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진 2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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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일기

임형주의 하월가(何月歌)란 노래가 있다. 고즈넉한 밤에 창 밖을 보면서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난다. 
비 오는 날이 생각난다.

함께 걸었던 인적없는 새벽의 길, 눈이 하얗게 내린 차밭의 풍경속에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며 서 있는 모습, 가을 단풍이 들던 수목원에서 함께 누워 찍은 사진, 낙안을 다녀오던 버스 안에서 보던 노을, 섬진강 변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어깨에 기댄 채 잠들곤 했던 너의 모습, 비 오는 날 우산을 같이 쓰고 걷다가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던 기억, 심야영화를 보고 나온 후 간판이 모두 꺼진 시내를 걷던 일, 아주 늦은 시간까지 술집 창가 자리에 앉아 서로를 약간 취한 눈으로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기억, 부스스한 모습으로 밤 늦게 편의점에서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고 돌아가던 그 길, 푸짐한 떡볶이와 순대, 병맥주를 싸들고 학교 운동장 스탠드로 향하던 발걸음, 레포트를 쓰느라 서너시간을 PC방에서 보내고 뻑뻑한 눈으로 새벽 바람을 맞던 기억, 진주를 다녀오던 기차 안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잠들었던 기억, 보성까지 가는 의자가 높은 통근열차 안에서 숨죽여 했던 짧은 입맞춤, 갈곳이 없어 같은 자리만 몇 시간이고 뱅글뱅글 돌았던 그 새벽 그 거리, 둘이서만 갔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짙푸른 밤바다와 노오란 별들을 배경으로 한 키스까지.

그 시간 그대로를 돌릴 순 없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아름다운  낭만이, 달콤한 꽃향기 같은 기억이 끌려나온다.

나에게 밤은 사색과 허무와 적요가 공존하는 특별한 세계와도 같다.
그 세계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있다.
앞도 뒤도 아닌 시간, 시각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세계가 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립고 함께여야 하는 밤이다. 

그 남자의 또 다른 일기

이 세상에서 너만큼 나를 이해하고 알아주는 사람
또 만날 수 없을거란 생각이 들어.
내가 받은만큼 돌려주기 전까지는 안돼.
천천히
아주 오래도록 돌려줄게.

널 지치게 하지 않을게. 널 내버려두지 않을게.
마지막으로 말만 잘하지 않을게.


그 남자의 낙서

왜 그래.
삶은 항상 중요한 순간에 널 빗겨갔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래.


그리고...어떤 일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찾아왔던 그대
지난 5년간 오로지 나를 향했던 당신의 삶
먼 거리,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던 당신

단 몇 시간을 위해서, 나를 보기 위해 달려왔던 당신을 나는 너무 당연한 듯 대해왔어요.
미안합니다.
당신이 힘들고 아픈데 내가 그것을 안아주지 못해서요.
그 마음 나에게서 비롯되었으니 내 잘못입니다.

당신을 향한 마음 변함없으나 어그러진 표현이 있나봅니다.

요즘 내 몸은 정상이 아닙니다. 밥을 한술도 뜨지 못하는 날들의 연속입니다.
살아보겠다고 밥을 한가득 퍼 담았습니다. 그러다가 당신 생각이 났습니다.
당신의 당연한 걱정을 물리쳤던 내가 생각납니다.
미안합니다. 

난 여전히 당신이어야 하고, 당신입니다. 
더 이상 멀리있는 당신을 보지 않겠습니다. 
가까운 당신,
오늘, 지금의 시와 분과 초에 존재하는 당신을 보겠습니다.
기분을 풀고 나를 향해 웃어주세요.

녹아버린 나날들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낮잠을 잡니다.
낮잠이라고 말하기도 우스운 시간, 오후 7시에 자리에 눕습니다.

늦은 잠, 이라고 해야겠군요.

전혀 피곤하지 않은 몸을 억지로 이끌어 자리에 누이고 불을 끕니다.
지금은 겨울.
방은 한동안 아무것도 구분이 되지 않는 캄캄한 어둠과 정적에 휩싸입니다.
나는 눈을 감습니다. 
.
.
.
나는 갈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고, 그래서, 방에만 있습니다. 
그녀는 매일 같은 시간에, 내가 사는 집 앞을 지나갑니다.
우리는, 사귀는 사이였어요.

그녀는 헤어지는 날, 담담하지만 울음섞인 목소리로 '안녕' 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것이 보이진 않았을거에요.
우린, 통화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 이후로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시간에 잠들었습니다.
알람을 맞춰놓은 것처럼, 정확히 그 시간이 되면 나는 불을 끄고 자고 싶어하지 않는
몸을 억지로 때려가면서 눕고 이불을 덮습니다. 

보지마, 쳐다보지마, 난 괜찮으니까.
이것이 내 자장가입니다.
제발 나를 봐, 돌아서서 한번만 봐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나는 잠이 듭니다.

오늘도, 같은 시간에 잠들고, 같은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씁니다. 


(+)
영화를 봤다.

내겐 뭔가 밝은 것이 필요했다.

아주 오랜만에 밤거리를 걸었다.
날은 추웠지만, 사람들은 많았다.

가게들은 밝았지만,
내게는 필요없는 밝음이었다.

(+)
또 코피가 나기 시작한다,
매일...

(+)
어제는 조금 과음했다.
교수님이 만들어주신 폭탄주에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
노래방에서 또 맥주를 마시고,
해장국 집에서 또 소주를 마시고,
집으로 와서 또 맥주를 마셨다.

새벽 4시 하고도 30분이었다.

술김에 엉터리 서평을 쓰고,
이곳저곳 인터넷을 떠돌며 흔적을 남기고,
이불을 깔고,
안경을 벗어놓고,
천장을 보다가,
잠들었다.

10시에 눈을 떴다.
정신은 멀쩡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한 시간을 그대로 있었다.
12시에 짬뽕을 시켜 먹었고,
같이 술을 마셨던 동기들에게 해장하자고 연락이 왔다.
나는 휴대폰을 끄고 다시 누웠다.

눈을 뜨니 
오후 4시 하고도 3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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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진 1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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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와 그 여자의 비 오는 날

비가 오면 우산을 씁니다. 
둘이 걷고 있지만 우산은 하나여야만 해요.
비는 컨버스 신발 밑창 윗부분이 흠뻑 젖을 정도로 많이 와야합니다.
아, 그래요. 우린 둘 다 컨버스 신발을 신고 있어야 합니다.

걷기에는 조금 멀지만, 차를 타기에는 가까운
그런 거리를 비가 오는 날 함께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그랬으니까요. 
둘 다 걷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이런 날 우리는 그 거리를 걸어 영화관으로 갑니다.
가슴에 잔잔하고 넉넉한 파문을 일으키는 영화 두 자리를 예매해야 하거든요.
시간은 많이, 많이 여유가 있어야 해요.
우리가 영화관에 도착한 시간과 보려는 영화의 상영 시간 사이는 아주 길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비가 오는 거리를 걸어
우리가 잘 아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낯익은 사람들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 
카페를 찾아가서 따뜻한 커피를 시켜야 합니다. 
특별한 이야기를 해야할 필요는 없고, 말없이 서로를 바라만 보아도 상관없지만,
자리는 꼭 창가여야 합니다. 

카페에 오래 앉아있다 보면 사장님이 직접 우려주시는 향이 좋은 차를 마시게 될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그 편지는 꼭 연필로 써야만 해요.
비는 계속 내리고 있어야 하지요.
카페에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카페에는 몇 안되는 손님들의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누군가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도 들려야 합니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윙윙대는 노랫소리도 들려야 합니다. 빠져서는 안돼요.
그리고 우리 사이에는 사각사각 연필소리만 들려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모여 하나의 음악이 될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짧은 시간, 오케스트라 단원이 될겁니다.

영화시간을 20분 정도 남겨놓으면 카페에서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길을 걸어가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 같은 영화를 보고 나올겁니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 
비가 와서인지, 시간이 늦어서인지 살짝 어두울 겁니다. 
한기가 조금 느껴지면 좋을거에요.
그럴때면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야 합니다. 비가 오고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우리는 다시 빗속을 걸어ㅡ비는 하루종일 와야할 것 같아요.
떡볶이를 먹으러 가야합니다. 그곳은 잘 아는 곳이고, 푸근한 아주머니께서 또 왔냐며
반갑게 맞이해 주는 곳이고, 같은 돈을 내도 떡이며 오뎅이며 더 얹어주는 곳입니다.

배불리 먹고나서 우리는 몰래 떡볶이값 2천원 대신 3천원을 놓아두고 도망칠 겁니다. 
다음데도, 그 다음에도...
같은 돈을 내고 먹는 떡볶이의 양은 점점 늘어갈 겁니다.

우린 다시 비오는 거리를 걷다가 가까운 술집을 찾아 들어갑니다.
그곳이 막걸리와 파전을 파는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전망이 좋은 곳에서 비가 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도 상관없을 겁니다.

우리는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고, 많은 말을 나눌 것이며, 
더한 행복은 없을 것처럼 함께 웃을 겁니다.

그렇게 세상은 우리 안에서 돌아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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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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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이 트이고 나서, 항상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내 이름 석 자가 인쇄된 책을 가지고 싶었고, 그 책의 종이 냄새를 맡아보길 원했다.

"글로 빌어먹다간 굶어죽기 십상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안정적인 삶을 원한다. 하지만 내 내면에는 실패에 대한 동경이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양립할 수 없는, 이기적인 우유부단함.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문학 동아리에 가입했다. 가입 이유의 80%는 선배들 때문이었다. 내게는 너무 과분하다고 여겨질만큼의 훌륭하고 따뜻하고 엄한 선배들이 있었고, 그 그늘에 안착하고 싶었다. 선배들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밥을 사달라, 술을 사달라 짹짹거렸다. 선배들은 군말없이 나를 밥집이고 술집이고 데리고 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내게 꺼내주었다. 
그 시절, 나는 참 호사스러웠다. 
시간이 지나 선배들은 졸업을 하고, 내가 그 선배들의 자리를 차지할때쯤. 나는 그곳을 등지고 나와버렸다. 만약 내가 여기서 중언부언하면 그 모든 말은 핑계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그 선배들처럼 할, 자신이 없었다.

어줍잖은 문학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 되었을 때, 나를 툭툭 건드려 준 작가가 두 명이 있었다. 하나는 김영하 작가, 하나는 바로 [달을 먹다] 의 김진규 작가였다. 나는 언젠가 이 두 작가가 했던 말을 지표삼아 어리석은 꿈을 키웠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항상 어떻게하면 소설을 실패시킬 수 있을까 고민한다' 던 김영하 작가의 말.
'한 방울만 더 얹으면 바로 터질 것 같은 위태로움, 표면장력의 끝을 느꼈기' 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던 김진규 작가의 말. 
그렇기에 [달을 먹다] 에 대한 모든 종류의 언급을 하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거창하게 시작하면서 뱀의 꼬리처럼 끝을 맺을까 지금도 걱정이 태산이다. 

[달을 먹다] 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김진규 작가가 했던 말은 유용하다. 
위태로움.
달을 먹다는 이해와 오해 사이를 줄타기 하는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의 이야기다. 
(이해와 오해에 대한 이야기는 책 말미 수상작가 인터뷰에서 작가가 직접 말했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에게 꽃이 되고 싶었다.
그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놓인 바다의 거리는 쉬이 좁혀지지 않았다.
그건 애초에 좁혀질 수도 없고, 좁혀져서는 안되는 거리. 다 아는 것을 그들만 몰랐다.
결국 눈먼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매질과 광기였다.
이건 그 시대를 비롯해, 지금 시대에도 유유히 살아남아 잇몸을 드러낸 채 웃는 숙명이자 업보다. 그것은 언제까지, 해가 한번도 뜨지 않는 북극의 겨울 눈밭 위에서 썰매를 끌까. 결국 갈라진 빙하의 틈새로 떨어지는 건 썰매를 끌던 그들이리라.

처음 [달을 먹다] 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의문은 장이 거듭될수록 당혹이 된다. 도무지 이야기의 맥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야 좀 알겠다 싶으면 야속하게도 장이 훌쩍 넘어가버린다. 그렇게 몇 번의 장을 넘기고 나면 왜 이런 서술 방식을 택했는지, 인물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된 것인지 간단한 밑그림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 즈음에 소설은 끝난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달을 먹다] 는 꼭 두 번 이상 읽어야 할 책이다. 

얼마전 다른 책의 리뷰에 그런 말을 썼다. 
사랑은 우리의 삶을 가장 조용하게 뒤바꾸는 혁명이라고.
이별은 우리의 삶을 가장 격렬하게 뒤집는 태풍이라고.
그리고 이 이별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세상은 온통 사랑뿐이라고.
거기에 한 구절을 더 추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숨기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추악한 면이나 사악함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허전함이다, 라고.

[달을 먹다] 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을 결국 사랑으로 함의된다.
한 번 모인 후에는 뿔뿔이 흩어지고, 흩어진 이후에는 분열되며 해체된다. 
그들의 손에는 파란 장미뿐이다.
앞으로도 그들이 빨간 장미를 쥐는 일은 없으리라.
책을 덮고 나는 
그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사랑이,
당신 앞에 가로놓인 캄캄한 오솔길의 한줌 빛이 되기를.
한겨울의, 따뜻하진 않지만 그저 한 장 더 걸칠 수 있는, 누더기라도 되기를.
금방 녹아 없어지더라도 잠깐의 위안이 될 수 있는 한여름의 얼음조각이라도 되기를.
제발, 그러했기를...

나는 끝끝내 이 책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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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반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Mr. Know 세계문학 20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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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깝거나 멀거나, 우리에겐 과거의 어떤 한 장면을 회상하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가진 냄새를 알고 있다. 그것은 향기로울 수도, 역할 수도 있다. 그것이 미소를 짓게 만드는 향이냐,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향이냐에 따라, 끌려나오는 과거의 어떤 한 장면도 마찬가지로 미소를 짓게 만들거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그 냄새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게 공기중을 둥둥 떠나니다가 잽싸게 비를 피하듯 우리에게 들이닥친다. 그리고 어떤 기억을 몰고 온다. 
어쩌면, 공기 중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기억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지도,
당신의 조각들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감 중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것이 후각이라는 사실은 새롭지 않다. 어떤 과정을 통해 후각 세포와 그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전달되어 뇌에까지 도달하는가 하는 과학적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학적 사실을 차치하고도 냄새는 신기하다. 그 작용은 마술같다. 과거의 마술(혹은 과학이었던) 연금술은 이제 향수로 명맥을 잇고 있다. 과학적인 과정이 만들어내는 감각과 감정의 변이는 마술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과학과 마술이 영원토록 만나지 못하는 기차 선로같은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향기라는 것은 좀처럼 역사 속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에 그것은 빠르게 잊혀져 가거나, 또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에 오래도록 기억되기도 했다, 한다, 할 것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나서도 인터뷰나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고 은둔한 채, 오로지 작품을 통해서만 존재를 역설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향수-냄새에 관한 소설을 썼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향기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서로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은폐하고 고립시킨다는 오해를 받을만큼 드물고 가늘게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다. 그의 심사가 어떤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나, 나는 그가 이 책의 주인공인 그르누이처럼 장인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도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제자들이 개미떼처럼 그득한 공방을 가진 마에스트로도 아니지만, 타고난 기질 자체가 장인인 사람.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자기 속의 칼날을 벼리고 벼려 서슬퍼런 빛깔의 글을 써내려간다. 일반 사람들은 그 고독하고 답답한 짓을 왜 하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고갯짓을 하겠지만, 실제로 그는 자유로운 상태였고, 상태이며, 상태일 것이다. 
나는 그 앞에서 일반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향기같은 글을 쓴다, 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말인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향기같은 글을 쓴다. 공기중에 가볍게 날아와서 귓볼이나 겨드랑이, 허벅지에 내려앉고는 오래도록 그 향기를 퍼뜨리다가 어느새 바람결에 흩어지는 글을 쓴다. 그 향기는 그르누이가 스물 다섯 명의 소녀들로 만든 완전무결한 향수의 향기다. 독자들은 열광했고, 비평가들은 부랴부랴 이 중년의 신인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유래없는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현명했다. 그는 그 파도에 몸을 실으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만일 그가 완전무결한 향기를 가슴에 그러모아  세상 밖으로 나갔다면 곧 그르누이와 같은 최후를 맞았으리라. 결국 그는 동굴을 택했다.

향수는 또 다른 파트리크 쥐스킨트,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의 이야기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어떤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공기 중에 가득찬 자신을 맡았을거다. 
어떤 강렬한 장인의 의식을 세례 받았을거다. 그는 연필을 깎을 수 밖에 없었을거다.
그렇게 썼다.
혐오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이야기.
그는 이 이야기를 스물 다섯 명의 소녀로 만들었을까? 

이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나의 조각들과 그의 조각들이 만나서 만들어낸 
또다른 파편에 불과하다. 
고로, 나는, 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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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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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은 가방같다.
둘 다 만든 사람이 누군지를 따진다. 
둘 다 들고 다닐 때 쪽팔리지 않는 것이 잘 팔린다.
둘 다 소위 베스트셀러라는 것이 있다.
둘 다 (무게가) 가벼운 것들이 선호되지만 절대적이진 않다.
둘 다 그 하나로 사람을 달라보이게 만든다.

단지 [스타일]을 한 번 읽고, 표지를 본 연후에, 생각나는대로 적어봤다. 그런데 쓰고보니 그럴싸하다. 유난히 표지에서 빨간 가방이 눈에 들어왔고, 소설의 주인공이 패션지 기자라는 사실이 떠올랐으며, 책이 날렵하게 (무게가) 가볍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자꾸 ’가볍다’ 란 말 앞에 ’무게가’ 란 말을 괄호로 담아두고 있는데 그건 일부러 그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자꾸 그런 말을 하기 때문이다.

- 책이 너무 유치하지 않아요? 무슨 트렌디한 드라마 대본같아. 
유치하단 말과 트렌디하단 말이 유의어였던가?
- 재미있긴한데...소설을 읽었다기보다 팬픽같은 걸 읽은 느낌이야.
그러니까 재미있는 ’소설’이란 건 뭘 말하는걸까? 
- 가벼워. 내용도 그렇고 문체도 그렇고.
아, 그러니까 이게 너무 속물적이란 말씀?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바라는 소설은 성서쯤을 말하는건가 싶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또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확대 해석을 하냐고. 우리가 말하는 소설은 그런 걸 뜻하는 게 아니라고. 뭔가 둔중하게 울리는 메세지가 있어야 하고, 뛰어난 문체가 전제되어야 하고...많은 조건들을 말하시리라 본다. 
무조건 그 말들을 틀렸다고 부정할 생각은 없다. 세상에 ’틀린’ 말이 어디 있겠는가.
단지 ’다른’ 말들이 있을 뿐이지. 그래서 내가 지금 해야할 말은 그 말들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 그 말들과는 조금 다른 말들이다. 이분법은 근대의 산물이다. 여기 이 책은 현대의 것으로 근대를 탈피하여 현대의 새로운 이분법을 종식시키려는 시도다. 

오히려 이 책에는 재기발랄하고 새로운 문체와 내용이 가득하다. 

다시 4. 19라는 숫자가 깜박인다.
문득 자신은 운동권이라고 얘기하던 선배에게 어느 신입생이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느 헬스클럽 다니세요? 거기 트레이너는 어때요?"
(중략)
체 게바라의 혁명 정신도 스타벅스의 카페라떼처럼 테이크 아웃할 수 있다고 믿는 이 시대에 혁명이란 몸 사이즈가 66에서 44로 줄어들거나, 키가 160에서 170으로 늘어나는 일뿐이다.

                                                                -『스타일』, 12-13쪽.

’오늘의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은 내일의 빚’
일주일에 5일씩 스타벅스 커피를 30년 간 마시게 되면, 은행에 잔고 대신 엄청난 빚이 쌓일 거란 얘기이다. 만약 커피 대신 그 돈을 저금한다면 우리 돈으로 5천 5백만 원 정도의 돈을 모을 수 있다. 복리로 계산해서 그렇다
(중략)
게다가 입맛이 고급인 이 바닥 인간들은 평범한 카페라떼 같은 걸로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더블 샷 에스프레소!
화이트 초코 프라푸치노! 더블!
난 샷 추가!

                                                              - 같은 책, 65쪽.

사실 데이트하면서 자기 밥값도 내지 않는 형편없는 인간이란 말은 엄밀히 말해 남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여자들이 데이트에 나가기 위해 쓰는 비용과 노력, 시간을 생각한다면 남자들은 생각 없이 그런 얘기를 하지는 않을 거다. 만약 아니라고 우기는 남자가 있다면 왁싱으로 온몸의 털을 뽑아버리거나, 15센티미터짜리 하이힐을 신겨서 서울의 청계천 광장 보도블록 위를 딱 2시간만 걷게 하고 싶다. 결국 아무리 우겨대도 내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 같은 책, 95쪽.

대충 이 정도로만 끝내야겠다. 이러다가는 책 한 권을 통째로 리뷰에 올려버릴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이 책에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문장들이 차고 넘친다. 이 태도들이 보편적이라는 건 아니다. 안그런 여자도 많으니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많은 소설들이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진 않다. 오히려 작고, 비일상적인 속에서 보편적인 감정과 윤리를 끌어낸다. 그렇게보면 이 책도 마찬가지다.된장녀를 대변하는 소설이라고도 하던데, 어쩌면 그 또한 허영의 다른 발로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 책은 현대의 것으로 현대의 새로운 이분법을 종식시키려는 시도와 희망이다. 작가는 이것을 화해라는 말로 대신했다. 또한 성장소설이라는 말도 썼다. 
서른한 살 먹은 여자의 성장기! 
그런 말도 있었더랬다. 발달된 현대 문명은 인간의 유아적 행태를 오래도록 유지하게 만든다고. 그 말을 입맛에 맞게 조리하면, 우리의 유아기-성장기는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말일거다. 

[스타일] 이 정확히 짚어낸 이 지점. 이 지점의 이 이야기. 
그것이 다른 원고들을 제치고 세계문학상을 거머쥔 이유가 아닐까.
문학이 지루하고, 자기들끼리의 놀이고, 꼬장꼬장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강추! 한다. 슥 읽고 오래도록 느껴보시길. [스타일] 의 또 다른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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