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얼굴
니겔 발리 지음, 고양성 옮김 / 예문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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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끼리 엘리아데의 <성과 속>을 읽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서로 엇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지식을 지닌 친구들이었던 만큼, 명확한 결론을 얻어낸다기보다는 부담없이 자기 생각을 확인하고 남의 생각을 듣는 난상 토론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처 신화와 종교가 왜 존재하는가에 끈질기게 매달리던 친구 하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역시 난, 신화나 종교는 다 죽음 때문에 생기는 거라고 봐.'

그 말에는 부정하기 힘든 진실이 담겨 있다. 사람은 왜 죽는가? 그 질문을 빼고는 우리가 왜 사는가를 물을 수 없다. 죽음이 항상 우리 곁에 있으며, 동전의 앞뒷면처럼 삶과 붙어있다는 사실은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신은 믿지 않을 수 있지만 죽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죽음이 존재하며, 언제든 우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갈 수 있음을 안다. 죽음을 내세로 가는 통로로 여기는 이도 있고,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죽은 혼이 귀신이 된다고 믿는 이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은 죽음이 어떤 것인지 판단을 내려야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처음 경험한 순간부터.

아, 거창한 이야기는 그만두자. 내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려고 생각한 것은 죽음에 대한 철학을 구구절절 풀어보려고 한 게 아니다. 그저 이 책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것 뿐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며, 또 저들에게는, 또 그들에게는 어떤 현상인가?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경험한다. 죽음의 순간만큼 인간성의, 그리고 문화의 본질을 드러내는 순간은 달리 없다. 인류학자들은 현지조사기간에 마을에서 장례식이 치뤄지면 운이 좋았다고 여긴다. 현지인들에게 불길한 일을 좋아하는 까마귀라고 불린대도 변명할 여지가 없겠지만, 장례식이라는 절차 자체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장례식만큼 마을 사람들간의 인간 관계가 뚜렷이 드러날 때가 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죽음만큼 삶을 잘 비추는 거울은 없다는 말이다.

<죽음의 얼굴>- 개인적으로는 '무덤에서 춤추기'라는 원제가 더 마음에 들지만- 은 어찌 보면 잡기에 가까운 짤막짤막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저자가 조사 중에 직접 겪었던 에피소드를 나직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저명한 학자의 근엄한 진술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죽음의 기원에 대한 동화같은 신화들이 나오고 뒤이어 신문에 실린 기사 한토막이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과거에서 현재, 미국에서 아프리카까지 온갖 시간과 장소를 넘나들며 죽음을 둘러싼 삶의 조각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것이 이 책이다. 죽음에 대한 다양하고 풍성한 기록들. 그리고 그것은 학자들과는 무관하게 다른 이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준다.

수필과 기획 기사 중간쯤 위치한 듯한 애매함이나 산만한 구성이 딱 마음에 차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처럼 죽음의 존재를 부정하고 삶에서 밀어내려 하는 시대에 이런 책 한권쯤 봐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관심이 생긴다면 더 찾아보면 더 좋겠고 말이다. 내용은 쉽게 읽을 수 있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번역을 맡은 이가 인류학과 무관한 까닭에 일부 문장이 맥락이 닿지 않는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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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씨의 결혼 서문문고 178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 서문당 / 197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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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곡을 좋아하지 않는다. 희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때로는 불가사의하게 여겨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묘사도 하나 없이 대사만으로 이어지는 상황과, 인물들간의 팽팽한 긴장감 - 종종 이해할 수 없는 - 과 재치,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한정되어 있는 무대. 대체 뭐가 재미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희곡이란 따분한 장르다. 그것이 내 믿음이었기에, 이 책을 추천받고 또 선물받아서 읽으면서도 마음은 내키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이렇게 통쾌하고 재치있을 수가! 빠른 사건 전개와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전, 그리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통렬한 비판은 그야말로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케 했다. 특히 이 책 표제작인 '미시시피씨의 결혼'보다도 뒤에 있는 '로물루스 대제'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무릎을 쳤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로물루스는 로마가 게르만인의 손에 함락되기 직전에 닭이나 치며 무심히 살고 있는 마지막 황제로 나오는데, 역사적인 배경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태도와 대사들이 중요하다.

감탄한 대사들 중 일부를 적어보고 싶지만,진정한 묘미는 앞뒤 정황을 함께 읽어야만 와닿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하겠다. 짧고 가벼워 지하철에서 읽기 좋다는 장점도 있으니 읽어보시길. (...이러니 꼭 책장사 같군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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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부족사회에서의 성과 기질 - 이화문고 50
마가렛 미드 지음, 조한혜정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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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류학이라는 생소한 이름. 재미없어보이는 제목. 학술서일 게 분명하다 싶은 책표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서가들조차도 이 책의 제목을 들은 적이 없거나 보았어도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겉모습에 속지 말라. 이 책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낌없는 추천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고전이다. 무엇때문에 고전이냐고? 물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뛰어난 고찰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세 부족사회에서의 성과 문화'라는 재미없는 제목의 의미는 단순하다. 그대로 읽으면 된다. 이 책은 고립되어 살아온 인접한 세 부족에 대한 민족지 기록이다. 그런데 세 부족사회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참으로 우리와 '다르다'. (사실 현대 인류학은 그렇지 않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인류학이라고 하면 신기한 원시부족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감안한 말이다) 분명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 부족들도 외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통을 잃고 혼란을 겪었겠지만, 이렇게 다른 문화, 이렇게 다른 가치관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있다.

세 가지 사회의 특성을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또다른 인류학의 명저 '문화의 패턴'(루스 베네딕트)와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으나, 관점은 약간 다르다. 베네딕트와는 달리 미드는 성차라고 하는 문제에 주목한다. 그녀는 미국 사회의 엄격한 성격 구분, 즉 남성은 진취적이고 공격적이며 독립적이고, 여성은 모성적이고 의존적이며 수동적이라는 규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와는 전혀 다른 세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녀 모두 온화하고 수동적이며 다정다감한 것이 이상적인 아라페쉬 사회, 남녀 모두 공격적이고 거칠며 과격한 것이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먼더거머 사회, 끝으로 미국의 성역할 구분을 뒤집어놓은 듯 여성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챔불리 사회가 그것이다.

이들 세 사회의 생활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움을 불러 일으키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 미드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점이다. 성차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길러지는 것이라는 이 책의 기술은, 여성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들어보았을 법한 이야기이다. 물론 실제 책을 읽어보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규정해버린 '이상적인 사람', '이상적인 여성', '이상적인 남성'이라는 개념들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항상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회의 이상에 맞지 않는 기질을 타고 났기에 고통받는다. 그 점을 아는 것, 더 나아가 그 사실을 알고 개개인이 규정된 이상을 향해 억지로 끼워맞춰지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으로 '진보한' 사회일 것이라는 그녀의 주장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여자다운 여자, 남자다운 남자를 강요받음으로써 고통받은 기억이 전혀 없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문화를 만드는 것은 사람인데도 그 문화의 틀에 갇혀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이란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가.

이 책에 결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한바탕 감탄을 늘어놓은 주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는 점, 이해하기 쉽게 쓰여있다는 점 등이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일 것이다. 진심으로 한 번 읽어보기를 추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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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고의 숲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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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라는 말은 어째서인지 밤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모든 그로테스크한 것, 환상적인 것, 신비스러운 것, 꿈과 같은 것들은 태양이 내리쬐는 낮보다는 밤에 더 어울리듯이 평야와 인간의 도시보다는 숲 속에 더 어울리는 것이다. 아직 인간의 침범을 받지 않은 곳, 오래 전부터 인간의 영역 밖에 남아있었던 곳. 그것이 아직까지도 숲이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느낌이 아닌가.

그리고 이 소설 속의 숲은 그런 이미지를 한껏 응축시키고 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손상되지 않은 숲. 침입자를 물리치고 끝없이 이어지는 깊고 어두운 내면을 간직한 숲. 그 숲속에서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모든 환상이 실체를 갖추고 튀어나온다.

수수께끼같은 발단에서부터 소설을 읽어나가며 나는 태양빛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어두운 숲 속 오솔길을 걸어들어가는 느낌에 빠져들었다. 저 안에 뭔가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게 있다는 느낌. 신화적인 비극을 예감케 하는 글의 전개는 그런 불안감과 매혹을 불러 일으킨다. 환상문학, 혹은 SF라는 장르에 속해 있으면서도 장르와 무관한 독자들에게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진정 궁금한 것은 이 책의 속편이 나올 날이 있을까 하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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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말할 것도 없고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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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해서 주교의 새 그루터기를 찾았는가> 라는 기상천외하게 긴 제목. 시간 여행에 대한 sf소설임에는 틀림없건만, 시간의 자체 교정이라는 전체 아이디어 안에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배경으로 엎치락 뒤치락하는 이야기는 유쾌한 희극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이건 보기에 따라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는 일.

빅토리아 시대의 일반적인 모습들은 물론고 옥스포드의 유명한 괴짜 교수들, 아가사 크리스티, 교회 재건축과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참으로 많은 것을 엮어넣은 작품. 그 점이 발목을 잡는 면도 없지는 않다. - 영국사와 풍습을 거의 모르는 사람이 볼 경우에는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측면이 있으니;; 솔직히 다른 작가라면 3,400쪽 선에서 끝냈을 것을 700페이지에 걸쳐 늘어놓은 것은 다소 부담스럽지만, 확실한 것은 그 입담이 참으로 유쾌하고 수다스러워 끝까지 낄낄거리며 읽게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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