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책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 속의 인물이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고 있다면 그 소설은 순수소설입니다. 그런데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이나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을 읽고 있다면 그 소설은 추리소설이 됩니다. 대개 소설 속에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특정 인물이 등장하면, 그 소설은 추리소설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나중에는 결국 이야기의 전개가 언급했던 추리소설과 비슷한 모양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사라진 아내 뤼야, 그리고 함께 사라진 칼럼 작가 제랄. 그들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이스탄불 시내를 배회하는 변호사 갈립. 소설은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키며 추리소설의 추리와 추적을 보는 듯한 출발을 보입니다. 그런데 추리소설에도 고유의 원리와 원칙이 있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은 채, 이야기는 계속해서 샛길로 빠집니다. 소설을 추리소설이라 여기고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추리소설로서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고, 이유를 분명히 밝혀두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에 대한 언급을 피합니다. 하지만 갈립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조사하고 추적합니다. 그런 과정을 한참동안 지켜보다가 비로소 저는 깨달았습니다. 추리소설을 이해한다는 것과 추리소설을 집필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구나! 아니다! 그저 『검은 책』오르한 파묵의 소설이구나! 라고.

 

 

    소설은 갈립의 조사와 제랄이 기재한 칼럼을 병행해서 보이는 구조입니다. 제랄의 칼럼은 암호와 공식, 일종의 글자 게임이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려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립의 추적 또한 추적하는 대상이 누군지 잊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단순히 배회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서로 완전히 무관할 것 같은 글과 행동. 그래서 소설은 단지 하나의 실종 사건이라는 가느다란 실을 갖고서 무언가를 잔뜩 꿰매어 어렵사리 붙여 놓은 이야기보따리 같은 느낌입니다. 강한 수집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데 엮어둘 수밖에 없었다는 느낌으로.

 

 

    오르한 파묵의 소설에선 매번 한 권의 소설로 하나의 박물관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수집력을 보입니다. 『검은 책』에선 이스탄불 시내의 풍경을 수집품처럼 담았습니다. 이웃의 모습, 길거리의 여러 가게, 신문사, 나이트클럽, 극장 등, 시대의 풍경을 담으려한 노력이 보입니다. 갈립이 시내를 이유 없이 배회했던 이유는, 가능한 많은 것을 수집해 담으려 했던 파묵의 집착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갈립의 입장을 빌려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은 곧 자기가 사는 곳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고, 그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의혹을 푸는 해결의 실마리라 말하려 합니다. 그래서 소설은 관찰을 통해 발견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곧 이스탄불의 얼굴이 되고, 도시의 지도가 된다는 말을 슬쩍 흘립니다.

 

 

    파묵의 소설이 흔히 그렇듯, 소설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 자신일 순 없다.’라는 말은 터키 사회가 점차 터키의 순수함을 잃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터키는 터키라고 할 수 없단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상과 문화, 거리의 풍경, 생활양식까지, 모든 것이 터키의 것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이스탄불의 모습을 비밀스럽게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신비라는 이름의 도시, 이스탄불을 부정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대단히 아름다운 무언가로 인식하는 동시에 특별할 것도 없는 익숙한 무언가를 보는 것이라는 놀랍고 신비로운 경험.

 

 

    그건 다시 도시의 풍경에서 인간 그 자체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던 것과 반대로, 갈립은 ‘나는 결국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합니다. 집단과 달리 개인이 정체성을 찾는 일은 민족을 이해하면서부터 시작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결국 같은 이상을 꿈꾸며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서로 크게 의견충돌을 보이는 상황. 그건 소설에서 전화상으로 격렬한 논쟁을 보인 갈립과 마호메트의 상황과 같다고 봅니다. ‘당장 주소를 대시오!’라는 외침은, 곧 이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총과 칼의 주먹다짐만큼 강한 분리를 만들어 냅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글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검은 책』은 소설 스스로가 암호화하고 있어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만약 작가와 독자 사이에 어떤 공간이 있고 그 사이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다면, 파묵의 소설은 독자들보다 파묵 자신에게 더 가까이 있는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잠깐 파묵 자신이 불쑥 소설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검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그 전까지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아 소설을 읽는 내내 혼란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도대체 이 많은 것들이 다 무슨 이야기이고, 결국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라며 어렴풋한 느낌과 분위기만으로 대충 짐작하며 읽어야 했습니다. 결국 『검은 책』은 추리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추리하며 추적할 어떤 대상이 있다면, 그건 민족의 정체성이라고 봅니다.

 

 



 

    추리소설에서 세부 사항은 항상 어떤 목적을 가리키고 있다면서 말이다. (1권, 80쪽)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삶이 다른 누군가의 꿈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야. (1권, 121쪽)

 

 

    사람들은 대부분 대상이 바로 코앞에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의 본질적 특징을 알아채지 못하고, 가장자리나 구석에 있고, 그래서 주의를 끄는 부차적인 특징을 보고 알게 되지. 이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은 확연히 드러나게 하지 않고 칼럼 한구석에 쑤셔 놓곤 해. 물론 아주 꼭꼭 숨겨진 구석은 아니야. 아이들을 속아 넘기는 것 같은 숨바꼭질이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 찬은 것을 아이들처럼 곧장 믿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야. 게다가 최악의 것은, 글의 나머지 대부분에 내포되어 있는, 바로 코앞에 보이는 그 확연한 의미와, 약간의 인내와 지능만을 요하는 숨겨진 우연적 의미도 인지되지 못한 채 신문이 내던져진다는 사실이지. (1권 138쪽)

 

 

    “왜냐하면 모든 살인은 다른 살인의 모방이기 때문이지. 모든 책이 다른 책의 모방인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난 내 이름으로 책을 낼 생각을 안 하는 거야.”

    (…)

    “하지만 가장 형편없는 살인에도 가장 형편없는 책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면이 있지!”

    (…)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살인이 아니라 책이 전적인 모방인 거야. 그러나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모방에 대한 모방이지. 책을 설명하는 살인과, 살인을 설명하는 책은 보편적인 호소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을 때만이 희생자의 머리에 곤봉을 내리칠 수 있기 때문이지. 창조성은 대부분 분노 속에,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그 분노 속에 존재해. 하지만 분노는 이전에 다른 사람에게 배운 방법을 매개로만 우리가 행동을 개시하게 만들어. 우리가 쓰는 칼은 똑같은 진실을 배반하지. 우리가 살인의 의식과 세부 사항을 다른 데서, 다시 말하면, 전설과 이야기와 회고록과 신문에서 배운다는 진실 말이야. 간단히 말하면, 문학에서 살인에 대해 배우는 거야. 가장 순수한 살인조차, 실수로 혹은 질투 때문에 저지른 살인조차 모방, 문학적 모방이야. 범인이 무의식적으로 행했다 해도 말이야. 내가 이에 대해 글을 써야 할 것 같지 않아?” (2권, 28쪽)

 

 

    “사람은 절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소.”

    “당신은 그 말을 아주 많이 썼지만, 그것을 나처럼 느낄 수 없을 거요. 그 사실을 나만큼이나 이해할 리가 없소. 당신이 ‘신비’라고 했던 것은, 이해하지 못한 채 알고만 있던 것이며, 알지도 못하면서 글로 썼던 것이오. 사람이 그 자신이 되지 않고선 누구도 이 진실을 발견할 희망을 품을 수 없기 때문이오. 진실을 발견했다면 그건 아직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인 거요. 두 가지가 동시에 옳을 수는 없소. 이 역설을 이해하겠소?”

    “나는 나 자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이기도 하오.” (2권, 218쪽)

 

 

    “왜냐하면 그 시기에는 오로지 독서만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내가 읽은 것의 환상만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육 년 동안 오로지 내가 읽은 책의 작가의 사상과 목소리만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2권, 267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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