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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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는 후기 근대 사회의 풍경을 노동하는 인간 주체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조명한다. 근대의 규율 사회는 외부의 권위에 의해 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와 명령에 복속된 복종적 주체로 이뤄진 사회라면, 후기 근대의 성과 사회는 “Yes, We Can”이라는 내적 동기를 통해 자신을 닦달하는 성과 주체, 즉 자기 착취적 주체로 이뤄진 사회이다. 저자의 미덕은 이러한 주체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대가, 즉 병리학적 상황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인문학적인 화법으로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것.

 

오늘날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며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성과 주체의 심리적 기구에 관한 묘사” p.81

 

근대 사회에서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다. /, 친구/, /남의 구분이 명확한 면역학적 도식에서 이질적이고 낯선 것은 폭력의 원천이며, 따라서 면역학적 주체의 방어 대상이다. “적의 계보학에서 근대 사회의 적이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후기 근대 사회의 적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착취의 주체인 동시에 적,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후기 근대의 인간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프로메테우스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죄로 인해 결코 완결에 도달할 수 없는 끝없는 노동의 형벌을 받았다. 저자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먹는 독수리를 성과 주체와 전쟁을 벌이는 제2의 자아로 분석한다. 즉 근대의 면역학적 도식에서 낯선 것으로부터의 폭력은 인간에게 배제와 박탈을 행사하며, 그 결과 광인과 범죄자가 발생한다. 반면 후기 근대의 신경성 폭력은 같은 것으로부터의 폭력이자 시스템에 내재된 폭력이며, 우울증과 낙오자를 만들어낸다는 것.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p.27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p.67

 

이러한 유형의 노동으로 인해 인간이 치러야 할 대가가 바로 우울과 탈진상태(burn out)을 초래하는 극단적 피로이다. “피로사회”, 혹은 우울사회라는 후기 근대적 풍경에서 저자는 깊은 심심함피로에서 구원의 단초를 발견한다. 한트케(피로에 대한 시론)에 따르면 피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너무나 심한 피로 때문에 인간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버린상태는 인간을 분열시키는 피로이다. 반면, 너나 할 것 없이 피로해진 개별자들이 동일한 시공간 속에 나란히 있는 상태는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으로서 화해시키는 피로”, “치유적 피로라는 것. 저자는 후자가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어 내며, 우애와 연대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분열시키는 피로개념에 비해 치유적 피로개념은 잘 와 닿지 않는다. 한트케가 제시한 두 가지 피로 개념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것은 피로를 둘러싼 삶의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인간이 느끼는 피로에는 그다지 차별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저자의 솔루션은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나서야 프로메테우스는 자기 착취의 형벌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는 그리스 신화의 플롯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저자는 피로를 느낄 줄 모르는 자아에서 피로를 느낄 수 있는 자아로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서사적 삶의 회복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자기-착취적 인간의 해방 혹은 구원에 대한 논의가 더 풍부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분명 서사적 삶의 상실이 벌거벗은 노동, 벌거벗은 생명을 만들어낸다고 진단하고 있다. 후기 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탈서사화되어 있기 때문에, “호모사케르보다 더 벌거벗겨진 것은 오늘의 삶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논의는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고 피로의 회복을 제시하는 것에서 멈춘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프로메테우스가 자기 착취적 관계에 고립되어 있는 한 천형에서 놓여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그는 자신의 상태를 외부의 존재에게 알렸고, 헤라클레스는 누군가가 보내는 이 미약한 신호를 감지했다. 어떻게 고립된 자아가 사회와 접속할 것인가. 헤라클레스가 가진 힘은 알 수 있음의 능력이었고, 프로메테우스가 가진 힘은 이해받을 수 있는능력이었다. 그것을 이어주는 고리가 바로 이야기가 아닐까. 발터 벤야민이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로 명명했다는 깊은 심심함이 하이퍼-어탠션의 상태로부터 이완된 시공간을 뜻한다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을 가진 주민들로 이뤄진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가 또 하나의 치유 및 해방 공간이 아닐까 싶다. 후기 근대의 주민들이 겪는 폭력은 피로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의 고립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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