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릉의 비밀 - 중국 명나라 역사를 읽는다
웨난 외 지음, 유소영 옮김 / 일빛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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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릉의 비밀. 제목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어든 기억이 난다. 이집트 투탕카멘 능묘가 발굴되었을 때 발굴대원들이 연이어 죽어넘어진 사건을 연상시키는 제목이었다. 그만큼 흥미를 끌기 위해 택한 제목이려니 싶었으나... 책을 펴들고 서언을 읽어내려가면서, 그리고 1장으로 넘어가면서 제목의 의미는 너무나 분명하게 다가왔다.

1958년 명 십삼릉 가운데 하나인 정릉의 발굴과 유물출토 소식이 전세계에 타전된 후 30년이 지나도록 뒤따른 뉴스도 발굴 보고서도 없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황릉의 비밀이란 정릉 자체에 숨어있는 비밀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왜 정릉 발굴 보고서가 나올 수 없었던가. 그것이야말로 진짜 비밀이며 이 책이 내놓은 수치스럽고도 슬픈 고백이다.

내용은 세 갈래로 나뉘어 진행된다.

우선 정릉을 발굴하기까지의 진행 과정과 유물에 대한 묘사가 있다. 고고학적인 기록을 참고하여 소설처럼 풀어놓은 대목이다. 그리고 정릉의 주인인 명나라 만력제의 일생과 정치적 암투, 명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 소설과도 같이, 실제 일어난 사건에 토대를 두되 인간적인 부분을 그리려는 노력을 재미있게 그려낸다. 마지막으로 정릉 발굴을 둘러싸고 일어난 -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당시 중국을 뒤흔들어 정릉 발굴까지 휩쓸어간 폭풍과도 같은 사건, 문화대혁명에 대한 고백이 뒤따른다. 정릉 발굴이 끝난 시점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문혁의 광풍은 정릉 발굴에 피땀을 흘린 학자들을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황제의 시신을 불태우고 관곽을 부수고 견직물을 망가뜨리고 말았다.

위에 난이라는 작가는 <진시황릉>, <마왕퇴의 귀부인>, <법문사의 비밀> 등으로 고고학적인 사건을 소설적으로 보여주는 일련의 책을 우리나라에 선보였으나, 이 책은 유적과 유물보다 이를 둘러싼 역사적, 정치적 사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언급한 책들과 다르다. 비교적 현대에 가까운 시대이기에 명나라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는 점, 다른 유적과 달리 정릉이 새로 발견된 유적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발굴을 둘러싸고 벌어진 가슴아픈 참변 때문이리라. 덕분에 이 책은 가장 많은 '자료'에 근거하면서도 가장 소설적인 작품이 되었다.

고고학이란 결국 역사를 밝히는 학문이며,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이다. 문화 대혁명으로 인해 정릉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불타고 사라져버린 것, 훌륭한 인재들이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죽은 것은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그 과거를 외면해버리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가들의 모습 또한 읽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정릉 발굴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인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중임을 떠맡아, 세월의 오랜 더께를 파헤치고 낡은 유물의 파편을 그러모아 역사의 본래 모습을 찾아내고 복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역사의 빛과 어둠을 그대로 드러내어 죽은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교훈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두 사람이 붓을 든 이유이자 맹세이다. > (저자 서언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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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의 사나이 그리폰 북스 16
필립 K. 딕 지음, 오근영 옮김 / 시공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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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를 하다보면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만일...'에 부딪친다. 만일 히틀러가 어렸을 때 죽었더라면, 만일 연합군이 며칠만 늦게 일본을 항복시켰더라면, 만일 인종의 쿠데타가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등등 등등...한끝 차이로 벌어질 수 있는 엄청난 변화를 생각해보는 그런 가정은 반쯤은 안타까움, 반쯤은 호기심에서 시작되어 결국 역사에 만일이란 없다는 말로 결론을 맺게 된다.

뭐라고 한탄하고 안타까워해도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 돌이킬 수 없다면 '만일...'이라는 가정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것은 대체 역사 소설이라는 장르의 가치에 대한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대체 역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안타까운 일을 좋은 쪽으로 바꿔보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물론 그 반대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는 한 판 즐거운 상상은 될지 모르나 문학이 되기는 어렵다. 후자의 경우, 우리나라가 아직 일제 치하에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비명을 찾아서'나,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패배했다는 가정하에서 그려지는 이 소설, '높은 성의 사나이'가 모두 해당된다.

그래서...대체 어째서? 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가정하는가? 왜 읽는 이를 음울하고 어두운, 그다지 들어가고 싶지 않은 어둔 숲속으로 끌어들이는가? 독일과 일본이 승리했다면 얼마나 무섭고 싫은 역사가 전개되었을까를 보여주어, 연합군의 승리를 자랑하고 안도하라는, 그런 의도일까?

천만에. 소설을 다 읽어본 결과 다행스럽게도 그런 의도는 아니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부분은 '높은 성의 사나이', 연합군이 아니라 독일과 일본이 승리한 세상 속에서 그 반대의 현실을 - 즉 지금과 비슷한 현실을 - 그리는 소설을 쓴 바로 그 작가에게 있다.

이 소설 속에서는 두 번, 소설 속의 진실과 허구가 뒤바뀌는 장면이 나온다. 펜던트를 들여다보다가 한 순간 아마도 '현실'(지금 미국의)에 발을 들여놓은 일본인의 모습과, '메뚜기 무겁게 가로눕다'라는 소설을 왜 썼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주역이 '진실이기 때문에'라고 답하는 장면이다. 진실 속의 진실, 허구 속의 허구. 다시 현실로 돌아와 물어보자. 만일 연합군이 2차대전에서 졌다면......분명, 많은 일들이 달라졌을 것이고 우리에게나 유럽인들에게나 과히 행복하지는 못했겠지만, 나치스가 지독한 광기의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과연 그 승리가 전적으로 옳고 바르기만 했을까?

혼란을 초래하는 질문과 생각이기에 거기까지 정리해볼 마음은 없지만, 적어도 나는 이 소설이 그리는 대체 역사가, 지금의 역사 - 진실을 돌아보게 하기에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일본 문화에 대한 묘사가 넘쳐나기는 하지만, 필립 딕의 필치는 싫은 기분이 드는 숲속 길을 끝까지 걸어가게 만들만큼 뛰어나며, 소설 속에서 시작된 자아성찰은 독자들에게까지 여러 가지 상념을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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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에서 천산까지
김호동 지음 / 사계절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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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이라기보다는 감상문이 될 이 글, 제목이 영 탐탁치 않아 몇번이고 지우고 또 지우다가 결국 책 제목을 그대로 쓴다. 황하에서 천산까지 아시아 대륙 한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 네 민족, 네 소수민족의 이야기를 그리 쉬운 감상으로 엮어버릴 수 없었기에.

"우리는 곧잘 강한 자와 강한 민족의 역사에 매료된다. 위인과 영웅의 생애를 즐겨 읽는 것은 어쩌면 우리 내면에 '권력에의 의지'가 꿈틀거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세계제국을 건설하고 지배했던 파라오나 시저 혹은 징기스칸을 읽고 싶어한다. 그러나 진정한 강자는 약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약하고 짓눌려 온 민족들의 비가를 들려 주고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려 했던 신앙의 자취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것을 듣고 공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단지 오늘날의 중국을 더 깊이 이해한다는 차원을 넘어, 우리 민족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이 시대에 존재하는 수많은 약자들을 외면하지 않는 참된 마음의 넓이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저자 서문 중에서)

글은 담담한 어조로 회족, 몽골족, 위구르족과 티벳인들의 지난 세월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지금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열광적인 어조도 아니고 과장스럽지도 않은 담담함.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사람살이의 눈물을 보는 건 나만의 감상적인 눈일까.

사람이란 결코 선하게 태어난 생물이 아니며 생명이란 그저 화학 반응의 일종, 사회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밟고 살아가는 치열한 경쟁터일 뿐이라고, 인간이 자칭하여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오만을 비웃다가도... 문득 마음 한구석이 싸아해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맞닿뜨린다. 어째서 사람의 사람다움은 행복과 풍요 속에서가 아니라 절절한 고난과 아픔 속에서 빛을 발하는지.

그러나 저자도 그렇고 나도 또한, 그들 중국의 소수민족이 언제나 마음아픈 약자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으며 지금의 강자들 또한 한맺힌 시간을 보냈음을 안다. 또 짓밟히고 헐벗은 자들이라 하여 늘 그렇게 아름답고 꿋꿋하지 못함 또한 안다. 그럼에도 지금,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작은 목소리의 주인들을 알고 싶은 것은, 사람다움이란 것의 답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렇게 믿고 싶은 가냘픈 희망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을 비난할 줄만 알지 우리 안의 곪은 상처를 들여다볼 줄 모르는 우리 나라에서 더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역사공부를 배부른 자들의 소일거리쯤으로 치부하는 이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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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악마들 -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
피터 홉커크 지음, 김영종 옮김 / 사계절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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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혹은 중앙아시아의 모래 속에 묻혀버렸던 오아시스 도시 유적들의 이야기에는 아련한 향기 같은 것이 있다. 어쩌면 그 아련한 향기, 혹은 그리움, 혹은 아름다움이 바로 역자가 말하는 우리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실크로드의 여러 예술이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우며, 그 지역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기초 단계인 것도 나름의 이유가 될 것이다. 물론, 그들이 멸망해버렸다는 사실도.

20세기 초까지 중앙아시아(중국의 변방이라기보다는 이 말을 사용하겠다)에서 벌어졌던 발견과 약탈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당시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스벤 헤딘, 스타인, 르콕, 펠리오, 랭던, 오타니 등이 행한 일은 지금 보기에는 도저히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에 나름의 여러가지 측면이 있음은 사실이고, '중국측의' 입장만을 생각하여 비난하는 것도 옳은 행동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나는 역자의 친절한 주석에 감탄했다. 저자는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각을 보이려 하고 있으나...그 자신이 속한 문명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는, 그리고 어떤 편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역자의 서문과 주석은 그 한계를 훌륭히 보완해주고 있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세계는 강자의 논리로 돌아간다.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실크로드에 뛰어든 학자들에게는 탐구심과 더불어 공명심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유물을 실어내야 했던 것에는 경쟁심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신기한 보물을 모으고 싶어한 유럽인들의 수집 취향이 한몫했다고 본다. 그러니 비난받아야 할 것은 탐사자들- '악마들' 자신들만이 아니다. 지금까지도 이른바 수집가라는 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나라에서 많은 유물이 흘러나가고 있는지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어린 시절 나는 인디애나 존스라는 영화에 열광했었다. 그런데 학자로 나오면서도 오지에 들어가, 위험한 원주민들의 공격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보물(그것도 꼭 황금빛으로 번쩍번쩍하는)을 들고 나오는 그의 모습이 실크로드의 약탈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 모습에 열광하는 우리는 그때와 또 얼마나 다른가?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났더라면, 혹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 이라는 물음은 언제나 헛된 것이다. 사람이 과거를 묻고 알아야 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것이다. 물론 과거의 일 자체가 재미로 다가올 수는 있지만 말이다. 지식의 가치는 편견을 떨치고 시야를 넓히는 데에 있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실크로드의 악마들은 일단 재미있게 읽고, 그 다음에 현재의 우리의 모습, 그리고 저들의 모습을 생각케 하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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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왕의 반지 - 그레이트북스 2
콘라트 로렌츠 / 문장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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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우리 또래는 몇 가지 책을 자주 권유받았다.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의 위인전과, 파브르 곤충기, 시튼 동물기는 그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책들이었다.

그런데 종종 함께 거론되던 파브르의 곤충기와 시튼의 동물기는 내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개인적 성향 탓에 시튼의 시각이 거슬린 탓도 있었겠지만, 파브르의 곤충기는 엄연히 객관적이고 대단한 노고를 요구하는 '관찰기록'이고, 시튼의 글은 기록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사람들이 흔히 동물이나 원시인에 대해 투영하는 감상적인 시각을 답습한 미담일 뿐이라고까지 여겼었다.

그런 면에서 콘라드 로렌츠의 수필집, '솔로몬왕의 반지'는 파브르의 곤충기에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다.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갖고 읽을 수 있고, 재치있는 문장과 생각지 못한 사건들 너머에서 깊이있는 애정, 동물에 대해서뿐 아니라 인간에 대해 가진 저자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노벨상을 받은 바 있는 생물학자인 저자는,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일상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편견을 무너뜨린다.

저자는 '솔로몬왕의 반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솔로몬 왕은 짐승과 새와 물고기와 벌레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나도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 ...(중략)...모든 동물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는 솔로몬 왕보다 못하지만 그처럼 마법의 반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보다 낫다.
...(중략)...나 개인으로서는 동물과 사귀는 데에 마법의 반지를 사용했다는 것을 어쨌든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살아있는 존재는 마술이나 요술 없이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즉 진실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의 애정, 그의 해박함과 재치, 그리고 그 참을성에 경의를 표하며 내가 어릴 적 느꼈던 그 경이로움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 특히 요새 너무나 많은 숙제와 입시의 무게에 찌들어있는 후배들에게, 어린시절에 읽어야 할 책이란 바로 이런 것, 참고서 100권보다 나은 양식이라 말해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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