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 - 유물과 유적으로 매 순간 다시 쓰는 다이나믹 한국 고대사 서가명강 시리즈 12
권오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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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있을 때는 ‘시업시간 전, 점심시간=독서시간’이라는 습관이 길러져서 매일 매일 책을 읽었었는데, 휴직하고 나니 이게 좀처럼 안된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은 아침 6시로 휴직 전이나 후나 같은데^_T... 이상하게 집에서는 책이 손에 잘 안잡혀서, 매일 정기 독서시간 습관을 들이는게 조금 힘들었다. 휴직한지 보름이 지나서야 겨우 독서시간이 정착된듯 하다. 매일 아침 신랑이 출근하고나서부터 오전 9시까지! 더도 말고 덜도말고 딱 책 1권을 다 읽을 정도의 시간! 아 물론 만화책 읽기는 예외다. 만화책은 독서시간에 포함하지 않고, 언제 어느때나 읽을 수 있는걸로 ㅋㅋ



다만 이 독서시간에 읽는 책들을 보면...내 독서편식이 대놓고 들어난다는 게 흠이랄까. 아무래도 우리집에서 제일 많이 있는 책이 역사책이라서 그런지, 매일 읽는 책도 역사책 투성이다(어디까지나 거실에있는 책장에 한해서 ㅋㅋㅋ). 뭐, 믿고보는 역사책이니까! 태교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ㅋㅋ



그런의미에서 오늘의 책은 권오영 교수가 쓴 『삼국시대, 진실과 반전의 역사』이다. 원래도 한국 고대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인지라, 고대사 관련 책이 집에 많기도 많다(특히 한일고대사). 이 책은 구입한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그동안 여러 출판사 서평단을 하느라 읽지 못하고 계속 뒤로 미루고 미뤘던 비운의 책이기도 하다T_T. 권오영 교수님은 차클에서 백제사 강의하는걸 보고, 꼭 책을 읽어야지 했었는데. 이제서야 읽게되는 슬픈 사실...




요즘 경주 여행기 리뷰를 쓰면서 자주 언급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신라 6촌장’이다. 그저 막연하게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혁거세를 신라의 왕으로 추대한 여섯 촌장이라는 사실과, 내 시조(ㅋㅋㅋ)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만. 정말 신라에 6촌이 있었는지,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는지, 단 한번도 의문을 가진적이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조에는 “이(혁거세의 즉위)에 앞서 (고)조선 유민들이 산과 골짜기에 나뉘어 살면서 육촌을 이루었다”는 수수께끼같은 기사가 있다. 신라를 설명하는 데 난데없이 등장한 이 기사의 의미는 조양동 유적발굴과 함께 풀렸다. 조양동에서 발견한 사로국 물질문화는 평양 일대의 고조선, 즉 위만조선의 문화와 유사한 면이 많았다. 위만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 이후 그 곳의 주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중 일부가 경주를 비롯한 경상도 각지에 정착한 것이다. 조양동 유적 발견 이후 대구, 경산, 영천 등 경상도 각지에서 비슷한 성격의 유적들이 발견됐는데 이들에서도 위만 조선계 문화의 영향이 드러났다. 자연스럽게 사로국 성립과 발전과정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다. p 031


놀랍게도 신라 6촌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삼국사기』 의 기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로 그를 뒷받침하는 유물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말하자면 신라로 발전하기 전, 진한의 소국인 ‘사로국’의 유물이라고 해야하나? 『삼국사기』에 기록처럼 나라가 멸망한 고조선의 유민들이 한반도 남부로 대거 이주해온 흔적이 진한, 마한이 있던 지역에서 유물로 발굴된 것이다. 완전 언빌리버블! 역시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의 능력이란!



(창원 다호리 유적)이로 인해 기원전 1세기 무렵 한반도 남해안에는 원거리 국게 교섭을 관장하던 세력이 있었고, 엄청난 부를 독점하던 지배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삼국사기』나 『삼국지』등의 사료에는 전혀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세력은 변한의 구성분자로서 훗날 가야로 발전한다. 도굴꾼에 의해 처참하게 파헤쳐진 무덤이 변한과 가야의 역사를 밝히는 일 등급 자료로 변모한 것이다. p 034



다라국은 가야 여러 나라 중 하나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수수께끼와 같았던 왕국이다. 그런데 경상대학교 박물관에서 이 유적을(합천군 옥전) 발굴조사하자 보물로 지정할만큼 호화로운 유물이 대거 발견되었다. 기원후 5~6세기 합천을 무대로 성장했던 다라국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났고, 그중 금과 은을 이용해 용과 봉황을 장식한 고리자루칼, 금으로 만든 귀걸이는 예술성을 인정받아 2020년 1월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초호화 장신구와 칼 여러점을 소유했던 인물은 다라국의 최고 지배자, 즉 왕이 분명하다. p 043


심지어 기록상에는 없던 변한의 흔적까지 찾아내서, 고대사의 빈공간을 메꾸기까지! 그나저나 다라국은 또 어디인가. 음. 변한의 12개 소국 중 하나일까? 우륵의 가야금 12곡이 각각의 가야 연맹국가를 지칭한다는 말도 있으니, 어쩌면 다라국도 또 하나의 가야 연맹국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다라국이 위치한 합천 주변은 고령(대가야), 창녕(비화가야), 성주(성산가야) 등 현재 이름이 알려진 여러 가야의 도시국가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한국고대사에 관련된 당대 기록이, 우리나라에는 남아있는게 없으니 주변국에 의한 왜곡이 쉽게 이뤄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나마 우리에게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도 엄밀히 따지면, 삼국시대의 이야기를 고려시대에 집필한것에 그치므로 당대의 기록이 아니니 말이다. 반면에 중국이나 일본에는 우리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당대의 기록이 남아있기에, 본인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여 역사왜곡을 시도하는 것이다.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역사 왜곡을 행했고, 왜곡이 가장 심하게 이루어진 분야는 가야사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아주 조금 언급된 내용을 제외하면 가야에 관한 국내외  문헌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일제 관학자들이 취약한 부분을 비집고 들어와 역사를 심하게 왜곡했다. 그때 만들어진 논리가 임나일본부설이다. p 047



다행히도 땅속에서 더 이상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할 만한 보물들이 발견됐다. 김해 대성동 발굴조사를 진행하던 젊은 연구자들이 쾌거를 이룬 것이다. 여기에서 출토된 금관가야의 유물들은 같은 시기 일본의 것을 압도할 정도의 기술력을 보여주는데, 대표적인 예로 철제 비늘 갑옷을 들 수 있다. 4~5세기 무렵 일본에서도 쇠판으로 만든 갑옷을 많이 사용했지만, 대성동을 비롯한 가야 무덤에서 발견한 갑옷들은 그보다 훨씬 발전된 개량 기술로 만든 것이다. 이외에도 기마전에서 아용한 재갈, 발걸이 등 마구류와 철제 무기류는 일본을 압도하는 양과 기술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갑옷, 마구, 무기 제조술에서 나타난 우열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왜가 군사적 우위로 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다. p 051


요즘엔 일본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이 많이 힘을 잃었으나, 과거에는 지금과는 달이 매우 강력하게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일본 진구덴노가 가야를 평정하여, ‘임나일본부’라는 기구를 두어 가야를 다스렸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일본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것은 그들의 당대기록인 『일본서기』를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이런 왜곡을 한 이유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 도래인 덕택에 문명국이 되었다는 피해의식을 뒤집기 위해서이며,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는게 정당하다는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우리 땅에서 발견된 철기 유물과 일본 땅에서 발견된 철기 유물의 엄청난 질적 차이와, 우리 고고학자들의 『일본서기』 연구로 인해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상상력이라는 것 밖에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거기다 가야는 철의 나라였다. 당대에 그 어떤 나라보다 뛰어난 철제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가야에서 생산된 철은 한반도 여러 국가를 포함하여 중국 및 일본까지 수출되었다. 이렇게 가야에서 수출된 철과 기술이 아니었으면, 제대로 된 철갑옷도 만들지 못했던 일본이 감히 가야를 다스렸다고 하니, 우리나라 학자들은 얼마나 기가찼을까?


(발해 효의황후, 순목황후 묘비는) 발해인들이 자국을 황제국가로 인식한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하지만 이 귀한 자료의 전모는 발굴조사 이후 여태껏 공개되지 않고 있다. 발해사를 말갈족이 세운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깎아내리려는 중국 당국의 공식입장과 정면으로 상충하는 자료이기 때문인 것이다. 한국에서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외부적으로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고학적 실물자료 없이 정치적인 의도로 작성된 당시의 문헌 자료로만 역사 연구를 시도한다면 얼마나 큰 왜곡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경고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p 059


일본의 역사왜곡은 수많은 유물과 증거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학술적으로도 반박가능하다. 다만 그놈들이 듣지를 않을뿐. 문제는 중국이다. 한마디로 ‘동북공정’. 중국땅에 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중국의 역사라는 뭐 그런 이야기다. 실제로 중국은 고구려의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도 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흔적들이 중국 땅에 있기 때문에, 중국이 유물을 숨기면 우리나라 학자들이 확인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하, 참으로 통탄스럽다..





인골의 체계적인 수습, 정리에서부터 사망 원인이나 생시에 앓던 질병, 습관, 영양 상태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협업이 필요하다. 발굴조사 기술이 향상되고 체질인류학이나 법의학 등 유관 분야 전문가들과의 융복합적인 협동 연구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으니 과거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영역과 깊이로 연구의 범위가 확장될 것이라 믿는다. p 078


난 간혹 오래된 무덤에서 인골이 나오면, 당연히 중요한 유물로 치중되어 연구가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헌데 아주 놀랍게도 인골이 고고학적 자료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비교적 최근 일이란다. 과거에는 인골이 입고 있는 수의나 부장품등만 유물로써 연구조사로 진행했을 뿐이며, 인골은 후손에게 인계하거나 화장하는 등의 방식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인골을 연구대상으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인골을 하나의 유물로 구분하여 연구조사를 하고 있는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렇지 않은가? 뼈 하나만으로도 성별, 유전자, 신장, 심지어는 식습관까지도 파악할 수 있으니 말이다.


중국 역사책인 『삼국지』에는 이 두개골 변형 풍습이 한반도 남부 진한에서 시행되었다고 기록돼있다. “아이를 낳으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 편평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편적인 기록뿐이어서 실제 시행 여부를 밝힐 수는 없었는데, 인골 발굴로 사실을 밝혀냈다. (……) 경산 임당동 고분군은 진한에서 신라에 걸쳐 장기간 만들어진 무덤들인데, 발굴 결과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인골이 출토되었다. 200여 개체의 인골 중에서 편두를 한 두개골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진한과 변한은 물론 신라와 가야에서도 편두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p 083


고대인의 ‘편두’. 신라 6촌에 이어 또 한번 기록이 유물로 증명된 순간이다.





물론 전승된 기록과 실제 발굴된 유물이 다른 경우도 있긴 하다. 


우리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미륵사는 무왕과 그 부인인 신라 출신의 선화공주가 세웠다고 믿었다. 그런데 2009년 미륵사지 서탑을 보수하다가 우연히 사리장엄을 발굴했고, 함께 출토된 사리봉영기에서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나왔다. 이로 인해 연쇄적으로 거진 이슈가 있었으니, 익산 쌍릉의 피장자 문제이다. p 093



대왕묘에 무왕, 소왕묘에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가 묻힌것이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이 제기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왕묘에서 발굴된 치아가 여성의 것이란 감정이 더해지면서 오히려 대왕묘는 사택왕후, 소왕묘가 무왕의 무덤이란 주장까지 대두됐고 문제는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얽히고 설킨 문제를 풀기 위해서 나선 곳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원광대학교로 공동 조사단을 구성해 대왕묘를 다시 발굴했다. p 094


그 유명한 서동(마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 서동이 후에 백제 무왕이 되면서 선화공주도 당연히 무왕의 왕비가 되었고, 그 선화공주가 미륵사지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믿고 있던 기록이었다. 그런데!!!!!!!!!!!! 발굴된 유물에서 이 이야기가 아주 깨끗하게 손절당했다^_T. 나 진짜 이때 뉴스보고 얼마나 충격이 컸었는지.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사택왕후로 인해 선화공주는 저멀리. 하지만 오랫동안 기록과 설화를 믿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죽하면 미륵사지 서탑을 사택왕후가 세웠지만, 미륵사지 동탑은 정말 선화공주가 세웠을 것이다! 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확실한건 미륵사지 사리장엄구 덕분에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이라 전해지던 익산 쌍릉까지도 피장자에 대한 의구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물론 그 덕분에 쌍릉 발굴이 시작되었지만 말이다. 거기다 이때 놀라운 사실까지 확인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발굴보고서에는 없던, 인골이 담겨있던 나무상자가 발견된 것이다. 인골 연구가 진보한 바로 21세기에 말이다.


연구결과는 대략 이랬다. 첫째, 팔꿈치의 각도, 목말뼈의 크기, 무릎 너비 등이 남성적 특징을 보인다. 둘째,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치를 볼 때 뼈의 주인이 수명을 다한 시기는 620~659년 사이일 가능성이 68퍼센트다. 셋째, 뼈 주인공의 신장은 161~170센티미터 정도로 당시로는 상당히 큰 편이었으며, 60대 이상의 고령이다. 넷째, 젊어서 낙상한 결과 골반에 상처가 남아있고, 광범위 특발성 뼈 과다증이라는 희소한 질병을 앓았던 흔적이 있다. (……) 말년에는 누워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사택왕후가 사리를 봉안하며 남편인 무왕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한 해가 639년이고 무왕이 사망한 시점이 641년이니, 왕후가 사리를 봉안할 때 무왕은 이미 앓아 누웠고 곧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 고고학자들은 대왕묘의 규모나 석재 가공 수준을 볼때 왕릉이 분명하다는 점을 증명했고, 역사학자들은 7세기 전만 고령으로 생을 마감한 백제왕은 무왕 외엔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인골이 백제 무왕의 것이라는 데 의견으 ㄹ모았다. 정체 미상의 뼈가 백제 무왕으로 밝혀진 순간이었다. p 096


덕분에 익산 쌍릉의 대왕묘는 이러이러한 합리적인 추론으로 무왕의 무덤이라고 결론이 내려졌다. 소왕묘는? 뭐... 아직 사택왕후의 무덤인지, 우리가 아는 선화공주의 무덤인지는, 아니면 의자왕의 생모인지, 그도 아니면 또다른 무왕의 왕비인지 알수 없지만 말이다. 적어도 확실한건 지금까지 삼국시대 왕릉 중 무덤의 주인이 정확히 밝혀진 것은 백제 무령왕릉 하나라는 점에서, 쌍릉의 대왕묘가 무왕의 무덤이라고 밝혀졌다는 건 정말 고고학과 과학의 승리나 다름없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속전속결로 발굴작업을 완료하는데 급급했지만, 이제는 국민들과 함께 발굴과정을 즐기는 방향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꾀하고 있다. 월성 북편의 쪽샘지구에서는 수년 동안 대형 고분을 조사하고 있는데, 고분 위에 우주선처럼 생긴 가건물을 씌워 비가오나 눈이오나 안정된 환경에서 발굴작업을 진행한다. 서울의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도 일반인이 방문하면 언제든지 발굴현장을 관람할 수 있도록 시스템화됐다. p 171



몽촌토성은 88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간단한 발굴조사만을 거친 채 성급하게 올림픽공원으로 변모했다. 그 결과 과거 백제의 수도는 오늘날 펜싱장과 사이클 경기장, 수경 경기장, 조각공원으로 변모했다. 뒤늦게나마 백제 초기의 역사를 규명할 귀중한 유산을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최근 정밀한 학술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p 183


요즘은 유적지 발굴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발굴작업을 할때 무조건 ‘속전속결’ 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발굴작업의 원인은 대게 도로나 아파트건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도로공사든 아파트공사든 뭘 하기전에 매장문화재가 있는지 확인을 해야하는데, 매장문화재가 있더라도 공사는 진행해야하므로 최대한 발굴작업을 빨리 끝내야만 했다. 빠르게 사진찍고, 빠르게 유물옮기고, 빠르게 유적지 파괴! 그 위에 도로를 건설하거나 아파트 건설! 심지어는 발굴작업으로 인해 공사기간이 늘어나는 것을 우려하여, 문화재가 출토된 것을 감춘 채 공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게 바로 과거 우리나라 유적지 발굴의 미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변하면서 문화재 발굴작업에 대한 패러다임도 바뀌었다. 지금은 속전속결이 아니라, 최대한 ‘문화재의 보존’과 ‘안정’을 목표삼아 발굴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전과는 달리 발굴작업을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었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발굴작업을 일반인에게 공개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경주 쪽샘지구 발굴작업은 일반인이 언제든 들어가서 볼 수 있기에, 나 역시 가보았는데... 하필 점심시간에 걸려서 못들어갔다는 슬픈 이야기T_T



조금 슬픈 사실은 이미 수 많은 고대사의 흔적들이 파괴되어 도로 밑에, 혹은 아파트 단지 밑에, 또는 빌라 주차장 아래에 잠들어버렸다는 점이다. 비교적 많은 고분들이 남아있는 웅진/사비 백제나 신라를 제외하면, 한성백제 및 가야의 왕릉급 고분, 심지어 삼한시대의 지도자 고분들이 파괴되어 아파트 단지가 되거나 도로, 심지어 누군가의 논밭이 되어버렸다. 뿐만인가? 한국  최대 규모의 신석기+청동기+초기 철기시대의 대규모 유적지가 발굴된 춘천 중도. 고고학의 한 획을 그은 중도 유적은 다시 파괴되어 땅 아래로 묻혔다. 춘천에서 자랑해 마지않는 ‘레고랜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 ‘레고랜드’는 올해 개장을 앞두고 있다. 아무리 유물 발굴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해도, 땅속에 다시 묻혀버리는 유물은 계속해서 생겨난다.



1988년 일본은 공단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팠다가, 대규모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정부는 이 유적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공단 조성을 포기하고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했다. 그곳이 바로 일본 요시노가리 역사유적지다. 우리나라는 그때나 지금이나 막대한 돈이 오가는 도로건설, 아파트건설, 공단 조성이 더 중요하여 유적지를 땅속에 묻어버리는데 말이다. 참으로 대비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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