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기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김현영·문순실 옮김 / 역사비평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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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은 지리적으로는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역설적으로 매우 먼 나라이다.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패권을 잡으려는 중국은 야심을 드러내고 있고, 이를 의식한 한국과 일본은 외교적으로 미국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지금 동아시아에서는 과거에 대한 이해를 둘러싸고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면서 소위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간도와 독도 문제를 비롯한 오랜 영토분쟁에 대해 여러 나라들은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를 역사에서 찾기에 바쁘다. 그리고 자국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그를 국내외에 관철시키기 위해 역사와 역사교육을 이용한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 파동에서 시작되어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한층 가열된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은 과거의 역사적 실체를 사실적으로 구명한다고 해서 해소될 성격의 것은 아니다. 각국은 모두 문제가 되는 영토에 대해서 자신들의 영유권을 뒷받침하는 자료들만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쟁 과정에서 각국의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방향으로의 역사 연구와 역사교육의 강화는 해결책이 아니라 반대로 갈등을 유발하고 증폭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한다. 

  이렇듯 역사는 국가 간 갈등을 첨예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완화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각국의 역사를 개별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관점 하에서 기술하는 것일 수 있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사'라는 협애한 틀이 아닌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 있고, 각 국가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폭도 깊고 넓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미래를 여는 역사』와 같이 동아시아의 역사가들이 모여 공동 교과서를 내려는 시도를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지금 서평의 대상이 되는 이 책『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는 비록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쓰인 책은 아니지만, 그 부제처럼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는『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소개되었지만, 사실 이 책은 일본의 중앙공론사에서 기획한 '세계의 역사' 총서 30권 중 한 권이라고 한다. 동아시아 근세사를 연구하는 기시모토 미오와 미야지마 히로시가 각자의 전공 분야인 중국의 명청시대와 조선시대를 각각 맡아 서술하였다.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미덕은 그다지 어렵지 않고, 가독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한국과 중국의 어떤 전통이나 풍습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조선시대와 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역사를 최근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개설서에서는 흔히 정치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소홀히 하기 쉬운데, 비록 정치사에 비해서 다소 미약하긴 하지만 사회사나 문화사적인 측면에도 일정 부분 이상의 분량을 할애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무엇보다 조선시대의 역사와 중국 명청사를 독자적이고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더불어 기술하고 있다는 점, 나아가 그 이외의 다른 주변 나라의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눈여겨 볼 만 하다. 따로 뗄 수 없이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던 각 국의 역사를 전체 동아시아의 틀에서 파악하고 설명하고자 한 저자들의 시도를 높이 사고 싶다. 

  다만 현실적 문제로 각각의 저자가 따로 작업한 것 때문인지,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노정했다. 몇몇 설명들을 제외하고는 서술들이 각 국의 역사를 그다지 유기적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다른 각각의 지역을 연구한 전공자들이 중국과 조선의 근세에 대해 기술한 내용을 그냥 단순히 시대에 맞게 배열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이 책만의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동아시아 공동 역사교과서 작업 등에서도 지적받았던 사항이다. 각 나라의 역사를 시간 순으로 나란히 배치 및 나열한다고 해서 그 책이 아시아적 관점, 세계적인 관점에서 쓰인 것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라는 이 책의 부제가 조금은 무색하지 않나 싶다. 일국사를 넘어서 세계사적인 관점으로 역사서술을 하려면 역시 교류사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국사'의 관점에서 진행된 연구를 통해 만들어진 기존의 편협한 역사를 성찰해보고, 앞으로의 역사 연구의 시각과 지평을 확대하기 위한 차원에서 미약하게나마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시도들이 좀 더 심화되고 확장된 고민을 거쳐 그 내용을 깊고 풍부하게 하면서 지속적으로 생산되길 바란다. 역사가 갈등의 도구로 이용되기보다는 동아시아의 화합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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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 20주년 기념 프로젝트 앨범: 환타스틱 프렌즈
이승환 노래 / 스톤뮤직엔터테인먼트(Stone Music Ent.)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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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나의 우상이었던 이승환 옹이 89년도에 데뷔했으니까 벌써 20주년이다. 7집까지는 진심으로 좋아했는데, 8집부터는 의무감에 샀다. 사실 이번 20주년 앨범도 마찬가지.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의 신곡 두 곡이 실려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그의 노래들을 다른 여러 아티스트들이 참여해서 리메이크 해서 불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건 일종의 헌정앨범 같은 건가. 

  타이틀곡이라 할 수 있는 'My fair lady'는 7집에 있는 '만추'라는 노래의 느낌도 나고, 아무튼 기존의 그의 노래 색깔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이승환은 그의 기존 팬들을 너무 사랑하는 것 같다. 팬들 그만 배려해줘도 좋으니까 콘서트에서 뿐만 아니라 음악에서도 새로운 시도들을 잔뜩 하면 좋을텐데.

  다른 가수들의 노래는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을 부르는 알렉스의 느끼한 목소리만 빼면 다들 신선하니 괜찮다. 노브레인, 아웃사이더, MC스나이퍼, 호란, 윤건, 윈디시티, 이하늘, 타이거 JK, 넬, 유희열, 조권, 훼일, 윤도현 등.  

  특히 어쩌면 20주년 기념의 의미를 가장 잘 살려줄 수 있는 곡인 '텅 빈 마음'을 리메이크해서 부른 윈터플레이! 훌륭하다.

  CD케이스에 대한 색다른 시도를 하고픈 맘은 알겠는데, 거대해서 보관하기 좀 힘들고,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그냥 하드보드지에다가 씨디를 떡 하니 붙여놔서, 까딱하면 CD에 기스 생기도록 만들어놨다. 

  나는 나름 결벽증 있고 때때로 획일적인 거에 목 매는 인간이라 나란히 정렬된 CD들을 보면 마냥 흐뭇하다. 따라서 그냥 일반적인 CD케이스가 좋은데, 그런 면에서 이승환과 나의 궁합은 최악이다. 6집부터 정상적인(?) CD케이스가 없다. 

  뭐 이런 저런 말이 많았지만 이승환의 팬이라면 나처럼 의무감에서라도 하나쯤 사둬야 할 앨범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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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서 온 편지
조규찬 글.그림 / 이른아침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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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3 시절, 한창 좋아하던 에쵸티나 핑클 같은 아이돌들의 자리를 대체한 건 김동률, 이승환, 그리고 '조규찬'이었다.

  올해로 그의 팬이 된지 딱 10년이 된 나는 그가 만들어내는 멜로디도 좋아하지만, 사실 그가 곡에 입히는 노랫말들을 정말 사랑한다. 그런 내게 그의 앨범에 담긴 가사가 아닌 다른 글들로 그를 만날 수 있는 건 일종의 행운이다. 

  그의 노래 가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글 솜씨는 보통이 아니다. 이번에 나온 그의 에세이집 '달에서 온 편지'를 한 번 '사서' 읽어보라. 금새 느낄 수 있다. '가수' 조규찬이 아니라, '글쟁이' 조규찬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책과 함께 있는 CD에 담긴 그의 조근조근한 목소리, 그리고 그의 아내 헤이가 부른 새로운 노래 한곡은 행복한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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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지음, 김기협 옮김 / 민들레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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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 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교사생활을 해온 존 테일러 개토라는 사람이 쓴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지금의 공교육제도가 아이들을 바보로 만드는 주범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공교육은 근본적으로 각 개개인의 자유로운 생각과 판단을 제거하고 창의력을 억제하는 대신 획일화된 사상을 주입한다. 그리하여 학교는 '근대에 발명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기제'로 작동한다. 그 '체제'라는 것은 작게는 국가의 교육 독점하에서 생계를 꾸려가거나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진 현실을 뜻하며, 크게는 민족국가와 무제한적 생산과 소비를 통해 유지되는 자본주의체제를 가리킨다. 

  개토는 미국 학교 교육이 프러시아의 교육제도를 차용했음을 이야기한다. 프러시아가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주의적 목표 아래 중앙집권적 교육제도를 도입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인간을 길러내고 그들을 자원으로 투입해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이권다툼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는 사고로부터 의무교육은 탄생했다. 해방 후 한국은 미국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이식받았으니 결국 프러시아의 것을 모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프러시아 식 교육방식에 대해 살펴보자면, 우선 과목들을 쪼개고 수업시간을 토막 내어 종소리가 울리면 수업을 마치도록 만든다. 그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를 받아 스스로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또한 학생들은 교사가 던져주는 추상적인 지식의 편린들만 배우다보니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약화되어 졸업할 때는 고분고분한 '소시민'이 되어있다. 이런 '소시민'은 정책결정자에게 대들 수도 없으며, 설령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오롯이 지켜나가거나 그 문제의식을 깊고 넓게 확장시킬 줄 모른다.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은 아이들은 비판적인 생각을 할 줄 모르고 올바르게 토론하는 능력도 없다. 

  게다가 지난 150년간 제도교육은 경제적 성공을 위한 준비를 주된 목적으로 내걸어 왔다. 좋은 교육이란 좋은 일자리를 얻어 돈을 잘 벌고 남들보다 더 좋은 물건을 많이 갖게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 교육에서 낙오되는 이들은 물질적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된다. 이 주장은, 주장 자체가 내포한 도덕적 진실성이나 현실적 효능은 전혀 의심되지 않은 채로, 학생과 학부모들을 겁주고 통제하기 쉽게 만들어왔다. 결국 지구 환경을 위협하는 무절제한 소비를 더더욱 부추기는 길로 교육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개토는 이러한 문제들을 타개하기 위한 영감을 각 가정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사회'로부터 얻는다. 그는 끈끈한 공동체적 연대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는 의무교육'조직'을 정서적 만족을 주는 '사회'로 전환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교사자격증 제도의 폐지를 시작으로 하여 교육의 국가 독점을 혁파하고 자유시장의 논리를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가족학교들, 소규모 기업학교들, 종교계 학교들, 기술학교들, 농장학교들이 다양하게 병립해서 정부교육과 경쟁해야한다는 것이다. 독학까지 포함해서 자기에게 맞는다고 생각되는 교육의 종류와 스승을 학생들이 직접 선택한다. 

  존 테일러 개토의 문제의식과 그로부터 비롯된 공교육 비판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의 해결방법은 혁명적 상황이 도래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유럽국가들과 같이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다면 또 모를까, 입시를 통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의 목표로 설정되어 있는 한국적 상황 하에서 우선 선택지는 소위 '인문계' 고등학교이다. 다른 종류의 학교를 가는 아이들은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탈락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진학하게 된다. 또한 어떤 형태의 학교에 진학한다고 하더라도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기에 어느정도 한계가 있다. '그래도 간판이 중요한 것 같다며' 서울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던 한 대표적 대안학교 출신 여학생의 TV 인터뷰가 씁쓸하게 다가왔던 이유이다.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관점과 진단, 해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현재의 공교육이 위기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 대안으로 많은 이들이 대안학교나 홈스쿨링과 같이 체제 내부에서 체제를 거부하고 '낙오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이때의 낙오는 무능력의 표현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가리킨다. 철학자이자 교육운동가인 김상봉은 이것을 '내부로의 망명'이라고 칭하며 교육의 새판을 짜기 위한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본인은 교사가 되어 공교육제도 안에 포섭될지도 모르는 입장으로서, 현재의 교육제도에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체제 내에서 점진적으로 바람직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쪽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고민으로 얻어진 결과물들은 당장 내 교실과 학교에서부터 시작하여 차츰 관철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평교사들의 주도하에 몇몇 공립학교들이 '공교육 내의 대안학교'를 표방하면서 철저하게 '학생 중심'으로 나름의 새로운 실험들을 시행하거나 준비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다른 방법들이 존재할 것이다. 물론 이런 노력들은 상대적으로 편한 직업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교사를 더 힘든 직업으로 만들고 승진과도 거리를 멀게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금의 용기를 내어 내가 가르치는, 혹은 가르칠 아이들이 단지 '내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추구해야할 목적' 그 자체로 여긴다면 마냥 힘들기만 한 일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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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명의 기반 - 철학적 탐구
강유원 지음 / 미토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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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리빨리'라는 말이 한국인을 나타내는 표현 중에 하나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이것은 흔히 말하듯 압축적 근대화의 소산일 테지만, 사실 자본주의 자체가 인간을 신속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기술의 혁신에 따른 빠르고 무한한 생산과 성장이라는 목표 아래 사람들을 채근하는 것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특징이 아니던가. 빠른 속도가 특징인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더욱 빨리 진행해왔으니 한국인에게 뭐든 급하게 하려는 습성이 없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여유도 없이 시간에 떠밀려 바쁘게 사는 것은 비단 한국인들 뿐만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 끊임없이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다지만, 우리는 너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말의 성찰도 없이 앞을 향해 급하게만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대 이후 세계를 속도감 있게, 핍진(乏進)적으로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결과 "과거는 쓸모 없는 것이 되었고 진지한 반성 위에서만 성립하는 역사라는 거대한 구조, 인간 집단의 정체성을 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제 역사는 단지 과거의 사실들을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현재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인식도 적지않다. 게다가 "역사라는 이름 아래 거대한 담론과 웅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책들은 제쳐 지고, 미시사-생활사 등이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역사가 호기심 충족 수단 정도로 전락"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하고, 자연스럽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역사 철학'에 시선을 돌리도록 한다. 일종의 '역사 철학' 책인 이 책에서 저자는 역사를 뭔가 다른 의미로 읽을 것을 제안하며, 역사를 인류 자유의식의 진보라고 말한 헤겔의 '자유-민권' 중심의 역사관과, 자유의 개념이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기를 바랐던 마르크스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검토하고 그것이 과연 몇 사람의 자유를 위해 기여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은 그러한 관점에서 '물질적 기반'과 '인간의 정신활동' 과의 관계, 즉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했는가를 중심으로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각 시대를 조망한다.
 

  책 말미에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먹고 사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거론한 것이, 역설적으로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말하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한다.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은 단지 어떤 방식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시스템을 통한 욕망의 절제"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단계로 이행하자는 것이다. "세상 안으로 들어가 '먹고 사는 문제'가 핵심임을 깨닫고, 그러나 스스로가 인간인 이상 오로지 그 문제에 매달릴 수만은 없음을 알고, '먹고 사는 문제'를 초월하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도덕적 원리이자 칸트의 도덕"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들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루 이틀의 일만 반성해서는 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전체를 살펴봐야한다고 역설한다. 그렇게 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았던 시대와 짐승같이 살았던 시대가 보인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동물들에게도 핵심 과제이다. 만약 인간이 이 문제에만 매달린다면 동물과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우리는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서로를 해치고 죽이던 인류 야만의 시대에서 벗어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살고 있으며, 사실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윤 추구와 체제 유지라는 명목 하에 전쟁과 환경파괴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고, 제국주의나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노골적으로 행해지던 착취는 그 모습을 세련되게 바꾸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인류 전체가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제 어떻게 그것을 나누어 가야할지 고민해야할 때이건만, 더 많은 것을 축적하고 독점하려드는 짐승들이 여전히 넘쳐난다.
 

  현대인은 누구나 빠르게 흘러 가는 시간 속에서 정신 없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짐승과 같은 수준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나'는 누구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통해 개인의 주체성을 찾고, 나아가 역사라는 '집단의 기억'을 통해 사회적 정체성을 확립해야한다. 저자는 이것이 전제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언제든 파시즘과 같은 파국을 맞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헤겔이 말했듯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민족들과 정부들이 역사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에 따라 결코 역사로부터 배우거나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는 역사 자체를 들여다보지 않는 듯 하다. 이 책에서 지적하는 대로 고대 지중해 세계가 트로이 전쟁을 끝으로 단순한 사회로 돌아간 것 처럼,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도 그렇게 암울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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