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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평점 :

기억이 사라진다면?
불과 10분 전에 내가 한 행동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기억이 사라져 버린다면?
우린, 인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질 못해. _ p. 34
공백을 깨달은 사실 자체도 잊어버리고 다시 공백이 되어버린 거죠. _ p. 42
여고생인 '유키 리노'는 어느날 기억이 사라진다는 걸 깨닫는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켠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컴퓨터에는 기억이 어느 순간에 끊긴 것 같다라는 내용의 글들이 시간별로 여러 개 적혀 있고, 그 글들을 쓴 것이 자신이라는 것도 분명해 보였다.
이 기억이 사라지는 현상(후에 '대망각'이라고 불리우는)은 비단 리노 혹은 리노 가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발생했고, 인류는 공황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그러한 혼란 속에서도 훗날 '제1행동자(프라임 무버스)'라 불리게 될 사람들은 문명의 존속을 위한 여러 제안을 내놓았고,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또한 기억장애와 관련하여서는 장기 기억이 가능하도록 외부 기억 장치를 만들어 사람들의 몸 속에 넣거나 몸에 부착하기 시작했다.
'대망각'의 시대가 시작된 이후에도 이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은 탄생하고, 그들에게 기억이란 자신들의 몸에 부착된 '반도체 메모리'였다.
그리고 장기 기억이 없는, 기억은 자신에게 부착된 메모리인 이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펼쳐진다.
서로 부딪쳐 넘어진 후 실수로 상대방의 메모리를 잘못 끼운 남자와 여자가 있다.
거액을 받고 대리 시험을 치기 위해 메모리를 바꿔 끼웠다가 결국엔 자신의 신체를 잃고, 다른 사람의 신체로 살아가는 남자도 있다.
메모리 결함으로 교체를 위해 제조사에 간 쌍둥이 자매는 메모리가 뒤바뀐다. (물론 나중에 알고 보니, 뒤바뀐 것이 아니었지만...)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메모리가 파손된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메모리를 딸에게 끼워 넣은 아빠도 있다.
한편으로 외부 기억 장치 장착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집단도 있다. 그들은 문명의 잘못을 또다른 문명의 힘으로 바꾸는 것을 거부하며 단기기억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죽은 자의 메모리를 끼워 재생하는 '혼령 부르기'를 전문으로 하는 무당도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간중간에 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의문의 '나'가 등장한다.
이런 일들이 발생할 때 당사자들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온 나의 몸은 저기 있는데, 내 기억이(어쩌면 내 정신과 영혼이) 이쪽 몸에 있다면, 그럼 나는 누구지?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인간의 본질'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존재한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그리고 영혼...
지금의 나는 '나'가 아닌 것인가?
기억이 마음대로 바뀌면 더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되니까요.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뭘 의지하면서 삽니까.?
마음은 자신과 현실의 관계에서 생깁니다.
현실이 없는 마음은 존재하지 않아요.
- 정말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까? 그날 이후 사람은 자기 마음의 한 부분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어.
분리된 마음은 이른바 하나의 개체에 지나지 않아. 너는 마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지 않나? _ p. 136
메모리를 다른 사람의 신체에 꽂으면 그 사람의 몸에 내가 들어간다... 이런 설정의 책들은 그 전에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자신이 늙고 쇠약해지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싫은 부자들이 젊은 사람들의 몸을 사서 그들의 뇌에 자신의 뇌를 이식한다든지 하는 이야기 말이다.
이 책에서는 메모리를 바꿔 끼우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그런 상황들이 벌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 상황까지는 없었지만, 죽은 가족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사망한 후의 메모리를 간직했다가 살아있는 신체를 빌려 그들을 다시 불러내는 상황은 있었다.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는 선한 마음으로 시작된 메모리 바꾸기는 점차 비지니스의 성격을 띠며 하나의 범법적인 직업이 된다.
재미있었지만, 막 가볍지도 않은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다보니 얼마전에 읽은 김영하 작가의 <작별 인사>가 생각났다.
그 소설에서 결국 인간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휴머노이드들에게 더 의존하고 편한 것만 취하다가 결국 스스로 소멸해 버린다. 인간보다 훨씬 인간다운 감정을 지녔던 휴머노이도 철이만이 인공지능의 형태로 남겨진 채 말이다.
이 소설에서는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장기 기억을 할 수 없게 된 인간이 만들어낸 메모리만이 결국 남는 세상이 도래한다.
생각해 본다. 기억이 분리된 세계를.
나의 신체와 분리되어 저장되는 기억을, 또는 나의 신체 없이도 기억만이 분리되어 저장되어 있는 먼 미래의 세상을.
생각만으로도 사실 무섭고 끔찍하다.
그런 나는 '나'인가? '타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