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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와! 이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김연수의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를 펴자마자 볼 수 있는 첫 장의 문장입니다. 너를 생각한다는 그 말에서 ‘너’는 소설 속의 여러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소설의 시작은 굉장히 몽환적인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배경이 외국이고, 말하는 사람은 카밀라 포트만이라는 외국인이고, 그녀의 남자친구가 시를 읊는 사람인데, 또 그 사람은 유이치라는 이름의 일본사람이다 보니, 소설은 굉장히 이국적이며 몽롱한 분위기를 절로 만들어 냅니다. 책 표지의 느낌처럼 말이죠. 마치 국내에 들어와 번역된 외국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어떤 계산된 서술을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도가 작가 스스로가 의도한 것이 맞는지, 아닌지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런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카밀라는 한국인입니다. 어렸을 때 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국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살았던 지역을 둘러보며 출생의 비밀, 죽음을 둘러싼 의혹, 아픔과 고독, 사랑과 배신 등, 자칫 신파극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진행을 보이기도 하는데, 또 본격적으로 그렇게 흘러가진 않습니다. 또한 사건의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미스터리한 부분들에 대한 풀이로 흘러가는가 싶더니,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감동과 슬픔을 말하려는 듯해 보이기도 하고, 또는 현실을 뛰어넘는 어떤 감정, 사고,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꽤 혼란스러운 전개를 보입니다. 이건 아마도 제 자신이 이 소설을 잘 정리해내지 못하고, 아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어중간한 감상만 남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은 한참을 돌고 돌아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관광객이 될 순 없지만, 유리창 밖에서 안에 있는 우리를 바라보며 관찰하게 합니다. 깊고 어둡고 춥고 나약해서 두렵기도 한 심연의 세상을.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유리창을 통해 돌고 돌며 관찰하는 소설의 시점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이질감을 느끼게 하다가 나중에는 그래도 무언가를 공감할 수도 있겠다는 묘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겨난 감정도 확신할 수 없는 모호한 것이라, 이 부분도 참으로 혼란스럽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잦은 시점의 변화가 야기한 혼동이라고 봅니다. 특히 어머니의 시점을 통해 말하고자 한 부분에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안개가 항구를 바라보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준’ 듯한 느낌이라 확신할 수 있는 어떤 사실까지 더욱 희뿌옇게 만들어 결국엔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 둡니다. 어떠한 윤곽도 그려낼 수 없어 그대로 붕 떠버린 느낌. 그래서 다양한 시점의 변화가 오히려 소설의 몰입을 저해하고 말하기 힘든 어떤 감정을 더 말하기 힘들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억을 회상하는지, 현재를 묘사하는지, 모호한 장면들이 이야기의 방향을 흐트러트리고 있는데, 분명 무언가를 의도한 심오한 장치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한 제 자신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시적인 표현의 멋진 문장들을 만날 땐 정신이 번쩍 들어 가슴을 쳐가며 경청했습니다. 이해하긴 힘들지만 참으로 멋지다는 막연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두 번, 세 번 읽어야만 했던 문장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소제목으로 예를 들자면, ‘평화와 비슷한 말, 그러니까 고통의 말’, ‘적적함, 혹은 불안과 성가심 사이의 적당한 온기’, ‘짧게 네 번, 길게 세 번, 짧고 길고 길고 짧게, 짧게 한 번’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런 문장들이 시종일관 음울하게 흘러가는 사건들 속에서 간간히 등장하며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감정, 그런데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서 구체적인 형태를 볼 수 없는 어떤 감정을 그리려 합니다. 이런 표현을 시적인 아포리즘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굉장히 함축적인 표현으로 서정적인 무언가를 말하려 했기 때문에, 같은 문장을 짧게는 두 번, 길고, 길고, 길게는 다섯 번 정도 반복해서 읽어야 겨우 그런 표현이 갖는 어떤 의미에 대해 어렴풋한 느낌, 매우 미묘한 차이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렇게 멋진 표현들이 소설의 큰 이야기 흐름에 합류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보단 덜한 느낌이라, 역시 문제는 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느낌, 참으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느낌이라, 무언가에 대한 무언가라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머릿속에는 바로 문장으로 옮길 수 있는 생각들도 있었지만, 도무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혹은 막연한 공포 같은 것도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공책의 여백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오로지 막막할 뿐이라면 그 막막함에 대해 쓰라고 유치치는 말했다. (56쪽)

 


    아직 늙지 않은 사람들과 완전히 늙은 사람들,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과 완전히 죽은 사람들, 그 사이에 갓 태어난 나와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인 엄마가 서 있었다. (75쪽)

 


    그러고 나니까 알겠더군요. 아름다움이란 솜씨의 문제이고, 솜씨는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라는 걸. 그렇구나. 괴로웠다고 생각하면 괴로운 글을 쓰는 것이고, 행복했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157쪽)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요즘 세상에는 값싸게 즐길 수 있는 고독이란 게 없어. 돈을 지불하지 않은 고독은 사회 부적응의 표시일 뿐이지. 심지어는 범죄의 징후이기도 하고. (244쪽)

 


    그렇긴 해도 서른이 되면서 뜨겁고 환하던 낮의 인생은 끝이 난 듯한 기분은 들었다. 그다음에는 어둡고 서늘한, 말하자면 밤의 인생이 시작됐다. 낮과 밤은 이토록 다른데 왜 이 둘을 한데 묶어서 하루라고 말하는지. 마찬가지로 서른 이전과 서른 이후에는 너무나 다른데도 우리는 그걸 하나의 인생이라고 부른다. (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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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1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계 명화 속 역사 읽기
플라비우 페브라로.부르크하르트 슈베제 지음, 안혜영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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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도 모르고 역사도 모르고, 아는 것이 하나 없지만, 그림이 많이 들어간 책을 보는 일은 항상 즐겁습니다. 공감할 수 있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이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가슴에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문득 그림과 전혀 관계없는 다른 생각을 해가며 내 안에서 작은 창작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예술을 통한 간접적인 학습이라고 해야 할까요. 활자로 배울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메시지가 전달되기도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상식을 뛰어넘는 사고를 하기도 합니다.

 


 

    『세계 명화 속 역사 읽기』에 담긴 그림은 모두 유명한 예술작품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적인 의미, 내용, 줄거리를 가진 작품을 담아 놓았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표정, 입고 있는 옷, 들고 있는 물건, 그들이 서있는 땅과 올려다 본 하늘, 모든 것에 역사적 의미를 품습니다. 예술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 당시 작가의 상황, 역사적 사실도 공부할 수 있어서 매우 유익합니다. 그런데 사실 의미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림을 보더라도 재미를 느끼긴 마찬가지일 겁니다. 자신의 능력껏, 있는 그대로의 작품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책에 담긴 이야기들 중에서 특히 18세기를 거치면서 미묘하게 변한 예술의 탄생 배경이 재미있습니다. 역사 속 예술은 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발전합니다. 후원자가 있어야 계속해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어쩔 수 없이 권력자들의 요구와 기호에 맞는 예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전쟁에서 승리한 업적, 지도자에 대한 찬미, 하늘의 뜻이라는 정당성 등을 담고 있는 작품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선전하기 위한 형태의 예술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예술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전쟁에 대한 경고, 질병과 가난에 대한 인류애 호소, 잔혹하고 폭력적인 체제에 대한 고발 등의 주제를 담습니다. 요즘의 우리는 예술이란 단어를 당연한 진보로 여길 테지만, 예술에 대한 이런 주제의식이 생겨난 것도 최근의 경향이란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1900년 산업화와 전체주의를 찬양하던 옴베르토 보초니의 작품들, 1800년 프랑스의 공식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들이 갖는 의미와 그것을 해석한 모습들이 재미있었습니다. 당연히 불합리하다며 비판할 사상들에 대해 작가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단 점이 신기합니다. 또한 동시대의 같은 역사적 사실을 두고서 해석을 달리한 작품을 한 데 모아 비교해 볼 수 있단 점이 매우 좋았습니다.

 


    역사와 관련된 책을 볼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세계의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고, 과거의 실수나 영광은 주체만 조금씩 달라질 뿐 내용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재현된다는 느낌입니다. 비록 현재의 상황이 과거의 일과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을 수 있으나 지구촌 어딘가에는 다른 역사의 시간이 동시간대에 흐르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미래나 과거의 구분 없이 인간이라면 충분히 공감할만한 어떠한 사상이 예술작품에, 특히 대단한 예술작품에 실려 있는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설명하기 힘든 사상과 가치, 복잡한 의미를 지닌 사고를 전세계 사람들이 함께 느끼며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나 봅니다. 문화와 언어를 초월한 예술의 힘은 바로 이런 거라고 봅니다.



    『세계 명화 속 역사 읽기』에 담긴 예술작품들 중에서 특히 우리가 더욱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작품 두 편이 생각납니다. 첫 번째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전쟁의 폭력성에 대한 고발,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 전쟁의 잔혹함을 다룬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대학살>이고, 두 번째 작품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어찌 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빈곤과 실업, 허탈감과 좌절에 대해 말하는, 아이작 소여의 <직업소개소>라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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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은 끝에 가서 죽는다 2 밀리언셀러 클럽 129
데이비드 웡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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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국내산 토종 가수 싸이가 전 세계적인 음원 시장 차트 빌보드에서 1위를 하는가 마는가 하는 범국민적 사건은 결코 싸이 본인의 운이 갑자기 좋아져 대박난 경우라 여길 우연한 사건으로 볼 순 없을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열광하고 즐거워하는 요소를 잘 포착해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계산해 완성된 하나의 전략적 이미지가 성공한 경우라 봅니다. 그렇다고 가식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란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본격적으로 B급의 이미지를 두드러지게 보이려 한 데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란 이야깁니다.

 


    얼마 전 YTN뉴스에서 20분 내외의 시간동안 그룹 UV가 나와 대대적인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최근 가요시장에서 유독 저급해 보인 B급 가수의 노래가 인기를 얻는 이유를 묻자, 최근의 방송에는 예쁘고 잘생기고 바른 이미지의 사람, 특히 아이돌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거기에 실증을 느끼고 갑갑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의바르고 올곧게 만들어진 이미지에 반감을 느끼는 듯하고, 오히려 자신보다 모자란 사람을 보면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려 하는 심리가 작용하여 B급 가수가 인기를 얻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만의 자유를 표현한다는 의미로 뉴스에서 삼선 슬리퍼를 신은 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유난히 큰 엄지발가락이라며 앵커에게 들이댑니다. 철저하게 B급의 이미지를 추구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런 유별난 행동을 두고서 그저 B급이기 때문에 저급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일단 그들의 음악이 웃기고 재미있어서 호기심에 듣기 시작하지만, 가만히 듣다 보면 묘한 음악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스꽝스런 가발을 쓰고 희한한 복장에 슬리퍼를 끌고 나와 공연을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내용이 있고 열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득 예술을 이야기할 때 바르고 틀리다는 말을 하기에 앞서, 이런 이상한 음악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단 생각을 합니다. 싸이의 음악은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할 수 없다는 식의 사고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예술과 문화를 이야기한다는 곳에서 나온 이런 사고야말로 진정한 B급의 사고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어렵게 포장함으로서 그들에게 대중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한 고립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분리와 소외는 이런 데서 온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하려 할 때 시작부터 현학적인 용어를 사용해 고지식한 태도를 보인다면, 요즘 시대에는 그 내용이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나다 하더라도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일단은 자신을 망가트리는 한이 있더라도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쉽고 재미있어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스꽝스럽지만 누구나 따라할 수 있고 이해하기 쉬우며 중독성 강한 이야기로 관심을 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강남스타일의 말춤처럼.

 


    데이비드 웡의 소설 『존은 끝에 가서 죽는다』은 철저하게 B급을 지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보이며 저급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독특한 희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깊고 풍부한 향의 프랑스산 포도주가 아니라, 아무 길거리 자판기에서 판매하는 청량음료의 톡 쏘는 맛, 막힌 무언가를 뚫어주고 가려운 무언가를 긁어주는 시원함을 느끼게 합니다. 자칫 취향에 맞지 않아 이상한 소설이라 여길 수도 있습니다만, 일단 한번 빠져들면 광팬이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소설의 시작은 이 무슨 개같고 똥같은 말로 병신 같은 웃음을 만들려 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참고 소설이 흘러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 소설의 이상한 세계가 천천히 만들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 괴상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거리를 돌아 왔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결국 소설이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 부분도 철저하게 B급의 모양을 따르는 듯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굉장히 거대하고 진지한 모양을 한 미스터리한 세상의 실체를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왜 그들은 크록 외에 아무도 섬기려 하지 않는가.’ 혹은 ‘자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한단 말인가’, 하는 식의 문제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소설은 미국식 농담을 즐기는 독자에게 더욱 큰 재미를 줄 것으로 보입니다. 말로 하는 미국식 농담보다 행동으로 보이는 미국식 농담을 즐길 줄 안다면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모험도 모험 나름이지, 누군가에겐 오히려 독이 될 행군일 수 있어서 한편으론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약간은 조심스럽습니다.

 


    어느 날 다람쥐 한 마리가 우연히 하수구를 탐험합니다. 난생 처음으로 구경하는 하수구의 모습. 길고 어두운 터널의 끝엔 무언가 대단한 보물이 있을 거라 여긴 흥미로운 모험. 그래서 다람쥐는 들뜬 마음으로 몇 킬로미터로 뻗어 있는 긴 하수구 터널을 여행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결국 그 다람쥐는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우리들이 싸고 내린 똥물에 포위되어 기나긴 하수구 터널 안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갑자기 다람쥐 이야기를 한 이유는, 혹시나 소설을 읽다가 그런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점잖아 보이지만 확실히 병신 같은 이야기. 때가 되면 완전히 미쳐버리는 이야기.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이야기. 커피가 식기도 전에 원샷 때리는, 그런 반전 있는 이야기.

 




 



 

    좋아. 그럼, 만약 그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에겐 우리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존재일 거야, 그렇지? 수준이 낮아도 한참 낮은 존재란 말이야. 이제 문제는 그 수준이 높은 치들은 그 밑에 있는 아랫것들을 연구하면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성립이 안된다는 거야. 우리는 현미경 밑에 바이러스를 놓고 보잖아. 하지만 바이러스가 현미경 밑에 우리를 두고 볼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만약 인간보다 훨씬 고등한 존재가 있다면, 그게 우리와는 극단적으로 다른데다 지극히 크고 복잡한 존재라면, 우리의 뇌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라면, 벌레들이 우리를 볼 능력이 없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볼 수 없다는 말이잖아. 안 그래? (112쪽)

 


    거기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라이플총임에 분명한 것을 가지고 트럭 주위에 서 있었고, 존은 즉시 팔을 뻗어 헤드라이트를 꺼버렸다. 그러다 갑자기 불빛이 꺼져버리면 거기 있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가 더 쉬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헤드라이트를 켰다. 그러자 트럭 주위에 서 있던 남자들 중 두 명이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걸 보고, 재빨리 다시 헤드라이트를 껐다. 이제 존은 이렇게 정신없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148쪽)

 

 

    아주 단순한 이유 하나로 이 사회는 파멸할 것이다. 빌딩을 하나 짓는 데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몇 백만 달러씩 되는 자재를 들여 몇 달 동안 짓지만, 그걸 무너뜨리는 데는 얼간이 하나와 폭탄 하나만 있으면 순식간에 끝난다는 사실 하나로. (190쪽)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너희들이 지금까지 본 걸 이해하려고 노력해 봐. 일단 이해가 되면 그렇게 화가 나지 않을 거야. (220쪽)

 


    난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말하겠어요. (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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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1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존은 끝에 가서 죽는다 1 밀리언셀러 클럽 128
데이비드 웡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굉장히 병적인 느낌의 소설입니다. 아니, 병이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가 병신인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굉장히 태연합니다. 이야기를 듣고서 믿지 않으려는 당신의 반응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계속해서 병신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래서 제 능력으론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음악으로 치자면 Nirvana의 <Smells like teen spirit>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래가사를 조금 적어보자면, 어이, 정말 구리네, 불을 끄면 조금 덜 하겠지, 나는 멍청한데다가 전염성이 있어, 우린 여기서 즐거움을 만끽할거야, 내 리비도.

 


    혹은 Beck의 <Loser>가 떠오릅니다. 침팬지 시절 나는 원숭이였고, 내 정맥에 부탄을 주입하고, 플라스틱 눈을 가진 마약 중독자를 처단하기 위해 개밥 그릇의 야채와 잘빠진 남자의 누드 팬티스타킹에 페인트 스프레이를 뿌렸어.

 


    그리고 이 같은 노래들의 후렴구에 데이비드 웡의 소설 『존은 끝에 가서 죽는다 1』를 함께 놓는다면 대단한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난 한 남자를 알아, 아니, 그건 내가 지어낸 말이야, 머리! 머리! 머어어어리! 낙타 대학살! 낙타 대학살!

 


    제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테죠.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설의 줄거리를 조금 요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도시에서, 그러니까 역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인물이 겪은 이야기입니다. 편의상 그 인물의 이름을 소설의 작가 이름과 같은 데이비드 웡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웡의 친구, 존이 나오는데 결국 존은 끝에 가서 죽을 친구인 것입니다. 아무튼, 어느 날 이 둘이 굉장히 신비로운 경험을 합니다. 간장 소스 같은 어떤 검은 액체가 몸에 들어갔는데 그 이후로 엄청난 일, 역시 그것도 어떤 일인지 여기서 대놓고 밝힐 순 없지만, 아무튼 어마어마한 일을 겪게 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제가 병신처럼 요약한 줄거리를 읽어 본 여러분은 이런 식의 설명이 제대로 된 요약이 맞긴 한가, 또는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병신 같은 줄거리란 말인가, 하며 의아해할 것입니다. 네, 네, 여러분의 그런 마음을 전적으로 이해합니다. 저 역시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도 궁금합니다. 소설은 영화 <맨 인 블랙>처럼 우리가 모르는 세상과 외계인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아니면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처럼 그냥 다 썰어 버리면 속 시원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요. <고스트버스터즈>처럼 두 주인공 존과 웡이 유령을 소탕한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식인 벌레들이 바글거리는 <조의 아파트>같은 이야기일지 모르구요.

 


    헷갈리고 혼란스러워 의미를 해독하기 힘든 이야기. 실제로 일어나긴 했는데 일어나지 않았던 이야기. 모르는 사람은 모를 수밖에 없고, 증명할 방법도 없는 이야기. 그러니까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성스런 기록과 닮았습니다. 분명 굉장히 다른 느낌의 이야기가 될 테지만, 묘한 믿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이비드 웡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소설은 어디로 흘러간단 말입니까. 그리고 지금 제가 하려는 소설 『존은 끝에 가서 죽는다 1』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로 흘러가야 하나이까. 제발 알려주세요.

 


    소설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갑자기 튀어 올라 생뚱맞은 방향으로 획 날아갑니다. 그리고 너무 해괴해서 맨 정신으로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전개를 보입니다. 한편으론 너무나 진지해서 병신의 끝은 어디인가, 라는 주제에 대한 장문의 논술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어떤 논리에 대해 독자가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까지 한참을 둘러서 말합니다. 항상 이런 식으로 병신처럼 이야기를 푸는 제 글처럼 말이죠. 그런데 이 소설이 보인 전개는 보통의 소설이 보인 어설픈 그것이 아닙니다. 병신 같은 분위기 속에 진지함을 깊은 곳에 감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손짓하는 진지함이 꽤 중독성을 갖습니다. 병신 같은 매력에 이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소설의 집요함을 인정하고 소설에게 항복했습니다. 소설의 결말에 존이 죽든 말든, 그래서 소설의 제목이 스포일러가 되든 말든 상관없이, 이렇게 독특한 모습의 소설은 ‘재미있는 이야기다’라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 취향에 따라서 평이 심하게 갈릴 유별난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이런 스타일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사실 또한 정말로 유별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데이비드 웡의 소설은 대놓고 우리를 병신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상한 이야기, 괴상한 이야기, 호러, 코믹, 판타지, SF, 미스터리, 스릴러, 아무튼 어떤 장르를 가져다 붙여도 가능할, 이 희한한 이야기에 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전도합니다. 아마도 소설을 읽는 우리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이 소설에서 왠지 병신의 맛이 느껴진단 사실을 충분히 인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갖는 재미의 유무에 대해 꽤 오랜 시간 갈등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참으로 묘합니다. 우리가 성수나 십자가를 믿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것들이 신비한 효력을 발휘하듯, 처음엔 거부반응을 일으켰던 소설의 이야기를 자포자기한 상태로 즐기며 읽기로 마음먹는 순간,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가 정말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단지 소설이 만든 환각인지, 아니면 원래 존재했지만 너무 미미해서 차마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미지의 감각인지 무엇이라고 명확히 표현할 순 없지만, 어떤 차이를 분명하게 만들어 냅니다. 그건 과학이나 종교로 설명하기 힘든 미스터리한 현상을 소설이 만든 특별한 설정을 통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 안에서 충분히 납득이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고 느껴야만 할까요? 그건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병신을 쫓는 믿음이 내 안에서 자라나 그것이 기묘한 방식으로 퍼지는 느낌입니다.

 


    소설가라면 치밀하게 구성한 자신만의 이야기로 독자를 밀어 넣고선 소설의 이야기를 믿게끔 끊임없이 강요하는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작업을 통해 현실에선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리얼리티를 소설 안에서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소설 안에서 그들은 신이고 주인입니다. 특히 장르소설에선 더욱 그러한 똥고집과 똥배짱, 똥 같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초지일관 병신 같은 느낌으로 독자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형태의 배경, 혹은 내러티브를 보인 소설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소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마침 운명과도 같이 병신처럼 집요한 소설 하나를 만난 듯합니다. 그런데 우린 이 같은 소설을 읽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믿고 따를 수밖에요. 믿음! 믿음! 미드으으음! 낙타 대학살! 낙타 대학살!

 

 


철저하게 B급을 추구한 이유 : 데이비드 웡 [존은 끝에 가서 죽는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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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존과 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이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병자…… 또라이, 아니면 미친놈처럼 보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상대에게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45쪽)

 


    한 번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손이 아주 빠른 마술사를 본 적이 있어요. 그 친구는 거기서 쇼를 하면서 관객 중 한 명을 불러내서 그 사람이 쓴 안경을 훔치는 걸 보여주더군요. 정말 대단했어요. 그 불쌍한 관객을 다시 자리로 돌려보냈는데 그 관객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방을 바라보면서 왜 갑자기 자기 눈이 안 보이는지 어리둥절해하더군요. 그건 마법이 아니죠, 미스터 웡. 그냥 상대방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속임수를 쓴 것에 지나지 않아요. (129쪽)

 


    그걸 보면 정말 머리가 어지럽지 않나? 인간의 손에선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그림이야. (179쪽)

 


    우리 모두 우리의 인식이 미지의 대상에 씌우는 꽃무늬 벽지 뒤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돌아버리지 않도록 보호하려고, 아니면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아니면 그냥 우리가 바지에 똥을 싸지 않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는 우리의 마음. (211쪽)

 


    있죠, 제가 한 이야기가 100퍼센트 진실은 아니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사실입니다. 맹세합니다. 저도 가끔씩 좀 웃긴 부분이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가끔은 설명하기 힘든 진실도 있으니까요. 그건 제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일 뿐입니다.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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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러면 아비규환
닉 혼비 외 지음, 엄일녀 옮김 / 톨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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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아, 정말이지 이딴 것보단 훨씬 나은 소설이 분명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갖고 우리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있다. 영미권 장르소설이라고 해서 간호사 로맨스물부터 떠올리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반기를 들자. 이제부터 승부다.

 

 

    영미권 현대 장르작가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서 한 데 뭉칩니다. 그들은 그들의 소설이 통속적이지만, 어떤 의미로는 전혀 통속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과거의, 최초의 그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의기투합합니다. 그 결과 탄생한 짧은 이야기들은 1930년대 펄프픽션의 느낌에 이릅니다. 마치 미국 최초의 펄프매거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 같은 모습으로, 장르소설이 꽃피웠던 50년 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숭고한 몸부림으로, 소설집 《안 그러면 아비규환》이 세상에 나옵니다.

 


    한 권의 책 안에 거친 느낌의 단편 20편이 담겨 있기 때문인지, 소설집 《안 그러면 아비규환》은 굉장히 빡빡한 느낌입니다. 서로 자신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는 듯 호객행위를 하며 아우성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매 이야기마다 도입부터 과장된 손짓으로 독자를 유혹하고 어깨에 힘을 줘가며 으스댑니다. 짧은 시간 내에 얼마나 많은 독자를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 들일 수 있는가 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런 경쟁을 지켜보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일 겁니다. 작가마다 자신만의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며 강렬한 불꽃을 뿜는 이야기를 선보이는데, 너무나 색이 강렬해서 마치 흰 종이 위에 잉크가 그대로 배어나와 글자들이 튀어나온 것 같습니다.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들은 장편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내러티브와 독특한 소재를 보이며 긴 여운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 단편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독자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아, 이야기들 사이의 피를 말리는 경쟁에서 거칠게 승리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들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야기도 있어 보여 한편으론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건 마치 주식시장 같습니다. 널리 알려져 상한가에 치달은 작가의 글은 이제 볼만큼의 재미를 다 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글은 이 소설집 안에선 내리막을 걷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제 막 상장되었거나,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하한가에 치달은 작가의 글은 오히려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뜻하지 않았던 행운, 수익창출, 대박, 인생역전. 아무튼 이 같은 소설집을 통해 듣도 보도 못한 작가의 글을 소개받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개인적으론 닉 혼비, 댄 숀, 글렌 데이비드 골드, 크리스 오퍼트, 에이미 벤더의 글이 보인 색깔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자, 내가 지금부터 무척이나 심장근육이 쫄깃해질 이야기를 할 터이니 귀를 쫑긋 세우고 잘 들어봐, 하는 식의 말을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내비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게걸스럽게 손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기고선 다음 장의 이야기를 계속 읽는 것 말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도록 독자를 몰아가는 서술 기술들이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타고난 이야기꾼의 단편 장르소설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서 하는 말인가 봅니다.

 

 

 


 


 

    이제 대충 결말이 어떻게 되겠구나 짐작할 텐데, 난 상관없다, 그래봤자 당신은 그애의 이름만 아는 거고, 우리가 어떻게 섹스에 이르게 됐는지는 모르니까. 우리가 어떻게 섹스를 하게 됐나가 제일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안 그러면 아비규환, 11쪽)

 


    서커스단의 재정은, 긴긴 겨울밤 소품 담당자가 불길을 살리기 위해 고체연료 찌꺼기에 던져 넣는 우랄 산맥 산 허브 조합만큼이나 불가사의하고 중독성이 강했다. 대출과 환매와 예상수입에 근거한 계약 및 역재구매 합의서 등이 있는데, (…) 그 부채를 갚을 길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경제적 신용이란 현대문명의 초석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그의 신념이 동물들의 기본적 고결함에 대한 거의 신뢰와 어긋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 경우와 같이 그 두 신념이 상충하게 되자 그 불화와 알력 때문에 속이 상했다. (스퀀크의 눈물, 다음에 일어난 일, 380쪽)

 


    “세상에 귀신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네.”

    “나도 알아.”

    “죽음이란 인식이 종료되고 세포가 부패한다는 것을 뜻하지. 사후를 상상한다는 것은 몹시 끔직한 개념이야. 불멸이라는 것은 모든 종교와 수많은 미신의 공통분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네의 말을 믿네.”

    “어쩌면 내가 미친 걸지도 몰라.” (척의 버킷, 507쪽)

 


    동반자살을 저지르는 커플은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연인 격으로 쳐주지만, 정확히 똑같은 시간에 서로를 살해한 커플은 온갖 신문에서 미친듯이 기사로 내보낸다. 가족들조차 헛기침을 하고 되도록 짧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들은 길고 복잡한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싶어 했다. 나는 수없이 탐문수사를 하면서 말할 수 없는 역겨움과 우월감을 감지했다. 하지만 내게는 아름다워 보였다. 종국에는 두 사람이 궁극적인 양보의 몸짓을 이루었음을, 자신들의 결합이 완벽한 원을 그렸음을 끝내 깨달았으니 이 얼마나 적절한가. 칼이나 독약보다 더 잔인하게 두 사람을 죽인 것은 필경 그 달콤하고도 쓰디쓴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소금후추통 살인사건, 542쪽)

 


    어쩌면 우린 모두 장님이다, 마음의 눈으로도 한눈에 모든 것을 보지는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죽는다, 다만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좀더 빨리 죽을 뿐이다. (어둠을 잣다, 6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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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1 23: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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