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식탁 - 진화론의 후예들이 펼치는 생생한 지성의 만찬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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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머니는 말하셨다. 
-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라.

우리는 끼니만 편식하는 것이 아니라 책도 편식하고, 사람도 편식하고...여러가지를 편식한다.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짓고 거기에 매달려 아둥바둥 하는 게 우리의 본 모습이라면 좀 심한 말일까? 

우리의 일상적인 삶도 그렇지만 학문의 영역에 있어서도 비슷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학문의 특징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한 영역에 줄기차게 매달려야지만 달콤한 과실을 맛볼 수 있으니까. 학문이란 것은 어설픈 태도로는 한 방울의 과즙도 떨어뜨리길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윈의 식탁]은 온갖 달콤한 과일이 먹기 좋게 손질되어, 숨쉴 틈 없이 나오는 코스 요리같은 책이다. 하, 이거 배가 부르면서도 계속해서 먹고 싶게 만들어지는 메뉴들이다. 

사람마다 많은 독서 스타일이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책의 겉표지를 꼼꼼히 읽는 편이다.
앞표지도 읽고 뒤로 넘겨서 뒷표지도 꼼꼼하게 본다. 그런데 뒷면에 눈에 띄는 말이 있다.
상상불허, 흥미만점의 가상 논쟁으로 진화론이 한층 더 맛있어진다!
으잉? 가상 논쟁? 
다시 책을 앞으로 돌려 후루룩 책을 넘기며 훑어보니,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서 서로 임의의 편을 만들어 토론을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리처드 도킨스나 촘스키도 보이고 스티븐 핑커도 있고...막 그렇다. 
자, 주의할 점은 바로 여기. 
이 세계적인 석학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일대의 사건이다.
게다가 그들이 각자의 분야를 가지고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유려하게, 서로의 입장에 공감도 했다가, 반대도 하면서 격렬한 논쟁을 했다는 사실은 금세기 최고의 이슈다.

음...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뉴스를 접해본 적이 없다.
우리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너무 무지해서? 에이, 아니다. 그건 이 책이 가상 논쟁이기 때문이다. 아까 책을 읽는 스타일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했었다. 그걸 다시 써먹자면, 나처럼 책을 겉표지부터 면밀히 따지는 스타일이 아니라, 곧바로 책의 본문을 향해 달려나가는 스타일이라면 뒤늦게 불유쾌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시작은 짐짓 그럴듯한 상황에서 출발한다. 

다윈 이래로 현대의 가장 중요한 이론들을 창안한 당대 최고이자 전설적인 진화생물학자 해밀턴의 장례식을 배경으로, 전 세계의 석학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임을 넌지시 알린다. 거기에 참석한 이름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것이 저자의 상상이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로 책은 꼼꼼하게 구성되어 있으므로. 
저자가 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이 [다윈의 식탁] 인데, 당시 신문에 연재될 당시에도 많은 국내의 석학들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혹, 이 사실을 모르고 읽었다가 늦게서야 화를 낼 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미리 말씀드린다.
그래도, 아주 흥미롭지 않았습니까? 읽는 동안은 만족할 만한 책 읽기였죠? 

이와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시도의 책이 있었다.
[위험한 생각들] 이라는 책이 그것인데, 세계의 석학 110명의 의견을 한 권으로 엮은 기획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윈의 식탁] 에서 토론의 한 축을 담당했던 리처드 도킨스가 해제를 하고, 역시 [다윈의 식탁]에서 도킨스 측 토론자로 나왔던 스티븐 핑커가 서문을 썼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다윈의 식탁]에서 또 다른 토론의 한 축인 굴드나 굴드 측 토론자들은 이 책에서 생각보다 적게 등장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러나 [위험한 생각들] 에 비해 [다윈의 식탁] 은 훨씬 전문적이고 비유적이며 쉽다. 
가끔 전문적인 용어가 나와서 좌절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 책에 나오는 석학들은 친절하다. 

다윈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그 호기심이면 [다윈의 식탁] 을 읽어야 하는 동기는 충분하다.
당신이 이 책을 손에 쥔다면 세계적인 파티에 초대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당신은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면 된다. 
그러다보면 현대 진화론에 대한 당신의 이해는 10년도 더 성숙해 질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편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웃긴 건 거장이 되려면 도가 지나친 편식이 받쳐줘야 하나보다.
부모님의 말씀을 지지리도 안 들었을 것 같은  이 편식쟁이들이 무슨 반찬에 대해 말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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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고래의 실천 - 켄 블랜차드 자기경영 실천편
켄 블랜차드 외 지음, 조영만 외 옮김 / 청림출판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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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라는 책을 읽고나서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이구나! 감탄을 연발하며 연신 무릎을 쳐댔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군인이었고, 나름대로 힘든 시기였다. 이대로 젊음이 지나가 버릴 것만 같았던 불안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2년을 보냈다는 초조함,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성장이라곤 전혀 없다는 정체감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군생활을 하는 동안 운이 좋았다. 좋은 부대에서 복무를 했고, 좋은 고참들을 만났고, 좋은 후임들을 만났다. 그 편하다는 분대장도 남들보다 오래 했다. 막내 생활은 바쁘고 정신없어 힘들었지만, 고참이 되었을 때는 많은 여유를 가졌다. 동기들은 저마다의 목표를 위해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는 동안, 나는 방황했다.
좋은 운을 내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뭘 해볼 요량으로 기웃거린 것은 아니고, 단지 책 냄새를 좋아했던지라 부대 독서실을 기웃거리던 중,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제목이 특이하다고 생각했고, 별 생각없이 책장에서 빼냈고,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다. 
좋았다. 뭔가 상쾌했다. 책의 긍정적인 기운이 내게로 전이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후로도 나는 그 책을 가까이 두고 여러번 읽었다. 딱히 어렵거나 두껍지도 않은 책이라 술술 읽혔다. 꼭 책의 덕택이라고 하긴 우습지만, 나는 그로부터 전역을 하기까지 50여권의 책을 더 읽었고,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영화를 더 알기위해 영화잡지를 정기구독했고, 30여편의 영화를 봤고, 당구를 배웠고, 하루에 매일 2시간씩 운동을 했고, 매일 일기를 썼고, 컴퓨터관련 자격증을 2개 땄고, 운전면허를 땄다. 

전역 후, 나는 곧바로 복학을 했고 열심히 살아보자는 마음가짐으로 한 학기를 보냈다.
1학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학점이 나왔고, 그로인해 더 노력할 생각을 했다기보다 오히려 더 나태해졌다. 바보같이 이제 예비역이 되니 교수님께서 학점을 챙겨 주신다고 지레짐작을 해버렸던 것이다. 
복학을 하고 맞이한 두 번째 학기에서 금세 내 밑천은 드러나버렸다. 게다가 1학년 때의 잔꾀가 슬슬 몸을 풀기 시작했다. 연초에 했던 다짐은 희미한 잔향만큼만 남아 있었다.

어설픈 1년이 모두 지나갈 무렵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학교에서 취업이라는 바깥 공간으로 밀리고 밀려 그 문턱에 선 4학년이 됐음을 알았다. 덜컥 겁이 났다. 젊음을 너무 생각없이 흘려보낸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고, 마침 내게 닥친 여러 일들은 스스로에게 도망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젊음을 즐기리라.’ 였다. 
예전부터 꿈꿔왔던 전국일주를 하기로 마음 먹었고, 머리가 터질만큼 책을 읽고 싶었고, 그래서 잡은 목표는 겨우 150권이지만, 읽은 책들의 서평을 모두 쓸 생각이라 앞이 깜깜하고, 그 사이에 여행을 위해서는 또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해야하고, 평생에 악기 하나는 다루는 게 소원이라 기타를 배울 생각인데다가, 어릴때 도장같은 데를 다녀본 적이 없는지라 운동을 꾸준히 할 생각이고, 틈틈이 소설이든 수필이든 시든 글을 쓸 생각이고, 단편 열 편을 쓰는 것은 무리일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누군가가 커피를 타는 바리스타의 뒷모습이 멋있다는 말에 그것도 해 볼 요량인 것이다. 
그야말로 원대하고 또 원대한 계획이 아닐 수 없다.

계획으로만 끝날 게 아니라 제대로 실천을 하는 것이 관건인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초등학교 이래로 방학 계획표를 단 한 번도 지켜보지 않은 달인인데다가, 일기란 당연히 한 달 분량을 몰아서 쓰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던 여유로운 속기사였고, 학교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숙제 베끼기라는 신조를 가진 대담한 필사가였으며, 하교 후 하는 일이란 오로지 놀기였던 대인배였다. 
음, 그랬다.

일단 일은 저질렀는데, 어찌 실천을 할 것이냐...
이런 고민과 자괴감에 빠져 있는데, 거짓말같이 내게 날아온 책이 바로 [춤추는 고래의 실천] 이었다. 우연이라기엔 우스울 정도로 놀라운 타이밍이랄까.
이 책의 전작도 비슷한 상황에서 내게 다가왔기에 더욱 그랬다. 

역시 이 책도 앉은 그 자리에서 독파를 해버렸다. 
담겨있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자 장점은 책이 가지고 있는(혹은 책을 쓴 이들의)긍정적인 마음이 읽는 사람에게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나는 지금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는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음을 상기한다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별 다섯 개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시시콜콜한 책의 내용을 중언부언하진 않겠다. 
어떻게보면 행동주의의 관점이 두드러지기도 하는 그런 행동패턴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한다고 해서 모든 분위기를 모사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명쾌한 리뷰를 읽고 책을 읽었다고 자처하는 분들을 조심스럽게 경계하려는 까닭이다. 

꼭 한 구절을 인용하라고 한다면 이 구절을 말할까 한다.
                        
                        나를 신뢰하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세상에서 가장 멋진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내가 지금의 바보같고 대책없는 엉터리 계획을 마음먹고 실현하기까지, 마음 속으로 깊이 공감해주고 무한한 신뢰를 보내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누가 그렇게 해줬냐고?
그건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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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폴라 앤 로모 - 나의 빈티지 카메라, 폴라로이드와 로모이야기
장현웅.장희엽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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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만한 사람이라면 사진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시대.
우리는 사상 유래없는 렌즈의 시대를 살고 있다.
디카가 널리 보급화되고, 더 나은 사진을 위해 DSLR 카메라를 구입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고, 인구의 약 70%인 3700만명이 사용한다는 핸드폰에 카메라 기능은 필수가 된 시대. 인터넷에 수백, 수천의 카메라 동호회가 넘쳐나고 사진을 찍는 일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된 시대에 사는데 정작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사진을 사랑합니다. 사진을 찍으면 즐겁고, 기분이 좋아져요. 사진을 좋아하다보면 사진에 찍히는 대상도 좋아하게 되죠. 전 사진을 좋아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 사람들은 정말 많다. 사진의 구도니, 카메라의 셔터 스피드니, 조리개 개방이니 하는 것들을 잘 아는 사람들도 정말 많다. 
사진의 양적 성장은 질적 성장을 동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뭔가 좀 허전하다.
분명히 사진에 대해서는 다들 전문가 뺨치는 수준인데, 정작 즐겁게 셔터를 누르는 사람은 찾기가 어렵다. 다들 심오하고, 어렵고, 완벽한 예술 작품으로서의 사진을 찍으려고만 해서 그런 것일까? 그들에게 사진이란 유쾌한 놀이가 아니라, 또 하나의 작업에 불과한 것 같다.
더 멋있는 사진을 위해 먼 곳까지 출사를 마다하지 않고, 공들여 찍어서, 평가받기를 원하는 걸까? 

이 책은 사진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두 형제의 이야기다.
아니, 사진에 대한 애정이란 말로는 이 책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겠다.
그건 이들을 매도하는 말일 것 같으니, 다시. 

이 책은 카메라와 그것이 만들어낸 사진과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들어온 모든 것을 사랑하는 두 형제의 이야기다. 

폴라로이드와 로모라는 두 대의 카메라로 담아낸 그들의 애정은 사진만큼이나 유려한 글솜씨에서도 드러난다. 가만히 사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 책은 만들어진 동기부터가 그랬다.
카메라와 사진을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데 비해 사진에 대한 책이 너무 없어서, 카메라 잘 다루는 법이나 잘 찍는 법을 강의하는 그런 책이 아닌, 그저 사진에 대해 즐거움과 인간적인 내용을 다룬 책이 없어서 의기투합 했다는 형제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마이클 부블레의 음악을 들으며, 가만히 기대어 앉아서, 병맥주를 옆에 놓고 한없이 여유를 부리고 싶어질 때 함께 있으면 좋을 책이다.
나처럼 비 오는 날을 좋아하고, 아날로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책이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고정된 렌즈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의도하는 대로 사진을 찍으려면 움직여야만 한다. 렌즈가 움직이지 않으니, 내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움직이다보면 피사체에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갈 용기를 얻게 된다. 
물론, 모든 사진 찍기는 피사체에 가까이 하기다.
하지만 폴라로이드는 ’좀 더...’를 말한다. 
폴라로이드로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좀 더’ 가까이 하는 습관이 들면,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때가 있다. 
돌틈에 피어난 작은 꽃, 평소에는 몰랐던 친구의 반짝이는 눈망울, 혹은 점, 골목길과 
연탄재...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마음속의 눈과 귀가 손을 통해 카메라로 전달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폴라로이드가 만들어 주는 사진은 그런 것이 아닐까.
’좀 더’ 가깝게 만들어서, 마음의 거리를 좁혀주는, 전파 같은 것.


(+)
어쩌다보니 폴라로이드에 대한 이야기만 하게 됐다.
개인적으로도 폴라로이드를 좋아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은데, 편향된 글쓰기를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60억의 사람이 있다면 60억의 생각도 있는 법이니까.
같은 책을 똑같이 받아들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음, 이건 구차한 변명인가?
여하튼 로모 역시 훌륭한 카메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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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놀기 -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
강미영 지음, 천혜정 사진 / 비아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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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아니, 이제 2009년을 말해도 될 것 같다.
2009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 인색하다. 
공부의 스트레스, 직장의 스트레스, 과음으로 인한 스트레스.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그 정도를 스트레스라고 생각하지 않아’ 라면서 희망차게 말한다. 
그러나 그건 모르시는 말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일어날까, 일어나지 말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거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스트레스라고 생각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스스로를 얼마나 스트레스 속에 방치한 채로 살아 왔는가?
세수를 할때면 손끝에 느껴지는 푸석푸석한 피부, 머리를 감을때면 으레 빠지는 줄 알고 방치하는 한 덩어리의 머리카락, 점점 진해져서 며칠 뒤면 얼굴 전체를 덮어버릴 것 같은 다크서클. 

어느날 문득,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내가 도대체 뭘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든다면.
혹은, 나에겐 왜 이렇게 여유가 없지, 나는 왜 이렇게 시간이 없는거야, 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도저도 아니라, 그저 주말에는 잠만 자면서 자기에겐 늘 여유가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서 이 책을 손에 넣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 그 시간마저 없다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 인터넷 서점도 있다는 것을 말씀 드려야겠다.

우리는 어릴 때, 놀이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웠다.
잘 놀던 아이들은 대체로 성격도 밝았고 성적도 좋았다. 
공부를 잘 하던 놈이 잘 놀았던 게 아니라, 잘 놀던 놈이 공부를 잘 했던 거다.
정신과 상담에서도 이런 특징은 뚜렷이 나타난다.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대체로 잘 놀지 못하는 사람의 유형이라는 특징을 보이는 반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대개 잘 노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잘 노는 것은 좋은 직장이나 좋은 배우자, 좋은 차나 좋은 집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우리 삶의 요소라는 인식을 해야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노는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갖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왔기 때문이다.
놀면 뒤쳐진다, 공부해라, 일해라, 놀면 그만큼 너의 수입은 줄어든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이기고 살아남으려면 너의 휴가를 반납할 각오로 일해라, 공부해라, 한 문제로 너의 직장과 배우자가 바뀐다...
성장을 목표로 했던 산업화 시대의 부정적인 사고는 결국 우리를 정신병이라는 구덩이 속으로 빠뜨렸다.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한가. 게다가 ’혼자 놀기’ 라고? 

우리나라의 1인 가구가 330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외자녀 가정은 갈수록 늘어만 가고, 독신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도 날로 늘어만 가니, 1인 가구는 앞으로도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 삶은 이럴진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라! 

저자는 이 앞선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혼자 놀기라는 테마로 책을 엮었다.
까페에서 혼자 놀기, 여관에서 혼자 놀기, 왼손을 써보기...
어쩐지 뻔한 것 같은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점차 깊은 곳을 파고 든다.

날카로운 송곳으로 가슴에 탁 구멍을 뚫어놓고 그 안에다가 커다란 잉크병을 왈칵 들이 붓는다. 고전을 인용한 문구 탓도 있을테고, 간간이 시적인 문장 탓도 있을테고, 무엇보다 감성적인 사진의 탓이기도 할테다.
’혼자 놀기’라는 자칫 명징해 보이는 말을 숨쉬게 만들어 준 것은 이 모든 것들의 공이기도
하거니와, 나의 자리 찾기 라는 분명한 주제 의식의 공이기도 하다.

[혼자 놀기]는 혼자 노는 방법을 나열한 지침서가 아니다.
혹시나 내가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구시대적인 패러다임을 전환하라는 완곡한 그림 시집이다. 
조용하고 작은 까페에서, 커피향을 맡으며 창가에 앉아 나른한 햇살을 등지고 읽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집에서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읽어도 좋다. 
조금 욕심내서 속옷만 걸친 채라면 아주 환상적일 것 같다. 
이건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나에게 선물을 줄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중요하다.
우린, 그만한 존재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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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남자 - KI신서 916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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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적이 있었다. 
시간을 기록한다고 생각했던 순간.
어떤 사람의 살아온 날, 그 숫자만큼의 어떤 말을 적어내려가던 애틋한 기억이 말이다.
꽤 근사한 일이었다.
보통 힘든 일이 아니기도 했고, 생각보다 오래 걸리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꼬박꼬박 쓰는 일이었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비가 오는 날도, 기분이 좋은 날도, 좀 삐진 날도, 화가 난 날도.
나는 항상 그것을 붙잡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쓴다(記)는 건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행여 잘못해서 글씨가 삐뚤어진다거나, 오기(誤記)를 해서 부득이하게 지워야 할 일이 생긴다거나 하면, 으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의 하루를 내가 잘못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내가 이때 실수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기에 그때의 너는 아픔을 겪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성의없이 휘갈겨 쓴 어떤 날은 너의 마음도 이리저리 휘갈겨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다 최후에 드는 생각은, 
예쁘지 못한 내 글씨로 인해 너의 시간이 더욱 아름다워지지 못한 것을 아니었을까, 였다.

우습지만 그랬다. 
내가 쓰지 않은 앞으로의 시간이 더욱 빛났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었다.
그럼 그건 나로 인해, 내가 쓰지 않음으로 인해 그런거라고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이 긴 서두에 비하면, 소설은 굉장히 짧은 편이다.
작가는 그 의도를 분명하게, 혹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시간은 돈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읽을 시간이 없으니 글을 쓸 시간은 더더욱 없다. 그러므로 축약한 형태로 쓰는 것이 실용적이다. 
이런 뻔뻔한 태도는 흥미롭다.
모험적이지 않은가? 대놓고 독자와 불꽃튀는 대결을 하겠다는 의도를 표출하고 있으니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다. 
 
이야기는 복잡한 플롯 없이 술술 읽힌다. 어라? 단숨에 읽고 나니 겨우 1시간 30분이 지났을뿐이다. 쉽게 읽힌 것에 비하면 남겨진, 그리고 숨겨진 텍스트의 양은 생각보다 방대했다.
내가 쓸데없이 기나긴 서두를 쓴 것을 보면 알만하지 않은가?

사실, 책의 내용 자체는 예측이 가능한 진부한 내용이지만 부분부분 작가내면의 날카로운 담론이 담겨져 있어서 충분히 그 단점을 만회한다. 특히나 사회제도와 경제상황을 압축해 놓은, 그 방대한 분량을 압축해 놓은 장을 보고 아연해 지기도 했다. 정말 그렇구나 싶어서. 우리 사회는 밀물이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모래성이구나, 란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경제관념, 상황, 특히나 이 소설의 중요한 맥락은 ’시간’ 보다는 ’마케팅’ 인 것 같지만, 작가의 시각에 박수를 보낸다. 어라? 그러고보니 이 작가, 전공도 경영학이다. 마케팅 관련 서적을 출간한 경험도 있다. 하하, 거저 얻어진 통찰은 아닌 모양이다.

지하철에서 읽으면 좋을 책. 
왜냐하면 지하철만큼 이 사회를 거대하게 담고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다 읽고나서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자, 당신은 얼마만큼의 시간을 빚지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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