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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안인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평점 :
이 리뷰는 비채서포터즈으로써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인간의 기억은 늘 불안하다.
기억한다는 행위는 완전한 복원이 아니라, 선택적 습득의 결과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의 빈틈은 언제나 존재하고,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뇌의 창조적 작용이다. 그래서 기억은 아름답지만, 늘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그 왜곡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 기억이 완전했다면 인간은 더 이상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은 신화적이고 몽환적이다. 마치 누군가의 꿈속을 걷는 느낌이다. 아니 누군가의 상상속인가?
현실의 표면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인간과 자연, 철학과 사유, 과거와 현재,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층적인 세계를 형성한다. 작가는 언어와 비언어의 경계를 흔들고,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해체하며,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다시 쓴다. 그 결과 독자는 언어의 세계와 감각의 세계 사이, 그 모호하고도 깊은 틈으로 끌려들어간다.
처음에는 앨리스와 아트리에, 두 인물의 경험이 서로 다른 축을 따라 흐른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치는 순간,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된다. 그 만남 이후 비로소 작품의 핵심이자 이름인 ‘복안(複眼)’이 드러난다. 그리스 신화 속, 눈이 백 개였던 감시자 아르고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 작품 속 복안인은 감시자가 아니다. 그는 통제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으며, 오직 ‘본다’. 세계를 바라보되,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관찰자이며, 인간의 언어 너머에서 세계의 숨결을 기록하지 않고 ‘기억’한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의 밑바닥에는 고래가 있다. 바다의 심연에서 고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그 거대한 호흡은 세계의 리듬이자, 자연의 기억이 순환하는 박동이다. 인간이 언어로 기록할 수 없는 그 저주파의 노래 속에는 수천 년의 시간, 잊힌 생명들의 흔적, 파도 아래에서 스러진 문명들의 그림자가 포개져 있다.
복안인이 ‘세계의 눈’이라면, 고래는 ‘세계의 귀’이다.
하나는 모든 것을 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듣는다. 그리고 그 둘이 동시에 존재할 때, 기억은 완전해진다.
인간이 남긴 기록 ― 사진, 일기, 언어의 파편 ― 은 세계를 붙잡기 위한 도구이자, 동시에 세계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벽이다. 기록은 세계를 보존하지만, 또한 그 순간의 살아 있는 숨결을 고정시켜버린다. 우밍이는 그 벽을 허무는 작가다. 그는 인간이 잃어버린 감각, 언어 이전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복안’이라는 낯설지만 원초적인 개념을 불러온다. 복안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은, 단 하나의 시점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폭력을 거부하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과 자연의 눈, 언어와 침묵, 생명과 죽음이 서로 포개지는 지점에서만 가능한 시선이다.
이 작품 속 아트리에는 바다의 기억을 품은 소년이다. 그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의 기억은 문장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파도의 결, 조개껍질의 냄새, 해풍의 리듬 속에 새겨져 있다. 그의 존재는 언어 이전의 기억, 몸으로 기억하는 세계의 은유다. 반면 앨리스는 언어의 세계에 속한 인간이다. 그녀는 잃어버린 남편과 아들을 되살리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쓸수록 그들은 더 멀어진다. 그녀의 기록은 결핍의 증거이자, 동시에 살아 있다는 증거다. 언어는 구원의 도구이자, 부재의 증명서다.
두 사람의 만남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과 기록이 스치는 찰나의 교차점이다. 언어를 모르는 존재와 언어로만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의 조우. 이들은 서로의 언어를 공유하지 못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수용의 순간, 세계는 잠시나마 온전해진다.
흥미로운 점은, 아트리에는 결코 앨리스 외의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인물들과 교차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아트리에는 앨리스의 상상, 혹은 무의식의 형상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상실과 죄책감이 빚어낸 투사이거나, 언어의 너머에서 들려오는 세계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든 환상이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닿음’의 사실성, 즉 인간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가 한순간이라도 교차했다는 점이다.
앨리스의 남편과 아들은 그녀의 기억 속에서 이미 사라졌고, 이제 기록 속에서만 존재한다. 사진과 문장, 단어의 그림자로 남은 그들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여전히 바다에 닿아 있다. 바다는 모든 것을 삼키지만,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고래의 울음은 그 잊히지 않는 기억의 증거다. 인간이 기록으로 세계를 남기고, 자연은 그 기록을 노래로 기억한다. 둘 중 하나라도 사라지면, 세계는 불완전해진다.
결국 이 작품이 말하는 ‘복안’이란, 인간의 눈과 자연의 눈이 동시에 작동하는 상태다. 인간의 눈은 세계를 언어로 번역하고, 자연의 눈은 그 언어를 다시 생명으로 환원한다. 하나는 기록하고, 다른 하나는 기억한다. 두 시선이 겹칠 때만 세계는 진실에 닿는다. 그리고 그 아래, 깊고 어두운 바다 속에서 고래는 그 모든 기억을 울음으로 이어준다. 인간이 잊어버린 세계를 대신 기억하며, 언어를 잃은 세계의 목소리가 되어.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려는 인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인간 ― 그것이 앨리스이며, 결국 우리 자신이다. 복안인은 그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파도의 결, 죽음의 냄새, 언어의 틈을 바라본다. 그리고 고래는 그 모든 것을 듣는다. 하나는 본다, 다른 하나는 듣는다. 인간은 그 둘을 흉내 내기 위해 기록한다. 그러나 그 기록이 다시 바다로 되돌아갈 때, 기억은 완전해진다.
《複眼人》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기억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세계의 것이다.
인간은 다만 그 기억을 잠시 통과하며, 빌려 쓰고, 잊는 법을 배우는 존재다.
기억과 기록이 만날 때, 세계는 다시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언젠가,
그 기억의 파도 속에서 고래의 울음이 들릴 것이다.
복안인의 눈으로, 우리 자신과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