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궁예
이재범 지음 / 푸른역사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우리의 역사에서 유독 저평가를 받는 인물 궁예를 비호하기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비호하는 것도 아니다. 작가는 궁예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근거를 기준으로 (작가의 말에 의하면) 소설과 역사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정사로 꼽히는 삼국사기는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된 왕건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 고려에서 제작한 기록이다. 즉 삼국사기에서는 왕건을 띄위기 위해 궁예를 죽여야 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조선에서 집필한 고려사 역시도 비슷하다. 궁예는 이렇게 역사 속의 패자가 되어 지금까지혹독한 평가를 받아왔다.


2년 전이었나, 궁예에 대한 동정심이 한창 물올랐던 시기가 있었다. 이 당시에 궁예에 대한 자료를, 정확히는 땅에 얽힌 설화들을 찾아보고는 했었다. 유독 궁예는 역사 속의 기록과 땅에 얽힌 설화가 너무 상반됬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는 궁예를 지독하게 못된 왕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왕건을 앞세워 몰아냈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궁예의 나라 태봉국의 권역이었던 철원, 포천 등의 지역에서는 기록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궁예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저 밑 경기도 안성에도 궁예의 전설이 담겨있는 사찰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궁예의 후손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서에서는 궁예가 정비인 강씨와 두 아들(청광, 신광)을 잔혹하게 죽인다고 한다. 그리고 왕건에 의해 궁예 역시 끝을 맞이한다. 이게 맞는 이야기라면 궁예의 후손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현존하는 광산 김씨, 광산이씨, 순천김씨의 족보에는 궁예를 시조로, 정확히는 궁예의 두 아들에게서 이어진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는 완벽한 패자였으며, 궁예를 물리치고 왕건이 이룩한 시대에서는 그 이름을 지웠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궁예를 시조로써 모시며 그에 대한 내력까지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움으로써 만 백성의 사랑을 받았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왕건이 궁예의 자리를 찬탈한 그 후, 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심지어 일부 호족은 왕건에 반하여 후백제로 넘어가기 까지 한다. 포천, 철원 지역 내에서 전하는 설화에 의하면 궁예는 왕건에게 왕위는 빼앗겼으나, 본인의 세력을 규합하여 항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항전은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궁예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은 궁예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이런 내용이 지금까지도 이 주변의 산과 강, 모든 지형 지물의 이름으로 남아서 궁예의 억울함을 토해내고 있다.
(왕건은 고려를 세운 후 호족들을 규합하기 위해 수 많은 혼인을 한다. 안하는 것보단 낫지만, 해도 그닥 티가 안난다는 혼인동맹이랄까 뭐랄까. 왕건의 이러한 혼인 남발로 인해 왕건 후계구도에서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호족의 입김에 흔들리고 흔들린 고려왕권은 광종 때 겨우 다져지지만 또 뒤에서...에헴)

중국의 삼국시대, 일본의 전국시대와 필적할 만한 시대인 우리나라의 후삼국시대. 일단 난 후삼국시대로 배웠으나 지금은 모르겠다. 일단 당대에는 발해도 있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사국시대라 하하;; 

뭐 여튼 ! 후삼국 시대에는 기존에 있었던 신라를 비롯하여 후백제를 표방한 견훤과 후고구려를 표방한 궁예가 주역이었다. 그리고 궁예 밑에는 고려의 태조가 될 왕건이 있었다. 왕건에 의하여 나라가 통일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후삼국시대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안쓰고 바로 고려로 넘어가버린다. 그리고 오롯이 승자인 왕건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상대적으로 왕건을 제외한 궁예, 견훤, 경순왕은 그 중요도가 낮아진다. 심지어 왕건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한 궁예는 아예 악인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된다. 
이럴 때 보면 중국 삼국시대나, 일본 전국시대의 주역을 대하는 방법과 우리가 후삼국시대의 주역을 대하는 방법이 너무나 다르다는게 느껴진다.  일본의 경우 전국 통일의 주역인 오나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에 대한 평가는 공통의 분모인 두견새 일화로 잘 나타난다.)

반면 우리 후삼국시대의 주역은 왕건을 기준으로 삼고 거기에 선악을 넣어서 평가를 한다. 신라에 쳐들어가 왕비를 겁탈까지한 견훤은 왕건에게 스스로 찾아오니, 왕건 입장에서 그는 선인이나 다름없다. 나라를 통째로 들고 온 경순왕은 또 어떠한가. 이것 뿐만이 아니다. 궁예의 일생 동안 있었던 수 많은 일이 각 국에서 한번 쯤은 있었던 그러한 일들이다. 예를 들어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로, 자신의 아들들은 보살로 칭한다. 이러한 예는 신라에도 있었다. 진흥왕은 전륜성왕에 비유되었고, 진평왕은 자신을 석가불로 비유했다. 심지어 진평왕은 자신과 부인을 석가의 부모인 백정과 마야부인이라 했으며, 진평왕의 동생은 석가의 숙부인 백반, 국반이다. 헌데 유독 궁예만 권력을 위해 불교를 이용한, 혹은 과대망상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궁예의 궁밖 행차 역시도 너무 과하고 사치스럽다고 평가를 한다. 헌데 기록을 잘 보면 역대 왕들, 후대 왕들 대부분의 못해도 그만큼의 인력, 혹은 배 이상의 인력을 대동하여 궁 밖 행차를 한다. 이러한 대목들만 봐도 우리나라 역사는 유독 궁예에게만 혹독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말 책 제목 그대로 슬픈 궁예 이다. 그는 언제쯤 역사 속의 패자가 아닌 영웅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그저 씁쓸할 따름이다.


※본 리뷰는 본인의 개인블로그에도 등록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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