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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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끝,
                     - 김연수,『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301쪽

약한 빗줄기가 약간 내리다 그칠 것이라던 기상청의 일기예보와는 달리, 비는 거세게 내렸다. 오후 세 시의 하늘은 오후 일곱 시쯤의 하늘처럼 컴컴했다. 묵직한 구름 어딘가의 틈 사이를 비집고 떨어지는 비를 보며, 속수무책일 기상청을 떠올리며, 나는 책을 읽었다. '세계의 끝' 과 '여자친구' 라니. 맑아야 할 오후 세 시의 장대비와 속수무책으로 그 비를 맞고 서 있을 기상청 사이의 거리를 견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건, 가까운 것인지 먼 것인지 짐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세계와 끝과 여자친구. 김연수라는 고유명사가 추가된 세계와 끝과 여자친구. 도대체 이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김연수를 읽는 일은 도시에 새로 구획된 텅 빈 아파트 단지를 걷는 일과 같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뭐랄까, 이미 끝나버린 연애를 되새김질하는 느낌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번인가 텅 빈 아파트 단지를 걸어본 적이 있다. 바람이 불때마다 훌쩍훌쩍 높이뛰기를 반복하는 정체불명의 비닐, 아직 다 치워지지 않은 도로의 모래더미, 너무 빨리 문을 연 문방구,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낯선 개. 차도 사람도 없이, 모퉁이로 사라지기 전까지, 그야말로 광활하게 뻗어있는 그 거리를 걷다보면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 심지어 나까지도. 나는 항상 길을 잃고 만다.


김연수를 읽는 일은 늘 그랬다. 이야기 안의 화자들은,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무엇인가를 깨닫고 앞으로의 세계가 더 이상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세계가 아닐거라는 이상한 확신에 차곤 했다. 그 확신에서 절망도 희망도 아닌 온전한 '그 자체' 로의 위치가 정립되곤 했다. 그와 같은 결말에 항상 감탄하면서 한편으론 '그러니까, 어쩌란 말인가.' 를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세계란 그러니까어쩌란 말인가 사이의 쉼표처럼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만일 이 세계를 써 나가는 누군가가 있고 내가 그 이야기의 화자라면, 김연수를 보고 그 무엇인가를 이렇게 깨달았다고 하겠다. 이미 김연수의 중요하고 주요한 단어들은『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에서 모두 나왔다. 그는 처음부터 끝을 말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1과 10을 정립해놓고 그 사이의 숫자들을 채워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2, 3, 4, 5, 6… 2.1, 2.2, 2.3… 그 사이엔 셀 수 없이 많은 숫자들이 있다. 김연수는 차곡차곡 숫자를 쌓아나가는 계단형 작가는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9에 가까운 어떤 실수가 아닐까. 그는 그 자신의 세계의 내연을 끊임없이 잘게 다진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넓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무엇을' 쓸 것인가 못지않게 '어떻게' 쓸 것인가도 중요한 일이다. 투박하지만 전자를 주제, 후자를 문체라고 이해해도 특별히 어폐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김연수의 쉼표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에게 쉼표는 작은따옴표의 역할을 일부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 나름의 호흡법. 사실, 문장부호가 문장부호로만 쓰이는 시절은 가고 있다고, 한 사람의 독자로서 짐작한다. 아마 김연수는 자신의 문장들을 몇 번이고 입 안에서 굴려보지 않을까. 자신의 폐활량에 알맞은 문장을 조립하기 위해서. 문득, 반듯해 보이는 그와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만일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자, 그럼 다시 텅 빈 아파트 단지다. 문득 스쿠터를 몰고 전국을 떠돈답시고 다녔던 계절이 떠오른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길목이었다. 어느 도시에서 길을 잃었던 적이 있다. 손에는 전국의 도로가 표시된 커다란 우리나라전도 한 장, 그 도시의 지자체에서 발간한 접는 관광안내도 한 장이 있었다. 지도는 상세했다. 문제는 내가 있는 이곳이 지도의 어디쯤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데 있었다. 무작정 가보자고 스쿠터를 몰면 몰수록 길은 점점 좁아지고, 주변으론 점점 푸른 논이 다가왔다. 덜컥 겁이 나서 길 한 켠에 스쿠터를 세우고 지도를 훑기 시작했다. 그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시던 할아버지께서 공황상태에 빠진 나를 보고 손가락으로 저 멀리 어딘가를 짚어주셨다. 지도의 어디가 아닌, 길을.

"이런 시골길에선 버스정류장이 어딘지 물어봐야 큰 길로 갈 수 있지."


버스정류장. 김연수의 글을 읽으면 버스를 타고 싶어진다.(그러고 보면 하고 싶은 게 참 많다) 나는 사랑하는 도시가 있다. 도로의 양 옆으로 늘어선 가게들의 간판 순서나 건물의 틀어진 각도마저 정겹고 사랑스러운 그 도시에서 나는 버스를 탄다. 20분쯤 되는 배차간격의 정해진 노선을 빙글빙글 도는 순환버스다. 나는 그 버스를 타고 기적같이 지나왔던 시절이 깃든 모든 곳, 그 도시의 어떤 곳들을 차례로 지날 수 있다. 마음이 내키면 그 시절의 어디로, 그 시절의 정류장으로 내릴 수 있다. 그 끝나지 않는 세계 속에 여자친구가 돌고 있다. 누구나 될 수 있었지만 다른 누구도 되지 않았던 한 시절의 여자친구.


그 모든 어떤 곳들을 지나기 위해 버스는 언덕을 오른다. 제목을 알 수 없는 노래의 기타반주가 주파수를 따라 버스 안을 흐른다.  이윽고 버스는 언덕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선다. 그 자리엔 정류장이 없다. 그 자리에서부터 창밖으로 펼쳐지는 도시의 풍경. 버스는 다음 정류장을 향해 달리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쓸 수 있다면, 나는 그 시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당신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버스 안을 가득 채운 노래는 열린 창 틈 사이로 흘러나간다. 나는 흥얼거린다. 그렇게 나는 흘러간다고. 멀리멀리 흘러간다고.


"맞아요. 그러니까……, 그렇게요."
                                     - 김연수,「세계의 끝 여자친구」,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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