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박사와 하이드 (반양장) 펭귄클래식 3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그' 라고 부른다. 차마 '나' 라고는 말할 수 없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125쪽.


아마 어릴 때였을 것이다. 아마도 만화였을 것이다. 아니, 영화였던가. 진위야 어찌됐든,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저 쳐다보기만 해도 '허약한 사람' 임에 틀림없는 사람이 있었다. 공기의 무게마저 견디지 못할 정도로 심약해 보이던 그 사람이 위기상황에서 어떤 물약을 마시자, 그는 괴물이 되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란 만화나 영화에서 그를 다루는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 그런 변신 자체가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것이지, 그 저변에 깔린 심오한 인간에 대한 통찰에 감탄한 것은 결코 아니다. 개인적으로 작년(2008)에 개봉했던 [인크레더블 헐크] 를 아주 재밌게 봤다.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읽고 나니 둘이 굉장히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호쾌한 액션 활극, 비스무리한 것을 기대하고 이 책을 펼쳤다간 크게 후회할 것이다. 아마 당신은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원전이란 하나같이 다 시시해. 원전에서 비롯된 사생아들이 떠들어대는 소리에 이미 익숙해져버린 탓이다. 게다가 이 원전의 분량이란 게 상상보다 훨씬 적다. 겨우 100여 페이지라니. 문득,『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떠오른다. 장편이라 짐작했던 이야기가 단편소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받았던 기묘한 느낌과 비슷하다. 당시엔 이 느낌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의아해하다 곧 잊어버렸는데,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우린 원전에서 비롯된 사생아들에게 너무 길들여져 있었다. 아이들이 차지해버린 아버지의 자리를 우린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거다. 


철학 교양 수업으로 기억한다.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정말로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은 원전을 찾아 읽도록 하세요. 속도는 더딜지 모르지만 그것만큼 확실한 공부는 없습니다." 
그 말을 삼년도 더 지난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아둔하기 짝이 없다고 해야 할 지. 


과거 한 세기를 대표했던 문학들을 읽다보면 흥미로운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고전 속의 인물들을 유심히 지켜보면 그 인물들이 현대에 와서 주목받기 시작한 정신병리학에서 말하는 장애 상태에 놓여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셰익스피어의 희곡, 보르헤스의 단편, 샐린저의 소설,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스티븐슨의『지킬 박사와 하이드』등등. 마치 실제 환자(현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를 옆에서 관찰하고 묘사한 듯, 고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임상 사례에 견줄만큼 독특하고, 세밀하다. 실제로 작가의 가까운 곳에 그들의 주인공과 같은 상태에 놓인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작가들은 '어떤 괴리된 상태' 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처럼 세대를 불문하고 익숙한 인물도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전을 읽어본 사람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사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읽는 일은 인간 근원에 자리한 욕망과 공포를 엿보는 일임과 동시에 그간 의심없이 믿어왔던 개념의 진실을 목도하게 되는 일이다. 100년도 더 된 짧은 이야기가 1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대중문화 속에서 변이는 있지만, 굳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그 진실의 일부를 발견했기에 나는 그렇게 무시무시한 파멸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 진실이란, 인간은 진정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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