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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9월
평점 :
어느 날, 삶은 말했다.
계속 똑바로 가, 똑바로, 길을 벗어나지 마.
그때 이후로 바보 같은 삶은 교훈을 배울 능력도 없는 주제에
우리를 가르친다고 뽐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했다.
심지어 자신이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 살펴보거나
나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는 법도 없었다.
별 것아닌, 남들이 하는 정도의 걱정ㅡ오늘 직장은 언제 끝날 것이며, 저녁으로는 뭘 먹고, 시간이 남는 늦은 밤까지 뭘 할까 정도의 걱정을 하며 살아가던 당신은 어느날 동료에게 우연히 영화를 추천 받는다. 딱히 할 일도 없고, 친절한 동료의 호의와 배려를 확인하기 위해 당신은 대여점으로 걸음을 옮긴다.
당신은 비디오를 빌렸지만, 처음에는 딱히 보고 싶지 않아서 쇼파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다. 저녁을 먹고, 의미 없는 짓거리를 몇 번 하다가 곧 흥미를 잃은 당신은 비디오를 생각해 낸다.
평범한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당신은 얼마간 웃고, 얼마간 비평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다행스럽게도 영화는 적당히 흥미롭다. 동료의 호의와 배려는 만족스럽다.
그런데 당신은, 영화에서, 당신을 본다.
보잘 것 없는 단역에 불과하지만, 그 모습은 당신 자신이기에 놓쳐지지 않았다.
얼굴이며, 몸통, 팔, 다리, 걸음걸이...모든 것이 당신과 똑같다. 이윽고 영화 속의 당신이 배역에 맞는 짧은 대사를 입에 올렸을 때, 당신은 비디오를 꺼버린다.
그건 심지어, 목소리까지 똑같았다!
신경증 환자처럼 온 방안을 쏘다니던 당신은 다시 비디오를 켠다.그리고 당신이 등장한 그 장면을 반복해서 돌려보고, 당신이 등장하는 씬에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다. 당신에게는 없는 멋들어진 콧수염에, 머리 길이도 훨씬 길고, 더 마른 당신이 화면 속에 꼼짝않고 있다.
- 그래, 분위기가 비슷할 수도 있는거지. 내 ’습관’ 을 ’연기’해서 그런걸꺼야. 그는 연기자니까. 그는 어떤 사람도 흉내낼 수 있겠지. 게다가 저 콧수염...
거기까지 말하던 당신은 ’혹시 저 콧수염과 머리길이가 분장이라면?’ 이라는 끔찍한 생각이 퍼뜩 든다. 그러다가 당신은 갑자기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휘청거린다.
당신은 정신없이 방으로 뛰어가서 책상을 모조리 뒤엎는다. 당신이 방에서 들고 나온 것은 앨범이다. TV화면은 사진처럼 정지되어 있고, 그 앞에서 당신은 미친 사람처럼 앨범을 거칠게 넘긴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을 찾아낸다.
그 사진 속의 당신은 지금보다 조금 더 말랐고, 머리 길이가 길고...콧수염이 있다.
사진의 구석에는 날짜가 적혀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비디오를 꺼내 껍데기에 붙은 스티커에서 영화 제작일을 본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다.
당신은 그 영화를 추천해 준 동료의 저의를 의심하지만, 실제로 그는 아무 뜻도 없었다. 당신은 곧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삶은 되돌려지지 않는다. 모든 앎은 진행이다.
이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입을 닫고, 팔을 묶고, 다리엔 사슬을 매달아 놓은 채로 살 것인가.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