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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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종언을 원했고 우린 증언했다.
1996년 2월 16일. 헌법재판소는 5·18 특별법을 합헌 판결했다. 
아주 반응이 뜨거웠는지는 모르겠다. 두 명의 전 대통령을 비롯한 여럿이 법원으로 갔다.
어떤 어른들은 소주를 마셨을테고, 어떤 어른들은 멱살을 잡았을는지도 모른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너무 어렸고 세상엔 그것말고도 재밌고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있었지, 로 그날을 기억했다.

그날, 그런 일이 있었다. 




1.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전라남도를 ’본’ 적이 없다. 지나간 적은 있다. 지나긴 했는데 본적이 없다니,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으리라 본다. 여기엔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 고등학생 때 갔던 제주도 수학여행은 비행기로 출발해서 배와 버스로 도착했었다. 배는 완도에 우릴 내려줬던 것 같다. 기억은 여기서부터 좀 몽롱해지기 시작하는데, 그건 내가 배에서 내리 잠만 잤기 때문이다. 수학여행하면 떠오르는 로망 때문이라고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겠다. 놀랍게도 한 번 불붙기 시작한 잠은, 배에서 버스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달아나지 않았고 덜덜거리며 버스가 출발하기 시작할 때쯤엔 기다렸다는 듯 몰려왔다. 그렇게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널브러진 소년 다수를 태운 버스는 전라도를 지났다. 눈을 떴을 때는 충남 어디쯤을 지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 덕분에 전라도에 대한 내 기억은 3년이나 유보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참 희한하게도’ 나는 대학을 전남 순천으로 가게 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희한함 속엔 ’거기가 어디냐’ 는 물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원서를 쓰기 전까지 우리나라에 순천이란 곳이 있는 줄 몰랐었다. 물론 지금은 가장 사랑하는 도시가 되었지만. 원서를 쓰고 나서 사회과부도를 펼쳐놓고 난리 부르스를 추던 기억이 난다. 

1, 2지망 대학을 모두 떨어지고 내게 남은 것이 정녕 재수인가 탄식하고 있을 때, 운명같은 전화벨이 울렸다. 그날과의 인연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운명같은 통화에서 난생 처음으로 ’오리엔테이션’ 이란 말을 들었다. 그것도 ’신입생’ 이란 단어가 앞에 붙은. 지금에 비하면 꽤 순수했던 시기였기에 그런 행사란 반드시 가야하는 줄로만 믿었고, 망설임없이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더랬다. 9시였는지 10시였는지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지만그 ’오리엔테이션’ 이란 게 오전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아주 오래된 시간을 추억하는 말 같아 우습지만, 당시엔 충청북도 청주에서 전라남도 순천까지 하루 안에 오전 도착이란 불가능했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단 하나의 방법은 ’전날 밤 출발’ 이었다. 광주에선 순천가는 버스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인터넷으로 확인한 터였다. 그날 이후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많이 변했다.  

세 시간을 달려 도착한 광주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순천행 버스가 끊긴 시간이었고, 많지 않은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갈 곳을 향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그 모든 사실을 안고 터미널 근처 여관으로 향했기 때문에.


그날 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여관이란 곳에서 숙박이란 것을 했다.
듣기만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전야였다. 광주에서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

"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가장 예뻤을 때』, 254쪽.




2.
치우치지 않고, 매몰되지 않고 그날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삶에서 가장 분명한 사실은 오직 죽음뿐이다. 알면서도 외면하니, 왜곡은 촘촘한 삼단논법의 결론처럼 피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무섭다. 그날과 관련된 말을 하는 것도, 그날과 관련된 책이며 영화며 노래를 접하는 것도. 이 책을 완독하는 일도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문학개론 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수업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강의의 명칭이 무엇이었는지는 헷갈리지만 강사님만은 또렷이 기억나는 강의였다. 대학생의 자유란 것를 철모르게 오독하고 있던 시기에 수업의 일환으로 광주를 찾았던 적이 있다. 그때의 나는 ’독특한’ 이나 ’젊음’ 이란 말 또한 내 식대로 오독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여’ 지길 바랐던 것 같다. 발표수업 시간엔 내용도 없으면서 그럴듯한 노래를 목청껏 불러 그럴듯하게 보여지길 바라거나, 나보다 열살도 넘게 차이나는 형님과 그럴듯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럴듯하게 보여지길 바라곤 했다. 그런 만용의 시기에 광주를 찾게 된것을 어찌보면 운명,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무서웠다. 망월동에서. 이름없는 무덤, 붉은 흙 앞에서 무서웠다. 추모관 비슷한 곳에 걸려있던 그날의 사진, 죽음 앞에서 정말로 무서웠다. 잔혹하게 파헤치고 찢겨진 사람들. 시리도록 하얗던 드러난 뼈들. 그토록 하얗던 국화. 그날도 환하게 떠올랐을 해를 보면서 나는 새파랗게 질렸다.   
 
그 순간에 스쳐갔던 많은 것들을 어떻게 다 적어내려갈 수 있을까. 그것은 지금 해야할 말이 아님을 느낀다. 시대의 증인들은 아직도 토해내는 중이다. 이미 토해낸 것들에서 그날을, 내게 스쳐갔던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믿을 수 없게도 그날 이후로

나는 가끔 심장이 가렵다.




3.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기 전에 지레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다. 치우치지도, 매몰되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오롯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도 치우치고 매몰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무사하진 않으나 살아남은 자의 부채, 라고 말하고도 싶으나 아는 바가 많지 않다. 

이 책은 더 무슨 이야기를 보탤 수 있을까, 하고 얹혀진 말이 아니다. 오히려 덜어내기에 가깝다. 견고해보였던 막을 걷어낸 무대 뒤 이야기다. 그날이 너무 묵직해서, 그 무게만큼 가라앉혀야 했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을지. 슬프며 기쁘고 안타까우며 애틋했을 긴긴 밤이 그려진다.

떠난 이도, 남겨진 이도 시절의 청춘이었다. 똑같이 사랑할 줄 알고, 똑같이 노래부를 줄 알며, 똑같이 술을 마실 줄 알던 청춘들. 

"우리는……아직 좀더 흔들려도 좋을 때잖아."
                        -같은 책, 300쪽.

그들이 가장 예뻤을 때, 우리는 가장 예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이 가장 예뻤을 때, 우리는 가장 부끄러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젊음의 초상이고 청춘의 자화상, 결국 사랑의 이야기이며

성장소설이다     

,고 말하고 싶다. 

그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안타까운 거리만큼, 안타까운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이환과 보낸 세상물정 모르던 시간들은, ’내 가슴에 은하수 흐르던 시절’들은 아스라이 멀어졌다. 그 시절은 내게도 오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환에게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시절이 그렇듯, 목련이 지듯, 모란이 지듯, 속절없이 지나가고 전혀 다른 새로운 시절들이 밀려오게 되어 있다.
                        -같은 책,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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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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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모든 게 책으로 보여. 세상도 사람도 모두모두.
                                                  -『위험한 독서』,「작가의 말」중에서

 
현재인 것 같기도 하고, 과거인 것 같기도, 혹은 가까운 미래인 것 같기도 한 김경욱의 단편들을 읽을 때면 과거의 어떤 시간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묵은 ’나’ 라는 책의 시제가 불분명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책이, 책을 읽고 쓰는 이 글이 불분명한 내 책의 시제를 찾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너무 넓고 사람이 많은 공간에 서면 나는 두렵다. 말과 글은 논리정연하지 못하고 시선은 늘 방향을 잃은 채 곤혹스럽다. 두렵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그렇기 때문에 두려운 것인지.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마치 하나의 패러다임처럼, 그것이 확립되기까지 많은 산발적인 선행된 발생이 누적된 형태라고만 짐작할 뿐이다. 한순간의 폭발적인 급진으로 훌쩍, 건너뛰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독서는 그런 식으로 진행될 수 없다.
 
 
1.
세상이, 세상 모든 것이 책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키 작은 아이였던 시절부터 부모님은 책을 사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으셨다. 좁은 집에 제법 많은 책이 있었다. 그 책들을 모두 읽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만큼 독서를 좋아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지금도 유효한 말이지만, 그저 책의 냄새가 좋았다. 책의 냄새는 항상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일을 하러 가시고 동생과 둘만 남은 날이면, 그러니까 거의 매일, 책을 성처럼 쌓는 놀이를 하곤 했다. 책 사이를 뛰어다니며 냄새를 맡는 일, 먼지를 들이마시는 일은 좀체 질리지 않았다. 한참을 놀다가 지치면 책을 베개 삼아, 책을 이불 삼아 잠들곤 했다.
 
어렴풋이 세상이 책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일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어났다. 나는 시력이 꽤 나쁜 편이다. 부모님은 TV와 게임기 때문이라고 믿고 계시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TV를 아주 좋아하지도 않았고, 가까이서 보지도 않았다. 게임은 좋아했지만 바깥에서 뛰노는 걸 마다할 정도로 매달린 적도 없었다. 시작은 한 권의 책이었다. 어느 책이었을까, 혹 '실험과 관찰' 같은 교과서를 보던 수업 시간이었을까.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불가능 하고, 눈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구절을 본 적이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불가능이란 말이 가당키나 할까.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심리의 기인은 아마 아이들에게 '불가능' 이란 단어 자체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태양을 쳐다본 적이 있다.
 
책이 옳았다. 이건 내가 가진 최초(라고 생각되는)의 위험한 생각이었다. 책을 신뢰하게 된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은 간단하다. 책을 따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현실감각이 책 속으로 수렴되는 사람이 나는 되었고, 세상은 책이 되었다.
 
 
2.
책으로 인한 최초의 상실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어떤 이유로 시작하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피아노 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다. 악보라는 책을 읽는 일은 즐거웠다. 읽은대로 움직이면 곧바로 소리가 나는, 책과 현실이 채 한 뼘도 안 되는 독서는 황홀했다. 읽기에 능숙해지면서 간혹 얼토당토않은 읽기를 감행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바쁜 틈을 타 악보를 읽지 않고, 세상이 내던 소리를 애써 기억해내며 읽던 시간들. 어쩌면 그것이 최초의 쓰기, 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피아노에도 급수라는 게 있었다. 여러 피아노 학원의 학생들을 모아놓은 뒤에 몇 개의 곡을 무작위로 돌려가면서 연주를 시키고 합격과 불합격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만약 그때 시험장에 조금 늦게, 아니, 정시에라도 도착했다면 나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서둘렀던 탓에 정해진 시간보다 빨리 시험장에 도착한 것, 시작은 거기부터였다. 강당과 같던 넓은 공간, 단상 위에 놓인 까만 피아노. 선생님은 한 명씩 단상 위로 올려보내 짧게 연습을 시키셨다. 처음 올라간 아이는 이번 시험에 나올 악보를, 늘상 읽던 책을 별다른 동요없이 무난하게 쓰고 내려왔다. 두번째는 나였다. 선생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짧게 연습을 하라고만 했지, 어떤 책을 쓰라고는 말해주지 않았다.
딩동딩동.
내가 쓴 것은 조악한 나의 이야기였다. 갑자기 아래에서 와, 웃음이 터졌다. 다른 학원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겨우 저런 실력으로 여기에 온 거야?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이 내게로 집중됐다. 재빨리 시험에 나올 악보로 연주를 바꾸었다. 하지만 당황한 마음은 익숙한 책마저 뒤죽박죽으로 기억하게 했다. 나는 엉뚱한 건반을 두들겨댔고,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연습은 충분했고, 기다리는 다음 아이가 있었다. 이미 붉어진 얼굴이었지만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걸어나왔다.
 
본 시험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내 연주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끝났다. 무난하게 급수장을 손에 쥐었다. 정해진 책을 참 잘 읽었어요, 라고 말해주는 듯한 급수장을 보자 다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시험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학원을 그만두었다. 내 이야기는 옳지 않았다.
 
 
3.
현실이 책으로 수렴되고, 책이 현실에 발디뎌 안착하게 된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현실은 책으로 수렴되고, 책은 현실을 휘젓고 다닌다. 내 청춘의 아이들이 어느 곳에서나 헤엄치고 다니는 그 도시, 순천이라는 지명의 도시는 어느 지도에도 표시 되지 않은 도시가 되어버렸다. 삐뚤어진 욕망, 정상적이지 않은 독서는 제멋대로 그리움을 만들어냈다. 내가 살았던 그곳의 자취방과 지역의 이름을 딴 여중 근처에 있는 허름한 고시원은 '갑을 고시원¹ ' 이 되었고, 그곳의 번화가 초입에 있는 맥도날드는 '맥도날드²' 가 되었다. 비틀거리던 그곳의 술집들은 '그 술집³'이 되었다.
 
나의 시제는 갈수록 점점 뒤죽박죽, 헝클어지고 있다. 온갖 책으로 세워진 상상의 도시를 만들며 꿈꾸던 것은 안전하게 숨어지낼 구덩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과거의 어떤 시간들로부터 시작된 페이지가 뒤섞여버린 나, 라는 책을 묻어버릴 구덩이. 부끄럽고 괴로워서 지우고, 찢고, 불태워야만 했던 페이지들. 어떤 것은 너무 빨리 찾아오고, 어떤 것은 아직도 찾아오지 않은 몸만 자란 소년의 이야기. 밤하늘을 보며 더 이상 자라지 않았으면, 중얼거리던 꼬마와 고속도로 휴게소에 앉아 어서 자랐으면, 중얼거리던 남자.
그들의 페이지.
여전히 위험한 상상을 한다.
당신의 독서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매혹적인 책이 되어주겠다고. 위험한 낙서가 되어주겠다고. 어서 나를 읽어달라고. 
 
 
                                                     

1) 박민규,『카스테라』,「갑을고시원 체류기」
2) 김경욱,『위험한 독서』,「맥도날드 사수 대작전」
3)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그집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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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 230 Days of Diary in America
김동영 지음 / 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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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스물한 살, 울창한 숲 속의 길을 걷는 너에게.

노란색과 녹색 중에서 많이 고민했어. 봄인데 어떤 색깔로 봄을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을까하고^^ 결국엔 이 녹색이 당첨됐지만!! 아, 헛소리 하려는게 아니었는데...생일 축하해^ㅡ^ 내가 막막 성대한 파티 수준으로 축하해줄 순 없지만, 적어도 내 동생 생일을 허투루 보내고 싶진 않았어. ’어떤 걸 선물하면 좋을까’ 라고 한참동안 고민했는데, 역시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책이 아닌가 싶었어.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도 또 고민이 되는거야. ’도대체 어떤 종류의 책을 선물해야 되는걸까?’ 
무작정 소설을 선물 하기엔 내 취향을 강요하는 것 같고, 혹 싫어하면 어쩌나 고민도 됐고. 

그러다가 생각이 난 게 [듀이] 였어. 네가 내, 서평을 가장한 낙서에 ’읽고 싶다’ 는 흔적을 남겼던 사실이 기억이 나더라. 그래서 일하는 서점을 뒤졌는데, 세상에, 다 팔린 거 있지;; 너무 아쉬워서 쪼그려앉아 낙담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그 생각이 났어. 언젠가 내가 너에게 이야기했던 너만의 시간. 그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책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전부터 내가 찜해두고 있던 이 책을 골랐어^^ 순전히 내 스타일이긴 하지만...이 책이 네게 어떤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비가 오는 날이면 좋을거야. 아스팔트 도로의 자그마한 틈 사이를 파고드는 봄의 청량한 빗방울처럼, 네 마음의 작은 틈 사이로 스며들어서 1분, 혹은 1초라도 낭만적인 시간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어. 보잘 것 없는 위로가 되길. 이제 진짜 성인이 되는 너의 가슴 한켠에 미세한 향기로 남길, 바란다. 

조급해 하지 말고, 많은 말을 하려 하지 말고, 굳이 당장 이해받으려 하지 말고, 지금은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대로 모든 것을 전진시키도록 해. 세상에 나면서부터 시작된 ’여행’ 을 거짓으로 하느냐, 진실로 하느냐는 다른 사람들에게 달린 게 아니니까.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들은 모두 새롭고 경이로운 여행의 풍경들인데, 
우리가 지레짐작하고 ’지겹다’ 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쁘게 보여지려고 노력하기보다 너 스스로에게 솔직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이런 말 하는 내가 완벽할 리는, 당연히, 없지만^^; 우리 서로 노력해서 다음에 얼굴을 마주할 땐 ’그런 일이 있었어요.’ 로 자신있게 운을 뗄 수 있는 오늘을 살자. 시작해 보자. 그 자체는 네게 더 없는 큰 선물이 될거야. 나처럼 먼 길을 돌아가지 않고도 네가 멋진 사람이, 분명히 될 거라고, 불분명한 나보다 몇십배쯤은 확실하게 그렇게 될거라고 믿어.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에 네가 서른이 되었을 때, 스물을 살고 있는 네가 상상하기 끔찍한(!) 시간이겠지만, 그 때가 되었을 때 이 책을 기억해줬으면 해. 열에서 스물로 넘어오는 시간이 급변하지 않았던 것처럼 스물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시간도 마찬가지 일거라고 생각해. 열아홉에서 스물이 되는 순간, 우리의 키나 눈의 깊이나 양팔의 너비는, 갑자기 커지거나 깊어지거나 넓어지지 않았잖아. 11시 59분이 12시가 되는 것처럼 미세하고 당연한 과정을 ’살아가는 중’ 에 불과하니까. 

가파른 절벽을 단숨에 뛰어넘으려고 하진 마. 그렇게 조급해하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넌 잘 해낼거야. 우리의 삶은 우리가 가진 꿈의 크기에 비례해서 고양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되도록 꿈은 크게 가지되, 당장 눈 앞에서 그 꿈과 관련된 어떤 일이 성취되기를 바라진 마. 결국 꿈을 성사시키는 것은 내가 가진 진심의 깊이를 따르니까. 

지금은 네 마음 속에 깊은 구덩이를 팔 때야. 삽질같은 육체적인 노동은 당연히 힘들지.
힘든 시간, 현명하게, 누구보다 멋지게 이겨나가리라 생각한다, 너는.

이렇게 지리한 말들을 풀어놓는거 보면 조급해하는 건 오히려 내쪽인 것 같다^^
이 인연이 너무 소중해. 제대로 함꼐 나눈 시간은 얼마되지 않지만 내가 너의 오빠가 된 것, 네가 내 동생이 된 것. 쓸데없이 진지한 게 아니라, 네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감사해^ㅡ^

진심으로 생일 축하한다. 봄비가 내린 뒤의 포근함같은 매일이 되길, 바랄게.


 

 
 

2009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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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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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성호 감독의 2007년 작품 [은하해방전선] 의 한 장면. 영화감독인 주인공과 그가 만든 영화의 주연배우가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다. 배우는 주인공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질문하면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하는지. 주인공은 핸드폰 문자로 이렇게 답한다. 별거 없어요 그냥 '소통' '인간' 그런 말만 하면 돼요. 그렇게 시작되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우리의 주연배우는 사람들의 질문에 이런 식으로 답한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소통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상대 연기자와의 소통을 중요시…현대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의 소통…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소통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마지막엔 결국 자기 자신도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은하해방전선] 에서 이 장면은 우스우면서 신랄했다. 실제로 소통은 우리에게 지난한 일이 되었고, 누구나 완전한 소통을 꿈꾸기 때문에. 그가 웃을 때, 우리도 따라서 웃게 되지만 지나고 나면 찝찝한 무엇이 남았다. 


2. 이 영화를 다시 보는 동안 아무도 내게 문자 하지 않았다.


3. 이 책을 읽으며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작가가 생각하는 여행과 내가 생각하는 여행이 비슷할 수도 있겠다고. 나는 사진이 절반을 차지하는 여행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여행을 위한 책인지 책을 위한 여행인지 헷갈리게 한다.(본문 13쪽) 겨우 13쪽을 읽고나서 한 속단일수도 있겠지만, 이런 문장을 보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여행은 과시하기 위한 방편이 되어선 좋을게 없다는 게 내 솔직한 생각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기에 책이라는 것은 좀 무리지 싶다. 그것은 인터넷이 충분히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행책이 쏟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도 여행책에서 발빠르게 정보를 찾으려는 생각따윈 하지 않는다. 여행책의 아이덴티티란 여기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자기를 들여다보는 일. 거기서 과시와 발전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4. 그런 말이 있더랬다. 인생은 여행이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 죽음에는 누구나 혼자일 수밖에 없다, 같은 말. 나는 전적으로 그 말들을 신뢰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영혼까지 이해하거나 완전한 소통을 할 수 없다. 단지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말과 글이 미끄러지듯, 사람과 사람은 언제나 미끄러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산다는 것은 오해로 점철된 세계를 산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정말로 이상하고 이상한 일은, 그 오해들 속에서 우리는 기쁨과 슬픔과 행복과 만족과 실패감과 소외같은 모든 감정을 맛본다는 것이다. 


5. 당신과 나 사이엔 오해만이 있을 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아무도 내게 싸이월드 방명록을 써주지 않았다. 


6. 이 책의 호흡은 짧고 격하다. 문득 맥박, 이란 말이 떠오른다. 평상 시 사람의 맥박은 60에서 80 사이다. 격한 운동 시 사람의 최고 맥박은 120에서 180 사이다. 이 책에서 장은진 작가는 최고 맥박으로 달리고 있다. 이 책은 152장이다. 


7. 그렇게 숨가쁘게 달리는데도 나는 이 책이 참 쓸쓸해 보인다. 그래, 그러고 보면 달리기도 결국 혼자일수밖에 없는 운동이다. 달리기는 살을 뺄 때도 하지만, 답답할 때도 하고, 고독할 때도 하는 것이다. 도시에서 사람들은 모두 강변을 따라 달린다. 가끔 나도 그 안에 속할 때가 있지만, 그들을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면, 멀어지는 그 뒷모습이 여간 쓸쓸하지 않다. 어쩐지 그녀의 달리기를 보게 된 것만 같다. 


8. 여전히 아무도 내게 편지하지 않고, 나는 가끔 달리는 사람들을 보거나 간혹 그 사람들처럼 뛴다. 열 번에 한 번쯤 그녀의 달리기를 생각한다. 격한 운동으로 최고 맥박이 긴 시간 유지되면 사람은 죽는다고 어느 책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러다 어느날 해가 지는 다리 위에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그녀가 옆에 있을 것만 같다. 희미하게 입가에만 미소를 머금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살짝 웃어주고 다시 다리 밑으로 시선을 돌릴 것이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엔 또 오해가 만들어질 것이다.


9. 아무도 내게 편지하지 않았으나, 나는 편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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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불패 - 이외수의 소생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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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릴적엔 참 많은 꿈을 꾸었다.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일도 뭐가 그리 많았던지. 그 모든 지나쳐간 꿈들을 한때의 치기로 묶기에 그때의 우린 너무 순수했다. 여름날의 소나기같이 금세 지나갈지언정. 그것은 본인조차도 예측할 수 없는 거센 흐름이었다. TV에서 멋진 축구경기를 본 다음날이면 한 반에 열댓 명씩은 장래희망이 축구선수로 바뀌기 일쑤였고, 소방서에서 어린이 안전교육이라도 나왔다치면 또 우르르, 장래희망이 소방관으로 몰려가곤 했다. 

그렇게 많은 바뀌는 꿈을 꾸면서 그 꿈들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낙담하지 않았다. 우린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그런 깊은 생각을 했다기보다 어떤 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린 우리의 마음 속에 '그건 안 될거야.', '그건 내게 어울리지 않아.' 따위의 부정적 경계같은 건 없었다. 이상한 말일지 모르지만 우리 키가 아주 작았던 시절, 꿈은 가장 꿈다웠다. 

슬프게도 우리가 자라면서 삶이 방사형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다는 총체적이고도 구체적인 지각력이 덩달아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로인해 작년까지 꾸었던 꿈을 사실은 이룰 수 없으리라는, 지금의 내 성적과 지금의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일임을 동시에 깨닫게 되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던 희망이 사실은 모든 얽힘에 의해 소거당하고 남은 것 중에서의 강요라는 절망스러운 현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게 되었다.

잔인한 세상은 이 고통을 성장이라고 곱게 포장했다. 도대체 포기하는 일이 어떻게 성장인건지, 세상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렇게 포기하며 겪은 '성장통' 으로 자란 우리는 '어디 또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며 두리번거리기만 하다 종종 기회를 놓치곤 했다.  잔인한 세상이 보기엔 아무 일도 없었고, 있어봐야 별 일 아니었다.

그렇게 모두 믿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꿈을 꾸는 사람들, 있다. 그러나 함께 어른이 된 우리들의 시선은 그들에게 노골적이었다. 그랬다. 우리는 그들에게 몽상가, 부적응자, 허풍쟁이의 입멍¹ 을 씌워버렸다. 그것은 씌우는 사람도, 씌움을 당한 사람도 모두 아픈 일이었다. 모두가 아프지만 왜 아픈지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승자는 오직 세상뿐인 듯, 우린 모두 아팠다. 계속 우린 아팠었고, 깨닫지 못한다면 계속 우린 아플 것이다. 

2.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육체적으로 아팠다. 떠도는 생활 중에 잠시 친구 방에 정착을 하게 된 일이 있었다. 갑작스레 바뀐 생활패턴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어이 몸살이 났다. 평소 잘 먹지도 않던 약까지 챙겨먹고 종일 누워 있었다. 밖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번개 번쩍, 우르릉 쾅. 하늘이 꼭 나를 놀려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안에 쳐박혀 있으니 편하냐, 고 살살 약을 올리는 것 같았다. 오기가 생겼다. 이불에서 나와 창가로 걸어갔다. 여전히 번개 번쩍, 우르릉 쾅.

분했다. 언젠가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꼭 손등에 빗방울을 묻혀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그날은 너무 몸이 아팠다. 창가까지 걸어간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안타깝고 분하지만 돌아설 수 밖에 없겠다고 낙담하려는 찰나, 친구의 책장에 꽂힌 한 권의 책을 보게 되었다.『날다 타조² 』라는 이외수 선생님의 책이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다른 책도 많았는데 왜 그 책이 눈에 띄었던 걸까. 왜 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그 책을 읽으려 손을 뻗었던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그날 결국 손등에 빗방울을 묻혔다. 그건 내 마음에 오기 비슷한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 용기는 결국 날 밖으로 이끌었고, 변화는『날다 타조』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3.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어차피 세상은 사소한 일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사소한 마음, 사소한 행동, 사소한 말에서부터 위대한 것들은 만들어진다. 그럼에도 우린 사소한 것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지 않은가. 꿈꾸길 망설이는가. 사소한 결정을 내리지 못해 망설이는가. 혹 당신의 꿈이 타박을 받았는가. 
너나할 것 없이 우린 모두 아프다. 처방이 필요할 때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난 거지꼴의 노인이 말했다.

여기, 약 있다.  

아놔. 도인이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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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멍에라고 쓰려다가 입멍이라는 단어로 바꿔보았습니다. 입멍은 부리망의 충청도 방언 입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 꼬마 시절에 할머니를 따라 소를 끌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소는 진득한 침을 뚝뚝 떨구며 따라왔었어요. 그때 저는 멍에보다도 부리망이 소를 더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부리망은 소를 부릴 때 소가 곡식이나 풀을 뜯어먹지 못하게 하려고 가는 새끼를 꼬아 그물처럼 엮은 것입니다. 소의 주둥이에 씌우는 것인데, 사진을 보면 다들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2)『청춘불패』는『날다 타조』에 이외수 작가가 새로 집필한 원고와 정태련 작가의 그림을 더해 재편집한 개정증보판입니다...라고 책의 맨 뒷장에 적혀 있습니다. 좋은 책이 개정되어 다시 나온다는 것은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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