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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베첸토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평점 :
#작가
이 작품을 쓸 당시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전통적인 소설 형식이 더 이상 세계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감각은 이미 변했는데, 소설은 여전히 과거의 그릇에 머물러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그는 소설가이면서 음악 해설자였고, 강연자였으며, 무엇보다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질문한다.
“이야기는 반드시 읽히는 것이어야 하는가. 텍스트는 꼭 책에 묶여 있어야 하는가.”
『노베첸토』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소설이면서 소설이 아니고, 연극이면서 연극이 아니며, 음악처럼 흐르지만 악보를 갖지 않는다. 이 작품은 장르를 선택하지 않는다.(읽으면서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이 부분이다) 대신 장르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 노베첸토(레몬)라는 인물의 존재 방식이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인물, 그러나 그 불완전함 자체로 완결된 존재. 이 작품은 형식의 실험이자, 한 인간이 세계에 머무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형식
극 → 소설 → 전지적 서술 → 1인칭
『Novecento』는 형식이 곧 주제인 작품이다.
이 텍스트는 처음에는 극(지문, 발화<여기서는 ‘독백’: 지금 배우의 입을 통한 말이 사건처럼 일어나는 것 > 존재)처럼 시작한다. 그러나 읽다 보면 점차 소설처럼 서사가 확장되고, 어느 순간 전지적 시점의 이야기처럼 흘러간다. 그러다 다시 관찰자의 증언으로 물러나며 “나는 노베첸토(레몬)를 보았다”라고 말하고, 끝내는 노베첸토(레몬) 자신이 1인칭으로 말하는 지점에 도달한다.
이 불안정한 형식은 의도된 전략이다. 바리코는 이 작품을 ‘모놀로그’라는 최소한의 극 형식으로 발표했지만, 대화와 행동을 제거하고 기억과 증언만을 남겼다. 그 결과 이 텍스트는 보여주는 극도 아니고, 설명하는 소설도 아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말해지는 이야기이다.
이 형식은 노베첸토(레몬)라는 인물과 정확히 겹친다. 그는 직접 말하는 존재가 아니다. 늘 누군가를 통해 전해지고, 증언되고, 회상된다. 형식이 안정되지 않는 이유는 인물이 안정된 자리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형식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에 있는 방식’이다. 때문에 이것이 장점이며, 이것이 단점으로 읽혔다.
# 재즈
하고 많은 음악중에 왜 재즈(재즈라고 하니깐 맛이 안나서 이하 ‘째즈’라고 할게)여야 할까.
째즈는 그 순간의 공간과 사람, 분위기에 반응하며 생성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같은 곡을 다시 반복할수 없고, 연주가 끝나면 사라지는... 기록되지 않고, 반복이 안되는 음악의 틀을 가지고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그 모든 변수에 따라 달라지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이 특성은 노베첸토(레몬)의 삶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정착하지 않고, 기록을 남기지 않으며, 어떤 제도에도 편입되지 않았다. 그의 연주는 그날 밤, 그 배 안에서, 그 사람들 앞에서만 존재한다. 클래식이 악보와 계보, 제도 위에 서 있다면, 째즈는 경계에서 태어나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음악이다.
노베첸토(레몬)가 째즈를 연주한다는 것은, 그의 삶이 째즈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무한한 가능성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지금 이 순간에 반응하며, 연주 가능한 선택만을 택한다. 째즈는 레몬이 세계를 견디는 방식이다.
# 하선(下船)
노베첸토(레몬)는 배에서 내려 육지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맞지만, 끝내 하선하지 않는다. 이를 두려움이나 비겁함의 문제로 설명하는 해석도 있고, 육지를 그를 옥죄는 공간으로 규정하는 설명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노베첸토에게 육지는 억압의 공간이라기보다, 무한한 선택을 요구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에게 무한은 연주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그의 판단은 자유와 억압의 대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한과 무한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해설은 이 선택을 심리적 회피나 사회적 압박의 결과로 번역하려 한다. 이 지점에서 해석은 작품을 설명하기보다, 작품을 정리하려는 태도에 가깝게 읽혔다.
이러한 설명은 작품 내부의 논리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기보다, 해설을 완결시키기 위해 덧붙여진 해설의 언어처럼 느껴진다. 만약 작가가 노베첸토의 선택을 그러한 의미로 명확히 규정하고자 했다면, 이 이야기는 단편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혹은 장편으로 확장하지 못한 서사의 한계를, ‘하선하지 않음’이라는 결말로 봉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남는다. 다시 말해, 하선 거부에 대한 일부 해설은 필연이라기보다 사후적으로 부여된 명분, 즉 핑계로 보였다.
해설은 독자를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 해설을 읽고도 납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배에 남는 삶이 의미 있는 삶이고, 육지로 나가는 삶은 의미를 상실한 삶이라는 구도는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이는 마치 목줄을 찬 개가 “저 밖은 위험하다”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시키거나, 어떤 선택이든 괜찮다고 말하는 피상적인 힐링 에세이의 논리와 닮아 있다. 성취나 적응을 하기 위해선 고통은 당연한 과정이다.
노베첸토의 선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불투명하다. 그리고 바로 그 불투명함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해설이 이를 지나치게 매끄럽게 정리하려는 순간, 이 작품이 유지하고 있던 긴장과 질문은 흐릿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