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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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는 후기 근대 사회의 풍경을 노동하는 인간 주체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조명한다. 근대의 규율 사회는 외부의 권위에 의해 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와 명령에 복속된 복종적 주체로 이뤄진 사회라면, 후기 근대의 성과 사회는 “Yes, We Can”이라는 내적 동기를 통해 자신을 닦달하는 성과 주체, 즉 자기 착취적 주체로 이뤄진 사회이다. 저자의 미덕은 이러한 주체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대가, 즉 병리학적 상황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인문학적인 화법으로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것.

 

오늘날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며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성과 주체의 심리적 기구에 관한 묘사” p.81

 

근대 사회에서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다. /, 친구/, /남의 구분이 명확한 면역학적 도식에서 이질적이고 낯선 것은 폭력의 원천이며, 따라서 면역학적 주체의 방어 대상이다. “적의 계보학에서 근대 사회의 적이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후기 근대 사회의 적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착취의 주체인 동시에 적,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후기 근대의 인간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프로메테우스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죄로 인해 결코 완결에 도달할 수 없는 끝없는 노동의 형벌을 받았다. 저자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를 성과 주체와 전쟁을 벌이는 제2의 자아로 분석한다. 즉 근대의 면역학적 도식에서 낯선 것으로부터의 폭력은 인간에게 배제와 박탈을 행사하며, 그 결과 광인과 범죄자가 발생한다. 반면 후기 근대의 신경성 폭력은 같은 것으로부터의 폭력이자 시스템에 내재된 폭력이며, 우울증과 낙오자를 만들어낸다는 것.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p.27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p.67

 

이러한 유형의 노동으로 인해 인간이 치러야 할 대가가 바로 우울과 탈진상태(burn out)을 초래하는 극단적 피로이다. “피로사회”, 혹은 우울사회라는 후기 근대적 풍경에서 저자는 깊은 심심함피로에서 구원의 단초를 발견한다. 한트케(피로에 대한 시론)에 따르면 피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너무나 심한 피로 때문에 인간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버린상태는 인간을 분열시키는 피로이다. 반면, 너나 할 것 없이 피로해진 개별자들이 동일한 시공간 속에 나란히 있는 상태는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으로서 화해시키는 피로”, “치유적 피로라는 것. 저자는 후자가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어 내며, 우애와 연대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분열시키는 피로개념에 비해 치유적 피로개념은 잘 와 닿지 않는다. 한트케가 제시한 두 가지 피로 개념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것은 피로를 둘러싼 삶의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인간이 느끼는 피로에는 그다지 차별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저자의 솔루션은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나서야 프로메테우스는 자기 착취의 형벌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는 그리스 신화의 플롯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저자는 피로를 느낄 줄 모르는 자아에서 피로를 느낄 수 있는 자아로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서사적 삶의 회복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자기-착취적 인간의 해방 혹은 구원에 대한 논의가 더 풍부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분명 서사적 삶의 상실이 벌거벗은 노동, 벌거벗은 생명을 만들어낸다고 진단하고 있다. 후기 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탈서사화되어 있기 때문에, “호모사케르보다 더 벌거벗겨진 것은 오늘의 삶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논의는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고 피로의 회복을 제시하는 것에서 멈춘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프로메테우스가 자기 착취적 관계에 고립되어 있는 한 천형에서 놓여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그는 자신의 상태를 외부의 존재에게 알렸고, 헤라클레스는 누군가가 보내는 이 미약한 신호를 감지했다. 어떻게 고립된 자아가 사회와 접속할 것인가. 헤라클레스가 가진 힘은 알 수 있음의 능력이었고, 프로메테우스가 가진 힘은 이해받을 수 있는능력이었다. 그것을 이어주는 고리가 바로 이야기가 아닐까. 발터 벤야민이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로 명명했다는 깊은 심심함이 하이퍼-어탠션의 상태로부터 이완된 시공간을 뜻한다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을 가진 주민들로 이뤄진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가 또 하나의 치유 및 해방 공간이 아닐까 싶다. 후기 근대의 주민들이 겪는 폭력은 피로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의 고립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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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
아마미야 가린 지음, 김미정 옮김 / 미지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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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빈곤층(working poor)’을 지칭하는 용어에는 학자에 따라, 그리고 특정 국가의 정치경제학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용어가 선호되는 듯. ‘워킹 푸어는 빈곤 문제에 방점을 두고 있다면, ‘불안정한(precario)’노동자계급(prolatariat)’을 합성한 신조어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삶의 불안정성과 계층화에 초점을 둔 용어.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미국에서는 워킹 푸어라고 불리지만, 일본에서는 프리터라 불린다.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뜻이 담긴 이 프리터라는 용어는 일본의 불안정노동, 노동빈곤의 문화적 측면을 역설적으로 포착하게 해 준다. 당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한 일이라는 신념은 가난뱅이끼리 치열하게 헐값 경쟁을 하면 할수록 부자가 득을 보는 시스템”(p.84)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면, 이러한 자유주의 문화정치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곳이 아마도 일본이라는 생각이 든다. (, 한국 사회도 크게 다를 것은 없지만)

 

-빈곤 활동가인 아마미야 가린이 프리터라 불리는 일본의 불안정노동자들을 인터뷰해서 쓴 이 책의 미덕은 물론 우울한 노동의 디스토피아를 적확하고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일 게다. 하지만 일본의 반-빈곤 활동가 지식인들, 특히 이 책의 저자 아마미야 가린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부조리한 노동 시스템을 작동시키고 정당화하는 문화정치의 논리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어디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없이 그저 표류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손쉽게 국가라는 공동체와 접속하게 된다. p.103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롭게 읽혔던 지점은 많은 프리터들이 자신의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사회 탓은 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 꿈을 가진 프리터와 그렇지 않는 프리터를 나누는 등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동일시하지 않거나 외면하는 태도 등 일견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분노할 줄 모르는 착한 근성의 기저에 놓인 프리터들의 심리적 상황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불안정노동 속에서 살아갈 공간도, 인간관계도 상실한 채 사회를 잃어버린 수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사회와의 접속감을 찾아서 우경화되고 있다는 해석도 설득력이 있었다.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의 어버이연합의 어르신들이 연상되기도 했다.)

 

약자가 자기보다 더 약자인 사람들을 증오하게 만드는 구조의 사회. 이런 곳에서는 아무도 구출되지 못할 것이다. p.104

 

저자는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일본 젊은이들에게 분노할 것을 제안한다. 나는 분노라는 처방을 접할 때마다 조금 뒷걸음치게 된다. 본디 분노라는 정서는 미움과 닮아있고, 에너지의 특성 상 환부의 원인을 어딘가에 돌리고자 하는 흐름이 강하게 나타난다. 분노라는 에너지는 당면한 상황을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데는 큰 힘을 발휘하지만, 이미 나눠질 대로 나눠진 사람들 사이의 틈을 더욱 벌어지게 만들고, 분노의 주체들을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 책임론이라는 신자유주의 함정에서 우리 모두가 구출되기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을 덮고 나서 그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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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말고 당당하게 - 하종강이 만난 여인들 우리 시대 우리 삶 1
하종강 지음, 장차현실 그림 / 이숲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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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주제의 글들을 묶어 놓은 에세이집. 1부는 저자가 오랜 세월 노동 운동 현장에서 만난 여성들에 대한 에피소드를 모은 것이고, 2부는 노동 운동가로서 저자 개인의 삶의 이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여성들에 관한 내용들이다. 개인적으로 1부가 더 좋았다. 특히 어느 할머니 이야기”, “어린이집 선생님”, “바보들의 행진등 세편은 쉽고 편안하게 읽히면서도 가볍지 않은 깨달음과 감동을 준다.

 

할머니 혼자, 정말 아무도 없이,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죽은 자식이 누워있는 썰렁한 영안실을 지켜야 하는, 이런 기막힌 현실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할머니의 슬픔을 외면하고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p.34

 

맨 처음 실린 어느 할머니 이야기는 가슴 깊숙한 곳에 묵직한 뭔가를 심어 놓는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그 여운이 때론 울컥하게 만들고, 화가 나게도 하고, 감동하게도 만든다. “법이 도무지 쓸모없는”(p.24)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정의는 결국 혼자 남겨진 할머니 옆에 있어주는 것, 그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밖에 없다.

 

어린이집 선생님에피소드는 일자리 영역에서 공공성 파괴가 인간성을 어떻게 시험에 들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구조조정 바람을 타고, 일자리의 질이 가장 악화된 영역 중 하나가 공공부문 일자리이다. 많은 어린이집 경영권이 국가에서 민간복지재단으로 넘어가면서, 정규직 교사들이 계약직으로 바뀌고 일부는 일자리를 잃었다. 이 에피소드의 선생님은 그 와중에 해고됐는데, 그 이유는 재단의 부정부패에 항의했기 때문. 재단은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 선생님을 헐뜯는 자료를 제출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부분은 이 선생님에게 요구된 부조리한 양자택일. 즉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이 가르친 아이의 흠결을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아이를 보호하고 자신이 해고되는 를 받을 것인가. 이 선생님은 제자를 보호하고 자신이 희생을 감내하는 선택을 했다. 이 에피소드는 외주화가 이렇게 재단의 부조리를 눈감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성을 이렇게 난간으로 몰아간다는 점을 그 어느 이론보다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올해 임금교섭이 시작되자 남자 노동자들 몇 명이 나서더니 또다시 교섭을 회사에 위임하자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면 회사는 올해에도 남자들은 많이올려주고 여자들은 조금올려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런 행동이 전체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 그런 인간들이 있다. p.72

 

바보들의 행진은 작업장에서 여성들의 노조설립 혹은 조직화를 남성들이 방해하는 갈등 상황을 다룬 에피소드. 극단적 상황에서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거나 남성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치를 하는 여성들에 대한 저자의 감탄과 존경심이 살짝 드러난다. 생산직, 사무직, 비정규직 등 다양한 작업장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갈등 혹은 대치 상황들이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직종을 불문하고 여성들이 비슷한 일을 겪는구나 싶다. 역시 직장 내에서 여성과 남성 간의 인격적 차등화라는 주제는 자본의 이익 축적 전략이라는 논리만 가지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흥미로운 주제인데, 간략하게 다뤄져 있어 좀 아쉬웠다.

 

아이들과 청소년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고단하고 부조리한 현실에서 인간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 부조리한 선택을 요구받고 인간성의 위기에 놓인 사람들,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를 떠나서, 어른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을 아는 것 자체가 소중한 성장의 기회가 될 것 같다. 읽고 나면 선한 의지가 충전되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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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탈출, 하나의 꿈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14
이정학 지음 / 텍스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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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 사회 인구구성비에서 탈북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존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그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책을 고른 이유는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고, 그 탈북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사실 그간 이념과 종교를 떠나서는 탈북자에 관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

 

대부분의 탈북자가 그러하듯 저자 역시 기독교의 도움을 받아 탈북한 청년. 이야기는 한국에서의 정착 과정 보다는 북한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기, 탈북에 이르게 된 과정, 탈북 후 중국에서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종교적 색채가 배제된 점이 맘에 들었다. 78년생인 저자가 들려준 이야기는 자못 충격적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공안 기능을 제외한 국가 기능이 거의 정지된 상태에서 그간 말로만 듣던 북한의 경제난 속에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생활고, 국가 경제를 돌릴 물질적 기반이 거의 바닥난 상태에서 국가가 요구하는 물품을 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상황, 군대에서 아사 직전에 병든 몸으로 귀향한 저자,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수난...이 모든 상황은 단지 굶어죽지 않기 위해 탈출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총체적 동기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처럼 양 체제를 모두 경험한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폐타이어의 역할을 해야 한다. 폐타이어는 경제적 값어치가 별로 나가지는 않지만 배와 부두 사이의 충격을 완화시키는 엄청난 역할을 한다. (……) 통일 이후에 있을 북남 갈등을 완화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저자는 북한 독재 체제가 무너지고 통일이 이루어지면, 탈북자들이 동란 이후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삶을 살아온 남과 북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오히려 탈북 단체들이 북한 체제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대형 풍선에 담아 보내는 풍경이 떠올랐다. 자신의 고향, 떠나온 곳에 저주의 말을 퍼붓는 사람들의 심경은 어떤 것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수난을 겪은 이들에게 우선 필요한 건 위로와 환대가 아닐까. “북남 갈등을 완화시키는사명이라는 짐은 이미 큰 고통을 겪은 이들이 지기엔 너무 외롭고 힘든 요구가 아닐까. 북한 체제 전복과 비난을 사명으로 삼은 이들과 저자처럼 북남 평화를 사명으로 삼은 이들, 후자보다는 전자가 현실적으로는 대세임에 분명할 듯. 그리고 서로 다른 사명을 품은 이들 사이의 간극에 보이지 않는 가장 큰 힘은 역시 이들을 품는 남한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 통일의식, 역사관일터. 그럼 저자의 꿈이 이뤄지기 위해서 이웃으로서 우리는 어떤 뜻을 품어야 할까.

 

노트. 저자의 유년기 학교생활을 보니, 남자 아이들의 남성성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지금 남한의 남자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 북한 아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왜 이리 호전적 남성성을 추구하는 것일까. 아마도 물리적 힘이 거의 유일한 생존을 위한 사회적 자원이기 때문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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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아프다 -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코끼리에 대한 친밀한 관찰
G. A. 브래드쇼 지음, 구계원 옮김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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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인이 어릴 적 동물원에서 처음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고 충격을 받아 울음을 터트린 경험을 들려준 적이 있다. 전시된 동물을 응시하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에게 동일시했던 당시 그 분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이례적인 반응일 터. 아마도 지나치게 예민한 아이, 상처받기 쉬운 아이, 강하지 못한 아이로 취급받거나, 혹은 인간이 아닌 동물에 동일시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을 수도... 어쨌거나 만약 아이가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고 충격을 받거나 슬퍼하면, 어른들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마도 나라면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하거나 화제를 전환시켜버리지 않았을까 싶다. 생태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저자, G. A. 브래드쇼는 신경쇠약에 걸린 코끼리에 대한 연구라는 예사롭지 않은 주제를 통해 인간의 현대 문명에 내재된 윤리적 난제들을 전면적으로 건드린다.

 

“이러한 모든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 대한 가장 적합한 진단은 ‘마음이 완전히 부서졌다’, 또는 ‘산산조각났다’일지 모른다” (정신과 전문의들이 본 코끼리 제니) p.209

 

이야기는 인간에게 적용되는 외상학(traumatology)의 관점에서 코끼리가 겪은 경험의 신경생물학적·심리학적 영향을 고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코끼리에게도 마음이 있고, 모든 포유동물의 진화적 적응전략에 해당하는 유대와 애착이 코끼리 사회에도 존재한다는 것, 코끼리의 이상행동과 트라우마는 아프리카의 식민지화에 연원을 둔 인간의 폭력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 등이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되는 스토리. 이 책에서 독특한 점은 인간의 신경쇠약과 코끼리의 그것 간의 유사점을 단지 심리학적 증상의 측면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 정치적 측면으로 확장하여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인간 사회에서 발생한 남성의 폭력 행동과 수코끼리의 그것이 어떻게 닮아있는지 설명하는 부분. 요컨대 인간이 코끼리에게 개입하면서, 수컷 코끼리 발달 단계에서 핵심적인 두 번째 사회화, 즉 암컷의 무리에서 젊은 수컷의 무리로 합류하는 단계가 사라졌고, 이는 수컷 코끼리의 사회 환경을 붕괴시켜 이상행동을 초래했다는 것. 즉 소년들에게 남성 멘토 혹은 아버지가 없는 사회에서 청소년 범죄가 발생한다는 점을 수컷 코끼리의 범죄에 대입시키고 있다. 저자는 나아가 시종 일관 인간이 코끼리의 삶에 개입하는 문제의 심각성이 단지 개체수를 줄이는 말살행위 혹은 감금과 폭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 문화를 파괴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코끼리 문화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단지 인간의 심리학을 동물에게 적용시키는 단계를 넘어서 인간다움의 사유 방식에 근본을 흔들어 놓는다. 저자는 과학적 분석과 나치 수용소 관련 증언, 수필, 소설 등을 인용하는 인문학적 화법을 동시에 활용하여, 종을 초월하는 고통의 정치적 성격, 동물의 고통을 이용하여 번성하는 동물원이라는 사업에 대한 문제제기, 자신이 돌본 동물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동물을 잔인하게 대하는 동물원 직원들의 정신상태 및 행동과 나치 수용소 직원 및 나치 의사들의 그것과의 유사성 분석을 내 놓는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코끼리다라는 저자의 선언에 시나브로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전통적으로 연장자 암컷 무리에서 아기 코끼리를 함께 돌보며 키워냈던 코끼리 문화가 파괴된 후 보이는 증상들(어미가 새끼를 거부하거나 살해하는 것, 우울증 등)을 통해 거꾸로 인간의 신경쇠약을 재해석해보게 된다. 경험이 없는 젊은 여성이 혼자 아이를 낳아 고립된 환경에서 아이와 단둘이 생활하며 키운다는 건 코끼리나 인간에게나 두렵고 외로운 상황이 아니던가.

 

아프리카의 코끼리들과 가깝게 지내며 80여 마리의 고아 코끼리를 돌봐온 50여년의 세월 동안 무엇보다 놀라웠던 점은 코끼리들이 보여준 한없는 너그러움이다. 고아 코끼리들은 어미, 때로는 가족 전체가 인간의 손에 힘없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코끼리들은 인간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채 시설에 도착하지만 결국 야생에서 인간을 보호해 준다. 인간이라는 가족을 위해 물소와 정면으로 맞붙거나 야생의 사나운 코끼리들로부터 막아주는 것이다. 코끼리의 삶에서 사랑하는 코끼리가 살해되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코끼리는 놀라울 정도로 너그러운 동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코끼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절대로 잊지 않기 때문에 (이는 추정이 아닌 분명한 사실이다) 그 인자한 행동은 인간도 좀처럼 도달하기 힘든 높은 수준의 관용이다. 수십년 간 고아 코끼리를 키워낸 대프니 셀드릭 여사 220

 

코끼리의 의식과 인간의 의식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저자의 주장보다도 더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긴 건 인간으로 인해 "마음이 부서져버린" 코끼리들이 인간에게 보여준 관용이다. 주제의 신선함, 연구자의 태도, 내용의 깊이를 포함해 완성도가 높은 저서라고 본다. 또한 여러 가지 생각해 볼 거리들을 가져다 준 책이다.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좋은 책으로 꼽고 싶다. 

 

사족. 책을 다 읽고 나서, 서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저자가 이 연구를 하게 된 경위였다. 무릇 학자의 연구 궤도(academic trajectory)에는 몇 가지 불연속적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브래드쇼가 코끼리의 신경쇠약이라는 주제를 연구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1990년대 남아공화국에서 목격한 코끼리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이 연구를 시작한건 아마도 어릴 적 동물원에서 침팬지와 시선이 마주친 짧은 순간,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인간들보다 침팬지에게 더 친근감을 느꼈던 그 순간의 경험이 단초가 되었다고 서술한다. 연구 도중에 저자가 과학이라는 차가운 언어와 고통의 개인성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10대 시절에 읽었던 엘리 위젤의 책(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험을 증언한 [나이트])이 길잡이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역시 훌륭한 학자는 인식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이며, 이런 소양은 유년기부터 쌓여지는 것!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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