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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명의 기반 - 철학적 탐구
강유원 지음 / 미토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빨리빨리'라는 말이 한국인을 나타내는 표현 중에 하나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이것은 흔히 말하듯 압축적 근대화의 소산일 테지만, 사실 자본주의 자체가 인간을 신속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기술의 혁신에 따른 빠르고 무한한 생산과 성장이라는 목표 아래 사람들을 채근하는 것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특징이 아니던가. 빠른 속도가 특징인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더욱 빨리 진행해왔으니 한국인에게 뭐든 급하게 하려는 습성이 없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여유도 없이 시간에 떠밀려 바쁘게 사는 것은 비단 한국인들 뿐만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혹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 끊임없이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다지만, 우리는 너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말의 성찰도 없이 앞을 향해 급하게만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근대 이후 세계를 속도감 있게, 핍진(乏進)적으로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결과 "과거는 쓸모 없는 것이 되었고 진지한 반성 위에서만 성립하는 역사라는 거대한 구조, 인간 집단의 정체성을 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제 역사는 단지 과거의 사실들을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현재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인식도 적지않다. 게다가 "역사라는 이름 아래 거대한 담론과 웅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책들은 제쳐 지고, 미시사-생활사 등이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역사가 호기심 충족 수단 정도로 전락"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끔 하고, 자연스럽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역사 철학'에 시선을 돌리도록 한다. 일종의 '역사 철학' 책인 이 책에서 저자는 역사를 뭔가 다른 의미로 읽을 것을 제안하며, 역사를 인류 자유의식의 진보라고 말한 헤겔의 '자유-민권' 중심의 역사관과, 자유의 개념이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기를 바랐던 마르크스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검토하고 그것이 과연 몇 사람의 자유를 위해 기여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은 그러한 관점에서 '물질적 기반'과 '인간의 정신활동' 과의 관계, 즉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했는가를 중심으로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각 시대를 조망한다.
책 말미에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먹고 사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거론한 것이, 역설적으로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음을 말하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한다.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은 단지 어떤 방식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시스템을 통한 욕망의 절제"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단계로 이행하자는 것이다. "세상 안으로 들어가 '먹고 사는 문제'가 핵심임을 깨닫고, 그러나 스스로가 인간인 이상 오로지 그 문제에 매달릴 수만은 없음을 알고, '먹고 사는 문제'를 초월하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도덕적 원리이자 칸트의 도덕"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들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루 이틀의 일만 반성해서는 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전체를 살펴봐야한다고 역설한다. 그렇게 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았던 시대와 짐승같이 살았던 시대가 보인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동물들에게도 핵심 과제이다. 만약 인간이 이 문제에만 매달린다면 동물과 어떻게 구분될 수 있을까. 우리는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서로를 해치고 죽이던 인류 야만의 시대에서 벗어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살고 있으며, 사실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윤 추구와 체제 유지라는 명목 하에 전쟁과 환경파괴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고, 제국주의나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노골적으로 행해지던 착취는 그 모습을 세련되게 바꾸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인류 전체가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제 어떻게 그것을 나누어 가야할지 고민해야할 때이건만, 더 많은 것을 축적하고 독점하려드는 짐승들이 여전히 넘쳐난다.
현대인은 누구나 빠르게 흘러 가는 시간 속에서 정신 없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짐승과 같은 수준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나'는 누구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통해 개인의 주체성을 찾고, 나아가 역사라는 '집단의 기억'을 통해 사회적 정체성을 확립해야한다. 저자는 이것이 전제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언제든 파시즘과 같은 파국을 맞을 수 있음을 경고한다. 헤겔이 말했듯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은 민족들과 정부들이 역사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에 따라 결코 역사로부터 배우거나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는 역사 자체를 들여다보지 않는 듯 하다. 이 책에서 지적하는 대로 고대 지중해 세계가 트로이 전쟁을 끝으로 단순한 사회로 돌아간 것 처럼,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도 그렇게 암울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