가 최악의 것은, 글의 나머지 대부분에 내포되어 있는, 바로 코앞에 보이는 그 확연한 의미와, 약간의 인내와 지능만을 요하는 숨겨진 우연적 의미도 인지되지 못한 채 신문이 내던져진다는 사실이지. (1권 138쪽)

 

 

    “왜냐하면 모든 살인은 다른 살인의 모방이기 때문이지. 모든 책이 다른 책의 모방인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난 내 이름으로 책을 낼 생각을 안 하는 거야.”

    (…)

    “하지만 가장 형편없는 살인에도 가장 형편없는 책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면이 있지!”

    (…)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살인이 아니라 책이 전적인 모방인 거야. 그러나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모방에 대한 모방이지. 책을 설명하는 살인과, 살인을 설명하는 책은 보편적인 호소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을 때만이 희생자의 머리에 곤봉을 내리칠 수 있기 때문이지. 창조성은 대부분 분노 속에,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그 분노 속에 존재해. 하지만 분노는 이전에 다른 사람에게 배운 방법을 매개로만 우리가 행동을 개시하게 만들어. 우리가 쓰는 칼은 똑같은 진실을 배반하지. 우리가 살인의 의식과 세부 사항을 다른 데서, 다시 말하면, 전설과 이야기와 회고록과 신문에서 배운다는 진실 말이야. 간단히 말하면, 문학에서 살인에 대해 배우는 거야. 가장 순수한 살인조차, 실수로 혹은 질투 때문에 저지른 살인조차 모방, 문학적 모방이야. 범인이 무의식적으로 행했다 해도 말이야. 내가 이에 대해 글을 써야 할 것 같지 않아?” (2권, 28쪽)

 

 

    “사람은 절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소.”

    “당신은 그 말을 아주 많이 썼지만, 그것을 나처럼 느낄 수 없을 거요. 그 사실을 나만큼이나 이해할 리가 없소. 당신이 ‘신비’라고 했던 것은, 이해하지 못한 채 알고만 있던 것이며, 알지도 못하면서 글로 썼던 것이오. 사람이 그 자신이 되지 않고선 누구도 이 진실을 발견할 희망을 품을 수 없기 때문이오. 진실을 발견했다면 그건 아직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인 거요. 두 가지가 동시에 옳을 수는 없소. 이 역설을 이해하겠소?”

    “나는 나 자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이기도 하오.” (2권, 218쪽)

 

 

    “왜냐하면 그 시기에는 오로지 독서만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내가 읽은 것의 환상만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육 년 동안 오로지 내가 읽은 책의 작가의 사상과 목소리만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2권, 267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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