듄 1 - 제1부 듄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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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이 황금가지에서 다시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반가움 반, '이걸 또 사야 하나' 하는 난감함 반이었다. 사실 풀빛에서 나온 듄을 예전에 이미 사서 보았기에 어서 5, 6부가 나오길 기다릴 뿐 앞부분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우연찮게 보게 된 황금가지판 듄은 전에 본 그 듄이 아니었다. 이런 맙소사. 대조해 가면서 보니 이빠진 문장에 잘린 부분까지...사실 당시에 듄이 나왔다는 것만 해도 선구적인 일이었으니 이제와서 불평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탄이 나올 일이다. (내가 무슨 돈으로 이 많은 권수를 다시 산단 말인가??)

어쨌든 다시 손에 잡은 듄은 여전히 감동적이며, 초장부터 사막의 분위기와 장엄함에 마음이 떨린다. 몇번을 되풀이해 읽어도 새로움이 있다. 비교적 가벼운 1, 2부에서부터 점점 무겁고 난해해지는 3, 4부까지. 놀랄 만큼 꼼꼼하고 섬세한 설정과 복합적인 상징, 풍부한 종교철학에 이르기까지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작품이다.

결코 쉽고 가벼운 내용이 아니라서 (가장 가볍다는 1부조차도 뒤에 있는 사전을 대조해가며 새로운 용어에 익숙해져야 하는 부담감이 만만치 않다) 편하게 읽어보라고 권하지는 못하겠지만, 두고 두고 몇번씩 읽어볼만한 고전이라고 추천하겠다. 깊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얄팍한 상업소설에 질렸다면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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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까치글방 199
존 키건 지음, 유병진 옮김 / 까치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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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TV 드라마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드라마 '왕건'의 인기 비결이 어디에 있을까? 개인적으로 왕건을 좋아하는 시청자 중 한 사람의 자격으로 말하자면 역시 그 큰 스케일과 전국시대라고 하는 배경, 전술과 전략이 얽혀드는 호쾌함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삼국지를 읽을 때마다 가슴 두근거리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전쟁사와 그 에피소드들에는 분명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아마 전쟁터라고 하는 상황이 극단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고 인간성의 양쪽 측면을 동시에 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 매력이 전쟁의 참혹함과 비참함이라는 뒷면을 간과하게 만들어서는 곤란하다. 제아무리 화려하게 그려진 전쟁이라도, 그 속에서 죽고 다치고 무너져간 사람들이 있으며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화를 당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면에서 더더욱, 전쟁을 다각도에서 파악해 보려는 움직임에는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을 빼놓을 수가 없는 이상에는.

전쟁이란 인류의 필요악이며, 천적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또 인간은 - 특히 남자들은 천성적으로 폭력성을 가지고 있어, 일정 숫자 이상에 도달하면 전쟁을 하게 되어있다고 하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클라우제비츠처럼 전쟁이란 정치의 연장선상이며, 지금과 같이 전국민을 동원한 전면전이 이상적인 전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중세 이탈리아처럼 용병집단을 고용하여 최대한의 효율과 최소의 피해만으로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사람도 있다...그만큼 전쟁은 인류사에서 빠진 적이 없음에도 그 정체는 모호하기만 한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우리'는 대체 왜 전쟁을 할까? 그 질문은 다음 대전에서는 전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음이 명백해진 지금,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 책이 그 질문에 대해 대답을 준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전쟁사를 단순히 전술사나 전사(戰史)로써가 아니라 전쟁문화사로, 사회와 문화, 역사의 맥락 속에서 보여주려 한 시도는 재미있을 뿐 아니라 의미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뭐 거창하게 말했지만 순수하게 전쟁사라고 하는 흥미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만으로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석기, 동물, 철기, 화기 등으로 장을 나누고 보론으로 요새화, 군대, 병참과 보급 등을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정리하고 있어 자료적 가치도 충분하다. 덧붙이자면 저자 존 키건 교수는 최근 MBC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전쟁과 문명'(이 제목이 맞길 기도한다)에 조언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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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대담, 이윤기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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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캠벨이라고 하면 미국의 유명한 비교신화학자이며, 신화를 단순히 신화 자체로서가 아니라 현대인의 생활과 문화의 맥락에서 해석하려 한 사람이다. 아무리 저술이 아니라 대담기록이라고는 해도 그의 저술에 별 셋밖에 주지 않다니 너무한 걸까? 아니, 그나마 나는 캠벨의 이름에 대한 경의로 원래 의도보다 별 하나를 더 매기고 말았다. 그만큼, 이 책에 대한 내 평가는 높지 않다. 그저 '볼만한 책' 의 수준 이상은 아니다.

사실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조셉 캠벨이라는 사람은 - 왠지 학자라고 평하기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묘한 인물이지만 - 때로는 그를 접한 사람들에게 인생의 스승으로 추앙받고 그의 책을 성서처럼 받들게 하는 인물이다. 뭐 그정도는 아니라 해도 그에게 매료되어 있는 사람을 직접 본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그의 논조는, 학자라기보다는 마음 따스한 노스승처럼 다정하고 자비로운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문제는 그 매력이 나처럼 회의적인 사람에게는 먹혀들기는커녕 묘한 반감을 사버린다는 것일 게다. 인간이 더 나아질 가능성, 더 높아질 가능성에 대한 낙관을 이야기하는 학자라면 같은 노선이라도 엘리아데나 융 쪽이 훨씬 매력적이다. 왜냐고? 캠벨은 너무나 교조적인 때문이다. 그는 까마득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온갖 지방을 종횡무진하며 해박한 신화지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이론틀에 근거로 삼고 예시로 들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방식에서 문제는 어떤 '신화'라도 그의 입을 통해 인용이 되고 나면 더이상 본래의 신화가 아니게 된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캠벨이 신화해석자가 아니라 재창조자라고 불렸을까.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그 단점은 장점으로도 작용한다. 그가 인용하는 신화의 단편들은 그 본래 모습과 자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때로는 깊이있는 관심을 유도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교조적이면 또 어떤가. 그게 평생이든 순간이든, 방황하던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에서 길을 찾는다면 그것 또한 대단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니 캠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도 신화에 관심이 있다면 역시 캠벨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고,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단, 이 책은 캠벨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인가를 들여다보기에는 좋지만 그의 이론과는 조금 다르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를. 꼭 다른 책까지 읽어보고 판단하라고 말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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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 칼비노 선집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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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전쟁터. 수많은 기사들 사이에 반짝이는 백색 갑옷을 입은 (아니 갑옷으로서만 존재하는) 아질울포라는 기사가 있다. 그는 실체가 없는 인물이다. 때마침 신참내기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혈기에 불타는 젊은 기사가 도착한다. 그는 아질울포에게서 안정감을 느낀다. 전쟁터에는 강력한 여자 기사가 한 명 있다. 그녀는 아질울포를 사랑한다. 젊은 기사는 그녀를 사랑한다.

아질울포가 기사 서임을 받은 것은 어느 귀족 여인의 순결을 지켜준 일인데, 그녀가 순결하지 않았다는 고변이 들어온다. 아질울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는 이 말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전쟁터를 떠난다. 그는 자신의 거울상인 종자 - 실체가 있으나 존재를 모르는 - 를 달고 떠난다. 그 뒤를 여기사가 뒤따른다. 그 뒤를 젊은 기사가 따른다.

모험은 '아더 왕 이야기'에 나올 법한 패턴대로 따라가지만 기묘하게 뒤틀려 있고, 마침내 사건은 뜻밖의 오해로 종결을 맺는다. 아질울포가 존재를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게 끝이냐고? 아니다. 시종일관 이야기를 서술하던 정체모를 수녀가 아직 남아있다. 그녀는 소설 끝에서야 정체를 밝히고, 수녀복을 집어던지고 뛰쳐나간다. 그녀가 바로 여기사였다.

조금은 침침하게 뒤틀린 동화같은 느낌을 주는 이 소설에서 사실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모든 사건의 중심에 놓인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있다. 이 말 자체가 대단한 역설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투명인간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갑옷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일들을 신경쓰고, 실제로는 아무도 챙기지 않는 기사도를 곧이 곧대로 행하는 미덕의 화신이며, 놀라울 정도로 여성에게 친절하고도 헌신적이며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 기사 중의 기사다. 당연히 그런 인물이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의 특수성 -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 을 접어두고 보면 이거야말로 영웅소설에 나오는 이상적인 기사상이 아닌가? 내가 보기에 존재하지 않는 기사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거기에 있었다.

아질울포의 '비존재성', 그러니까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성격은 현실적인 인물들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그는 갑옷 마디를 철컥이며 환상적인 전쟁터 위를 걸어다닌다. 그 전쟁터에는 고딕소설에서 나올 법한 사건과 인물, 사랑과 우정이 있지만 그 모두가 기묘하게 뒤틀려 있다. 어떤 것도 그리 진지하지 않으며, 누구도 아질울포만큼 신념에 충실하지 않다.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그것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는 것도 한 가지 재미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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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온 편지 - 작가정신 소설향 10 작가정신 소설향 10
장정일 지음 / 작가정신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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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구절 풀어가는 문체는 물흐르듯 잘도 넘어가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가끔은 웃음을 터뜨릴 만한 재치있는 구절도 눈에 띈다. '중국에서 온 편지'는 내용을 떠나 마음편히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게 그리 편하고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진시황의 맏아들 부소. 사서에는 고작해야 그가 진시황의 분노를 사서 변방으로 쫓겨나고 아버지의 죽음 후에 전달된 거짓 명령에 따라 자살한 비운의 왕자로 나올 뿐인 부소. 작가는 이 '비운의 왕자'를 화자로 선택하여 어릿광대처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제 하고 싶은 이야기 타령을 풀어놓는다.

사마천의 사기는 이야기의 줄기일 뿐이요 황금가지는 곁다리일 뿐. 실제로 하고 있는 말은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통렬한 야유요 비야냥이다. 누구에 대한, 무엇에 대한? 진시황이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아버지', 가부장, 권력자. 그것은 장군 몽염에 대해 되풀이되는 작가의 비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네가 백성 혹사시킨 죄는 깨닫지도 못하고 무슨 지맥 끊은 것에 죄를 돌리려고 하는가...

좋게 말하면 참신하고, 나쁘게 말하면 사람을 황당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쓴 에세이. 시원한 맛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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