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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아프다 -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코끼리에 대한 친밀한 관찰
G. A. 브래드쇼 지음, 구계원 옮김 / 현암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언젠가 지인이 어릴 적 동물원에서 처음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울음을 터트린 경험을 들려준 적이 있다. 전시된 동물을 응시하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에게 동일시했던 당시 그 분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이례적인 반응일 터. 아마도 지나치게 예민한 아이, 상처받기 쉬운 아이, 강하지 못한 아이로 취급받거나, 혹은 인간이 아닌 동물에 동일시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을 수도... 어쨌거나 만약 아이가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고 충격을 받거나 슬퍼하면, 어른들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마도 나라면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하거나 화제를 전환시켜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생태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저자, G. A. 브래드쇼는 ‘신경쇠약에 걸린 코끼리에 대한 연구’라는 예사롭지 않은 주제를 통해 인간의 현대 문명에 내재된 윤리적 난제들을 전면적으로 건드린다.
“이러한 모든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 대한 가장 적합한 진단은 ‘마음이 완전히 부서졌다’, 또는 ‘산산조각났다’일지 모른다” (정신과 전문의들이 본 코끼리 제니) p.209
이야기는 인간에게 적용되는 외상학(traumatology)의 관점에서 코끼리가 겪은 경험의 신경생물학적·심리학적 영향을 고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코끼리에게도 마음이 있고, 모든 포유동물의 진화적 적응전략에 해당하는 유대와 애착이 코끼리 사회에도 존재한다는 것, 코끼리의 이상행동과 트라우마는 아프리카의 식민지화에 연원을 둔 인간의 폭력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 등이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되는 스토리. 이 책에서 독특한 점은 인간의 신경쇠약과 코끼리의 그것 간의 유사점을 단지 심리학적 증상의 측면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 정치적 측면으로 확장하여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인간 사회에서 발생한 남성의 폭력 행동과 수코끼리의 그것이 어떻게 닮아있는지 설명하는 부분. 요컨대 인간이 코끼리에게 개입하면서, 수컷 코끼리 발달 단계에서 핵심적인 두 번째 사회화, 즉 암컷의 무리에서 젊은 수컷의 무리로 합류하는 단계가 사라졌고, 이는 수컷 코끼리의 사회 환경을 붕괴시켜 이상행동을 초래했다는 것. 즉 소년들에게 남성 멘토 혹은 아버지가 없는 사회에서 청소년 범죄가 발생한다는 점을 수컷 코끼리의 ‘범죄’에 대입시키고 있다. 저자는 나아가 시종 일관 인간이 코끼리의 삶에 개입하는 문제의 심각성이 단지 개체수를 줄이는 말살행위 혹은 감금과 폭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 문화’를 파괴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코끼리 문화’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단지 인간의 심리학을 동물에게 적용시키는 단계를 넘어서 ‘인간다움’의 사유 방식에 근본을 흔들어 놓는다. 저자는 과학적 분석과 나치 수용소 관련 증언, 수필, 소설 등을 인용하는 인문학적 화법을 동시에 활용하여, 종을 초월하는 고통의 정치적 성격, 동물의 고통을 이용하여 번성하는 동물원이라는 사업에 대한 문제제기, 자신이 돌본 동물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동물을 잔인하게 대하는 동물원 직원들의 정신상태 및 행동과 나치 수용소 직원 및 나치 의사들의 그것과의 유사성 분석을 내 놓는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코끼리다”라는 저자의 선언에 시나브로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전통적으로 연장자 암컷 무리에서 아기 코끼리를 함께 돌보며 키워냈던 코끼리 문화가 파괴된 후 보이는 증상들(어미가 새끼를 거부하거나 살해하는 것, 우울증 등)을 통해 거꾸로 인간의 신경쇠약을 재해석해보게 된다. 경험이 없는 젊은 여성이 혼자 아이를 낳아 고립된 환경에서 아이와 단둘이 생활하며 키운다는 건 코끼리나 인간에게나 두렵고 외로운 상황이 아니던가.
아프리카의 코끼리들과 가깝게 지내며 80여 마리의 고아 코끼리를 돌봐온 50여년의 세월 동안 무엇보다 놀라웠던 점은 코끼리들이 보여준 한없는 너그러움이다. 고아 코끼리들은 어미, 때로는 가족 전체가 인간의 손에 힘없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코끼리들은 인간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채 시설에 도착하지만 결국 야생에서 인간을 보호해 준다. 인간이라는 가족을 위해 물소와 정면으로 맞붙거나 야생의 사나운 코끼리들로부터 막아주는 것이다. 코끼리의 삶에서 사랑하는 코끼리가 살해되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코끼리는 놀라울 정도로 너그러운 동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코끼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절대로 잊지 않기 때문에 (이는 추정이 아닌 분명한 사실이다) 그 인자한 행동은 인간도 좀처럼 도달하기 힘든 높은 수준의 관용이다. 수십년 간 고아 코끼리를 키워낸 대프니 셀드릭 여사 220
코끼리의 의식과 인간의 의식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저자의 주장보다도 더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긴 건 인간으로 인해 "마음이 부서져버린" 코끼리들이 인간에게 보여준 관용이다. 주제의 신선함, 연구자의 태도, 내용의 깊이를 포함해 완성도가 높은 저서라고 본다. 또한 여러 가지 생각해 볼 거리들을 가져다 준 책이다.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좋은 책으로 꼽고 싶다.
사족. 책을 다 읽고 나서, 서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저자가 이 연구를 하게 된 경위였다. 무릇 학자의 연구 궤도(academic trajectory)에는 몇 가지 불연속적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브래드쇼가 코끼리의 신경쇠약이라는 주제를 연구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1990년대 남아공화국에서 목격한 코끼리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이 연구를 시작한건 아마도 어릴 적 동물원에서 침팬지와 시선이 마주친 짧은 순간,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인간들보다 침팬지에게 더 친근감을 느꼈던 그 순간의 경험이 단초가 되었다고 서술한다. 연구 도중에 저자가 과학이라는 차가운 언어와 고통의 개인성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10대 시절에 읽었던 엘리 위젤의 책(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험을 증언한 [나이트])이 길잡이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역시 훌륭한 학자는 인식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이며, 이런 소양은 유년기부터 쌓여지는 것!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