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들이 있었던 곳
정찬 지음 / 말하는나무 / 2026년 5월
평점 :
『그들이 있었던 곳』은 역사 자체가 주인공이다.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의 서사보다 5·18의 현장을 재현하기 위해 호출된 증인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읽는 동안 특정 인물에게 오래 머물 틈이 없다. 누군가를 따라가기보다 군중을 따라가고, 감정을 붙잡기보다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독자가 기억하게 되는 것도 인물의 얼굴보다 거리, 광장, 군중, 이동 경로 같은 것들이다.
많은 역사소설은 거대한 사건 속에 개인의 삶을 배치한다. 독자는 역사와 개인, 사실과 픽션 사이를 오가며 읽는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거리가 몹시도... 좁다. 밀도 높은 서사와 역사적 정보가 계속 이어지면서 엄청난 정보를 쏟아낸다. 그래서 이 책은 읽는다기보다 역사적 현장을 천천히 걸으며 확인하는 것 같았다.
작가 정찬은 오래전부터 한국 현대사의 폭력과 균열을 다뤄온 작가다. 그의 소설은 감정보다 구조를 보여준다. 그 안에 인간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였는지, 시대가 사람을 어떻게 압도했는지를 차근차근 쌓는다. 이 소설은 도시 전체를 움직이는 거대한 구조물처럼 다룬다. 그래서 공간 묘사가 많고, 장면 전환이 잦고, 군중의 움직임이 반복된다.
배경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의 광주를 이야기한다. 많은 소설들이 광주를 상처 이후의 시간으로 불러왔다면, 이 소설은 사건이 발생하고 증폭되고 붕괴되는 과정을 시간 순으로 따라간다. 거리와 광장, 버스와 검문소, 군인과 시민, 방송과 유언비어까지 세세하다. 읽다 보면 작가의 기록에 대한 집착이 느껴지기도 한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 잊히게 두지 않겠다는 의지. 그 의지는 강하다. 그 강한 의지가 기록의 밀도를 빼곡하게 만든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몰입이.... 솔직히 조금 지루했다.
5·18을 다룬 소설을 말할 때 많은 독자들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소년이 온다』는 감정과 정서를 건드리고, 시점의 혼란(?)으로 독자에게 심각한 몰입감과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한 잔인한 경험을 하게 한다. 『소년이 온다』는 몸으로 기억하게 하고, 이 소설은 머리로 기억하게 한다. 이건 마치 MBTI의 F와 T 같다고 할까?
또 오래된 정치 드라마들도 자주 떠올랐다. 사건 하나를 중심이 아니라 권력 구조, 사회 분위기, 군중의 움직임, 도시의 변화가 한꺼번에 들어온다. 그래서 이 책은 빠르게 읽히지 않는다. 한 장면을 넘길 때마다 시대 전체를 같이 통과해야하는데 누군가는 이 밀도가 굉장한 장점이겠지만, 누군가는 피로감으로 느껴질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후자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진 부분도 있었다. 이 소설은 최근의 정치적 충격 이후 다시 쓰이고 확장된 소설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대가 생겼다. 지금 이 시대를 통과한 사람이 다시 쓴 광주는 어떤 모습일까.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런데 읽는 동안 강하게 남은 것은 새로운 질문보다 기존 질문의 보강 정도?! 24년 전 『광야』를 현재 시점으로 업데이트 한 건 아닐까.
그리고 여기서 조금은 아쉬운 이야기를 해볼까
우리는 종종 ‘좋은 소재’와 ‘좋은 소설’을 혼동한다. 특히 5·18처럼 역사적 무게가 큰 사건은 더 그렇다. 이런 소재는 강력하고,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반드시 기억해야하고, 이 사건은 종료된 듯 하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보다 작가보다 먼저 이 소재가 책의 전면에 등장에 평가받는 순간들이 생긴다. 이런 상황에 이 소재로 쓰여진 대부분의 소설들은 좋은 소설을 넘어 훌륭한 소설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소재가 좋은 소설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누구나 아는 몹시도 평범한 사실이야. 중요한 역사를 다뤘다고 자동으로 좋은 소설이 되지도 않는다. 이는 독자가 책을 샀다고 그 역사를 이해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누군가가 ‘ 우 ’하면 ‘아’ 하고 따른다. 전형적인 군중심리. 역사 소재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런 군중심리를 호출하게 된다.
이런 소재의 소설은 읽어야 할 것 같고, 읽지 않았지만, 읽었다고 해야할 것 같은 그런 심리는 도대체 뭘까??(아직 모르겠다. 답을 알면 알려주세용~)
이 책이 기록인지 소설인지 묻는 질문에는 아직 답을 못 내리겠다. 다만 한 가지는 남는다. 『그들이 있었던 곳』은 기억을 복원하려는 소설이라는 것. 그리고 그 기록의 복원의 성공여부를 떠나 이 소설은 사람보다 장소, 개인보다 군장, 감정보다 시간을 잡고 있다. 때문에 책을 덮고 나서 남은 것은 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광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