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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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무슨 문학상’ 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면 닥치는대로 읽었던 시절에 처음 보았다. [몽고반점] 이라는 소설을. 아니, 소설이라고 하기보다 미술 같았다고 하는 편이 더 알맞겠다. 한 폭의 그림을 본 것 같다는 말이 아니다. 그 소설은 붓의 광기를 담고 있었다.  그 소설엔 물감의 잔혹한 미소가 있었다. 
마치 생전처음 사망사고 현장을 목격한 것 같은 패닉이, 책을 덮는 순간 찾아들었다.
이 작가는 미쳤거나, 제정신이 아니거나, 천재의 광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책의 겉표지를 보니 그것 참... 
’이상’ 문학상이었다.
나에게 한강이라는 이름은 자상(傷)의 흔적처럼 한 켠에 남았다. 

이후로 나는 언듯언듯 치미는, 번뜩거리는 짐승의 이빨을 옷 속에 애써 숨길때마다 그녀가 생각났다.  어울리지 않는 날렵하고 매끄러운 손가락을 쫙 폈다가 꽉 주먹을 쥐며 내 살을 파고드는 손톱의 감촉이 생생해지면, 조금씩 차가운 이성이 제자리를 찾아와 혀를 길게 빼물고 헐떡이는 숨을 쉴때면, 묻고 싶어졌다.

당신도 이렇게 참았나요? 당신의 턱을 타고 흐르는 과즙같은 말간 침을 애써 소매로 훔치면서 참았나요?  

그녀는 조용히, 한편으론 격정적인 답을 던져주고 홀연히 떠났다. 그게 바로 이 책, [채식주의자] 였다. 총 세 개의 단편. 나는 첫 번째 단편 ’채식주의자’ 를 읽고 킥킥 웃었다.
연작이야? 이게 연작이었어?
두 번째 ’몽고반점’과 세 번째 ’나무불꽃’ 까지 단숨에 읽고 나서 느꼈다. 내 안에 다시금 치미는 짐승의 울음을. 

1년만에  다시 이 책을 꺼냈을 때는 새벽 1시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새벽 2시였다. 
명백한 조소가 멍청한 얼굴에서 흘러 나왔다.
다음번에 불온서적을 지정할 때에는 꼭 이 책을 집어넣어야 할 껄.

나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한다. 한글을 읽을 줄 아는 교양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책을 읽고나서, 날카롭게 튀어나온 자신의 손톱이나 까슬하게 혀에 감기는 송곳니가 매혹적이게 느껴질테니까. 정답게 지저귀는 화려한 깃털의 새를 손아귀에 터지도록 붙잡고 이빨로 물어뜯어 따뜻하고 달큰한 피를 목구멍 깊숙이 느껴보고 싶어질테니까.
이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잔인한 이면을 끄집어 내는 혼돈의 책이다.

[채식주의자]를 다 읽고나서 나는 처음 질문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맹수의 발톱이 자란 당신의 손에 연필을 쥐여주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얼마나 많은 연필을 부러뜨렸나요? 어떻게 연필의 궤적이 남은 종이를 갈기갈기 찢지 않을 수 있었나요? 

한강, 그녀는 차갑게 일렁이는, 걸쭉한 늪같은 작가다. 그녀는 물이다. 지독한 물.
한번의 철썩임으로 새파란 아기를 잡아먹고, 피묻은 입가를 닦은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하게 미소짓는 잔잔한 파문같은 물. 

그녀가 가진 눈(眼)의 깊이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제 그녀의 다른 거짓말을 읽기가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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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원성 글, 사진 / 이레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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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나의 어머니는 여행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계신다.

평생 일만 해오신, 어렸을 때는 맏딸로, 결혼해서는 아내로, 자식을 낳고는 어머니로, 당신은 손이 부르트고 칼로 베어낸 것 마냥 발꿈치가 갈라지는 고통을 참아오셨다.
그렇게 어머니의 50년은 지나갔다.

어머니는 배움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학창시절, 공부보다는 미술이나 음악같은 예술의 방향으로 더 두각을 나타내셨지만 학교다니는 것 자체를 즐거워하셨던 어머니는 딸이라는 이유로, 그 시대의 많은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타의에 의해 학교를 그만둬야만 했다. 당시로서는 모자람 없이, 꽤나 잘 사는 축에 속했던 나의 외가는 어머니를 일에 묶어버렸다.

어머니는 색에 대한 감각, 서예, 악기 연주, 노래까지 지금도 그 재능을 간직하고 계신다.
사는 일에 치여 그것 사이사이에 낀 녹을 제거하셔야 되겠지만 말이다.
얼마전에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집 근처에 대학교 있잖아, 거기에 평생교육원 신청하면 배우고 싶은 거 배울 수 있대."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싫다고 하셨다. 혼자서 하기에는 무섭고 겁이 나신다는 게 이유다. 당시에는 그렇게 어물쩍 넘어갔지만 나는 여전히 어머니가 배움을 소망한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책을 좋아하신다. 두껍고 글씨가 많은 책은 겁을 내시지만, 여행과 관련된 책이라면 OK를 외치신다. 어머니는 여행, 더 나아가 인도여행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이란 책을 읽고 나서부터 였던 것 같다. 어머니에게 ’지금까지 본 책 중에 어떤 책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라고 물으면, ’류시화가 쓴 책 있잖냐,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라고.’ 라고 매번 똑같이 대답하신다.
어머니가 꼽는 인생의 책은 바로 ’여행+인도’ 인 셈이다.

2.
원성 스님의 이 책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어머니+여행+인도’ 다.
아들을 출가시키고 뒤이어 자신도 출가하신 원성 스님의 어머니, 금강 스님.
인도에 가는 것이 하나의 소원이었다고 말하는 환갑이 넘은 작아진 어머니를 보며 이 여행을 마음 먹었다는 원성 스님의 말은 슬펐다.

여행을 가기로 한 새벽.
들고 가기 벅찰 정도로 바리바리 싸여진 어머니의 짐을 본 원성 스님은 말문이 막힌다.
쌀, 김, 깻잎, 고추장, 된장, 배추김치, 깍두기, 총각김치, 갓김치에 전기 밥통까지 목록에 있는 것을 보고 정리를 하자고 하는 원성 스님의 눈치를 보면서, 어머니 금강 스님은 한국 음식으로 밥을 지어 공양을 올리고,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준비 했다는 말을 하신다. 
밤새 짐을 싸놓고 고심하고 걱정하셨을 어머니의 마음이 가슴을 아릿하게 만든다.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원성 스님이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인도 거리 한 복판에 선 어머니의 뒷모습.

여기까지 정확히, 내가 넘긴 페이지는 20.
나는 한 순간에 이 책을 모두 읽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불교의 연기, 공, 무아. 자비와 자애의 마음.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뚫리는 느낌이랄까.

3.
그 이후로 나는 어머니께 책 선물을 종종 해드렸다. 물론 여행과 관련된 것으로.
어머니에게만 하기엔 불효 자식같아 아버지께도 해드렸다. 택배가 도착하는 날, 어머니와 아버지는 상기된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하셨다. 값비싼 옷을 해드린 것도, 맛있는 음식을 사 드린 것도, 해외 여행을 보내드린 것도 아닌데 너무도 기뻐 하신다. 심지어는 곳곳에 자랑도 하신다. 우리 아들은 책도 선물하는 아이라고. 그럴때면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부모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마음 한켠이 먹먹해진다.

집에서 나와 산 지 벌써 5년이나 되었다. 
멀리 떨어진 곳이라 일 년에 다섯 번을 채 못간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못볼 아들의 얼굴을 보려고 밤늦도록 아들과 술을 마신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가 살더니 벌써 5년이다. 앞으로도 집에 들어올 일은 없지않겠니.
아마 그럴 것이다. 더 이상은 내가 집에 들어가게 될 일이 없으리라.
앞을 아는 것은 그래서 때로 슬프다. 

어릴때는 어색하게만 여겨지던 부모님과의 동행이 즐거워 지는 것은 
슬픈 일일까, 기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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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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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말 미립자.
나는 김애란 작가의 단편을 읽으면 이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과학과는 전혀, 일말의 관련도 없는(이라고 단정짓기는 좀 무식하지만) 그녀의 단편에서 왜 이런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걸까.

분말 미립자라는 말에서 ’말미’ 라는 억지 의미를 끌어내거나, ’미자’ 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연상해서는 아니다. 생각해보면 분말 미립자라는 말의 뜻도 모르는 내가 이 말을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분명한 것은 분말 미립자라는 말이 내게는 전혀 학술적인 용어로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마 처음에 들었을 때도 그랬을테고, 지금도 그렇다. 오히려 뭔가, 말랑말랑한 것이고, 얼마의 비밀을 숨기고 있으며, 가끔 우울해지기도 하는 작은 생명체를 떠올리게 한달까.
그건 분말 미립자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ㄴㅁㄹ’같은 울림소리들의 공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애란의 소설은 비음같다. 울림소리들의 어울림 같은 단편. 
그것은 여성과 방이라는 미묘한 것들을 접목시킨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2.
그녀의 소설이 배경이 되는 대도시. 서울. 혹은 수도권의 어디.
천만명. 이 나라 인구의 4분의 1을 품고 있는 도시. 
그 많은 사람들은 밤이 되면 모두 어느 방을 향해 가는 것일까.
Home sweet home. 
그럴까?

3.
뚝뚝 묻어나는 교집합에의 욕구, 그리고 동시에 내 공간에의 욕구.
비루하지만, 이율배반적이지만 분명한 욕구.

4.
우리가 생을 다해 얻어내는 것은 단 한 줌의 안온을 느낄 수 있는 방이 아닐까.
하지만 자궁과 요람, 방, 그리고 종내는 오그라든 한 몸이 누일 수 있는 공간만이 우리에게 남는 것이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 심지어는 그 공간마저 허용되지 않고 단지 하나 속에 머물게 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자리가 아닌지.

물론, 김애란 작가가 그 정도까지 우울하게는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젊고, 활기차며, 에너지가 넘치는 작가다. 하지만 그 내면에 담고 있는 불안의 깊이를 매도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녀의 깊이는 남다르다. 「칼자국」에서 보여주던 나의 자오선의 끄트머리쯤. 「기도」의 의도적인 회피.

5.
예전에 씨네21에서 매주 그녀의 글을 읽었던 적이 있다.
그녀는 영화를 매력적으로 볼 줄 알았다. 지독하진 않지만, 숙명과도 같아 보이는 외로움이 그녀의 글에서 묻어났다. 
하지만, 그래, 그녀에겐 낭만이 숨겨져 있었다.

6.
나는 그녀의 진짜 정체가 ’우주 멀리 날아가는 운석’ 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문자는 보내지 않겠’ 지만, 그녀는 ’빛만 확인한 뒤 문을 닫겠’ 지만, 그녀의 마지막 메세지는 ’안녕’ 이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 ’안녕’ 이 이별의 안녕보다는 만남의 안녕이라고 믿고 싶다.
세상에 그녀만큼 아프고 외로운 이야기와 희극적이고 아름다우면서 투명한 이야기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작가는 아직 없다. 
그녀의 소설은 정말 여자같다. 
소녀에서 여자가 되는 그 사이 어딘가.
정말,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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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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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삶은 말했다.
계속 똑바로 가, 똑바로, 길을 벗어나지 마.
그때 이후로 바보 같은 삶은 교훈을 배울 능력도 없는 주제에
우리를 가르친다고 뽐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했다.
심지어 자신이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 살펴보거나
나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는 법도 없었다
.



별 것아닌, 남들이 하는 정도의 걱정ㅡ오늘 직장은 언제 끝날 것이며, 저녁으로는 뭘 먹고, 시간이 남는 늦은 밤까지 뭘 할까 정도의 걱정을 하며 살아가던 당신은 어느날 동료에게 우연히 영화를 추천 받는다. 딱히 할 일도 없고, 친절한 동료의 호의와 배려를 확인하기 위해 당신은 대여점으로 걸음을 옮긴다.

당신은 비디오를 빌렸지만, 처음에는 딱히 보고 싶지 않아서 쇼파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다. 저녁을 먹고, 의미 없는 짓거리를 몇 번 하다가 곧 흥미를 잃은 당신은 비디오를 생각해 낸다.

평범한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당신은 얼마간 웃고, 얼마간 비평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다행스럽게도 영화는 적당히 흥미롭다. 동료의 호의와 배려는 만족스럽다.

그런데 당신은, 영화에서, 당신을 본다.

보잘 것 없는 단역에 불과하지만, 그 모습은 당신 자신이기에 놓쳐지지 않았다.
얼굴이며, 몸통, 팔, 다리, 걸음걸이...모든 것이 당신과 똑같다. 이윽고 영화 속의 당신이 배역에 맞는 짧은 대사를 입에 올렸을 때, 당신은 비디오를 꺼버린다.
그건 심지어, 목소리까지 똑같았다!

신경증 환자처럼 온 방안을 쏘다니던 당신은 다시 비디오를 켠다.그리고 당신이 등장한 그 장면을 반복해서 돌려보고, 당신이 등장하는 씬에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다. 당신에게는 없는 멋들어진 콧수염에, 머리 길이도 훨씬 길고, 더 마른 당신이 화면 속에 꼼짝않고 있다.
- 그래, 분위기가 비슷할 수도 있는거지. 내 ’습관’ 을 ’연기’해서 그런걸꺼야. 그는 연기자니까. 그는 어떤 사람도 흉내낼 수 있겠지. 게다가 저 콧수염...
거기까지 말하던 당신은 ’혹시 저 콧수염과 머리길이가 분장이라면?’ 이라는 끔찍한 생각이 퍼뜩 든다. 그러다가 당신은 갑자기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휘청거린다. 

당신은 정신없이 방으로 뛰어가서 책상을 모조리 뒤엎는다. 당신이 방에서 들고 나온 것은 앨범이다. TV화면은 사진처럼 정지되어 있고, 그 앞에서 당신은 미친 사람처럼 앨범을 거칠게 넘긴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을 찾아낸다.
그 사진 속의 당신은 지금보다 조금 더 말랐고, 머리 길이가 길고...콧수염이 있다.
사진의 구석에는 날짜가 적혀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비디오를 꺼내 껍데기에 붙은 스티커에서 영화 제작일을 본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다. 

당신은 그 영화를 추천해 준 동료의 저의를 의심하지만, 실제로 그는 아무 뜻도 없었다. 당신은 곧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삶은 되돌려지지 않는다. 모든 앎은 진행이다.

이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입을 닫고, 팔을 묶고, 다리엔 사슬을 매달아 놓은 채로 살 것인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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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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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2008년을 기억할 것이다. 물론 굳이 대한민국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2008년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한 번쯤 기억될 만한 해임이 분명하다. 그해로 말할 것 같으면ㅡ우선 경제를 살리겠다고 호언장담한 분께서 대통령이 되고, 50%라는 초유의 지지율을 얻고 당선하신 그분은 취임 100일만에 지지율 10%라는 초유의 위업을 달성하심은 물론, BBK인지 뭔지 동영상에 버젓이 ’임’의 육성이 있는데도 무죄를 때린 검찰이 충격을 준 해였다. 그러다보니 자기들도 버젓이 있기가 민망했는지 멀쩡한 국민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으려 각종 방송국을 장악한 것도, 전대미문의 연예인 자살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이 홀라당 타고, 금강산에서 관광객이 피격되는 사고에, 중국은 자기들이 소외될까봐 성화봉송 주자를 다굴치고, 그것도 모자라서 멜라민으로 자기들의 존재를 널리 퍼뜨리고, 일본도 이에 질세라 다케시마는 니혼땅을 외친것도 바로 그 해의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사다난한 한 해였던 것이다.

아, 이런,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세계 경제는 침체일로에 빠져있는데 대통령께서는 컴퓨터도 사용하실줄 모른데다, ’읍니다’ 타령까지 구성지게 해댔고, 인수위원장을 하시던 어떤 분께서는 전 국민을 상대로 오렌지를 ’아륀지’라며 사기를 쳤고, 성화봉송 주자를 후드려팼던 중국에서는 베이징 올림픽이 열렸고, 거기서 우리나라가 전대미문의 성적을 낸 것도 바로 그 해였다.

어디 그뿐이랴.

미친소때문이라기 보다는 어이없는 정부때문에 전국민이 초를 들고 거리로 나섰고, 때마침 국회의원들은 집회장을 의기양양하게 방문해 이상한 분위기를 조장하려다가 다굴을 맞고 조용히 돌아갔고, 집회는 과거와는 달리 축제의 장이 되었고, 경찰은 거기에 물대포를 뿌렸고, 대통령께서는 미국산 쇠고기 만찬을 즐겼으며, 그 와중에 시민들은 물대포를 맞으며 비누를 달라고 외쳤다.

오, 여기서 끝나면 좋으련만.

우리나라의 부패지수가 세계 64위에서 72위로 하락하고, 대통령께서는 6박 7일의 첫 순방을 미국과 일본으로 가셨고, OECD 국가 중 과학기술역량이 12위로 나타났고, 엄청난 경제위기 속에서 수출이 사상 처음으로 4천억달러를 돌파했고, 삼성동 무역센터에서 그것을 축하하는 기념행사가 열렸고, 세계에서 다섯번 째로 길다는 인천대교가 연결되고, 그 공사가 3조원인지 30조원인지의 경제 효과를 낳거나 말거나, 여전히 관심받기 좋아하는 중국의 성장률에 따라 우리의 성장률도 쓰리고이거나 반토막이고, 정부는 간만에 쓴소리 하는 다음의 아고라의 누군가의 입을 막아버렸고, 전국 각지에선 교사들이 제자들에게 뺨을 맞고, 그러거나 말거나 청년 실업률은 여전히 늘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박지성 선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100경기 출장이라는 대업을 달성했고, 박주영 선수는 AS모나코를 A/S하러 갔으며, 이영표 선수는 31세의 나이에도 꾸준한 기량을 선보이며 팀의 주전자리를 꿰차고 있고, 31세나 되는 아기 아빠의 별명이 언제까지 초롱이냐는 불만도 불만이지만, 설기현 선수는 너무나도 기복이 심해서 걱정이고, 김두현 선수는 부상이 큰 악재였던 것 같아 안타깝고, 이상은 EPL의 소식이지만, 우리에겐 아직 김연아 선수에, 박태환 선수에, 이용대 선수에, 장미란 선수에, 신지애 선수에...너무도 많은 운동 선수들의 활약이 남아 있다. 

더욱 황당한 건, 아직 절반도 채 2008년을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과 이게 겨우 프롤로그라는 것이다. 나 원, 참.

프롤로그 끝.
그리고 벌써,
동네축구단 창단.

동네축구, 일명 뻥축구는 꼭 시작이 거창해야 한다. 
시작에 앞서 일단 유니폼은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만 한다. 

경기는 일단 누가 하늘 높이 공을 차 올리면 시작이고, 먼저 열 골을 넣는 팀이 승리할 것 같지만, 일단 열 골을 넣으면 다시 다섯 골을 더 넣어야 하고, 다섯 골을 넣으면 다시 세 골을 더 넣어야 하며, 그 세 골마저 넣고도 골든골을 넣어야지만 경기는 끝이 난다.

뭐 딱히 룰은 없으며 전반과 후반을 통틀어 경기 시간은 들쭉날쭉해서, 30분일 때도 있고, 3시간일 때도 있다가, 해가 져야만 끝나기도 한다. 일단 공이 뜨면 상대편과 우리편의 구분이 무색해지며 피아의 구분마저 사라져 버리기 일쑤여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공 가는데라면 뻘밭과 풀밭과 자갈밭과 개똥밭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리지 않고 뛰어가고, 그렇게 뛰다보면 자신이 어째 상대편을 어시스트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야만 한다. 

감독이 있을리는 만무하거니와 특별한 교체타임이랄 것도 없어서, 결국엔 모든 교체선수까지 경기를 뛰기 시작하고, 그러다보니 다들 일단 뛰기는 뛰는데 정작 공을 만져본 사람은 없기 마련이다. 그렇게 뛰어도 이상하게 각 팀의 밸런스는 깨지지 않는데, 체력이 약한순으로 알아서 작전타임을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축구에는 작전 타임이라는 게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제 나름대로의 만족한 경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경기를 뛴 모든 선수들은 유대가 더욱 돈독해지며, 누가 이겼건 심지어는 상대편과도 돈독해진다. 

그것은 정말 심사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운동이다.
하지만 이건 말이지, 그야말로 제일 처음 축구가 생겨나던 시절의 생각을 복원하는 그 자체로의 축구이다.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 
생겨나던 바로 그 순간의 완전한 축구. 
이건 세상의 복원이자 최초로의 복구이다. 


간다, 플레이 볼!
뻥.
재구성된 지구의 맑고 푸른 하늘을 지나
공이 날아간다.
이 두근거림 앞에서
어떻게 할 지 알고 있는 당신. 자,

플레이 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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