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읽은 소설은 날을 잡고 읽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짧은 글속에 작가의 글을 독자의 머릿속에 밀어 넣은 것이 아니라 독자의 생각을 끊임없이 이끌어 내는 책이다.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독서모임을 소개하는데 그 이야기가 다른이의 이야기임에도 내 이야기 같고, 내 가족의 이야기 같았다. 책은 분명 읽은 것이라고 배웠지만 이 책은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정여울의 독서모임에 가입한듯 작가와 함께 글을 쓰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정여울 독서모임의 회원임을 증명하는 듯하다."회원증 발급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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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각적 이미지에 현혹되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분명히 빛나는 것들을 바라보는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박노해의 시<민들레처럼>을 읽다가 ’우리는 이런 감수성을 잃어버렸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감옥에서 단식 투쟁을 하고 고문까지 견디며 파란수의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끌려가고 있던 시인에게 누군가가 민들레 한 송이를 쥐어주었다고 한다.
-->파란색과 검정색, 수의와 고무신. 마치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색들이 사라지고 파란과 검은 색만 색이 바랜 듯 포커 싱 될 때 어디선가 노오란 빛이 들어온다. 마치 생명을 불어 넣듯이 말이다.
민들레는 민중의 꽃이다. 지금은 이렇게 먹는 사람들이 잘 없지만, 민들레 자체가 약으로도 쓰이고 김치로도 담긴다. 그리고 장난감이 흔하지 않던 시절 하얗고 몽글몽글한 민들레는 ‘후~’하고 불면 마알간 속을 드러내며 거품같은 솜털을 날린다. 마알간 속은 마치 대머리아저씨같이 보인다. 후~ 하고 날아가는 민들레씨도 재미있지만 남겨진 꽃대마저 웃음을 한바가지 주고 풀 속에 버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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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시인은 노올나 민들레 한 송이의 힘으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권리’를 되찾은 것이다.
>>예전에 ‘쇼생크 탈출’을 보았다. 그때 주인공으로 인해 감옥에 클래식이 퍼지자 죄수들은 일제히 행동을 멈추었다. 그것은 마침 호흡조차 멈춘 듯 했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다. 그 일로 주인공은 큰 고초를 겪은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결국 그 자세한 상황은 기억이 안나지만 그 교도소에 주기적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길보드차트라고 해서 길거리만 다니면 음악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유명음악이 흘러나오면 지나가던 누군가가 흥얼거리는 소리를 우연히 듣기도 하고, 같은 부분을 따라부르기도 하면서 함께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박노해 시인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꽃’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꽃’이라는 상징과 그 꽃이 ‘흔하다’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온 것은 ‘시각적 자극’, ‘노오란’이 더 훨씬 강했을 것이다. 온통 회색빛은 감옥에 눈이 확 깨는 느낌, 이 느낌은 눈이 깨는 것이 아니라 뇌가 깨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이성과 데이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비빔밥을 먹는 이유 또한 같다. 비빔밥의 갖갖이 채소가 여러 가지 감각이 깨워 눈 앞에 상대를 훨씬 더 호의적으로 볼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 보는 것, 함께 듣는 것, 함께 맛보는 것은 보는 것, 듣는 것, 맛보는 것 자체도 있겠지만, 이것은 일종의 감각의 공유이다. 관계를 돈돈하게 만드는 손을 잡은 행위조차 촉각의 공유이다. ‘엄마 냄새’라고 하는 것은 후각의 공유이다.
이러한 감각의 공유는 공감과 연결되며, 공감은 서로의 이해를 이끌어낸다. 코메디언 이영자 님은 맛깔스럽게 맛을 표현해서 숨은 맛집을 대박집으로 탈바꿈 시켰다. 이것은 맛의 공유로 이끌어낸 공감이 서로의 그 맛집을 찾을 수밖에 없게 하는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정여울 작가는 여기서 잃어버린 감각을 염려한다. 맞다. 우리는 감각에 무뎌짐과 동시에 공유하는 방법도, 공감능력도 축소되며, 이로 인해 타인에 대한 이해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니체는 시인이 되어라고 했고, 디오니소스처럼 춤 추듯 인생을 살아라 라고 했다. 춤이나, 노래또한 한명이 한는 것 보다 때로 하는 것이 훨씬 감동적이다. 예전에 기억하는가 광화문에서 뻐~얼건 티를 입고, 아무나 얼싸 안으며, 대~한민국을 외쳤던 시절.
우리는 함께 대~한민국을 외치며 시대를 공유했으며, 치맥이 동이나도록 미각과 후각의 공유와 손바닥이 뜨끈뜨끈할 정도로 촉각을 공유했으며, 안정환이 반지키스의 세레모니를 했을 때 나도 반지키스를 하는 시각의 미러세포를 공유했고, 귓전에서 떠나지 않는 대~한민국의 함성을 공유했다. 우리는 서로 공감했으며,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것은 공유, 공감을 넘어선 이해로 똘똘 뭉친 연대감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함께니깐’
박노해 시인에게 쥐어진 것은 단지 꽃이 아닌 공감이며, 시인이 느낀 것은 한 시대를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연대감이었다.
민들레가 씨를 다 보내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 봄이 되면 언제나 돌아오는 것처럼
당신도 지금은 흙에 있는 것이니 봄이 되면 돌아오라고,
그때 당신의 시가 멀리 퍼질 수 있도록 우리가 조용히 ‘후~’하고 당신을 퍼트리듯 당신의 시를 하늘 높이 날리겠다는 민중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오늘은 다시 대한미눆을 외칠수 있ㄴ느 날이 다시 오길 기다리며 민들레를 후~하고 불어보려한다.
그냥 가만히 자고 있는 아이의 손을 잡아본다. 공유하려고, 공감하려고, 이 아이를 이해보려고, 그럼 우리 또한 연대감으
언제나 버려지는 듯 되돌아오는 민들레처럼 당신 홀로 인 듯 하지만, 겨울이 지나 봄을 기다리 듯이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민중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이렇듯 우리는 지속적인 감각의 공유와 함께 관계를 만들어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곳을 보라 는 함께 감각을 공유하라 와 일치한다.
우리가 함께 보는 하늘, 우리가 함께 듣는 노래, 이
우리가 함께 듣는다고 하는 것은 노래를 공유하는 것 같지만 감각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제는 길거리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을 순 없지만, 이제는 길거리에 핀 꽃은 사람의 손에의해 피어진 것 밖에 없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공감할 것을 찾고, 그것을 향해 돌진한다. 이것이 삶이다.
박노해 시인에게 쥐어진 것은 단지 꽃이 아닌 공감이며, 시인이 느낀 것은 한시대를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연대감이며, 언제나 버려지는 듯 되돌려지는 민들레처럼 당신이 홀로 인 듯 하지만, 겨울이 지나 봄을 기다리 듯이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민중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꼬함께 사는 것이 아름답다고 알려주는 인생의 교훈 같은 것이다.
지금은 길거리에 그렇게 음악이 흘러나오면 여러 가지로 힘들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골라 혼자서 듣는다. 2000년대에 태어나도 7080음악을 듣고, 한국에 살아도 이탈리아 음악을 듣기도 한다. 여기서 수고로움이 생긴다. 공감할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에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어디에선가 사부작이 핀다.
민들레는 버려지지만 다음해에 어김없이 아니 더 많이 풍성하게 우리에게 돌아온다. 박노해 시인에게 쥐어진 노오란 민들레가
준것이라면 일반인들에게는 각박한 세상에 하늘을 한 벌 볼수 있는 권리. 땅을 한번 내려다 볼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더 나아가 과거를 한번 돌이켜 볼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삶이라며, 우리는 알지 못하게 민들레는 늘 우리곁에 있고,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어김없이 그곳이 자기 자리인냥 돌아오는 것처럼...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을 잊지 말라고, 그 자리는 누군가가 정해준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정하는 것임을 민들레가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박노해 시인에게 쥐어진 꽃이 파랑과 검정과 노랑의 조화였다면
우리에게 쥐어진 꽃은 회색과 노랑, 그렇다면 우리의 파랑은 어디 있을까?
박노해 시인을 억압한 파랑은 옷으로 표현되지만 우리의 파랑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가둬 답답함에 파랗게 질려가는 우리의 얼굴은 아닐까?
오늘은 잠시라도 스스로를 가두는 것을 풀어버리고
(브레지어, 허리띠, 머리띠, 머리끈 등등)
우리스스로가 노오란 빛이 되어 누군가에게 하늘과 땅을 볼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떨까?
노오란 민들레가 하이얀 씨앗이 되어 날아가듯
누군가에게 희망과 순수함을 느낄수 있길 기대해본다.
나부터 말이다. (중략) 민들레처럼 살아야한다고.
.84 나는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박물관에 가서 몇 시간이고 혼자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의 상처가 가라앉는 느낌을 받는다.
.315 우리는 시각적 이미지에 현혹되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분명히 빛나는 것들을 바라보는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박노해의 시<민들레처럼>을 읽다가 ’우리는 이런 감수성을 잃어버렸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감옥에서 단식 투쟁을 하고 고문까지 견디며 파란수의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끌려가고 있던 시인에게 누군가가 민들레 한 송이를 쥐어주었다고 한다.
.132 논문은 객관성이 생명이야
.132 나의 글쓰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도대체 뭐가 달라진 것인지... ‘내가 노는 물’이었다.
.320 그는 어렸을 때 안구에 새겨진 흉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있다. (중략) 시인의 속삭임에 나도 용기를 얻는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저 제가 저라서 좋아요. 제흉터도, 제 아픔도, 그게 가장 나다운 모습이라 좋습니다.’
.61 내게 선택권이 있었는데도 용감해질 기회, 진정한 내가 될 기회나 자신이 될 기회를 놓쳐버리는 데서 우리의 슬픔이 시작된다. 타인이 내 삶을 쥐락펴락한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보듬고 쓰다듬기 시작해야만 치유는 가능하다.
.132 학자의 자리에서 작가의 자리로 옮겨 오면서, 잃어버린 자존감을 되찾았다. (중략) 내게 어울리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을 때, 우리는 진짜 자신이 될 수 있다. (중략) 진정으로 ‘나다움’을 받아줄 수 있는 공동체를 찾는 적극적인 모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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