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인물 열전 1 - AI의 토대를 놓은 사람들 AI 파이오니어 FOUNDATION 1
김경달 지음 / 이은북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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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달의 《AI 인물 열전 1》은 AI라는 거대한 학문적 뼈대를 만들어온 여섯 명의 인물을 다룬다. 책을 읽다 보면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는 충분히 알게 된다. 지금 우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하는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기술이 아니라 수많은 연구와 실패, 집념과 논쟁이 오랜 시간 쌓인 결과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읽으면 읽을수록 내 머릿속에는 조금 불경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 위대한 건 알겠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이 여섯 명은 6개의 입으로 하나의말읏ㄴ 한다.

"AI는 위험해!!"

사실 AI가 위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너무 많이 들었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고,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규제와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익숙하다. 그런데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도대체 왜 위험한가.
그 위험은 어떤 과정에서 만들어지는가.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이 되는가.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책은 그 질문의 문 앞까지 데려가지만 정작 문을 열어주지는 않는다. 이제 뭔가 나오겠구나 싶으면 다시 인물의 업적과 생애가 등장한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자꾸 이야기를 하다 마는 느낌이다.
밀땅해?

여섯 명의 위대함은 충분히 전달되었지만,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AI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선뜻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납득이 불러와야한다)

물론 이 책은 한 권으로 끝나는 책이 아니라 4권으로 이어지는 시리즈이다. 어쩌면 내가 1권에서 너무 빨리 답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1권은 인물을 소개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학문적 토대를 보여주는 시작에 불과하고, 내가 궁금해하는 이야기는 뒤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문제는 한 권에 13,000원이라는 것이다. 네 권이면 52,000원이다. 더구나 책이 꽤 얇다. 13,000원을 내고 한 권을 다 읽었는데 중요한 이야기가 이제 시작될 것 같은 순간 끝나버리니 솔직히 조금 아니 많이 아까웠다. AI가 아직 나를 위협한 적은 없는데 벌써 내 지갑은 조금 위협받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얇다고 투덜거려 놓고 아주 나다운 일이 생겼다. 서울에 가야 해서 가방을 정리하다가 이동하면서 읽을 책을 고르는데, 내 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AI 인물 열전 1》을 집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얇으니까. 🤣

얇다고 욕해놓고 얇아서 가방에 넣었다.🤣 기차를 기다리면서 읽고, 지하철에서도 읽었다. 가벼우니 쉽게 꺼내게 되고, 내용도 위인전을 읽듯 어렵지 않게 넘어간다. 앞의 내용이 적당히 반복되니 띄엄띄엄 읽어도 흐름을 잃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혹시 이것까지 마케터의 작전인가?
“책이 너무 얇은데요?”라고 했더니
“그래서 당신이 들고 다니잖아요”라고 대답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AI 인물 열전 1》의 유용성에 대한 평가는 보류다. 1권만으로는 이 시리즈가 결국 어디로 가려는지 잘 모르겠다.

AI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AI의 역사를 인물을 통해 설명하려는 것인가,
AI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기 위한 긴 서론인가,
아니면
네 권짜리 AI 위인전인가.

그래서 3권과 4권이 더 궁금하다. 1권을 읽으며 계속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 ‘그래서’의 답을 찾으려면 다음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이것이 처음부터 계산된 구성이라면 꽤 성공적이다. 얇아서 아까웠는데 얇아서 들고 다녔고, 이야기를 하다 만 것 같아서 아쉬웠는데 이야기를 하다 말아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결국 이 책의 진짜 유용성은 이어지는 책들을 조금 더 읽은 뒤에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굳이 13000원으로 다음편과 그 담 편은 내돈내산?

편집자는 또 생각해야한다. 이 책이 독서가의 순응도를 끌어낼수 있는 책인가?
🤣☺️🌊 (점점 두꺼워진다면... 또)

이 책을 읽고 난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그다음 이야기는 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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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다 과학을 믿게 되었을까 - 노벨 물리학상으로 읽는 의심과 논쟁, 합의의 역사
이근희.김갑진 지음 / 모어사이언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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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을 읽을 때마다 늘 비슷한 기대를 한다. 이번에는 얼마나 어려울까. 얼마나 많은 공식과 개념이 나올까. 그런데 이 책은 예상과 조금 달랐다. 노벨물리학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정작 이 책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물리학 자체가 아니었다. 새로운 이론이 어떻게 탄생했고, 기존의 상식과 어떻게 충돌했으며, 수많은 의심과 검증 끝에 하나의 과학이 되었는지를 따라가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읽다 보면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보다, 그들이 처음 던졌던 질문에 더 오래 머물게 된다. 과학은 위대한 발견의 역사가 아니라, 당연함을 의심해 온 사람들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이 책은 차분하게 보여준다.


 책을 읽으며 가장 잘 읽힌 부분은 「거울 안 세상과 거울 밖 세상은 같을까」였다. 이상하게도 그 장을 읽는 내내 최근 본 넷플릭스 드라마 〈동궁〉이 떠올랐다.(사실 거울로 드나드는 여자도 떠올랐고, 유일한 아내?라는 웹소설도 생각났다. 캬캬캬 요건 나중에) 물을 통과하면 인간 세상과 평행하게 존재하는 귀신들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설정이다. 같은 궁궐이 있고, 같은 공간이 있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하지만 그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는 전혀 다르다.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그곳에서는 보이고, 귀신들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다시 인간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같은 공간처럼 보이지만, 같은 세계는 아니다. 드라마를 볼 때는 그저 흥미로운 상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문득 깨달았다. 거울을 사이에 둔 두 세계를 상상한다는 점에서는, 물리학도 아주 비슷한 질문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우리는 거울을 보며 한 번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좌우만 뒤집혀 있을 뿐 결국 같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물리학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현실에서 성립하는 자연법칙은 거울 속 세계에서도 그대로 성립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전닝과 리정다오는 그 믿음을 너무도 단순한 질문 하나로 흔들었다. 정말 거울 속 세계도 현실과 같은 법칙을 따를까. 그 질문은 결국 우젠슝의 실험으로 이어졌고, 모두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거울대칭은 약한 상호작용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답보다 새로운 질문이었다. 세상이 달라진 것은 새로운 현상을 발견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다시 묻지 않았던 질문을 다시 꺼냈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 지점에서 판타지와 과학은 갈라지는 것 같다. 판타지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만들고, 과학은 그 상상이 사실인지 끝까지 확인하려 한다. 하나는 상상력으로 세계를 넓히고, 다른 하나는 의심으로 세계를 넓힌다. 그래서 〈동궁〉이 재미있었다면, 이 책은 그 재미가 현실에서는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웠다. 결국 과학은 상상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에서 출발해 증거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은 늘 멀게 느껴졌다. 실험실과 공식, 천재들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세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덮고 나니 과학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거울을 보며 한 번쯤 품었을 법한 의문,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때도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는 태도, 그 사소한 호기심이 결국 과학의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과학은 참 이상하다. 가장 가까운 질문에서 시작하지만, 그 질문은 결국 우주와 자연의 가장 깊은 곳까지 우리를 데려간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멀어지고, 멀다고 느끼는 순간 어느새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에 와 있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과학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과학이 끊임없이 의심하는 방식을 신뢰하게 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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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불안을 다루는 법 - 에피쿠로스에게 배우는 덜 두렵고 더 단단한 삶
김용하 지음 / 헤이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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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두 종류의 책을 만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책이 있는가 하면, 읽는 내내 "맞는 말인데... 잠깐만?" 하며 작가와 토론하게 만드는 책도 있다. 서른의 불안을 다루는 법은 분명 후자였다. 🤣

 

문장도 좋았고, 에피쿠로스 철학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방식도👍 메시지에는 충분히 공감했다. 그런데 심심찮게 폭풍 댓글을 달고 싶은 부분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가장 먼저 걸린 것은 제목이었다. 왜 하필 '서른'일까. 책을 덮고 난 지금도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찾지 못했다. 저자는 인터뷰에서 20대는 아직 가능성이 열려 있고, 40대 이후는 어느 정도 삶의 윤곽이 잡히지만, 30대는 그 사이에서 가장 큰 불안과 절망을 마주하는 시기라고 했다.

글쎄, 정말 그럴까. 오히려 저자가 살아온 시대가 그랬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비교적 강했던 시대와 45세에도 조기퇴직을 걱정해야 하는 지금의 노동시장은 너무나 다르다. 하나의 직장에서 차근차근 자리를 잡아가던 시대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해야 하는 시대는 삶의 리듬 자체가 다르다. 그렇다면 '40대에는 삶의 윤곽이 잡힌다'는 전제 역시 지금 세대에게는 쉽게 적용하기 어려운 말처럼 들렸다.

책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서른만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았다. 불안, 욕망, 비교, 평온, 행복은 특정 나이가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오히려 현대인의 불안을 다루는 법이라는 제목이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과거의 자신(30)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읽혔다는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까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됐는데.", "조금은 내려놓고 살아도 괜찮았는데." 이미 그 시간을 통과한 사람이 염려과 아쉬움을 담아 과거의 자신, 혹은 자식 세대에게 건네는 조언 같았다. 그래서 현재진행형으로 불안을 견디고 있는 30대의 숨 가쁜 호흡과는 다소 거리가 느껴졌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 것은 '평온'이었다. 에피쿠로스는 평온을 최고의 가치로 둔다. (중략) 그 이전의 나는 평온보다 도전이, 안정보다 성장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서른에게 과연 '평온'이 맞는 처방일까.

지금의 30대는 인생의 기반을 만드는 시기다. 직장을 잡고, 자리를 만들고, 가정을 꾸리고, 실패도 하고, 다시 도전하면서 40대와 50대를 준비한다. (심지어 40, 50대에도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쉽게 말해 에너지의 방향이 밖으로 향하는 시기다. 그런데 책은 자꾸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물론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의 30대는 치열한 하루하루와 불안을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평온을 말하는게 과연 맞는 순서일까.

그렴 불안과 두려움은부정적인 것일까?

이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으로 여겨지지만 조금만 방향을 바꾸면 그것은 설렘이, 도전이, 추진력이 된다. 설렘과 두려움은 늘 함께 오고, 도전에는 반드시 불안이 따른다. 그래서 불안을 모두 걷어내라고 말하는 순간, 어쩌면 도전까지 함께 걷어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이 책을 나쁘게 읽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읽는 내내 생각이 많아졌다. 반박도 하고, 고개도 끄덕이고, 밑줄도 긋고, 혼자 작가와 토론도 했다. 좋은 독서는 반드시 동의하는 독서일 필요는 없다. 때로는 계속 질문을 던지는 책이 더 오래 남는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끝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비유가 하나 있다. 좋은 옷인데, 단추를 하나 잘못 끼웠다. 옷은 좋다. 원단도 좋고, 디자인도 좋고, 색도 마음에 든다. 그런데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바람에 전체적인 균형이 흐트러졌다. 옷은 여전히 좋은데 입은 사람은 계속 어딘가 불편하다. 이 책도 그랬다.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은 충분히 가치 있었고, 문장도 좋았으며, 전달하려는 메시지에도 공감했다. 하지만 그것을 '서른'이라는 삶의 단계에 입히는 순간 끝내 단추가 하나 어긋난 느낌이었다.

 

저자는 1961년생이다. 고도성장기와 IMF를 모두 통과한 세대이며, 지금의 30대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환경을 살아왔다. 그 시대를 통과한 사람에게 평온은 삶의 끝에서 얻은 지혜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30대에게는 아직 싸워야 할 시간이 더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시대를 초월한 철학을 이야기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지금 시대의 30대를 충분히 담아내지는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좋은 책은 반드시 정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읽고 난 뒤에도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 여러 번 반박했고, 여러 번 공감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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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초코빙수 - 지금여기 제철감각으로 살아가기
임애련 지음 / 이야기나무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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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가장 잘 익은 시절을 한 입 베어 문다면

 

책을 읽는 동안 이상하게도 입에 침이 고였다. 음식 하나마다 사람과 계절, 그리고 오래된 기억이 함께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엔 초코빙수는 열두 달을 따라가는 음식 에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음식이 아니다. 음식을 매개로 떠오르는 사람과 시간, 그리고 그때의 감정이다. 여름의 초코빙수는 더위를 식혀 주는 디저트가 아니라 친구와 나눠 먹던 웃음이 되고, 겨울의 따뜻한 음식은 식탁을 둘러앉은 가족의 온기가 된다. 음식은 기억을 불러오는 가장 따뜻한 열쇠였다.

 

임애련 작가의 글은 과장되지도 거창한 깨달음도 없다. 그냥 누군가의 일상의 한 부분을 일기로 엿보는 느낌이다. 문장 하나하나에는 말랑한 온도가 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움, 누군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따스함, 일상의 여유로움을 만들어준다.

 

오일파스텔로 그린 그림 역시 책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그림은 크레파스로 그린듯 나도 그릴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이제는 안다. 내 손은 그런 능력이 없다는 걸 캬캬캬 음식의 색감은 군침을 돌게 만들고, 계절의 공기는 손끝에 닿을 듯 전해진다. 글을 읽다가 그림을 오래 바라보게 되고, 그림을 보다 보면 다시 글을 읽게 된다. 두 요소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없던 추억도 만들 판이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이 책이 특별한 하루보다 평범한 하루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거창한 여행도, 극적인 사건도 없다. 대신 제철 음식 하나, 익숙한 골목 하나, 함께 밥을 먹던 사람 하나가 소중한 이야기로 바뀐다. 읽다 보면 '나에게도 이런 계절이 있었지' 하는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책장을 덮고 나니 초코빙수 한 그릇이 먹고 싶어졌다. (혈당스파이크는 걱정되지만) 어쩌면 그것은 빙수가 아니라, 그 시절의 여름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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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장 밝은 밤에 헤어졌다 - 도스토옙스키 단편 백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윌마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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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서평단으로써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일명 모자무싸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생각은 내가 가만히 있어도 여기저기 갈 수 있는데, 나는 여기 있잖아. 그럼 생각이 진짜 나야? 여기 있는 내가 진짜 나야?”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오래전 대학원 시절 들었던 철학 강의가 떠올랐다. 외부 철학자를 초빙해 들은 강의였는데, 두 시간 가까이 열심히 설명을 들은 결과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상하게도 단 하나였다.

벌레가 나고, 내가 벌레다.”

강의실을 나와 우리는 한동안 그 말을 씹고 또 씹었다. 잘근잘근.

 

그런데 백야를 읽으며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생각이 나인가. 아니면 지금 여기 있는 내가 나인가. 도스토옙스키의 백야는 흔히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나에게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보다 훨씬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몽상가가 만난 나스텐카는 정말 현실의 사람일까. 아니면 몽상가가 자신의 외로움과 욕망으로 만들어낸 관념의 산물일까.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실 도작가는 나와 궁합이 그닥이다. 이제는 알것 같아. 왜 내가 그의 글이 좋게 느껴지지 않는지. 그는 장황하다. 엄청나게 장황하다. 설명은 길고 인물들은 끝없이 떠든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배운다. 스스로를 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착각이었다. 나는 장광설과 만연체를 힘들어한다. 그리고 도작가는 장광설과 만연체의 대가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읽게 된다. 싫은데 읽는다. 읽으면서 투덜거리고, 투덜거리면서도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정확하게 까려고!!!

 

백야의 주인공인 몽상가는 이름조차 없다. 내가 못 찾은 것인지 정말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동안 그는 끝내 이름을 얻지 못했다. 반면 몽상가가 마음에 품고 있는 나스텐카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정인이 있다. 그런데도 몽상가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아니, 사랑이라고 믿게 된다.

 

이들의 만남은 단 4일이다. 밤 세 번, 그리고 마지막 한 번.

처음에는 4일 만에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있었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불같은 4일간의 사랑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간 두 사람. 결국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그 4일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10년의 시간이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고, 누군가에게는 단 며칠이 평생을 따라다니는 기억이 된다. 그러니 4일 만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문제는 무엇을 사랑했느냐이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다.

그런데 백야의 몽상가는 과연 나스텐카를 사랑한 것일까.

 

몽상가는 끊임없이 말한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감정을 말하고 상상을 말한다. 어찌나 떠드는지 듣지 않고 보기만 해도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다. 그런데 그 긴 독백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든다.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것은 아닐까. 몽상가는 현실의 나스텐카보다 자신이 만들어낸 나스텐카를 더 사랑한다. 실제 사람이라기보다 관념 속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는 동안 자꾸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가 떠올랐다. 참 이상한 일이다. 한 사람은 살인을 하고, 한 사람은 사랑을 한다. 한 사람은 세상을 향해 칼을 들고, 한 사람은 밤거리를 배회한다. 전혀 다른 인간처럼 보인다. 그런데 둘은 닮았다. 둘 다 현실보다 생각을 더 신뢰한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사상을 현실보다 앞세운다. 그는 머릿속에서 인간을 분류하고, 특별한 인간과 평범한 인간을 구분하며, 결국 그 생각을 현실에 밀어붙인다. 반면 몽상가는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상상한다. 현실을 살아가기보다 가능성을 꿈꾼다. 실제 삶보다 머릿속 삶이 더 풍요롭다. 한 사람은 관념 때문에 살인을 하고, 한 사람은 관념 때문에 사랑을 한다. 둘 다 관념 속 인간일뿐이다. 이 둘은 내가 볼때 찐따다.

 

그래서 백야를 읽으며 처음 떠올린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생각이 나인가. 아니면 지금 여기 있는 내가 나인가.

 

생각은 어디든 갈 수 있다. 과거로도 가고 미래로도 간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몸은 늘 현재에 묶여 있다. 몽상가는 생각으로는 누구보다 자유롭다. 그러나 그의 몸은 늘 혼자이다.

 

백야라는 제목도 어쩌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밤인데 밤이 아니다. 어둠인데 완전한 어둠도 아니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간이다. 몽상가가 살아가는 방식도 그렇다. 현실인데 현실 같지 않고, 사랑인데 사랑 같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첫사랑 이야기로 읽지 못했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도작가는 죄와 벌에서 생각이 인간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백야에서는 생각이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이 삶을 살아가는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가.

 

아직도 답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진짜로 알겠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무리 그래도 내 스타일은 아니다.

그럼 안 읽을 거냐고?

아니. 싫으니까 더 읽을 것이다. 더 읽고 더 깔 것이다. 계속 읽고 계속 깔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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