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 인류를 위협한 전염병과 최고 권력자들의 질병에 대한 기록
로날트 D. 게르슈테 지음, 강희진 옮김 / 미래의창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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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한 시대를 휩쓴 역병이 있었다. 전 중세 유럽을 휩쓸어 인구를 반토막 낸 페스트가 그랬고, 1차 세계대전이 또다른 복병이었던 스페인독감이 그랬고, 아즈텍과 잉카문명을 박살낸 천연두가 그랬다. 그리고 21세기, 바로 지금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과거의 질병들은 백신, 치료제가 만들어졌다. 코로나19도 아마, 언젠가는 치료제가 나올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코로나19가 휩쓸고 지나간 이 후의 시간을 어떻게 마주해야하나?




아주 놀랍게도 이런 역병들이 창궐할 때마다, 역사의 흐름이 조금씩 요동쳤다. 어떤 때는 크게 꺾였고, 또 어떤 때는 조금씩 조금씩 휘어졌다. 역대 전염병 중 역사 교과서에 실린, 아주 유명한 병 ‘페스트(흑사병)’을 보자. 



쥐, 벼룩, 페스트균으로 이루어진 ‘3종 세트’는 화물을 실은 배와 동일한 속도로 로마, 마르세유, 스페인 해안, 유럽 문명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까지 단 며칠 만에 진출했다. 그 이후부터는 육지를 통해 확산된 덕분에 확산 속도가 조금은 느려졌다. p 043



역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1억 명에 달했고, 하루에 1만명씩 죽어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후에도 페스트는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7~8세기에도 유럽 내 어딘가에서는 종종 역병이 발병했고, 영국 역시 664년에서 666년 사이 페스트의 습격을 받았다. 이후 페스트는 한동안 잠잠했다. p 046



페스트는 중세유럽 때 처음 생겨난 질병이 아닌 이미 6세기에 나타난 질병이었다. 그렇다면 6세기에 발발했던 페스트는 오래전에 발생했던 페스트는, 14세기 중세 유럽을 휩쓸 때처럼 대규모로 확산되지 않고 오래안가서 잠잠해졌을까? 그 대표적인 이유는 전염병 확산 요건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염병이 확산되기에 최적화된 요건 2가지가 있으니, (1) 고도로 밀집된 도시화 (2) 교통의 발달이 있다. 14세기와 달리, 6세기는 그정도로 밀집화된 도시화라던가, 교통의 발달이 더뎠기 때문에 페스트가 점차 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14세기, 페스트가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중국 대륙을 통해서(수많은 역병의 시작이 대륙이라는 건 정말 싸이언쓰..).



당시 기록된 보고서에 따르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철수하는 길에 타타르인들은 절망과 분노를 참지못하고 일종의 생물전을 치르기로 결심했다. 역병에 걸려 사망한 시신을 투석기에 매달아 카파 성벽 안쪽으로 던져넣은 것이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으레 그렇듯 이 이야기 역시 ‘양념’이 많이 가미되었을 것이고, 성벽 안으로 던져진 시신만으로 전 유럽을 휩쓴 끔찍한 재앙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타타르군 진영에 서식하던 쥐들이 카파시로 들어왔을 수도 있고, 쥐들과 함께 박테리아에 감염된 쥐벼룩도 함께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p 039



한 때, 기마민족인 몽고인들이 유럽땅을 짓밟았었는데, 바로 그때 페스트가 다시 유럽으로 들어왔다. 위생관념이라곤 없던 14세기 중세 유럽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불과 3~4년만에 유럽 전역에서 인구의 반 이상이 사망하였다. 왜 중세 유럽에 위생관념이 없다고 하는지는, 아래 내용만 보아도 알 수있다.



로마인들의 문화는 청결과 위생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입증하는 사료이기도 하다. 대도시 로마가 성정함에 따라(전성기 때에는 인구가 120만명에 달했다) 각종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티베르강은 오물과 세균으로 뒤덮였고, 도시 외곽에서는 풍토병 말라리아가 만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에서는 위생이나 건강관리, 경험과 관찰을 통해 지식을 쌓은 전문가들의(중세 시절과는 달리, 종교적 도그마에 좌우되지 않는) 치료 행위들이 활발히 이뤄졌고, 그 수준은 당시 유럽 내 그 어떤 국가들보다 높았다. 몇몇 유럽 국가들은 19~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고대 로마제국 정도의 위생과 의료 수준에 도달했다. p 036



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각종 영화나 드라마만 봐도. 휴. 고대 로마제국의 반의 반도 못따라가던게 중세 유럽의 위생상태였다. 뭐, 이유야 어찌되었든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고 난 뒤, 유럽은 어떻게 되었을까? 보통이라면 경제가 붕괴되어, 유럽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나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고 간 뒤, 유럽사람들에게 “메멘토모리”, 즉 죽음은 늘 곁에 있다는 사상이 보편화 되어, 이를 바탕으로한 예술작품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아픔을 예술로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게 바로 흑사병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이다. 



두번째로는 유럽의 ‘산업혁명’이다. 뜬금없이 왠 산업혁명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인구가 반 이상이 줄어들면서 노동력이 급감했다. 노동력 자체가 희소해지면서, 그 가치가 올라갔고 그에 따라 신분이 해방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한 기술발전이 생겨났고,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산업혁명이다.



물론 이것들은 전부 긍정적인 측면일 뿐이다. 부정적은 측면도 분명히 있었도. 페스트가 ‘신의 분노’라고 하여,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마녀사냥이나 유대인학살도 많았다. 



이처럼 페스트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는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중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것 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질병은 근/현대에도 있었다. 



콜레라는 유럽이 현대에 들어서면서 등장한 질병이다. 당시 유럽의 생활환경은 유례없는 속도로 급격히 개선되었다. 1815년 이후 유럽대륙은 18세기에 이미 근대화를 이룬 영국을 모델삼아 산업화를 급속도로 진전시켰다. p 149



현대식 생활환경이 시작된 19세기, 듣도보도 못한 병이 창궐했다. 그 이름하야 콜레라.



1817년, 인도에서 대규모 콜레라가 최초로 발발했으며, 그 전파 속도와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중략)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있어 인도나 중국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먼 나라에 불과했다. 당시는 이동수단이 그만큼 느렸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느린 이동수단과 콜레라의 짧은 잠복기, 즉 감연된 시점으로부터 겉으로 증상이 들어나기까지의 시간은 짧으면 몇 시간, 길면 사흘 정도에 불과하다. (중략) 따라서 유럽은 콜레라 발생 초기에는 안전지대로 남아있었지만, 방어선은 단 몇 년만에 무너졌다. p 154~155



병원균을 들여온 이들은 대륙 곳곳의 전장을 누비던 군인들이었다. 군인들은 자신들의 짐 속에 병균을 품은 채 귀환했고, 짐이 아닌 뱃속에 병균을 품은 채 돌아온 이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p 155



뉘른베르크는 배로는 도달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덕분에 콜레라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1852년 뭔헨과 뉘른베르크를 잇는 직행 열차가 개통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중략) 뮌헨에서 열차를 타면 7시간 뒤에는 뉘른베르크에 도착할 수 있다. 즉 뮌헨에서 감염된 사람이 열차를 타고 뉘른베르크에 도착했을 때에도 겉으로는 아마 멀쩡하게 보였을 것이고…. p 165



콜레라가 창궐한 19세기는 페스트가 발발했던 6세기, 14세기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때는 제국주의가 만연하여, 서로 식민지 설치를 위해 전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던 시기였다.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한 교통도 과거에 비해 비약적인 발전을 한 뒤였다. 철도가 그 대표적인 예다.



식민지 설치를 위해 세계 여러나라로 쏘다니던 군인들이 수 많은 병균을 가슴속에 품어왔고, 이 병균들은 발달한 교통수단에 힘입어 전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페스트가 유럽을 초토화 시켰다면, 콜레라는 유럽을 포함하여 아메리카, 아시아 전 세계를 초토화 시켰다.



인도에서 시작한 콜레라는 인근 아시아 도시에 퍼진건 물론이고, 인도를 밟았던 유럽의 여러 군인들이 품고온 병균은 러시아, 폴란드, 프로이센 등 곳곳으로 실어날랐다. 사망자의 단적인 예를 들자면, 독일에서만 50만명이 사망했다.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들 중 전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제일 지위가 높았던 사람은 미국 11대 대통령 제임스 녹스 포크 이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을 들자면 차이코프스키가 있다. 이처럼 콜레라는 지위고하 막론하고 전 세계적으로 수십,수만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리고 바로 이 콜레라 덕분에, 지금 우리에게는 아주 당연한 공중보건과 위생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영국의 한 의사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던 중 영국에서 당대를 주름잡던 위대한 의사 하나가 콜레라의 전염 경로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공중보건과 위생 관념이 수면으로 떠오르면서 의학에 혁신적인 발견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그 혁신적 순간을 탄생시킨 의사는 존 스노우였다. p 168



영국의 의사 존 스노우는 유독 소호지구에 콜레라 환자가 급증하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발병자가 나온 집을 전부 찾아다니며 ‘질병지도’를 만든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역학조사’ 다. 이 지도를 통해 사망자중 대부분이 브로드가에서 펌프로 길어올린 물을 마셨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그 물이 콜레라의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애초에 인도에서 콜레라가 시작된 이유가 바로 더러운 갠지스강을 식수로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존 스노우의 발견은 그야말로 기적과 다름 없었다.



우리는 이 점을 콕 집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역학조사’와 ‘위생’이라는 개념이 바로 콜레라 덕분에 탄생했다는 것을.




팬데믹 현상이란 교통의 발전 및 세계화로 인해,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창궐한 현상을 말한다. 6세기, 16세기, 19세기 세계적으로 창궐한 페스트와 콜레라 역시 일종의 펜데믹 상태였다. 그때보다 더욱 전 세계적으로 밀접해진 21세기,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또 한번의 팬데믹을 맞이했다.



앞서 일어난 펜데믹의 결과로 르네상스 부흥과 산업혁명, 질병관리에 대한 기초개념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이 지나간 다음, 즉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화할까?



이미 그 변화는 시작되었다. 직장에서 근무하는 형태가 바뀌었다. 회의 형식도 바뀌었다. 장을 본다는 개념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동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 그저 잠만 자는 공간이었던 집이, 내 ‘생활’공간이 되었다. 뿐만 아니다.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은, 평범한게 아니라 소중한 일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포스트코로나. 완성된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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