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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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사라진다면?

불과 10분 전에 내가 한 행동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기억이 사라져 버린다면?

우린, 인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질 못해. _ p. 34

공백을 깨달은 사실 자체도 잊어버리고 다시 공백이 되어버린 거죠. _ p. 42

 

여고생인 '유키 리노'는 어느날 기억이 사라진다는 걸 깨닫는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켠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컴퓨터에는 기억이 어느 순간에 끊긴 것 같다라는 내용의 글들이 시간별로 여러 개 적혀 있고, 그 글들을 쓴 것이 자신이라는 것도 분명해 보였다.

이 기억이 사라지는 현상(후에 '대망각'이라고 불리우는)은 비단 리노 혹은 리노 가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발생했고, 인류는 공황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그러한 혼란 속에서도 훗날 '제1행동자(프라임 무버스)'라 불리게 될 사람들은 문명의 존속을 위한 여러 제안을 내놓았고,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또한 기억장애와 관련하여서는 장기 기억이 가능하도록 외부 기억 장치를 만들어 사람들의 몸 속에 넣거나 몸에 부착하기 시작했다.

 

'대망각'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에도 이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은 탄생하고, 그들에게 기억이란 자신들의 몸에 부착된 '반도체 메모리'였다.

그리고 장기 기억이 없는, 기억은 자신에게 부착된 메모리인 이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펼쳐진다.

 

서로 부딪쳐 넘어진 후 실수로 상대방의 메모리를 잘못 끼운 남자와 여자가 있다.

거액을 받고 대리 시험을 치기 위해 메모리를 바꿔 끼웠다가 결국엔 자신의 신체를 잃고, 다른 사람의 신체로 살아가는 남자도 있다.

메모리 결함으로 교체를 위해 제조사에 간 쌍둥이 자매는 메모리가 뒤바뀐다. (물론 나중에 알고 보니, 뒤바뀐 것이 아니었지만...)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메모리가 파손된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메모리를 딸에게 끼워 넣은 아빠도 있다.

한편으로 외부 기억 장치 장착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집단도 있다. 그들은 문명의 잘못을 또다른 문명의 힘으로 바꾸는 것을 거부하며 단기기억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죽은 자의 메모리를 끼워 재생하는 '혼령 부르기'를 전문으로 하는 무당도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간중간에 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의문의 '나'가 등장한다.

 

이런 일들이 발생할 때 당사자들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온 나의 몸은 저기 있는데, 내 기억이(어쩌면 내 정신과 영혼이) 이쪽 몸에 있다면, 그럼 나는 누구지?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인간의 본질'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존재한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영혼...

지금의 나는 '나'가 아닌 것인가?

 

기억이 마음대로 바뀌면 더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되니까요.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뭘 의지하면서 삽니까.?

마음은 자신과 현실의 관계에서 생깁니다.

현실이 없는 마음은 존재하지 않아요.

- 정말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까? 그날 이후 사람은 자기 마음의 한 부분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어.

분리된 마음은 이른바 하나의 개체에 지나지 않아. 너는 마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지 않나? _ p. 136

 

메모리를 다른 사람의 신체에 꽂으면 그 사람의 몸에 내가 들어간다... 이런 설정의 책들은 그 전에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이 늙고 쇠약해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싫은 부자들이 젊은 사람들의 몸을 사서 그들의 뇌에 자신의 뇌를 이식한다든지 하는 이야기 말이다.

이 책에서는 메모리를 바꿔 끼우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그런 상황들이 벌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 상황까지는 없었지만, 죽은 가족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사망한 후의 메모리를 간직했다가 살아있는 신체를 빌려 그들을 다시 불러내는 상황은 있었다.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는 선한 마음으로 시작된 메모리 바꾸기는 점차 비지니스의 성격을 띠며 하나의 범법적인 직업이 된다.

 

재미있었지만, 막 가볍지도 않은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다보니 얼마전에 읽은 김영하 작가의 <작별 인사>가 생각났다.

그 소설에서 결국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휴머노이드들에게 더 의존하고 편한 것만 취하다가 결국 스스로 소멸해 버린다. 인간보다 훨씬 인간다운 감정을 지녔던 휴머노이도 철이만이 인공지능의 형태로 남겨진 채 말이다.

이 소설에서는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장기 기억을 할 수 없게 된 인간이 만들어낸 메모리만이 결국 남는 세상이 도래한다.

 

생각해 본다. 기억이 분리된 세계를.

나의 신체와 분리되어 저장되는 기억을, 또는 나의 신체 없이도 기억만이 분리되어 저장되어 있는 먼 미래의 세상을.

생각만으로도 사실 무섭고 끔찍하다.

그런 나는 '나'인가? '타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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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괜찮아 - 엄마를 잃고서야 진짜 엄마가 보였다
김도윤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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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인생에 엄마는 없었다.

엄마는 오로지 누군가의 엄마였을 뿐이다.

우리 엄마로서의 시간만 있을 뿐이었다.

(p. 27)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련해지는 단어가 있다. 바로 '엄마'.

어렸을 때, 아니 어쩌면 성인이 되어서도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식들은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받을 뿐 아니라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가끔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요즘에야 많이 나오는 문장이지만, 예전에는 미처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그러나 너무 적절해서 가슴에 콕 박히는 말이 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요즘보다 더 결혼 연령이 낮았던 옛날 그 시절,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처음 해 보는 엄마로서의 역할을 잘 해 내려고 고군분투했을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진다.

 

김도윤 작가가 추억하는 '엄마'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을 위해서 평생을 살았고, 마지막 삶의 끈을 놓는 순간까지도 자식 생각밖에 없었던 '엄마'의 모습 말이다.

엄마가 많이 아프다는 건 알았지만 설마 우리 엄마가 그럴리는 없으리라 믿었던, 그래서 엄마의 마지막에 더 있어주지 못했고 더 많은 일들을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작가는 너무도 슬퍼한다.

 

어렸을 적 우등생이었고 대기업에 입사까지 했던 형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혔고, 병증은 더 심해져 차도로 뛰어들기도 한다.

형의 증세가 심해질수록 엄마의 마음도 함께 곪아갔고, 엄마 역시 우울증에 걸려 형이 한때 입원했던 병원의 폐쇄병동에 입원하기도 한다.

 

죽고 싶다는 엄마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나 하나 편하자고 엄마는 그럴리 없을 거라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으리라는 단단한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엄마는 스스로 삶을 마쳤고, 그 슬픔이 너무 커서 작가의 마음마저 좀 먹고, 그 역시 우울증을 겪으며 마음 고생을 한다.

 

자신이 우울증에 걸린 것 같았다는 걸 직감하면서도 그는 쉽사리 정신과 진료를 받지 못한다. 어쩌면 나를 보호하고 있는 이 막이 다 무너져 버릴까봐, 오롯이 그 일들을 마주하는 것을 견딜 수 없을까봐, 외면하기도 했다.

 

책을 읽는동안, 어쩔 수 없이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작가의 문장 곳곳에 엄마와의 추억, 아니 엄마가 보여준 무한한 사랑이 담겨 있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리들의 엄마는 자식들이 가는 길 곳곳마다 응원과 지지, 격려를 아낌없이 보낸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생각해 보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혹은 고비마다 늘 옆에 있어주고 무조건 내편을 들어주던 엄마의 모습이 있다.

잘한 일은 잘했다고, 못한 일은 괜찮다고... 그저 자식 일이라면 당신의 한 몸, 당신의 안위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던 '엄마'라는 사람들...

 

늘 괜찮다는 말만 하는 엄마, 언제나 자식이 먼저인 엄마.

갑자기 GOD 노래도 생각난다.

"어머니는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문득 어렸을 때 일이 떠오른다.

고리타분한 중2였던 나는, 엄마의 화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장은 왜 했냐고 핀잔을 줬다. 그 당시 엄마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엄마의 나이는 지금의 나보다 젊었다. 난 지금도 나 자신을 꾸미는 데 여념이 없는데, 그 젊은 청춘의 엄마에게 화장을 하지 말라고 했다니... 지금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 뿐이다.

 

아직 자녀가 없어 엄마의 마음을 100퍼센트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니, 아이가 있어도 그 시절 엄마의 그 마음을 어떻게 100펴센트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작가의 글 덕분에 오랜만에 엄마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 부모님에게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고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무한정 있지 않다.

그러니 미루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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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68)

우리 엄마는 마치 고장 난 시계처럼 형과 나의 시간에 멈춰 있는 것만 같았다.

형과 나의 시간에 맞추어 째깍거렸다.

그리고 가끔 엄마의 시침은 어느 시간대에서 멈춘 후 그곳에서 우리의 침과 겹쳐지기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긷고 했다.

그 몇 안 되는 짧은 시간을 위해 엄마는 평생을 기다렸으니까.

 

(p. 129)

살면서 힘들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수많은 돌멩이를, 나뭇가지를, 힘든 길을 치워달라고 부탁했는데,

엄마는 마지막까지 내게 그 어떠한 조그마한 돌멩이조차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p. 151)

엄마의 사전에는 '괜찮지 않다'는 말이 없는 게 아닐까.

그저 괜찮다는 말로 가족들을 안심시키고 싶은 사람, 모든 걸 괜찮게 만들고 싶은 사람, 엄마는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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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리커버 에디션)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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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눈사람이 길을 보고 있지 않아요?

왜 눈사람이 우리집을 보고 있어요? (P. 40)

 

오슬로의 11월, 첫눈이 내린 밤 '요나스'의 엄마 '비르테'가 한밤중에 사라진다.

엄마를 찾는 요나스의 눈에 띈 것은, 집 앞 눈사람의 목에 둘러져 있는 엄마의 핑크색 목도리였다.

경찰이 출동하고, 조사 중 비르테의 휴대전화가 눈사람 속에서 발견된다.

 

해리 홀레는 비르테의 실종이 단순 실종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다. 9월 초, 토크쇼 출현한 이후에 그의 집 우편함에 수상한 편지가 들어있었던 것.

 

곧 첫눈이 내리고 그가 다시 나타나리라. 눈사람.

그리고 눈사람이 사라질 때 그는 누군가를 데려갈 것이다.

당신이 생각해봐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눈사람을 만들었을까? 누가 눈사람들을 만들지?

누가 무리(Murri)를 낳았지? 눈사람은 모르기 때문이다."

(p. 105, 해리 홀레가 받은 편지)

 

실종 여성을 중심으로 조사하니, 비슷한 패턴의 많은 실종 여성들이 있었고, 해리는 연쇄살인범의 출현을 걱정한다.

노르웨이에 연쇄살인범이 없었다는 팀원도 있었지만, 새롭게 오슬로 경찰청에 전입 온 '카트리네 브라트'는 해리의 의견을 옹호한다.

 

그러던 중, 또다시 '쉴비아 오테르센'이 실종되었고, 그녀의 행적을 찾던 중 숲 속에서 쉴비아의 머리가 얹힌 눈사람을 발견한다.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조사하던 수사팀은, 요나스와 쉴비아의 쌍둥이 자녀들이 같은 병원에 다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병원을 주시한다.

 

한편, 실종된 유부녀들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확인하던 중 '첫 눈이 내린 날 사람들을 죽였'다는 걸 발견하고, 그 시작이 1992년 베르겐 지역에서 같은 날 2명이 실종된 사건이란 걸 알게 된다.

해리와 카트리네는 당시 실종된 2명 중 한 명인 경찰 '게르트 라프토'에 대해 조사하다 그의 오두막을 수색했고 그 지하실 냉동고에서 게르트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의 얼굴의 코가 있어야 할 부분에는 당근이 있었고, 그 모습은 완벽한 눈사람이었다.

 

여성들과 게르트를 죽인 '눈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해리는 이번에는 누군가의 희생 없이 범인을 무사히 잡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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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6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인만큼, 굉장히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새롭게 수사팀에 합류한 '카르리네 브라트'는 굉장히 스마트한 모습으로 수사에 기여하는 듯 하지만, 뭔가 미심쩍어 보이는 부분들이 있어 긴장감을 일으켰다.

해리를 소중히 여겼던 옛 상관 묄레르가 떠나고 새롭게 부임한 '군나르 하겐'이 의외로 해리를 소중한 부하로 여겨주는 듯 해서 다행이다 싶은 순간도 있었다.

라켈과의 관계 역시 여전히 순탄한 듯 순탄하지 않은 듯 했지만, 그건 내가 적는 것보다는 책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범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등장하지만 곧 그 사람은 죽음을 맞게 되고, 사건이 그렇게 종결되나 싶은 찰나 새로운 용의자가 떠오른다.

그렇게 유력한 스노우맨 후보들이 차례차례 링에서 떨어져 나가고, 결국 밝혀진 스노우맨의 정체는 놀라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또 해리의 소중한 누군가가 다칠까봐... 또 소중한 누군가가 생명을 잃게 될까봐... 그래서 해리가 또다시 어둡고 스산한 나락으로 빠져 버릴까봐... 무서웠다.

 

북유럽 특유의 어둡고 차갑고 스산한 분위기가 가득한 《스노우맨》, 이번 이야기 역시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계속되는 반전 덕분에 긴장감을 놓는 일 없이 집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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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습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4
이혜경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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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동안 약간 뜨끔했다.

어느 시기부터인가 좋아하는 여행지로 거듭난 '베트남', 나는 베트남의 여러 곳을 그저 관광지로만 생각했기에, 그동안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베트남 전쟁'을 소설 속에서 맞닥뜨리자 잠시 멈칫했다.

역사의 한 부분을 너무 등한시하고, 현재의 즐거움만 추구하고 살아가는 걸까, 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기억하고 기억해야 할 역사를 너무 쉽게 망각하고 망각하는 것 같아서...

 

소설은 필성과 이장이 베트남 새댁의 가족을 데리러 간 공항에서 시작된다.

베트남 새댁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온 새댁의 가족들은 장례식장에서 섧게 울고, 필성은 과거의 악몽을 여러번 꾸며 옛일들을 떠올린다.

 

필성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다.

한국전쟁 중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키우느라 고생한 엄마를 두고 전쟁에 참전한다는 것이 두렵고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럴듯한 빽이 없어 그대로 월남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번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왔고,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동생의 대학 등록금도 보탰다.

늘그막에 베트남 여행을 함께 다녀온 아내 영희가 갑작스런 교통사로고 죽고, 필성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었다.

 

동네의 노총각 철규는 베트남 여인 응웬을 신부로 맞는다. 시어머니인 장암댁은 며느리가 밖으로 다니는 것을 못마땅해 했지만, 응웬은 읍내에 있는 한국어 교실에도 다니며 이 곳에서 잘 살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 마을에는 '김'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

그는 과거 북파공작원으로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을 테지만, 김에게서 풍겨나오는 느낌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을 김을 멀리하고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

그럼 김을 유일하게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사람이 바로 필성이었다.

 

필성은 월남전에 참전해서 어쩌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많은 베트남인들을 죽였을 지 모른다.

비단 필성이 무고한 민간인 학살을 한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베트남전에서 한국인이 행한 무자비하고 참혹한 만행들은 베트남인들의 기억 속에 끔찍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김 역시 북파공작원 활동을 하며 어쩌면 무고한 민간인을 죽였을 지도 모른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힘든 시절을 살아왔다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무자비한 행위들을 옹호할수도 비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커다란 역사의 톱니바퀴 속에서 '개인'이란 어쩌면 너무나도 작은 존재일 뿐이니까.

 

책을 읽는 느낌을 적고 있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이 행한 끔찍한 만행들도 그저 쉬쉬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가 뒤따라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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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웃는 숙녀 비웃는 숙녀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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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과의 만남이 인생을 바꾼다.  _ p.125

 

핑크빛 표지 속 진핑크 원피스와 모자를 쓴 여성의 모습이 있다.

챙 넓은 진핑크 모자에 입술마저 진핑크인 그녀, 첫인상부터 무척 강렬한 그녀의 이름은 '가모우 미치루'이다.

 

둥근 얼굴, 작은 눈, 두툼한 입술, 통자 허리, 굵은 다리.

'노노미야 쿄코'는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쿄코는 학교에서 같은 반 아이들의 표적이 되어 심한 괴롭힘과 왕따를 당하고 있다.

아이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가슴 속 깊이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을 해소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종사촌인 '가모우 미치루'가 같은 학교로 전학을 오고, 너무도 아름답고 완벽한 그녀 앞에 주눅이 든다.

미치루가 어떤 남학생의 고백을 거절한 것을 계기로 여자 아이들은 미치루를 괴롭히고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미치루는 그런 상황에서도 의연했고, 요염한 미소마저 흘린다. 그러던 중 선두에 서서 미치루를 괴롭히던 아이가 치욕적인 일을 당했고 그 현장을 쿄코가 목격한다.

원래 빈혈이 잦았던 쿄코는 수업중 갑자기 쓰러지고 '재생불량성 빈혈' 진단으로 골수이식이 필요해지지만, 가족들은 그와 골수가 일치하지 않았고, 미치루가 골수를 이식해주겠다며 나선다.

골수이식 이후 쿄코는 미치루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며 그녀 곁에 붙어 다니고, 미치루의 곁에 머무는 자신을 향한 질투와 선망의 시선 또한 즐긴다.

그리고 미치루는 그런 쿄코에게 자신의 불행한 모습을 보이고, 쿄코는 '소중한 친구'라는 미치루의 말에 기뻐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미치루를 그 잔혹한 상황에서 구해내겠다고 결심한다.

 

책 속에는 '가모우 미치루'의 현란하고 교묘한 화술에 넘어가 최악의 짓들을 벌이는 사람들이 나온다.

미치루와 쿄코 외에 남성 중심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다 횡령까지 저지르는 사요, 취업에 실패하고 가업을 돕고 있지만 불만이 가득한 히로키, 허황된 꿈을 꾸며 현실도피중인 무능한 남편에게 스트레스를 받는 요시에가 등장한다.

 

미치루는 아름다운 외모와 교묘한 화술로 이들의 마음 속 약한 부분을 파고든다. 물론 미치루가 직접적으로 실행명령을 내린 적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은밀하게 그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고 마음 속의 실행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이들은 미치루에 대한 원망 없이 그저 사회나 상대방의 탓을 하며 그녀의 뜻대로 움직인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문제 원인과 분노, 원망을 외부로 돌리며 자신들의 그릇된 행동들을 합리화시킨다.

 

미치루가 희대의 악녀인 것은 맞지만, 글쎄...

나는 그녀에게 이용당하는 이들이 더 황당하고 이상해보였다.

물론 그들에게는 충분히 힘든 상황들이었다. 그렇지만, 분명 그 상황에서도 다른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미치루가 교묘히 이끄는 대로 이끌려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며, 그저 남탓하기 바쁜 면모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미치루와의 만남이 최악의 상황으로 가는 하나의 길이었는지 몰라도, 이미 그들의 마음 안에 잘못된 불씨가 많이 숨어 있었다.

 

당하는 이들 또한 심정적으로 100퍼센트 이해가 가는 인물들이 아니라는 생각에, 미치루가 과연 최강+최악+희대의 악녀가 맞는가라는 생각에 잠시 빠졌다.

미치루와 관련된 사건이 늘어갈수록, 눈치 빠른 형사들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고, 그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며 숨통을 조여오는 듯 했다.

그러나, 역시, 그녀는 희대의 악녀가 맞았다. 음하하하하하.

미치루는 다 계획이 있구나.

아주 계획적인 그녀, 미치루의 다음 행보도 너무 기대된다.

미치루상, 다음에는 어떻게 비웃어 줄 건가요?

 

++ '옮김이의 말'을 보면, 작가가 이 소설을 구상할 때 '사기꾼들은 나쁜 인간이지만, 그들에게 속은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의외로 그렇게 나쁜 존재가 아니지 않았을까. 속는 순간에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악녀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했고, 악녀 같지 않은 악녀를 그리고 싶었다고 하네요.

 

+++ 작가님!!! 그래도 미치루가 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 속인 게 아니라, 진짜 그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속인 것이니까 나쁜 건 나쁜 겁니다... (이건 내 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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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같은 악.

그 정체를 직접 확인하지 못하면 체포해서 처벌할 수도 없다.

그러면 악행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p.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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