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박사와 하이드 (반양장) 펭귄클래식 3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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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그' 라고 부른다. 차마 '나' 라고는 말할 수 없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125쪽.


아마 어릴 때였을 것이다. 아마도 만화였을 것이다. 아니, 영화였던가. 진위야 어찌됐든,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저 쳐다보기만 해도 '허약한 사람' 임에 틀림없는 사람이 있었다. 공기의 무게마저 견디지 못할 정도로 심약해 보이던 그 사람이 위기상황에서 어떤 물약을 마시자, 그는 괴물이 되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란 만화나 영화에서 그를 다루는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 그런 변신 자체가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것이지, 그 저변에 깔린 심오한 인간에 대한 통찰에 감탄한 것은 결코 아니다. 개인적으로 작년(2008)에 개봉했던 [인크레더블 헐크] 를 아주 재밌게 봤다.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읽고 나니 둘이 굉장히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호쾌한 액션 활극, 비스무리한 것을 기대하고 이 책을 펼쳤다간 크게 후회할 것이다. 아마 당신은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원전이란 하나같이 다 시시해. 원전에서 비롯된 사생아들이 떠들어대는 소리에 이미 익숙해져버린 탓이다. 게다가 이 원전의 분량이란 게 상상보다 훨씬 적다. 겨우 100여 페이지라니. 문득,『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떠오른다. 장편이라 짐작했던 이야기가 단편소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받았던 기묘한 느낌과 비슷하다. 당시엔 이 느낌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의아해하다 곧 잊어버렸는데,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우린 원전에서 비롯된 사생아들에게 너무 길들여져 있었다. 아이들이 차지해버린 아버지의 자리를 우린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거다. 


철학 교양 수업으로 기억한다.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정말로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은 원전을 찾아 읽도록 하세요. 속도는 더딜지 모르지만 그것만큼 확실한 공부는 없습니다." 
그 말을 삼년도 더 지난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아둔하기 짝이 없다고 해야 할 지. 


과거 한 세기를 대표했던 문학들을 읽다보면 흥미로운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고전 속의 인물들을 유심히 지켜보면 그 인물들이 현대에 와서 주목받기 시작한 정신병리학에서 말하는 장애 상태에 놓여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셰익스피어의 희곡, 보르헤스의 단편, 샐린저의 소설,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스티븐슨의『지킬 박사와 하이드』등등. 마치 실제 환자(현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를 옆에서 관찰하고 묘사한 듯, 고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임상 사례에 견줄만큼 독특하고, 세밀하다. 실제로 작가의 가까운 곳에 그들의 주인공과 같은 상태에 놓인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작가들은 '어떤 괴리된 상태' 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처럼 세대를 불문하고 익숙한 인물도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전을 읽어본 사람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사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읽는 일은 인간 근원에 자리한 욕망과 공포를 엿보는 일임과 동시에 그간 의심없이 믿어왔던 개념의 진실을 목도하게 되는 일이다. 100년도 더 된 짧은 이야기가 1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대중문화 속에서 변이는 있지만, 굳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그 진실의 일부를 발견했기에 나는 그렇게 무시무시한 파멸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 진실이란, 인간은 진정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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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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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끝,
                     - 김연수,『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301쪽

약한 빗줄기가 약간 내리다 그칠 것이라던 기상청의 일기예보와는 달리, 비는 거세게 내렸다. 오후 세 시의 하늘은 오후 일곱 시쯤의 하늘처럼 컴컴했다. 묵직한 구름 어딘가의 틈 사이를 비집고 떨어지는 비를 보며, 속수무책일 기상청을 떠올리며, 나는 책을 읽었다. '세계의 끝' 과 '여자친구' 라니. 맑아야 할 오후 세 시의 장대비와 속수무책으로 그 비를 맞고 서 있을 기상청 사이의 거리를 견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건, 가까운 것인지 먼 것인지 짐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세계와 끝과 여자친구. 김연수라는 고유명사가 추가된 세계와 끝과 여자친구. 도대체 이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김연수를 읽는 일은 도시에 새로 구획된 텅 빈 아파트 단지를 걷는 일과 같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뭐랄까, 이미 끝나버린 연애를 되새김질하는 느낌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번인가 텅 빈 아파트 단지를 걸어본 적이 있다. 바람이 불때마다 훌쩍훌쩍 높이뛰기를 반복하는 정체불명의 비닐, 아직 다 치워지지 않은 도로의 모래더미, 너무 빨리 문을 연 문방구,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낯선 개. 차도 사람도 없이, 모퉁이로 사라지기 전까지, 그야말로 광활하게 뻗어있는 그 거리를 걷다보면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 심지어 나까지도. 나는 항상 길을 잃고 만다.


김연수를 읽는 일은 늘 그랬다. 이야기 안의 화자들은,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무엇인가를 깨닫고 앞으로의 세계가 더 이상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계가 아닐거라는 이상한 확신에 차곤 했다. 그 확신에서 절망도 희망도 아닌 온전한 '그 자체' 로의 위치가 정립되곤 했다. 그와 같은 결말에 항상 감탄하면서 한편으론 '그러니까, 어쩌란 말인가.' 를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세계란 그러니까어쩌란 말인가 사이의 쉼표처럼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만일 이 세계를 써 나가는 누군가가 있고 내가 그 이야기의 화자라면, 김연수를 보고 그 무엇인가를 이렇게 깨달았다고 하겠다. 이미 김연수의 중요하고 주요한 단어들은『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에서 모두 나왔다. 그는 처음부터 끝을 말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1과 10을 정립해놓고 그 사이의 숫자들을 채워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2, 3, 4, 5, 6… 2.1, 2.2, 2.3… 그 사이엔 셀 수 없이 많은 숫자들이 있다. 김연수는 차곡차곡 숫자를 쌓아나가는 계단형 작가는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9에 가까운 어떤 실수가 아닐까. 그는 그 자신의 세계의 내연을 끊임없이 잘게 다진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넓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무엇을' 쓸 것인가 못지않게 '어떻게' 쓸 것인가도 중요한 일이다. 투박하지만 전자를 주제, 후자를 문체라고 이해해도 특별히 어폐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김연수의 쉼표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에게 쉼표는 작은따옴표의 역할을 일부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 나름의 호흡법. 사실, 문장부호가 문장부호로만 쓰이는 시절은 가고 있다고, 한 사람의 독자로서 짐작한다. 아마 김연수는 자신의 문장들을 몇 번이고 입 안에서 굴려보지 않을까. 자신의 폐활량에 알맞은 문장을 조립하기 위해서. 문득, 반듯해 보이는 그와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만일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자, 그럼 다시 텅 빈 아파트 단지다. 문득 스쿠터를 몰고 전국을 떠돈답시고 다녔던 계절이 떠오른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길목이었다. 어느 도시에서 길을 잃었던 적이 있다. 손에는 전국의 도로가 표시된 커다란 우리나라전도 한 장, 그 도시의 지자체에서 발간한 접는 관광안내도 한 장이 있었다. 지도는 상세했다. 문제는 내가 있는 이곳이 지도의 어디쯤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데 있었다. 무작정 가보자고 스쿠터를 몰면 몰수록 길은 점점 좁아지고, 주변으론 점점 푸른 논이 다가왔다. 덜컥 겁이 나서 길 한 켠에 스쿠터를 세우고 지도를 훑기 시작했다. 그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시던 할아버지께서 공황상태에 빠진 나를 보고 손가락으로 저 멀리 어딘가를 짚어주셨다. 지도의 어디가 아닌, 길을.

"이런 시골길에선 버스정류장이 어딘지 물어봐야 큰 길로 갈 수 있지."


버스정류장. 김연수의 글을 읽으면 버스를 타고 싶어진다.(그러고 보면 하고 싶은 게 참 많다) 나는 사랑하는 도시가 있다. 도로의 양 옆으로 늘어선 가게들의 간판 순서나 건물의 틀어진 각도마저 정겹고 사랑스러운 그 도시에서 나는 버스를 탄다. 20분쯤 되는 배차간격의 정해진 노선을 빙글빙글 도는 순환버스다. 나는 그 버스를 타고 기적같이 지나왔던 시절이 깃든 모든 곳, 그 도시의 어떤 곳들을 차례로 지날 수 있다. 마음이 내키면 그 시절의 어디로, 그 시절의 정류장으로 내릴 수 있다. 그 끝나지 않는 세계 속에 여자친구가 돌고 있다. 누구나 될 수 있었지만 다른 누구도 되지 않았던 한 시절의 여자친구.


그 모든 어떤 곳들을 지나기 위해 버스는 언덕을 오른다. 제목을 알 수 없는 노래의 기타반주가 주파수를 따라 버스 안을 흐른다.  이윽고 버스는 언덕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선다. 그 자리엔 정류장이 없다. 그 자리에서부터 창밖으로 펼쳐지는 도시의 풍경. 버스는 다음 정류장을 향해 달리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쓸 수 있다면, 나는 그 시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당신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버스 안을 가득 채운 노래는 열린 창 틈 사이로 흘러나간다. 나는 흥얼거린다. 그렇게 나는 흘러간다고. 멀리멀리 흘러간다고.


"맞아요. 그러니까……, 그렇게요."
                                     - 김연수,「세계의 끝 여자친구」,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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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고 동맹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1
미타 마사히로 지음, 심정명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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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깊은 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도 사라진, 바람도 숨을 죽인 그런 깊은 밤에 자리에 누워 이 책을 펼쳤다. 무슨 경건한 의식을 행하는 마음같은 것은 아니었다. 새벽,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잠이 오지 않아 집히는대로 꺼내온 것이 이 책이었을 뿐이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를 깔고 엎드렸다. 바스락거리는 이불은 보드랍게 감겼고, 베개는 충분히 푹신했다. 방 안의 온도는 포근하게 따뜻했고  내게 남은 것은 잠드는 일 밖에 없는 듯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10분 정도가 지난 뒤였던 것 같다. 

나는 책을 잘못 집어왔다는 생각을 했다.


1.
나의 열다섯은 시끌벅적한 해에 찾아왔다. 어떤 사람들과 어떤 방송 프로그램은 종말을 떠들어댔고, 그에따라 사람들은 유난히도 세계의 숨겨진 비밀 따위에 박식해진 해였다. 둘 이상만 모였다하면 누구나 새로운 세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때. 1999 이상의 숫자 이상이 입력되어 있지 않은 컴퓨터로 인해 모든 금융, 통신, 교통 등등이 마비가 되리라던 해. 밀레니엄 바이러스라는 극적인 친구덕분에 앞선 말들이 더욱 신빙성을 얻었던 해. 지구마저도 들뜬 것 같아 보이던 그 해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코 옆에 난 여드름 하나에도 지독히 우울해지는 사춘기가 찾아온 때도 하필이면 그해였다. 

밖으로는 아주 밝고 적극적인 아이였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틀어박히곤 했던 열다섯. 2000, 21세기, 밀레니엄, 혹은 종말. 그런 것들이 나를 절망에 빠뜨렸던 것일까? 그때부터 분명하지 않지만 뭔가가 삐걱거리는 녀석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학 학년에 세 명밖에 없는 방송반의 3학년, 그 중에서도 교내의 모든 방송을 도맡아 했던 학교의 목소리였고,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소중한 친구들의 덕으로 전교 학생회장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고, 당시 유행했던 DDR이라는 음악게임을 위시로 모인 지역 대표팀에서 활동하는 팀원이었고, 같은 게임으로 모인 지역 중학교 연합에 속해 있었던, 어찌보면 화려할 수도 있는 겉모습에 비해 안쪽은 그리 성실하지 못했다. 하루에도 대여섯 시간씩 라디오를 들으며 알 수 없는 낙서를 끄적이거나, 방에 가만히 누워 반복되는 천장의 무늬를 쳐다본다거나, 일주일에 너댓번씩은 터지는 코피를 틀어막으며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는데도 죽지않는 나를 신기해한다거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노래를 빈 카세트 테잎에 녹음하며 눈물을 닦는다거나, 더러 엄마에게 날카롭게 신경질을 부린다거나. 

그때의 나는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서로 다른 얼굴을 한 두 명의 나. 하루에도 몇번씩 그 둘은 손바닥을 마주치고 자리를 바꿨다. 정확히는 셋, 일지도 모르겠다. 활기찬 얼굴과 늘어뜨린 어깨가 교대하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또다른 나까지. 세번째의 나는 어디에도 드러나지 못했다. 머리 위에서 몇 미터 허공에 붕 뜬 채로 지켜보기만 하던 나. 그즈음 내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던 밀레니엄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밀려온 그것에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풋내나는 사랑, 이었다.


2.
"동맹 맺자. 우리는 열다섯이니까 이치고(일본어로 1과 5를 읽은 것) 동맹으로 해. 남자 대 남자의 약속이야."
"알았어."
나는 대답했다.
                                        -『이치고 동맹』, 208쪽.

이 책을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살건 열다섯은 모두 같다, 고. 고민의 무게, 고민의 깊이를 비교할 수 없다, 고. 어른이라고 여겨지는 나이에 들어선다고 우리는 모두 어른인걸까. 어쩌면 우리는 열다섯, 그 이후로 몸만 자란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때 모두 자란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시절이 그렇게 또렷이 떠오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시절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는 일이다.  

료이치와 데쓰야. 열다섯은 지나갈테고, 스물이, 서른이, 그리고 마흔이 올테다. 피아니스트가 될것만 같았던 료이치나 프로야구선수가 될것만 같았던 데쓰야는 어쩌면 평범한 회사원이 될지도 모른다. 지옥같은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으며, 지각 1분 전에 아슬아슬하게 회사에 도착해 땀을 훔치게 될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아버지가 되고, 아이의 아이를 보게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료이치와 데쓰야에게서 한 줄기 빛을 본다. 남은 생에서 그들은 열다섯을 언제고 기억하며 살 것이라고 확신한다. 당신은 당신의 열다섯을 몇 줄로 요약할 수 있는가? 열다섯은 잊혀지지 않는 무지개다. 


3.
그 사랑이 다가왔을 때 나는 밤의 도로처럼 숨죽였다. 사춘기 때 찾아오는 열병과도 같은 단순한 호기심, 이라고 매도해도 상관없다. 어른들의 사랑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눈을 감고도 사랑은 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우린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다. 우리가 아기일 때, 우리가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그 사랑이 다가오기 전에 나는 활발하고 자신감 넘치는 ’나’ 였다. 그 사랑이 다가왔을 때 나는 어깨를 움츠린 ’나’ 였다. 그 사랑이 떠나갔을 때 나는 허공에 뜬 ’나’ 가 되었다. 그 사랑이 운명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열다섯의 사랑은 머무르지 못하고, 그리하여 잊혀지지 않는 시간으로 남는 것이다.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은 말한다. 너희 둘은 서로 좋아했잖아, 라고. 
사실 그건, 우리도 알고 있었다. 우리 둘은 서로 좋아한다, 고.
그때 우린 열다섯이었다. 


4.
그로부터 9년이 지났다. 밀레니엄 바이러스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충돌한다던 운석은 궤도를 벗어난 모양이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결국 일직선 상에 정렬하지 않았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왔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모든 것이 조금씩은 변했다. 그 시절의 친구들은 코밑이 거뭇거뭇해졌고, 목소리도 굵어졌고, 키도 훨씬 컸고, 무엇보다 저마다의 일로 바빠졌다. 우리는 그때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처럼 웃는 일도 드물게 되었다.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과 말한다. 그때 우린 정말 좋았었는데, 라고.
사실 그건, 이런 말이다. 그 시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그때 우린 열다섯이었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
우린 열 다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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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3 2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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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5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무현 이후 - 새 시대 플랫폼은 무엇인가
김대호 지음 / 한걸음더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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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은 슬픈 해로 기억될 것 같다.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2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고, 9월 오늘 배우 장진영 씨마저 눈을 감았다. 죽음에 높고 낮음이 있을리 만무하지만 우리를 뒤흔든 커다란 죽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우리를 도저히 이전처럼 살 수 없게 만든 단 하나의 죽음이 있었다.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서거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사회적 차원을 넘어서 의식적인 차원까지 파급되었다. 진실을 알지 못한 무지, 알고도 외면했던 잔혹한 무관심, 혹은 비난. 인간 노무현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올곧았고, 우리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남김과 동시에 작은 불씨를 떨어뜨렸다. 2009년 5월은 눈을 뜬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잊혀지지 않을 시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촉발된 많은 담론들, 어떤 것은 급진적이거나 폭력적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온건하거나 무관심에 가깝기도 한 말들은, '그날 이후' 를 온통 지배하고 있다. 


광복 이래, 대한민국 정부를 향한 국민들의 감정이 이렇게 하나로 거대하게 뭉쳤던 적은 없었다. 그것은 혐오, 다. 그 어떤 언론플레이를 통해서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국민들은 지금의 이명박 정부에 단 한줌의 신뢰도 가지지 않는다. 그 같은 감정의 근원은 인간다움, 에 있다. 한 개인을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고 간 비인간적인 집단을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너도나도 그날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한다. 당장 폭발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민심은 극단적인 위치에까지 와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사람은 한 번 더 생각이란 것을 해봐야 한다. 과연 노무현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증오인가 용서인가. 우리는 노무현에 대해 도를 지나친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그날 이후' 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나는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그런 감정을 품어왔던 것일까. 인간으로서의 도리, 윤리적인 감정으로서 노무현을 추억하는 일을 그만두자는 말, 아니다. 너도나도 목청이 터져라 부르짖기 전에, 우리가 디디고 있는 바닥을 한 번 살펴보자는 말이다. 우리는 제대로 탄탄한 땅을 밟고 있는가. 나는 이 책이 우리를 드넓은 벌판으로 인도할 목동이라고 생각한다. 


추모와 애정에 눈이 멀어 비판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마찬가지로 추모와 애정에 눈이 멀어 무조건적인 비판에만 열을 올려서도 안 된다. 전자는 참여정부, 후자는 지금의 정부를 말함이다. 『노무현 이후』에서 가장 흥미롭고 독보적인 부분은 바로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부채의식으로서 노무현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통령 노무현을 곧게 바라본다. 그 비판의 본질도 수긍할만한 철학을 품고 있다.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건 묻혀 질수도 있었던 담론들을 이 책은 끄집어낸다. 


수많은 장점을 꼽을 수 있는 이 책의 백미는 단연 뒤통수를 저릿하게 만드는 촌철살인의 문장이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비교 설명하면서 '국가대표팀은 그런대로 선전하지만 대표팀에 미래의 선수를 공급할 유소년 및 청소년 팀은 점점 피폐해져 가' 노라는 부분이나, 참여정부의 비전 2030과 뉴민주당 선언에 대해 언급하면서 '극복할 대상을 너무 낮은 수준으로 잡으면 거의 모든 것이 긍정된다' 고 말하는 것이 그렇다. 이는 그 중에서도 추린 예에 불과하다. 딱딱한 내용일거라 오해하게 만들고 싶진 않지만, 이 책은 촌철살인의 문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내 흥미진진하다. 


332쪽의 이 책 중 가장 힘들게 읽히는 부분은 바로 첫 번째 장이다. [대한민국 바로 보기] 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장은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안 읽히는 부분이다. 시작하자마자, 첫 번째장이 어렵게 읽히니 지레 겁을 먹을 수도 있다.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은 정말로 힘들다, 는 말을 종종 들어봤을 것이다. 첫 번째 장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바로 보는 일이 이토록 힘들 줄은 몰랐다고. 결코 숫자나 통계에 약해서 엄살을 피우며 하는 말이 아니다. '나' 를 '바로 보기' 란 참으로 난망한 일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바로, 우리를 바로 보는 것, 이었다. 


『노무현 이후』를 다 읽고 나면 노무현은 맑은 거울이었다, 고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당신이 2009년을 살았던 대한민국 국민이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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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8 05: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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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 대한민국 30대를 위한 심리치유 카페 서른 살 심리학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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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내게도 정신병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정신병이란 전염병처럼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마음의 어딘가가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니 감기처럼 흔한 것이라는 말. 환희와 우울을 넘나드는 감정의 기복을 생생히 느끼며 혹시 조울증은 아닐까 걱정했던 순간.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밤. 

누구나 이와같은 생각을 살면서 적어도 한번쯤은 한다. 내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거라는 의심. 그같은 생각은 아주 힘든 상태일 때, 지쳐있을 때 더 빈번히 고개를 쳐든다. 물론, 스스로가 조울증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많지만, 소리내어 말하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어설픈 지식을 접목하자면, 이와같은 병명의 남발은 신의 실수나 인정할 수 없는 상태를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어떤 원인을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건 조울증 때문이야. 아는 것도 병이다, 는 옛말이 떠오른다. 


2.
처음『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를 보고 삐딱한 생각이 치밀었다. 서른 살, 삼십대만 보라는 책인가? 이십대는 아직 어리다는거야, 뭐야. 참 실없는 오기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 프롤로그부터 시작해 311쪽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서 책 제목의 '서른' 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됐다. '서른' 이 물리적인 서른 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과거엔 없었던 지독한 취업난에 도서관에만 쳐박혀 있다가 던져지듯 세상에 나가게 되는 그들, 심리학의 인간발달 과정에서조차 언급이 없는 무명의 그들, 꿈과 현실의 간극에 낙담하고 좌절하는 그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삶의 모든 것들에 방황하게 되는 그들. '서른' 은 이 모두를 포괄하는 말이었다. 진부하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는 어떤 상태에 있든 당신을 보듬고, 위로하는 책이 될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삶의 오해, 잘못된 상식, 근거없는 이론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실제 사례와 풍부한 문화적 지식으로 이해를 돕고, 긴 여운을 남기는 특별한 시선의 마무리는 부드럽지만 강력하다.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는 유달리 자기계발서가 홍수를 이룬다는 통계에 동의한다. 사회로부터, 윗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이행되었어야 할 일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라는 말에도 공감한다. 그러니 책과 같은 매체가 그 일을 대신하는 것이다, 는 말도 인정한다. 그 모든 사실을 끌어안고 말한다. 이 책은 진짜다.


사랑하는 사람, 부모님, 소중한 친구들을 한번에 아우를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하고픈 책이다. 삶은 늘 힘겹고, 우리는 망망대해에 떠 있으므로. 이 책이 당신의 항해에 필요한 지도는 되지 못할지라도, 먼저 항해를 떠났던 선장의 항해일지는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새로운 항로는 과거의 항로의 문제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과거의 잘못에 연연하며 후회와 연민으로 세월을 낭비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경험이 쌓여 현재의 당신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 당신의 선택과 행동이 옳을지 그를지는 미래가 알려 줄 것이다. 
"네가 항상 옳다는 것을 잊지 마라. 심지어는 네가 틀렸더라도 말이다!"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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