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고 동맹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1
미타 마사히로 지음, 심정명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아주 깊은 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도 사라진, 바람도 숨을 죽인 그런 깊은 밤에 자리에 누워 이 책을 펼쳤다. 무슨 경건한 의식을 행하는 마음같은 것은 아니었다. 새벽,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잠이 오지 않아 집히는대로 꺼내온 것이 이 책이었을 뿐이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를 깔고 엎드렸다. 바스락거리는 이불은 보드랍게 감겼고, 베개는 충분히 푹신했다. 방 안의 온도는 포근하게 따뜻했고  내게 남은 것은 잠드는 일 밖에 없는 듯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10분 정도가 지난 뒤였던 것 같다. 

나는 책을 잘못 집어왔다는 생각을 했다.


1.
나의 열다섯은 시끌벅적한 해에 찾아왔다. 어떤 사람들과 어떤 방송 프로그램은 종말을 떠들어댔고, 그에따라 사람들은 유난히도 세계의 숨겨진 비밀 따위에 박식해진 해였다. 둘 이상만 모였다하면 누구나 새로운 세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때. 1999 이상의 숫자 이상이 입력되어 있지 않은 컴퓨터로 인해 모든 금융, 통신, 교통 등등이 마비가 되리라던 해. 밀레니엄 바이러스라는 극적인 친구덕분에 앞선 말들이 더욱 신빙성을 얻었던 해. 지구마저도 들뜬 것 같아 보이던 그 해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코 옆에 난 여드름 하나에도 지독히 우울해지는 사춘기가 찾아온 때도 하필이면 그해였다. 

밖으로는 아주 밝고 적극적인 아이였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틀어박히곤 했던 열다섯. 2000, 21세기, 밀레니엄, 혹은 종말. 그런 것들이 나를 절망에 빠뜨렸던 것일까? 그때부터 분명하지 않지만 뭔가가 삐걱거리는 녀석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학 학년에 세 명밖에 없는 방송반의 3학년, 그 중에서도 교내의 모든 방송을 도맡아 했던 학교의 목소리였고,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소중한 친구들의 덕으로 전교 학생회장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고, 당시 유행했던 DDR이라는 음악게임을 위시로 모인 지역 대표팀에서 활동하는 팀원이었고, 같은 게임으로 모인 지역 중학교 연합에 속해 있었던, 어찌보면 화려할 수도 있는 겉모습에 비해 안쪽은 그리 성실하지 못했다. 하루에도 대여섯 시간씩 라디오를 들으며 알 수 없는 낙서를 끄적이거나, 방에 가만히 누워 반복되는 천장의 무늬를 쳐다본다거나, 일주일에 너댓번씩은 터지는 코피를 틀어막으며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는데도 죽지않는 나를 신기해한다거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노래를 빈 카세트 테잎에 녹음하며 눈물을 닦는다거나, 더러 엄마에게 날카롭게 신경질을 부린다거나. 

그때의 나는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서로 다른 얼굴을 한 두 명의 나. 하루에도 몇번씩 그 둘은 손바닥을 마주치고 자리를 바꿨다. 정확히는 셋, 일지도 모르겠다. 활기찬 얼굴과 늘어뜨린 어깨가 교대하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또다른 나까지. 세번째의 나는 어디에도 드러나지 못했다. 머리 위에서 몇 미터 허공에 붕 뜬 채로 지켜보기만 하던 나. 그즈음 내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던 밀레니엄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밀려온 그것에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풋내나는 사랑, 이었다.


2.
"동맹 맺자. 우리는 열다섯이니까 이치고(일본어로 1과 5를 읽은 것) 동맹으로 해. 남자 대 남자의 약속이야."
"알았어."
나는 대답했다.
                                        -『이치고 동맹』, 208쪽.

이 책을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살건 열다섯은 모두 같다, 고. 고민의 무게, 고민의 깊이를 비교할 수 없다, 고. 어른이라고 여겨지는 나이에 들어선다고 우리는 모두 어른인걸까. 어쩌면 우리는 열다섯, 그 이후로 몸만 자란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때 모두 자란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시절이 그렇게 또렷이 떠오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시절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는 일이다.  

료이치와 데쓰야. 열다섯은 지나갈테고, 스물이, 서른이, 그리고 마흔이 올테다. 피아니스트가 될것만 같았던 료이치나 프로야구선수가 될것만 같았던 데쓰야는 어쩌면 평범한 회사원이 될지도 모른다. 지옥같은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으며, 지각 1분 전에 아슬아슬하게 회사에 도착해 땀을 훔치게 될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아버지가 되고, 아이의 아이를 보게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료이치와 데쓰야에게서 한 줄기 빛을 본다. 남은 생에서 그들은 열다섯을 언제고 기억하며 살 것이라고 확신한다. 당신은 당신의 열다섯을 몇 줄로 요약할 수 있는가? 열다섯은 잊혀지지 않는 무지개다. 


3.
그 사랑이 다가왔을 때 나는 밤의 도로처럼 숨죽였다. 사춘기 때 찾아오는 열병과도 같은 단순한 호기심, 이라고 매도해도 상관없다. 어른들의 사랑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눈을 감고도 사랑은 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우린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다. 우리가 아기일 때, 우리가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그 사랑이 다가오기 전에 나는 활발하고 자신감 넘치는 ’나’ 였다. 그 사랑이 다가왔을 때 나는 어깨를 움츠린 ’나’ 였다. 그 사랑이 떠나갔을 때 나는 허공에 뜬 ’나’ 가 되었다. 그 사랑이 운명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열다섯의 사랑은 머무르지 못하고, 그리하여 잊혀지지 않는 시간으로 남는 것이다.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은 말한다. 너희 둘은 서로 좋아했잖아, 라고. 
사실 그건, 우리도 알고 있었다. 우리 둘은 서로 좋아한다, 고.
그때 우린 열다섯이었다. 


4.
그로부터 9년이 지났다. 밀레니엄 바이러스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충돌한다던 운석은 궤도를 벗어난 모양이다. 태양계의 행성들은 결국 일직선 상에 정렬하지 않았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왔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모든 것이 조금씩은 변했다. 그 시절의 친구들은 코밑이 거뭇거뭇해졌고, 목소리도 굵어졌고, 키도 훨씬 컸고, 무엇보다 저마다의 일로 바빠졌다. 우리는 그때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처럼 웃는 일도 드물게 되었다.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과 말한다. 그때 우린 정말 좋았었는데, 라고.
사실 그건, 이런 말이다. 그 시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그때 우린 열다섯이었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
우린 열 다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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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3 2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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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5 13: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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